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 회)

 

자정이 썩 지난 시간이였다. 금필은 지금 최응, 최지몽, 박술희와 함께 완산주를 다녀온 간자의 보고를 듣고있었다. 후백제를 제압하자면 우선 상대의 우단점을 정확히 파악하는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금필은 보름전에 완산주로 드나드는 밀매장사치들속에 유능한 간자들을 섞어 들여보냈었다. 간자의 말을 들어보면 얼핏 듣기에는 후백제조정의 실상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견훤과 간무는 득의양양해서 장수들과 어울려 밤에는 주연을 벌리고 낮에는 지도를 마주하고있다 하니 그들이 도대체 어떤 꿍꿍이를 꾸미고있는지. 한편으로 견훤의 일등모사이던 능환이는 견훤이나 간무와 거리를 두면서 장수들을 등지고 몇몇 대신들과만 마주앉군 한다니 이들이 따로 싸고도는 리유는 또 무엇인지.

민심동향은 또 그것대로 대중하기가 힘들었다. 고려를 기어코 눌러야 한다며 윽윽 기세를 올리는 축들이 있는 반면에 이대로 나가다가는 후백제가 속곳도 가리지 못한채 등껍질을 싹 벗기워 굶고 지쳐서 지리멸렬한다고 아우성치는 축들이 적지 않다 한다. 그러니 싸움에 지쳤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건 고려도 마찬가지다. 지금 량쪽은 지루한 싸움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하고있다.

금필은 견훤의 두 모사인 간무와 능환이 서로 등지고있는 사실에 주목했다. 능환이가 견훤과도 거리를 두고있다니 이것 또한 후백제의 허점의 요진통이 아닐수 없었다.

(그러고보면 후백제의 조정은 겉으로 보면 원기왕성한것 같지만 속으로는 병이 들기 시작했다고 봐도 지나친 말이 아니렸다. 눈앞의 싸움에서 일시 진것만 생각하면서 기가 죽어 스스로 오금을 꺾고앉아 앉은방아만 찧었으니 세상에 이런 혼빠진짓이 어디 있담.)

금필은 제스스로 이마를 치며 후회했다.

락심할 필요는 없다. 회복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군사들이 지루감을 털어버리고 다시금 일떠서게 하는것이고 후백제의 허점을 알아내여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과감히 돌진해나가는것이다.

금필은 이 점을 왕건에게 잘 설유해올리자고 최응이네와 일치를 보았다. 아울러 견훤이 치는 수에 말려드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매사에 신중하자고 약속했다.

그 무렵에 송악궁성에로 한장의 서신이 날아들었다. 후백제왕 견훤이 왕건에게 보내온 편지였다.

편지내용인즉은 목포의 오다린과 웅주를 교환하자는것이였다. 왕건의 둘째부인인 오씨의 아버지를 살려주겠으니 웅주(공주)를 내놓으라는것이다.

견훤은 라주와 목포를 점령한 뒤 라주성주 종례와 목포성주 오다린을 억류해놓고있었다.

견훤은 왕건이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 제의를 해왔다. 이것이 무엇을 노린것인가는 생각해보나마나였다. 왕건으로 하여금 격노하게 만들어 또다시 군사를 이끌고 후백제지경으로 뛰쳐나오게 한 다음 사로잡자는 목적일것이였다. 몇번 재미를 본 이른바 《격장지계》(상대편 장수를 격노하게 만들어 저들의 유리한 곳으로 유인해내여 소멸하는것.)를 견훤이 또 쓰고있는것이였다.

금필은 왕건의 분노를 가라앉히는데 적지 않은 품을 들이였다.

더우기 급한것은 장화왕후(왕건의 둘째부인 오씨)의 반발이였다.

그가 아버지를 살려달라며 왕건에게 애원하다못해 갑옷차림에 칼을 차고 나서기까지 하자 왕건은 금필의 설유를 잊고 다시금 라주를 치자며 수군에 출병을 명령했다. 병석에 누워있던 최응이 달려와 금필과 함께 만류해서야 출정은 보류되였다.

금필은 간자들이 알아온 후백제조정의 동향을 왕건에게 귀띔해주면서 때를 기다려보자고 거듭해서 간청했다. 후백제 견훤왕의 왕자들사이의 다툼질이 심하니 일단 지켜봄이 좋으리라는것이였다.

