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 회) 죽령에 둔치고있는 후백제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고창성을 둘러싸고있던 저희 군사들이 다 녹아난것을 후백제군이 알아차린것은 해가 중천에 떠오른 때였다. 저수봉 량옆에 대기하고있던 후백제군이 지금쯤 고창성을 또 한겹 둘렀고 이미 성을 포위하고있던 군사들과 협공하여 고려군을 완전히
포위소멸하였으리라고 생각했던 후백제장수 신검은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견훤의 맏이인 신검은 이번 싸움에 후백제군의 부총대장(총대장은 물론
견훤이였다.)으로서 후백제군 중군진영에 위치하고있었다. 바람에 흐느적이는 지휘기들은 전부 고려군것이였다. 후백제군지휘기는 단 한기도 보이지 않았다. 신검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는 즉시 견훤에게 이 사실을 알리게 했다. 견훤과 간무는 부랴부랴 죽령에 전개했던 군사를 풀어 고창성으로 내몰았다. 상주와 의성에 둔치고있던 후백제군도 고창으로 달려왔다. 죽령에 틀고앉아있던 후백제군이 북으로부터 내려오고 상주에 있던 후백제군은 서쪽으로부터, 의성의 후백제군은 남쪽으로부터 모여온것이였다.
고창성서쪽 구릉지대가 후백제군사들로 차고넘치였다. 고려군은 동쪽 야산지대에 집결되여있었다. 금필과 술희의 부대는 잠시 뒤전에 물러나 휴식을 하고 홍유, 배현경 등이 이끄는 부대들이 전렬에 나섰다. 이들은 금필과 술희가 밤사이 치른
승리한 전장을 굽어본 뒤라 모두가 신심에 넘쳐있었다. 반면에 후백제군은 퍼그나 긴장해있었다. 저들의 정예한 병력이 밤새 까마귀밥이 되여 벌판 가득 널려있는것을 보고난 뒤인것이다. 량측은 거침없이 두번째 접전에 들어갔다. 처음 한동안은 화살전만 벌리다가 급기야 창격전으로 넘어갔다. 좀 있어 량쪽은 기병전을 뒤섞었다. 더는 피할 곳도 물러설 곳도 없다고 생각한 량측은 해가 저물 때까지 파도식공격을 련속 들이대였다. 후백제군이 등지고 선 석산너머로 저녁해가 넘어가기 시작한무렵에 이르러 싸움은 일단 멈춰졌다. 후백제군은 석산기슭으로 물러섰고 고려군도 등지고 선 병산기슭으로 물러갔다. 해가 기울고 곧 어둠이 비껴들었다. 저녁바람에 피비린내가 물씬물씬 날리더니 피로 물든 전장은 이내 어둠에 잠겨버리고말았다. 다음날부터 이틀간 량측은 력량을 수습하느라 일단 싸움을 멈추었다. 이 기회에 금필은 고창성을 정리하는 한편으로 고창성 성주인 신라귀족
김선평과 그와 동조하는 이웃고을의 호족들인 권행, 장길 등 장수들을 불러다 왕건앞에 대령시켰다. 이들은 그사이 진행된 싸움을 직접 목격하고
고려군의 승리를 판단한 뒤라 즉시에 왕건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스스로 군량조달을 맡아나섰다. 왕건은 이들을 치하한 뒤 김선평에게는 대광(2품), 권행과 장길에게는 대상(4품)벼슬을 내리였다. 그리고 이들을 내세워 상주와 의성 등지의
신라관리들에게도 고려군의 전승소식과 동시에 자기의 친서를 보내게 하였다. 고려군을 지원하여 후백제군의 패배를 앞당기는데 기여함으로써 차후에 고려왕의 은총을 함께 누리라는 호소를 담은 편지였다. 이들은 즉시에 화답해왔다. 후백제군의 전횡에 이를 갈면서도 뻐꾹소리 한마디 할수 없었던 이들이였다. 후백제군이 일시 우세를 차지하자 단박에 주눅이 들어
갈팡질팡하였었다. 그러나 형세는 달라졌다. 고려군이 다시 용을 쓰고있는것이였다. 고려왕이 직접 내려와 벼슬까지 내리는 정도였기에 이들은 두손 들어 고려군을 환영했다. 고창주변의 민심은 서서히 고려쪽으로 기울어갔다. 금필은 지몽에게 소문계도 써보도록 부탁했다. 견훤이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소문돌리기였다. 라주를 지키고 있을적에 민간에 떠돌던 이야기를 리용해보려는것이였다. 그때 후백제 항간에는 견훤의 횡포에 반감을 품은 선비들이 뒤고방에서 꾸며내여 퍼뜨린 흉한 소문이 돌았었다. 어느 산골에 한 처녀애가 살았는데 지렁이를 가지고 장난질을 하다가 실수로 잉태하여 아이를 낳았으니 그가 바로 견훤이라는것이였다. 지몽은 이 이야기에 몇구절 그럴듯 하게 더 보태여 백제군진영에 퍼뜨리였다. 올해는 룡띠들에게 액운이 뻗친 해인데 지렁이는 룡의 팔촌찌꺼기쯤 되므로 자칫하면 그 화를 함께 당할 우려가 있으므로 지렁이아들인 견훤과
