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 회)

 

견훤은 공산전투에서 고려군을 격파한 뒤 한달이 지난 그해 10월 중순에 대목군(경상북도 칠곡군)을 또 들이치였다. 대목군 신라군사들이 고려군을 도왔다는 트집을 잡은것이였다. 그리고는 대목군 앞벌의 로적가리들에 불을 달았다. 이후에 고려군의 수중에 대목군이 다시 떨어져도 낟알만은 넘겨주지 말자는 속심에서였다.

견훤은 뒤이어서 11월에 신라의 벽진군(경상북도 성주)을 또 토벌했다. 문경 남쪽 상주일대가 고려의 점령지로 되여있어 그 아래로 잇달아있는 벽진군도 고려의 점령지역이나 같았다.

이곳의 식량은 거의나 고려군의 군량으로 조달되고있었다. 신라는 후백제의 공격으로부터 저들을 막아주는 대가를 고려군에 식량으로 치르고있었다. 신라의 벽진군과 대목군일대는 락동강중류류역으로서 땅이 기름지고 농사가 잘되였다.

왕건은 이미전에 장수 하나를 보내여 벽진성을 수복하고 지키는 일을 주관하게 하였었다. 그러나 이 장수는 견훤의 아들 금강이 지휘하는 후백제군에게 패하고 자결하고말았다.

견훤은 크게 기뻐하면서 신라땅인 벽진군에 후백제군의 군영을 설치하고 머무르게 하였다. 신라땅에서 주인행세를 하려는것이였다.

이제는 고려란 말만 들어도 떨던 후백제가 아니였다. 후백제는 공산전투를 기점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왕건을 이겼다는 사실이 장수로부터 군졸에 이르기까지 모두의 사기를 올려주고있었다.

견훤은 한해가 저무는무렵에 제가 직접 왕건에게 장문의 편지를 써보내면서 낯간지럽게도 화친을 도모하자고 제의했다. 가을에 있은 신라 서라벌공격은 옛날의 백제를 무너뜨린 신라를 벌한것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정당행위라고 주장하고나서 실은 이해안으로 평양성까지 완전히 정복하려다가 이웃나라들의 권유도 있고 하여 그만두었으니 그만 자제하는게 좋으리라는 내용이였다.

이것은 견훤이 잠시 숨을 돌리며 힘을 보충할 시간을 얻으려는 잔꾀에 불과했다.

새해를 맞으며 왕건은 견훤에게 보낸 답신에서 세해전인 925년에 조물성에서 한 약속을 저버리고 동족의 나라인 신라의 왕실을 무참히 유린하고 인명과 재산을 강탈한 후백제는 그 후과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고 질책하고 이후로는 경거망동하지 말것을 강조하였다.

그에 대한 대답인듯 후백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려가 차지하였던 강주지역을 단번에 빼앗아버렸다.

왕건은 그에 대한 보복전으로 후백제가 차지한 삼년산성(충청북도 보은)을 직접 공격했다.

삼년산성은 동쪽으로는 신라의 상주, 서북쪽으로는 고려의 청주, 서남으로는 후백제의 옥천, 동남으로는 신라의 영동과 련결되여있는 군사적요충지였다.

이러한 곳을 후백제가 깔고앉아있어 문경과 상주를 차지한 고려군은 서쪽이 늘 불안했었다. 그래서 형세를 만회하려 한것인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만큼 고려군은 사기가 저락되여있었다.

반면에 후백제군은 날이 갈수록 사기를 올리였다. 보은을 고수한 뒤 고려군을 올려밀어 청주를 함락시킨것이였다.

탕정(아산)을 지키고있던 금필이 지원해오지 않았더라면 왕건은 지난번 공산전투에서처럼 또한번 견훤의 포위에 들번 하였다.

금필은 우울해졌다.

자기에게 고려군의 후백제공격 총대장직무까지 준 왕건이였건만 자신은 지금 그 기대에 미처 따라가지 못하고있었던것이다.

탕정에 성을 쌓아 후백제의 공격에 대비하는 문제도 그랬다.

