
(제 40 회)
금필의 부여공략을 도우러 왕건이 출전했다가 돌아갈 때 술희도 함께 동행하였었는데 그때 왕건은 흥성고을에 들려 고을두령을 포섭하느라 하루밤
묵어가게 되였다. 묵어가게 된 연유인즉은 고을두령의 딸을 왕건이 취하게 된때문이였다. 그날 낮에 두령은 새빠지게도 왕건에게 사냥경기를 제의했다.
조상대대로 세습해오던 제 령지를 그냥은 마진국에 바칠수 없다면서 사냥경기를 하여 왕건이 이겨야만 완전항복을 하겠노라고 했다. 노는 모양이
재미있는지라 왕건은 쾌히 응하였는데 해보나마나 사냥은 왕건이 이기는것으로 끝이 났다. 그러자 두령은 이번엔 복속의 뜻을 명백히 하는 의미에서 제
딸을 거두어달라고 매달렸다. 왕건이 이를 받아들여 하루밤 지체하였던것이다. 문제로 되는것은 이 두령에게 딸이 또 하나 있었는데 이 둘째딸을
술희가 어떻게 흐물떡해치웠는가 하는 이야기였다. 왕건이 첫째와 함께 여사여사하게 밤을 지샐 때 심사가 울적해진 술희는 두령을 꼬드겨 술겨루기를
걸었다. 제 딸을 왕건에게 안겨준 흐뭇한 기분에 둥 떠서 이밤을 어떻게 보내나 하고 궁싯거리던 두령은 마침이다 하고 술희와 마주앉아 술동이를
비우기 시작했다. 그러는중에 그는 술희를 또 탐내기 시작했다. 이 텁석부리도 왕건의 부장이니 여간내기장수가 아니렷다, 박달목침같은 다부진
체구에 털부숭이얼굴이며 범발통같은 저 손을 보지, 얼마나 믿음직한 손탁이냐, 이런 사내는 좀해서 맞다들기 힘들다, 거저 놓아보내긴 아까운
놈이다, 생각이 이에 이른 두령은 이왕지사 맏이를 내놓은바엔 둘째도 싹 털어버리고말자고 결심했다. 하여 그는 지면 제 둘째를 술희에게 주겠노라
장담했다. 주량으로 말할진대 술희를 당할자가 어디 있으랴. 당장에 둘째는 술희 차지가 되였다. 그러잖아도 제 언니만 뽕을 따고앉은 이밤이라
눈물이 가랑해서 독수공방하고있던 둘째는 어미품에 병아리들듯 순순히 술희품에 들어버렸다. 이 일은 왕건외엔 누구도 모르고있었는데 왕건이 왕위에 오른 뒤
언니(흥복원부인)를 송악으로 부르면서 동생도 함께 올라와 술희와 백년해로를 하라 이르는통에 제 형제들에게 들장났다.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반겨나올줄 알았던 술희가 도리질을 하고 앉은것이였다. 당황해난것은 금필이와 숭겸이였다. 이 애가 무엄해도 분수가 있지 형님의 분부를
거역하다니…금필은 숭겸과 함께 술희를 다불렀다. 《왜 살지 않겠다는거냐?》 《어서 이실직고하지 못할가?》 둘이 다그어대자 두눈만 꺼뻑이며 갑자르기만 하던 술희의 입에서 왕청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러지들 말아요, 형님들. 남의 사정은 알지도 못하면서…》 《여기에 무슨 사정이 있느냐?》 《아, 거 뭣이냐면… 실은 내 쟁기가…》 《쟁기라니?…》 《엥이… 내 아래것이 그만… 까닭없이 미물이 되여버려 그러는거요.》 《뭐라구?… 그것이 미물이 되였다?!…》 《너 이놈!》 숭겸이 술희의 멱살을 움켜쥐고 다그어댔다. 《네가 지난해 형님께서 고을부를 평정하라 내려보냈을 때 (고을부 일부 세력들이 짜고서 고을두령을 반대하여 소요를 일으켰던 사건으로 후백제에
가붙으려다가 제지되였다.) 그곳 두령의 딸을 어찌했다 하였지? 그때는 두꺼비 파리삼키듯 잘도 해치운 네놈의 그것이 지금에 와서 미물이 되였다?