함께 다니는것을 삼가하는게 좋을것이라는 소문이였다. 화식을 맡은 후백제군졸들이 민가에 내려와 접촉하는 과정에 주어듣고 옮긴것이 가지를 치고 살이 붙으며 후백제군의 귀에서 귀로, 입에서
입으로 옮겨져 소문은 눈덩이 불리듯 커져갔다. 《룡과 뱀의 조상은 지렁이인데 우리 견훤왕은 그 아들이라누만.》 《지렁이는 해빛을 피해야 사는데 우리 왕은 한사코 해빛을 보았기때문에 인차 죽는다고 하네.》 《이 지렁이와 같이 지낸 사람은 다 죽게 된다누만.》 어처구니없는 소문이였지만 듣고난 병졸치고 목을 움츠리지 않는자가 없었다. 후백제의 진중이 이 소문 하나로 뒤숭숭해지기 시작했다. 견훤마저 이 소문을 듣고는 장탄식을 하고 나앉았다. (하늘이 나를 조롱하는데 이르렀구나!) 그무렵 금필은 왕건의 승인을 받아 다시금 공격령을 내리였다. 고창벌에서의 세번째 격전이 시작되였다. 후백제군은 모든 힘을 기울여 저항했지만 형세는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후백제군은 무려 8천의 죽음만 내고 끝내 퇴각하고말았다. 승승장구하던 후백제군은 고창전투와 함께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후백제의 수중에 들어갔던 신라땅들이 다시금 고려로 넘어왔다. 고창 남쪽과 서쪽의 신라호족들은 련이어 고려에 투항해왔다. 이에 뒤질세라 고창 동쪽지역 호족들도 고려에 귀속해왔다. 명주아래에서부터 흥례부(울산)에 이르는 4백여리구간의 무려 110여개 성이 고려에 투항하고 자진 귀속되였다. 신라의 동해안지역이 고려의 수중에 새롭게 장악되고 고려군은 남으로의 진출을 거듭하여 서라벌근처까지 나아갔다. 후백제에게 고려가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 군사적으로 완전장악하는데로 넘어갔음을 알리여 더는 넘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신라는 불안에 싸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고려와 우호정책을 유지해 보호를 받아왔지만 지금은 명백히 정복당하고있기때문이였다. 고려가 후백제를 치는 싸움을 하였지만 싸움을
벌린 땅은 신라땅인 까닭이였다. 게다가 몇년전 서라벌을 짓뭉개놓은 견훤에게 신라는 복종을 언약했던것이 켕기지 않을수 없는것이였다. 경순왕은 허겁지겁 왕건을 서라벌에 초청하는 사신을 보내왔다. 일종의 항복인것이였다. 왕건은 신라를 안심시켜야 할 필요를 느끼고 그 중임을 금필에게 맡기였다. 하여 금필은 왕건의 특사로 서라벌에 들어가게 되였다. 앞으로 있게
될 왕건의 서라벌행차를 위한 예비방문이기도 하였다. 930년 2월, 금필은 서라벌로 들어갔다. 신라 경순왕은 어전뜨락에 내려와있다가 금필을 맞아들였다. 대청에 올라가서도 룡상에 앉지 않고 그앞에 따로 자리를 만들고 금필과 나란히 앉았다. 자기를 완전히 낮추고있었다. 《일국의 대왕께서 이러시면 아니되오이다. 자리를 다시 잡으시옵소서.》 금필이 간곡히 권하였으나 경순왕은 손을 저었다. 《유대광은 이전에 우리 부친과 친교가 두터우셨소. 하오니 오늘 첫날만은 내 부친을 대하듯 그대를 대하려 하오.》 《황송하기 그지없소이다.》 금필은 거듭 머리를 숙이였다. 금필의 언행에 신라조정의 문무대신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고려왕의 대리인으로 온만큼 금필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는 그대로 신라를
대하는 고려왕의 립장이고 자세인것이다. 금필의 부드러운 눈길이며 몸가짐은 바로 고려가 신라를 예전처럼 변함없이 우호적으로 대하리라는것을 시사하고있었던것이다. 경순왕은 금필에게
이전에 금필이 라주공략의 성공을 위하여 사화진에 와서 고려와 신라와의 협조를 약속했던 당시의 성주 김효종이 바로 자기의 부친이라는것을 다시금
상기시키였다. 금필은 경순왕의 두손을 꼭 잡아쥔채 한동안 말을 못했다. 몇년전 후백제가 네번째만에 대야성을 함락시킨 그날 시중의 몸으로 대야성 성주를 도와 싸움을 주관하던 김효종이 장렬하게 전사하였던것이다.