최지몽이 형세로 보아 이곳이 후백제군의 기본공격로로 될수 있다 하여 성을 쌓자고 하였으나 누구 하나 나서는 장수가 없었다. 장수들이 이제는 변방에 있기 싫다는 속심이였다. 장수들의 이 심리적변질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금필은 자기가 변명할 여지가 없음을 느끼고 그 책임을 지는 심정으로 변방에 남았다.

간난신고끝에 성을 쌓아놓고 지켜보느라니 고려군은 련속 패전하고있다.

금필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왕건은 충주까지 잃을번 하였다. 다행히도 금필이 후백제군을 막아놓았던것이다.

왕건은 청주를 또 잃을수 있다는 위구심에 빠져 청주성 보강에 힘을 돌렸다.

그 틈에 견훤은 보은을 지나 그 아래 영동(충청북도)을 또 타고앉았다.

왕건은 이를 묵과할수가 없었다. 고려가 문경과 상주를 타고앉아있다 해도 보은과 영동이 후백제의 수중에 장악되면 이후에 후백제의 신라공략이 더욱 수월해지게 될것이였다.

왕건은 다시금 후백제군을 영동에서 몰아내기 위한 출병을 명령했다.

그러나 고려군은 또다시 패전하고 대야성마저 후백제군에 떼우고말았다. 대야성앞벌에 펼쳐진 곡식밭에 불을 질러 대야성의 신라군사들을 끌어낸 후백제군이 감쪽같이 성을 타고앉아버린것이였다.

대야성은 927년 봄 장수 김락이 이끈 고려군에 의해 탈환된 이후 신라의 요청으로 고려군은 철수하고 신라군이 지키고있었다. 신라는 다른 곳은 몰라도 대야성만은 저희들이 고수해서 신라가 다 죽지 않았다는것을 시위하려고 하였었다. 이런 주장을 펴며 손수 자원해내려온 장수가 바로 사화진에 자진해 내려가있던 신라장수 김효종이였다. 그러나 신라군은 패하고 장수 김효종은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고려군은 대야성을 되찾으려고 열흘을 공격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다.

후백제와의 싸움은 928년에 들어서면서도 그치지 않았다.

전해에 신라의 대목군과 벽진군을 빼앗은 후백제군은 그곳을 다리로 하여 신라의 오어곡성(경상북도 례천)으로 공격해 올라왔다. 문경과 상주에 있던 고려군의 남쪽을 치려는것이였다.

오어곡성이 무너지면 죽령(소백산줄기의 중허리)을 후백제군이 장악할수 있게 되며 그렇게 되면 상주는 물론이고 충주까지 위태로와질수 있었다.

왕건은 후백제군이 죽령으로 공격을 집중하는것을 보고 라주를 치기 위한 눈속임이 아닐가 하고 우려하면서도 죽령쪽에 지원군사를 파했다.

그런데 고려지원군은 이번에도 후백제군에 패하였다. 고려군은 거의 천명의 사상자를 내고 오어곡성을 빼앗기고말았다.

신라땅에서 고려군은 주도권을 완전히 잃었다.

엎친데덮친격으로 고려는 후백제군에게 라주마저 떼우고말았다.

왕건이 우려하였던대로 후백제는 고려의 이목을 죽령에 돌려놓고 마침내 라주, 목포일대를 점령하고만것이였다.

결국 928년에도 왕건은 견훤과의 싸움에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이미 차지하였던 지역을 적지 않게 떼우기만 하였었다.

후백제군은 라주, 목포일대를 다시 차지한 뒤 조금 숨을 돌리는가싶더니 해를 넘기고나자 또다시 신라의 의성(경상북도)으로 진격했다.

견훤은 죽령에 군사를 배치하여 고려군의 남진을 막게 한 뒤 5천의 기병으로 불의에 의성을 점령하였다. 고려로 하여금 신라로 들어오지 못하게 완전차단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다음 견훤은 신라의 동북방으로 에돌아 올라가며 고려군을 에워싸고 총공격을 단행하여 그들을 밀어냈다. 상주, 문경, 청주, 충주앞까지 올리밀고서야 전진을 멈추었다. 왕건이 궁예때부터 품들여 정복하였던 대부분의 령토가 견훤의 수중에 들어가고말았다.

