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회)

제 2 장

괴상한 중의 검은 장삼

3

 

황봉부자는 비류강기슭을 따라 대동강을 향해 걸었다. 우리 나라 금수강산은 말그대로 어델 가나 맑은 물과 기암괴석, 푸른 숲과 꽃떨기들이지만 북대봉기슭의 산삼뿌리를 씻어내린다는 비류강물은 그대로 맑은 약수와도 같았다.

만발한 꽃들과 벙그는 봄싹들이 기묘한 산봉우리들이며 오색구름과 어울려 물속에 비껴서서 색갈로도 향기로도 이 나라 산천의 아름다운 풍치를 더 돋구어주었다.

이 절승경개의 무르익은 봄빛속을 황바위는 봄나비인양 날아갔다. 험한 세상에서 묻은 때가 없이 맑고도 정가로운 그의 동심에 한떨기 꽃송이로 붉게 안겨진 인간세상의 뜨거운 손길인양 그의 머리끝에서는 빨간 댕기가 나풀나풀 춤을 추었다.

하늘의 넓이가 매방석만 하던 그 심심산골에서 벗어져나와 넓고 푸른 하늘로 날개를 활짝 편 아들, 평양에 가면 큰아버지를 꼭 만날수 있다는 밝디밝은 믿음과 한서방네 집에서 어린 넋속에 받아안은 따뜻한 인간세상의 체온으로 부푼 그 아들의 기쁨을 두고 황봉은 생각이 많아졌다.

어린 아들의 순박한 동심에 금을 주지 않으려는 아버지로서 《도비》의 자식이라는 비밀이 제 몸에 붙어다니는것도 모르고 그렇게도 천진스럽게 구는 아들이 더 가엾어서 가슴이 미여지는듯 하고 더더욱 조심스럽기도 해지는 아버지의 마음이였다.

몇해를 두고 북대봉벼랑들을 톺아오르고 더듬어서 오늘을 위해 마련한 몇뿌리의 산삼과 록용, 산꿀, 더덕, 고사리따위가 든 괴나리보짐을 지고 큰아버지 만나려 평양으로 간다고 우쭐우쭐 앞장서가는 아들을 보며 (저걸 데리고 나오기를 잘했지. 내 이제야 애비구실을 하나부다.) 하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하는 아버지였다.

《아버지! 쌍가마랑 그 어머니랑 억쇠 어머니랑 오늘 모두들 울었어요. 평양에도 억쇠네같은 사람들이 많나요?》

《많구말구. 세상에는 그렇게 좋은 사람들이 많단다. 자, 어서 가자.》

황봉은 어제밤 인심후더운 친구를 만나 오래동안 막혔던 가슴을 털어놓고나서 그런지 앞길이 그리 막막한것만 같지도 않고 고달픈 인생행로에서 이 열세살짜리 아들이 그 무슨 큰 배의 돛대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발걸음이 빨라졌다.

(형님이 살아있다쳐도 험한 세상이니 머리가 더 세였겠지. 제발 살아있기나 했으면…)

황봉은 지게발을 고쳐잡으며 발걸음을 다그쳤다.

그런데 갑자기 앞서가던 아들이 뚝 발걸음을 멈추더니 《아버지!》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도 알고있다는듯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들이 지나가야 할 산모퉁이의 양지바른 곳 다복솔앞에 검은 장삼을 입은 어제 본 그 중이 앉아있었던것이다. 중은 반석우에 종이장을 펴놓고 먹으로 산수화를 치고있는데 옆에는 석장이 놓여있고 바랑이 챙겨져있었다.

향로에 향불을 피워놓고 조꼬만 돗자리우에 무릎을 꿇고앉았는데 네 귀퉁이에 밤알만한 하얀 차돌멩이들을 지질러놓은 종이우에다 속세를 떠난듯한 거룩한 자세로 먹을 듬뿍 먹인 붓을 휘둘러대고있었다. 어찌나 그림그리기에 심취되였던지 옆에 사람이 오는것도 모르고있다가 황봉부자를 보더니 붓을 벼루우에 뉘여놓고 공손히 합장을 했다.

바로 이때 심술궂은 회오리바람이 홱 불어오더니 차돌멩이로 지질러놓은 종이장을 훌쩍 날려보냈다. 그런데 그 종이가 날아나면서 그밑에 깔렸던 종이장마저 펄럭 머리를 쳐드는데 그것은 그림이 아니라 산줄기와 강줄기, 큰 길과 거리, 산성과 같은것들을 그린 지도였다.

바람은 그 종이장마저 휙 말아올려 바로 황바위앞에 내동댕이쳤다. 황바위가 그것을 급히 집어드는데 그렇게도 거룩스럽게 틀을 차리고 앉아있던 중이 왕벌에게 눈통을 쏘인 놈처럼 후닥닥 일어서더니 황바위에게로 달려들어 그 종이장을 홱 나꾸챘다. 그바람에 종이장이 두쪼각이 났다.

중은 황바위가 쥐고있는 종이장마저 빼앗으려고 미친듯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놓아기른 야생말같은 황바위가 그것을 공손히 바칠리가 없었다. 더우기 그 중놈이 수상하다는 말을 아버지와 한서방에게서 들은 황바위였다.