그것도 말이라고 하냐?》 《정말이와요, 실은 그때 그날 밤부터…》 《흰소리 말아. 그날 밤은 뭐 네놈 쟁기에 귀신이 들린 밤이였더냐?》 《내 말을 들어보옵소. 내 그날밤 취중에 혼이 나가 그러하였거니와…》 《취중이라구? 너는 취할수록 정신은 더 맑아지는 놈 아니냐?》 《정신이 너무 맑아지여 그랬던가봐요. 그때 내 그 짓거리를 막 하려고 하는 때인데 문득 흥성의 그 녀인 얼굴이 떠오르는게 아니겠어요? 그 즉시에 내 밑에것이 그만에 누에번데기모양으로 쫄아들더라구요. 그때부턴 그것이 다시는 고개를 들지 않는구만요.》 《뭐라구?!… 와핫하하…》 창황중에도 둘은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수 없었다. 《까무러치겠구나, 오라질 놈! 네가 흥성에서 이미 녀자를 보고서도 또 그짓을 하니 하늘이 벌을 내렸고나, 하늘이…》 숭겸이 탄식을 하는데 금필이 안타까운듯 또 다그어댔다. 《삼강오륜이라는것을 뜬금으로 외우는 네가 눈 한번 깜빡 않고 그짓을 해?》 《그런건 엿사먹은지 오랜 놈이로구나. 이봐, 술희!》 《네에…》 《그래 네가 뜬금으로 외우는 거기에 남편과 안해사이에 어찌해야 한다고 했더냐?》 《둘사이에 공경하고 복종하는 분별이 명백해야 한다 하였소이다.》 《그게 안해만 남편을 공경하고 남편은 안해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냐?》 《그건 아니오나… 아, 내가 지금 부부간을 이룬 사람이요?》 《잘 나온다. 그러면 붕우지간에 지켜야 하는 도리는 알고있냐?》 《내가 형님들하구 신의를 어긴 사람이요?》 《이놈이?! 너 우리가 매소물에서 형제를 맺을 때 약조한 계률중의 한가지를 좀 물어보자. 사내장부로서 금해야 할것이 무엇이라 했더라?》 《첫째로는 혀뿌리를…》 《옳다! 말 한마디에 평생 한을 남기고 원쑤지간이 되는 수가 있느니라. 확실히 혀는 함부로 놀리는게 아니다. 그럼 둘째!》 《손뿌리올시다.》 《손가락을 잘 놀리라는 소리렷다. 도적질따위 부정한짓은 절대로 말아야 하는거다. 다음 셋째!》 《?!…》 《셋째!》 《아, 거 뭣이냐면… 아래것을 함부로 놀려서는 아니된다 하였구만요.》 《그걸 아는 놈이 그짓을 해?!…》 금필은 속이 상해 방바닥을 쳤다. 《글쎄, 고을부에서 있은 일은 내 잘못하였소. 볼기를 쳐도 할말이 없소. 하지만…》 《하지만 뭐냐?》 《흥시도 따먹지 못한 그날후부턴… 하늘에 대고 맹세하는데 내 쟁기가 정말이지 딴눈을 판적이 없다구요. 딴눈을 팔수도 없게 되였구요.》 술희는 볼이 부어 두덜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까지 흥성의 그 녀자를 잊은줄 아시오? 하지만 생각들 해보시오, 형님들! 상대가 형님의 아니, 페하의 처제이신데…구실을 못하는
나와 백년가약 맺었다가 그 후환을 어찌 감당하겠소이까. 페하앞에 내 뭐가 되겠냐 말이요. 미치겠구나, 하늘도 야속하지. 흥성의 그 녀자와만