왕건은 이 말을 그닥 심중하게 대하지 않았었다. 왕자들이 란을 일으켜야 어쩐다는건가. 완산주 궁성의 한쪽구석쯤 시끄러워진다고 견훤이 제 할일을 못하랴… 하면서도 왕건은 일단 수군출병은 취소했다.

하지만 왕건은 오래 앉아있을 생각은 없었다. 다시금 솟구쳐오른 새로운 방략을 짜기에 그는 시간가는줄 몰랐다.

그 시각에도 금필은 형세를 만회할 첫 싸움을 어디서 뗄것인가 하는 생각에만 옴해있었다. 지도를 들여다보는 그의 눈길이 신라의 고창성에 가서 자주 멎군 하였다. 견훤이나 간무가 그곳을 노리리라는 예감이 이상스레 그의 뇌리에서 떠날줄 모른때문이였다.…

930년 정월에 후백제군이 고창성을 치려한다는 정보가 날아들자 금필은 무릎을 쳤다. 자기의 예감이 맞은것이였다.

옳다! 바로 이곳에서 견훤을 꺾어야 한다.

고창성은 고려군이 지켜주고있는 신라의 성중에서는 마지막성이였다.

경애왕이 죽기 이태전에 왕건에게 부탁하여 고려군이 고창성에 둔치고있었다. 고창성 성주는 신라왕족인 김선평이였는데 초기엔 그도 주인구실을 한답시고 적극성을 보였었다. 그러나 주변의 다른 성들이 후백제군에게 함락된 이후에는 잔뜩 주눅이 들어 앞에 나서는것조차 꺼려하였다. 그 역시 고려군의 일시적인 퇴보에 실망하고있었으니 그도 그럴것이 고창성을 제외한 이전에 고려군이 지켜주던 신라땅을 지금은 거의 다 후백제가 차지하고있었던것이다.

지금은 후백제가 신라보고 저들이 신라땅을 지켜준다고 하고있는 형편이였다. 이런 판인지라 적지 않은 신라사람들은 김선평이처럼 머리를 기웃거리며 몸들을 도사리고있었다. 고려든 후백제든 신라를 지켜주기만 한다면 아무쪽이든 상관이 없다는 태도였다. 신라사람들은 고창성에서 벌어지게 될 고려와 후백제사이의 싸움을 일단은 지켜보고있다가 차후 이기는쪽에 가붙을 잡도리였다.

신라를 끌어당기기 위해서도 고창성싸움은 치르어야 하며 그것도 꼭 이기는 싸움을 해야 하였다.

금필은 고창에서의 싸움에 고려군이 다시 일떠설수 있는 운명의 기회를 걸고있었다. 이와 함께 이 결심을 왕건에게 아뢰였다.

왕건도 적극 찬성해나섰다.

한편 견훤도 이미 증원군을 거느리고 고창성으로 가고있었다.

견훤에게는 문경과 상주, 례천일대의 고려군을 다 몰아내였는데 고창에만은 아직도 고려군사가 3천이나 있는것이 눈에 든 가시가 아닐수 없었다. 고창의 고려군을 내몰면 소백산줄기 남쪽으로는 고려군이 더는 없게 되는것이다. 고려군을 조령과 죽령너머로 완전히 구축한 뒤에 마음 편히 돌아앉아 신라를 먹자는것이 견훤의 속심이였다.

견훤은 증원군까지 합쳐 도합 2만의 정예군사를 고창성에 투입하였다. 후백제군 총력량의 절반이 넘는 병력이였다.

금필도 서둘러 출병했다. 왕건에게는 송악에 그냥 있으라 권유하였지만 왕건은 머리를 저었다.

《혼자 떨어져 뭘하겠나. 같이 가세. 나는 구경만 하겠네.》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이것은 무서운 예고였다.

나를 따르지 않는자는 고려사람이 아니라는 무언의 선고였던것이다.

고려군은 몇개의 진으로 나뉘여서 밤낮으로 행군해갔다.

죽령가까이의 례안진(안동 북쪽)앞에 이른 금필은 잠시 정황을 료해하느라 멈춰섰다.