금필이 지금 그 아들인 경순왕에게 애도의 뜻을 담아 위로하고있는것이다. 《신라는 맥이 진하였소이다. 이제 무엇을 더 숨기겠소이까. 우리는 고려의 선의만 바랄뿐이오이다.》 경순왕은 에두르지 않고 들이댔다. 《우리 신라는 선대시기에(태종왕 김춘추때를 말함.) 당나라와 야합해서 고구려를 무너뜨린 대죄를 지은 나라이오이다. 그때의 죄를 물어 지금
신라를 벌하려 하는것은 아니오이까?》 《부디 선대의 죄를 거들어 괴로워할 필요는 없소이다. 현재의 신라와는 화친과 포섭으로 가는것이 고려의 국책인것을 대왕께선 아실텐데요.》 《고맙소이다. 당부하옵는데 신라왕실을 유린한 흉적 견훤을 하루빨리 멸하여주소서. 그리고 신라의 사직을 보존케 하여주소서. 고려왕에게 이를
부탁드릴뿐이오이다.》 《걱정마시오이다. 우리 페하께서 나를 여기로 보내신것은 신라를 보호하고 안심케 하고저 하신것이니 그 점에 대해서는 믿어도 되겠사옵니다.》 《감사하오이다. 내 불미한 우리 조상들을 대신해서 사죄 겸 다시한번 인사를 올리겠소이다.》 경순왕은 다시한번 무릎을 꿇고나섰다. 후백제왕에게는 강제로 빌었을망정 고려에는 진심으로 사죄하고싶은 그일것이였다. 금필은 황황히 일어서며 만류했다. 《이러지 마소이다. 저는 고려왕의 신하일뿐이오이다. 이후에 우리 페하께서 왕림하실터이니 사죄는 그때 하셔도 늦지 않으리라 보오이다.》 그제서야 경순왕은 자세를 바로하며 화제를 돌렸다. 《참, 고려왕께선 평양성으로 떠나셨다면서요?》 《발해정세가 난감이로소이다.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서 북방수비에 손을 대야 할 일이 많아졌소이다.》 《그러시겠지요. 그런 복잡한 속에서도 남쪽은 남쪽대로 돌보셔야 했으니 로고가 클것이오이다.》 신라왕은 다시금 감사의 뜻을 표하고 말을 이었다. 《듣자니 발해왕은 거란에 끌려갔다 하던데 그게 사실이시오이까?》 《사실인것으로 아오이다. 하오나 발해는 아직도 항전을 계속하고 있소이다. 발해후국을 자칭하고 나선 세력이 여러곳에 있다 하오이다. 그러니 있는 힘껏 도와야지요. 나도 인차 우리 페하를 뒤따라야 하오이다.》 《그렇소이까. 생각같아선 유대광을 아예 이곳에 붙잡아두고싶소만… 하오나 한달쯤은 말미를 두셨겠지요?》 경순왕은 후백제를 두려워하고있었다. 견훤이 다시금 서라벌을 공격해올지 알수 없는 일이였던것이다. 《페하께서 그리하라 하셨소이다. 제가 서라벌에 급히 온것은 후백제의 도발에 대처하는데도 목적이 있소이다.》 《고려왕에게 다시한번 사의를 표하오이다.》 경순왕은 또한번 머리를 숙이였다. 금필은 서라벌에 한달가량 머물렀다. 떠날 때 금필은 자기 이름이 새겨진 지휘기를 서라벌성루에 그냥 꽂아두게 하였다. 고려군이 서라벌을 지키고있다는 표시였다. 군사도 절반가량 떨구어놓았다. 서라벌 도성수비를 돕게 한것이였다. 《우리 신라에 유대광 같은 장수가 한명만 있어도 내 마음을 놓으련만… 헤여지고싶지 않소그려.》 작별의 순간에도 경순왕은 금필의 손을 놓을줄 몰랐다. 《대왕전하, 이제 우리 페하와 더불어 천하를 도모할 때가 꼭 있을것이오이다. 부디 강녕하소서.》 금필은 정중히 하직인사를 하고 말머리를 돌리였다. 금필은 신라조정의 분위기를 다시금 파악하였다. 신라를 전취하는것은 시간문제였다. 좀 있어 왕건이 정식으로 서라벌을 방문하는 그때에는 모든것이 무르익을것이였다. 금필은 이것을 확신하여 마지않았다. 송악에서 금필을 맞이한 왕건은 다시금 그를 칭찬했다. 고창전투의 승리에 기여한 금필의 공적은 실로 큰것이였다. 몇해째 승전의 한길만 걸으며 세 나라의 구도를 뒤집어놓았던 후백제를 보기 좋게 꺼꾸러뜨린것이 바로 금필이였던것이다. 그가 아니였다면 고려의 운명이 달리되였을지도 몰랐다. 금필의 이름은 고려는 물론 신라와 후백제에도 널리 퍼져갔다. 승자의 뒤에 찬사만 따르라는 법은 없는것이다. 금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얄미울 정도로 잇달으고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