만나라고 하면서도 병신을 만들어 골탕먹이는 까닭은 또 뭡니까요.》 술희는 주먹으로 제 뒤통수를 치며 훌쩍거렸다. 《됐다. 이젠 엎지른 물인데 울고만 있으면 된다더냐. 다시 담을 궁냥을 해야지.》 금필이 위로하고 나섰다. 술희가 도리질을 하는 리유를 안 이상에는 대책을 세우는게 급했던것이다. 《너는 우리보다도 식자를 먼저 깨친 놈인데 그래… 이런 경우에 어찌해야 한다는것을 모른단 말이냐?!》 숭겸이 넌지시 찌르자 술희가 기다렸던듯 얼른 대답하였다. 《그동안에 품을 넣어 슬그머니 얻어둔 비방이 하나 있긴 하오나…》 《그게 뭐냐?》 금필과 숭겸은 동시에 물었다. 《의원의 말이 나는 지금 그 흥성녀인의 음기에 밀려 내 양기가 주눅들어 그러하니 양기를 우선 돋구어야 한다고 했수다. 양기를 돋구는데는
물닭 수컷의 변두가 제격이라니 그걸 좀 구해주시오이다.》 《저런 놈을 봤나?!… 목마른 놈 우물 판다더니 저것이 제 궁냥은 하고있었구나!》 숭겸은 반색을 하고 금필은 안도의 숨부터 내쉬였다. 《그렇다면 일찌감치 약을 쓸것이지 왜 여직 그러고 앉아 병신타령이냐?》 《그 약재는 형제들이 구해주는것이여야 한다더군요. 제 손으로 구한건 효험이 없다구요.》 《그 의원이 약을 써도 형들앞에 토설을 하고 볼기를 맞은 다음에 쓰라고 그런 비방을 내렸구나. 여하튼간에 볼기는 맞아야겠다.》 아닌게아니라 이 기회에 버릇은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한 금필은 숭겸과 눈맞춤을 하고서 두말없이 술희의 엉치를 까제끼고 토방밑에 있던
싸리비자루 한개를 방에 들여왔다. 비자루는 고스란히 족살나버렸다. 둘은 술희에게서 다시는 헛눈을 팔지 않겠다는 다짐을 열번은 받아내고서야 손을 털었다. 그다음 둘은 뛰여다니여 그날중으로 물닭을 수컷으로 다섯마리나 잡아다주었다. 술희는 물닭 다섯마리를 변두는 물론 몸통까지 통채로 삼켜버렸다. 그리고는 득의양양하여 삼일후에 혼사를 가볍게 치르어버렸다. 가끔가다 흠을 남겨놓는 이런 술희를 지몽은 타박하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차라리 흠이 좀 있는게 낫지 너무 흠이 없어도 좋지 않다는 식이였다. (세상리치에 닿지 않는 소리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몽공이…) 금필은 지몽의 그 말뜻이 리해되지 않았다. 하기는 그 말의 뜻을 리해하면 금필이 아닌것이다. 《우린 그만 일어나겠소이다.》 대목늙은이의 말에 금필은 생각에서 깨여났다. 《자, 또 한번 땀흘려보세.》 대목늙은이가 소리치자 모두 응수하며 일자리로 흩어져갔다. 자리를 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금필은 속으로 되뇌였다. (사람이란 정직하고 대가 발라야 한다. 그러자면 흠이 없어야 한다. 흠이 없어야 하구말구.) 금필은 힝하니 일어나 일판에 끼여들었다. 시원히 도끼질이라도 하고싶었던것이다. 《아버님!…》 금필은 자기를 찾는 처녀의 맑은 목소리에 휘두르던 도끼질을 멈추었다. 《너 왔느냐!…》 《너무 무리하지 마시와요. 이 땀 흐르는걸 봐…》 금필이 허리를 펴는 사이 처녀는 어느새 사뿐히 다가와 자기의 흰수건으로 이마에 내밴 땀을 씻어주었다. 금필은 처녀의 말큰말큰한 손이 얼굴에 닿자 흠칠 몸을 떨었다. 《일없다.…》 《아버지도 참…》 처녀는 금필이 어색해하는양을 보고는 그만에 저도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숙이였다. 《참, 매훈련은 잘되냐? 달무는 어디 두고 너만 이리 왔느냐?》 