여기서 장수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죽령에 진을 치고있는 후백제군을 그냥 두고 고창으로 내려가는것은 위험하니 죽령에 있는 적부터 치자는 장수들이 여럿 되였다. 그들은 퇴로를 미리 확보해놓고 공격하는것이 상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금필은 그 의견에 반대였다. 죽령에서 힘내기를 하는 사이면 고창성의 고려군사 3천명은 고스란히 죽음을 당하고말것이라는것이며 또 고창성을 지켜야 하는 이상 죽령에서 어물거릴 필요가 없다는것이였다.

《그럼 유대광은 죽령의 후백제군을 놔둔채 고창으로 가자는거요?》

《그렇소이다.》 금필이 홍유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거야 적의 함정안에 스스로 들어가는것이 아니요?》

《후백제군이 죽령에 진을 치고있고 그너머 고창성을 포위하고있으니 우리가 후백제군가운데로 들어가는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그것을 꼭 함정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소이다.》

《그게 함정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요?》

홍유는 얼굴을 붉히며 되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금필의 주장이 그에겐 억지로 보였던것이다.

《고창성을 지키고있는 우리 군사와 협공하면 오히려 후백제가 우리의 함정에 빠질수가 있소이다.》

《이게 뭐 아이들 술래잡인줄 아오?》

홍유는 왕건도 같은 생각일것이라고 단정하며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장수들이 홍유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고있는듯 했다. 모두가 퇴로를 확보한 뒤에라야 고창을 공격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금필은 물러서지 않았다.

《고창성이 무너지지 않고있는것은 우리 군사들이 결사항전하는데도 있겠지만 그것만은 아니고 후백제군이 우정 고창성을 놔두고있는것이지요.》

《무엇이라구요?》

금필의 말에 모두가 의문을 표시했다.

《후백제군이 고창성을 타고앉자고 마음먹고 나서면 이미전에 해치웠을것이라 그 말이요. 그들이 고창성을 포위하고있는지가 벌써 닷새가 지난걸 생각해보시였소?》

금필이 사리를 따지고들었다.

《유대광 말씀에 일리가 있소이다.》

최지몽이 비로소 참녜해나섰다.

《후백제군은 지금 뭔가 더 큰것을 노리고있소이다. 그것이 무엇이 겠소이까? 그것은 고창성의 3천군사만이 아니라 우리 고려군주력을 노린것이요. 더 정확히 말하면 페하를 노리고있는것이요.》

《페하를?!》

최지몽의 말에 모두가 와뜰 놀랐다.

《하오면 우리가 기를 쓰고 죽령을 넘어야 할 리유가 무엇이요?》

배현경이 두눈을 부릅떴다.

유금필은 여유있는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적의 기도를 역리용하자는것이지요.》

《어떻게 말이요?》

배현경이 다그치였다.

《지금 후백제군이 먼저 진을 치고있어 유리한것은 사실이나 빈틈이 많소이다. 그들도 우리 못지 않게 먼길을 걸어온바로 아직 주변파악은 부족한 상태인데다 그곳 지리에 밝지도 못하여 우리와 별반 다를바가 없소이다. 다만 그들은 고창성을 미끼로, 함정으로 정하고 우리를 포위해 먹자는것인데 우리가 그들의 기도를 안 이상에는 그것을 파탄시킬 계략도 찾아쥘수 있다는것이오이다.》

《그 계략이 무엇이요?》

홍유가 아직 리해가 되지 않는다는듯 머리를 기웃거렸다.

《우리가 주동적으로 후백제군대형을 허물어놓는것이지요. 다시말하지만 역리용하는것이오이다.》

금필은 신심있게 대답했다.

《승산이 보이지 않소. 승산이…》

홍유는 여전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유대광의 주장을 따르는게 좋을상싶다.》

돌연히 왕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론을박하던 장수들의 입이 뚝 굳어졌다. 떠날 때부터 말 한마디 없던 왕건의 입이 오랜만에 한번 열린것이였다.

《금필대광은 어서 령을 내리라.》

그만하고 빨리 금필의 주장을 따르라는 분부였다.

《알겠소이다.》금필은 잠시 생각을 굳힌 뒤 말을 이었다.

《내가 이제 약간의 군사로 공격하려니와 이는 이번 싸움의 시작에 불과할것이니 여러 장수분들은 지켜보시다가 이후의 행동에만 전념하시면 되겠소이다.》

금필은 이렇게 일단락을 짓고는 곧 명령을 하달했다.