《이 썅…》

그는 그 종이장을 내동댕이치더니 두발로 짓뭉개버렸다. 이때 또 한무데기의 센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쳐 중이 쓰고있는 대삿갓을 훌렁 벗겨놓았다. 그러자 중놈의 큰 뒤웅박만한 뻔뻔대가리가 불쑥 나타났는데 우묵하게 패인 두눈에서는 살기가 뻗치고 송충같은 검은 눈섭과 푸르딩딩한 구레나룻자리가 사납게 꿈틀거렸다. 더우기 바른쪽귀밑에 붙은 콩알만한 시뻘건 쥐젖이 마음을 오싹하게 했다.

독이 오른 중놈은 당장 잡아라도 먹을듯 황바위에게 덤벼들다가 그의 아버지가 큼직한 작대기로 이사짐을 받쳐놓는것을 보자 그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황바위의 미투리에 쪼각이 난 종이쪽들을 주어모아 장삼소매자락에 처넣더니 살맹이나무가지에 걸린 삿갓을 벗겨서 썼다. 그리고나서 돗자리며 벼루, 붓, 향로 등을 주섬주섬 걷어서 바랑속에 넣어지고는 검은 장삼자락을 드리운채 석장을 짚고 휘적거리며 산모퉁이를 돌아갔다.

《왜놈이 틀림없다. 그놈이 우리 나라 지도를 그리고있었구나.》

황봉은 저도모르게 중얼거렸다.

《우리 할아버지를 죽인 그 왜놈말인가요?》

《그렇다.》

바위의 눈이 커질대로 커졌다.

《아버지, 그럼 그 왜놈을 왜 살려보내나요?》

황봉은 어린 아들앞에서 말문이 막혔다.

《바위야, 네 말이 옳다. 그러나…》

황봉의 생각은 여러 갈래로 엉켜졌다. 왜놈의 칼에 맞고 백사장을 피로 물들이며 쓰러진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별별차림으로 왜놈들이 우리 나라 팔도강산을 개싸다니듯 한다던 한서방의 말도 생각났다.

《아버지, 그 왜놈을 어서 쫓아가자요.》

이때 옆길로 보따리를 진 늙수그레한 령감이 여나문살쯤 되여보이는 아이의 손에 이끌려 한발을 절뚝거리며 오더니 물었다.

《성천고을 노루목골이 아직 먼가요?》

《우리도 초행길이여서 잘 모르겠는데요. 그런데 검은 장삼입은 왜놈중이 어데로 갔는지 못봤소?》

《왜놈중이라니요? 어이구, 그럼 그놈이 여기까지 와서 싸다니는게 아닐가?》

《예?》

《그놈의 바른쪽귀밑에 빨간 쥐젖이 있는걸 못보셨소?》

《옳수다.》

《그놈이 우리 전라도 남해가 배군들의 마을을 돌아다니던 놈이웨다. 하기사 별별차림한 왜놈렴탐군들이 다 있지만… 그놈이 다녀간 후 우리는 왜구의 불벼락을 맞았쇠다. 나도 집을 불태우고 안해랑 두 자식을 죽였쇠다. 그래서 그곳에서 마음놓고 살수가 없어서 이렇게 병신이 돼가지구 어린 자식 손잡구 친척집으로 찾아가 땅뙈기나 일궈먹을가 해서 수천리길을 왔는데 있기나 한지 원…》

《관가에서는 그런 놈들이 싸다니는걸 모르고있나요?》

《흥, 관가? 말도 마시오. 머지않아 왜놈의 란리가 꼭 터질것이라고 백성들은 아우성치는데 관가에서는 제길… 막동아, 어서 가자.》

그는 더 말할 재미도 없다는듯 쩔룩거리며 가던 길을 갔다.

멀어져가는 그를 바라보는 황봉의 눈앞에 어린시절 백사장에서 본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왜놈때문에 나라가 망하겠는데 넌 무얼 멍청히 서만 있느냐.》

황봉은 아들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버지, 그 왜놈을 쫓아가자요.》

황봉은 아들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아니다. 관가에 알려야 한다. 그것이 백성의 도리다.》

《예, 그럼 관가에서 잡아주나요? 관가가 어덴데요?》

《여기가 성천땅이니까 성천고을에 있지. 성천고을 원님에게 알리면 된다.》

《칠성형님의 다리힘줄 끊겠다던 그 원님말인가요? 그 원님이 왜놈을 잡아줄가요?》

황봉은 말문이 막혔다.

(정말 그 원님이 왜놈을 잡아들일가?)

황봉은 지게를 다시 지며 말했다.

《나라에 도적이 들었는데 아무려믄 원님이 그놈을 가만히 놔야두겠냐. 바위야, 어서 성천고을 원님한테로 가자.》

황봉은 아들을 앞세우고 평양으로 가던 발길을 되돌렸다.

그들이 걸음을 다그쳐 성천고을관가앞의 홍살문(관가문앞에 세우는 붉은 칠한 살대문)이 바라보이는 둔덕에 올라섰을 때 벌써 해는 허공중천에 떠있었다.

홍살문을 바라보는 황봉의 발걸음은 저도모르게 멈춰졌다.

(이러다가 내가 누구라는것이 알려지게 되면 내 아들은…)

황봉은 어제 세거리 아이들이 부르던 노래생각이 났다.

(아니다. 가야 한다. 나라에 도적이 들었는데…)

이렇게 마음을 도사려먹은 황봉은 아들에게 《바위야, 내 저 관가에 들어갔다올테니 너는 여기서 기다려라. 만약 아버지가 늦게까지 못나오거든 억쇠네 집에 가있거라.》하고 당부하고는 미심쩍어하는 아들을 언덕우에 세워놓고 관가로 발걸음을 다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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