처녀가 손에 쥔 수건만 꼬깃꼬깃 비틀고있는 모양을 이윽히 바라보던 금필은 뭔가 짐작되는바가 있어 다시금 되물었다. 《달무 그녀석이 아직도 너를 멀리하는게 아니냐!》 그 말에 처녀는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런것은 아니오나…》 《그럼 뭐냐?》 처녀는 몸을 옹그리며 바재이다가 한숨을 호- 내쉬였다. 《무슨 일이 있느냐?》 금필이 저으기 상심하는 모양이 안스러운지 처녀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섬에 웬 녀인이 하나 들어왔소이다. 갈매나루로 들어왔사온데…》 《그런데…》 《대장수님을 찾아왔다 하오이다.》 《나를?…》 《대장수님을… 뫼시련다 하오이다.》 처녀의 얼굴에 서늘한 그늘이 한껏 비끼였다. 《부여성에서 왔다고 하옵는데… 대장수님 부인의 친척벌이 된다면서… 섬에 닿자마자 쓰러진것을 달무와 함께 거두어주고 왔소이다.》 《뭐라고?!…》 금필은 아연해서 멀거니 처녀만 바라보며 서있었다. 처녀는 슬며시 몸을 돌리더니 이내 종종걸음을 놓았다. 《얘, 아람아! 넘어질라!…》 이윽토록 멀어져가는 처녀를 응시한채 금필은 그만에 한숨을 후 내쉬였다. 이럴수가 있나.… 아람이! 한적한 이 외지에 와있는 금필에게 새처럼 날아와 안긴 처녀다. 전혀 뜻밖에 나타나 금필을 아연케 하였던 저 처녀,
금필은 자기 생에 이런 일을 당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하였다. 금필이 귀양살이를 한다는 소문이 사방 퍼져 나라안팎이 어지간히 뒤숭숭했던 모양이였다. 금필은 군사용무를 빗대고 얼핏 자기를 찾아온 맏이를
되게 꾸짖어 쫓아보냈다. 예로부터 귀양살이하는 사람을 동정하는자는 엄하게 벌하는 례를 모르는가고 다불렀다. 다시한번 자기를 동정하는 사람은 그가
혈붙이든 친구이든 가차없이 조정에 알려 처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제 아들을 조정에 상소하여 강등처벌을 받게 한것은 물론이였다. 그런데
어느날인가 아람이란 이 처녀가 별안간 찾아왔다. 리유인즉 금필장수의 내실이 되련다는것이였다. 금필은 기절초풍할 지경이 되였다. 쉰고개를 바라보는
자기에게 이제 겨우 스물에나 닿은듯만듯싶은 애어린 꽃송이가 거침없이 몸을 맡기겠다고 나선것이였다. 하도 어이가 없어 웃음 절반, 욕 절반 하는
금필에게 또랑또랑 되뇌이는 처녀의 말이 또한 걸작이였다. 《황소가 밭을 갈고 인재가 나라를 받드오이다. 저는 거처할 곳을 찾는 걸인은 아니옵고 더우기 색녀는 아니옵나이다. 먼 후날에라도 그때
사람들속엔 인걸을 알아보는이가 그렇게도 없었는가고 비웃음을 살가 념려되여 소녀 외람된줄 알면서도 청을 드리는것이오이다. 부디 소녀의 진정을 받아주소서.》 처녀는 평양 대성산성너머 광법사에서 운영하는 경당의 수련생이였다. 부모를 여의고 몸을 의지하러 찾아간것이 글귀를 깨치고 무술을 갖추어
이제는 세상을 볼줄 알고 제 주장을 펼줄 아는 수준에 이른 처녀무사가 되였다. 경당 도사의 승인까지 받고 찾아왔다고 하였다. 그곳 도사도
금필과는 면목이 있는 사이였다. 그 역시 젊은 시절에 금필과 무술을 함께 익힌적이 있었던것이다. 처녀는 금필이 귀양에서 풀려날 때까지만 한지붕아래 있겠다고 거듭거듭 우기였다. 그날 저녁상까지 차려올리고나서도 처녀는 물러나지 않고