《박술희대광은 군사를 절반 갈라 죽령을 왼쪽으로 우회하도록 하시오. 거기엔 내가 따르겠소이다. 홍유, 배현경나으리들은 페하를 모시고 중군으로 행동하시오. 죽령을 오른쪽으로 우회하여 넘을것이오이다. 중군은 죽령에 전개되여있는 적군을 견제만 하면서 상주와 의성쪽에서 지원오는 적군을 막아주면 되겠소이다.

죽령의 적군이 움직일수 있는것은 확실한것이오만 상주와 의성쪽 적군은 만약의 경우에 해당하는것이로소이다.》

좌중에는 다른 의견이 없었다. 아직은 뭔가 석연치 않으나 일단은 복종한다는 태도였다.

《그럼 출전하십시다.》

금필은 일어섰다.

왕건은 더는 말이 없었다.

고려군은 금필의 지휘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편 후백제군은 고려군의 죽령돌파를 말없이 주시만 하고있었다.

간무가 계획한대로 고창성앞에서 포위소멸하려는것이였다.

서로가 얼리고 얼리워넘어가는 숨막히는 싸움에 들어갔다.

금필은 고창성근방의 저수봉에 이르자 박술희에게 군사를 또 절반 나누어주며 대기하게 하고 신호에 따라 역포위를 실현해달라고 당부했다.

《범의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랑패가 없으렷다. 군사들! 그대들은 나를 믿으라! 승리는 우리의것이다.》

금필은 군사들을 불러일으킨 뒤 곧 고창성공격에 나섰다.

먼저 성 좌우쪽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고창성을 둘러싸고있던 후백제군이 맹렬하게 맞서나왔다.

성은 고려군의것인데 후백제군이 그를 막아주는 판이였다.

싸움은 시작부터 우습강스럽게 벌어지고있었다.

각기 성벽까지 접근하는데 성공한 고려군이 이번엔 성밖에 진을 친 후백제군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이때를 맞춰 금필은 나머지 군사로 성의 정면을 공격해나갔다.

성을 둘러싸고있던 후백제군의 절반이 고려군에게 역포위된채 두들겨맞기 시작했다.

이쯤되자 저수봉 량옆에 둔치고있던 후백제군이 쓸어나와 고창성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금필의 군사들은 역포위에 들고말았다.

금필은 기회를 놓칠세라 불화살을 날리고 붉은색기발을 흔들어 술희에게 신호했다.

그러자 이번엔 술희가 이끄는 고려군이 또 역포위해 들어왔다.

고려군안에 후백제군이 들고 그 후백제군안에 또 고려군이 들고 그안에 또 후백제군이 들었다. 그다음엔 고창성안에 있는 고려군이 닭알의 노란 자위모양으로 들어있었다.

서로가 포위하고있는듯 했으나 실지로 포위에 든것은 후백제군이였다.

량측은 밤이 새도록 치고 부시며 맞붙어돌아갔다.

날이 밝아와 전장엔 초절임된 배추잎모양으로 늘어져버린 량쪽군사들의 모습이 눈이 모자라게 안겨왔다.

피를 물고 쓰러진 시체가 태반이나 한편 맥이 빠져 죽은듯이 누워있는 군사들도 많았다. 개중엔 적아가 서로 붙안은채 늘어져 코를 고는 축들도 있었다. 밤새워 맥을 뽑고난지라 쓰러진 그대로 잠에 취해버린것이였다. 죽은자와 산자를 분간하기 어려운 광경이였다.

금필은 징을 울리고 지휘기를 흔들어 자기 위치를 알렸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고려군 부장기들이 하나, 둘 쳐들리더니 흐느적흐느적 화답을 해왔다. 고려군사들이 저들의 지휘기주위에 지척지척 모여들었다.

후백제군속에서도 제편을 찾아 움직이는 군사들이 도간도간 보이였다. 그러나 그들의 수는 많지 못했다. 희생자는 대부분이 후백제군사들이였다.

그무렵에 찌쿵하고 성문이 열리였다. 성안의 고려군사들이 환호를 올리며 쓸어나왔다. 그래도 몸을 움직이는것은 그들이 나았다. 고창성은 후백제군의 포위에서 풀려났다.

첫 싸움은 고려군의 승리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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