버티였다. 난감해진 금필은 먼길에 피로할테니 그럼 쉬여라 하고는 제가 밖으로 나와 토방마루에서 밤을 새였다. 조금 지나보니 처녀도 밖에 나와 쪼그리고앉아 밤샘을 하고있는게 아닌가. 이런 일을 보았나…
혼곤히 잠든 처녀를 넋없이 내려다보던 금필은 방에 들어가 이불을
내다씌워주었다. 고집도 이만저만이 아닌 애였다. 세상에 이런 처녀도 있는가. 그의 진정이 눈물겹도록 고마왔지만 금필은 정말이지 그것만은
받아들일수가 없었다. 귀양살이하는 처지때문만도 아니였다. 제 딸같은 나이의 처녀를… 정신이 나가지 않고야 어떻게… 뜬눈으로 밤을 새고나서 날이
푸름푸름 밝아올무렵 금필은 처녀를 조심조심 흔들었다. 《아가, 그만 일어나렴. 조반을 지어야지?》 《그러니 나리께선 응하신단 말씀이시죠?!》 처녀는 눈을 감은채로 물었다. 그도 자지 않고있었던것이다. 《딸이라 하였소이까?》 《그렇구나. 내… 머리숙여 절을 한다. 세상에 너같이 고마운 애가 어디 있겠니. 그래서 더 달리할수 없어 내 자식으로 삼은거다. 너의 그
마음을 이 가슴에 새겨두겠다. 네가 바라는바를 내 안다. 충정의 마음 변함이 없으리니 믿어다오. 내 아버지구실을 꼭 하마! 내 딸아!》 금필은
목이 메여올라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처녀는 소곳이 숙였던 머리를 살며시 들었다. 창백해진 얼굴의 호수같이 그윽한 눈길이 금필의 얼굴을 더듬고있었다. 이윽해서 처녀의 앵두입술이 열리였다. 《아버지!…》 《오냐! 내 딸아!…》 처녀는 스스럼없이 금필의 가슴에 얼굴을 대였다. 그 순간 금필의 눈가에 저도 모르게 맑은것이 맺히였다. 살며시 고개를 들어 금필을 마주보는 처녀의 고운 얼굴! 금필의 흐려지는 망막속에 발그레하게 물들여져 웃고있는 처녀의 정겨운 그 모습이
새겨지고있었다. 금필은 양딸 아람을 달무와 짝을 무어주기로 했다. 그런데 아람이보다 네댓살아래인 달무가 길길이 뛰며 등을 돌렸다. 아버지의 부탁을
저버리고 처녀 꽁무니나 붙어다닐수 없다는것이였다. 둘이 힘을 모아서 금필장수를 보살피면 더 좋으면 좋았지 나쁠것이 없다고 섬사람모두가 추기고
금필이 성을 내서야 겨우 약조가 되였다. 금필장수를 위한 일이라면 써도 달게 넘겨야 한다고 주변에서 못을 박아 겨우 약혼이 되였는데 둘사이가 서먹서먹한것이 영 안심치 않았다. 저 애들을 어떻게 하나, 타이르는것도 정도이고 더우기 매로 쳐서 되는 일도 아니지 않는가.… 이런 일을 당해본적이 없으니…생각을 굴리던
금필은 달무와 아람이 매를 잘 다룬다는데 생각이 미쳐 매를 가지고 통신련락을 할수 있게 련마할 과제를 주었다. 둘 다 매를 다루는 재간을 적잖게
익힌터라 전장에서 이를 활용할 궁냥을 한것이였다. 한 사나흘 오손도손 재미있게 매를 길들이는데 정신을 쏟는가 했는데 그만에야 또 한명의 녀인의
출현으로 아람의 마음이 충격을 받은듯싶었다. 이러나저러나간에 자기를 시중들겠다며 새롭게 나타난 녀인이 금필에겐 문제거리가 아닐수 없었다. 그날 저녁 금필은 서둘러 녀인을 만나보지 않을수 없었다. 녀인은 금필이 거처하는 집 건너 아람이와 달무가 든 초막에 누워있었다. 스물댓 되였을가. 아람이보다는 퍼그나 나이가 앞서 보였다.
바다바람에 신고를 적잖게 한것 같았다. 온몸이 불덩이같이 달아있고 신열에 헛소리까지 치고있었다. 금필은 사정은 어찌되였든 구완을 하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런저런 조언을 주었다. 녀인은 다음날 아침에야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는 금필을 찾았다. 금필대장수가 분명한가고 거듭 되묻더니 몸에 지녔던 보짐에서
비둘기를 찾아달라 하고는 그중 한마리를 골라잡아 날려달라고 부탁했다. 자기가 섬에 무사히 닿아서 금필대장수를 만났다는것을 알려야 한다는것이였다. 금필은 녀인의 부탁대로 하게 하였다. 녀인은 비둘기가 날아가는것을 보고서야 다시금 잠에 들었다. 참 영문을 알수 없는 녀인이였다. 금필은 달무에게 말했다. 《아무랬거나 사람은 살리고 봐야겠구나. 저간의 사정일랑은 그다음에 알아보자꾸나.》 금필은 저를 찾아온 사람인데는 도리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녀인은 다음날에야 정신을 차렸다. 몸을 가누기 힘들어하면서도 금필을 돌본다며 부득부득 자리를 개는것을 겨우 밀막아 눕혀놓았다. 금필은 난감했다. 이런 우연한 일치도 있는가. 아람이와 똑같이 마음먹은 녀인이 또 나타나다니… 믿어지지 않는 일이였다. 달무가 속살거리였다. 《아버님, 저 랑자가 아무래도 수상쩍소이다. 비둘기까지 날리면서 죽기로 노는품이 속에 무언가 품고있는게 분명하오이다.》 아람이도 같은 소리를 했다. 《대장수나리! 경계해야 할가 보오이다.》 아람은 녀인이 나타난 다음날부터 금필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일종의 시샘을 숨기지 않고있는것이였다. 《그렇기야 하랴만 알아는 보자꾸나.》 금필은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일에 또 부닥친지라 자기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였다. 녀인의 정체는 인차 드러났다. 달무가 녀인이 가지고온 다른 비둘기를 몰래 가져다 살펴보다가 비둘기발목에 매여져있는 붉은색천쪼박을 단서로
잡아 문초를 하여 토설을 받아낸것이였다. 녀인은 후백제 견훤의 모사 간무가 들여보낸 간자였다. 이전에 왕건의 집을 기습했다가 죽은 자객의
녀동생으로 오랍의 원쑤를 갚는다며 간무의 청을 기꺼이 들어 자진해서 들어온 녀인이였다. 고려의 맹장 유금필이 정말로 곡도에 귀양가있는지만
확인하면 되는 임무였다. 그가 날린 비둘기에 매인 파란색천쪼박이 그 표식이라 하였다. 두번째 비둘기는 금필이 귀양에서 풀려날 때 날리게
되여있다고 하였다. 금필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후백제가 잠을 자지 않고있었으며 무언가 큰 작당을 하고있는것이 분명했다. 금필은 이 사실을 왕건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달무와 아람을 서둘러 떠나보내였다. 술희에게 찾아가 낱낱이 전한 다음 그길로 후백제땅 완산주도성으로 들어가라고 일렀다.
재간껏 그곳의 동향을 내탐해서 술희에게 알리라고, 좋기는 후백제 모사 간무의 거처로 스며들라고 당부했다. 그들을 떠나보내기 전날 금필은 이들을 위해 소박한 잔치상을 차려주었다. 아버지의 자격으로 두 젊은이의 백년해로를 축복해준것이였다. 다음날 달무와 아람은 눈물을 머금고 금필과 작별했다. 금필은 간무의 간자녀인을 죽이자는 섬사람들의 제의를 밀막았다. 그는 자기의 천성 그대로 녀인에게 손을 대지 않고 몸을 추세워주기까지 하였다. 녀인은 금필의 지성에 감복하여 무릎을 꿇었다. 금필은 녀인을
이후에 간무에게 보내주려고 작정했었다. 승려인 간무가 몸종으로 데리고 안방에도 함께 드는 사이로 지냈다는것을 안 다음 내린 결심이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현될수 없었다. 이후에
간무의 운명이 달리 되였기때문이였다.… 금필은 부지런히 일을 밀고나갔다. 하지만 금필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위구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후백제가 조만간에 엉큼한짓을 하리라는
위구심이였다. 날이 갈수록 불안은 더 커갔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에 와서 살아 그런지는 몰라도 금필은 후백제가 꼭 바다로 해서 일을 칠것
같은 예감으로 가슴이 조여들었다. 이러고만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이왕에 대비를 할바하고는 크게 해야 한다. 그것도 빠른 시일안에… 때마침 류달에게서 소식이 왔다.
부포(지금의 강령)에서 만나자는 소식이였다. 그곳 해안가에 구리쇠밭이 있었다. 금필은 서둘러 떠나갔다. 류달은 그사이 부포 구리밭도 넘겨받아 크게 확장하려고 걸음을 하고있었다. 《자고로 벼슬살이란 살얼음판을 건느는 나그네인생길이라 했소. 쩍하면 얼음이 깨져 찬물에 발을 적셔야 하는 후회막심한 길이지.》 류달은 반가움보다는 측은한 기색만 가득한 얼굴로 금필을 맞았다. 《내 벼슬을 바라고 사는 사람이 아니니 비꼬는 말일랑 접어두게.》 《심지가 곧은 사람들이 골탕먹는것이 어처구니없어 해보는 소리요.》 《대장부 인생길에 이쯤한 일이야 례상사지. 자, 어서 본론에 들어갑세. 그래 내가 전번 편지에 부탁한건 다 해놓았겠지?》 《원, 사람두…》 류달은 혀를 차며 종이말이를 펼쳤다. 《자, 병선건조에 쓸 쇠붙이가 2만근, 창과 칼을 벼리는데 1만근, 이건 해놓았소. 놋활촉을 만드는데 드는 황동구리쇠 2천근이 지금
채 안되였는데… 그것도 닷새안엔 될수 있소. 그런데 활촉은 꼭 놋으로 만든거라야 되우?》 《불화살을 만들어야 하니 그러지. 나무로는 불화살이 적합지 않소. 바다싸움에선 불화살이 능률을 낸다오.》 《아, 그렇군!》 《은밀히 해주시오. 견훤의 촉수가 이쪽으로 뻗고있소.》 《알겠소. 나라를 위하는 그대의 충의지심에 내 감복하게 되오. 닷새안으로 어떻게든 전량 보내주리다.》 《고맙소, 류달형!》 금필은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왔다. 귀양살이하는 사람은 귀양지에서 두문불출하고있어야 한다고 되여있었지만 금필은 개의치 않고 일을 벌려나갔다. 이후에 벌을 받으리라, 지금은
가만 있으면 안된다, 이런 생각으로 금필은 밤낮으로 일을 밀고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