왕건은 실망을 금치 못하였으며 고려군의 사기는 완전히 저락되였다.…

금필은 며칠째 고민에 빠졌다. 최근 두해사이에 돌이킬수 없는 실패의 쓴맛을 보고있는것이였다. 이 기간에 고려군이 이긴 싸움은 기껏 잡아 다섯손가락안에나 들 정도였다. 대부분의 싸움에서 실패를 면치 못하였다. 꼭 찍어 말하면 공산전투에서부터 실패의 내리막길을 걷고있었다.

실패만 거듭하는 요인이 무엇인가에 대해 론의가 분분했다. 그런데 적지 않은 대신관료들은 그 요인을 북방사정에서 찾으려 했다. 전쟁 그 자체가 국력을 깡그리 동원해야 하는것인데 후백제와는 달리 고려는 국력을 북과 남 두 전선에 나누어 소비해야 하니 힘이 딸릴수밖에 없다는것이였다. 인적물적자원의 동원과 소비에서 후백제에 뒤질수밖에 없는 사정을 무시할수 없다는것이였다. 북쪽의 방비를 하지 않을수도 없는 사정이므로 후백제에 밀리는것은 당연하다는 론리를 펴고있었다. 그러니 지금의 사정으로는 어쩔수 없다는 말이 아닌가? 아니, 그건 옳은 답이 못된다.

금필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북방에 국력의 일부가 돌려지는것때문에 후백제를 이기지 못한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말은 바른대로 북방을 지금만큼이나마 장악하였기에 고려의 국력을 유지하는것이 아닌가. 후백제가 고려를 어쩌지 못하는것은 고려가 북방으로 령토와 인구를 늘여 국력이 강화되였기때문이다. 고려가 앞으로도 북방을 계속 개척하고 확장해나갈 때만이 후백제를 이길수 있는 힘이 더 커지게 될것이다. 그래서 왕건대왕도 이미전에 벌써 평양성 장악과 북방개척에 고려의 생사가 달려있다 하지 않았던가.…실지로 왕건은 이해의 그 바쁜 속에서도 서경순행만은 건느지 않았다.

금년 4월에도 틈을 내여 평양성을 돌아보고 내려왔다. 평양성만이 아니라 그앞의 안정진성(순안)과 영청성(평원군)을 거쳐 흥덕진성(순천), 안수진성(개천)까지 올라가보고 내려왔다. 근 한달이라는 기간을 서북방을 다지는데 돌리였다.

남쪽의 정세가 그토록 위급한 때에 한달씩이나 북방에서 보낸다는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며 보통의 상식으로는 어림도 없는 용단이다. 그만큼 북방을 중시하고 북방강화에 고려의 성공의 열쇠가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 바로 왕건대왕이다. 그래서 멈출수도 없고 늦추어도 안되는 나라의 최우선과제가 바로 북방강화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조정의 국책 그 자체에는 잘못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다면…

비로소 금필은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고려가 후백제에 뒤지는 요인이 다름아닌 싸움을 주관하는 장수들 자신의 무능력에 있다는것을 깨달았다.

패전의 원인은 고려장수들의 사기저락 즉 정신적힘의 부족에 있었다. 승전고만 울리는데 버릇되여 자만도취에 빠져 적을 가볍게 보고 대한것이 실패의 첫째 원인이고 한번 패했으면 패한데서 교훈을 찾고 이길 묘술을 찾아야겠으나 조급하게 만회할 생각에만 빠져 급급하던 나머지 련이어 패전을 거듭하게 되자 신심을 잃고 겁을 먹고 싸울 용기마저 잃고만것이 실패의 둘째 원인이라 할수 있었다.

지략과 전술의 활용에서 견훤에게 뒤지는것이 실패의 원인이라면 그건 큰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에 금필은 숨이 나갔다. 적을 압도할수있는 싸움방식만 찾아내고 과감히 밀어나가면 문제는 해결될것이기때문이였다.

금필은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장수들을 분발시켜야 한다. 견훤과의 두뇌전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길수 있다는 신심을 가지고 방략을 짜자. 금필은 왕건의 모사들과 먼저 상론하리라 결심했다.

이때였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와 문을 여니 술희가 숭겸의 부인을 앞세우고 군영안으로 들어서고있었다.

《아니?!… 제수님이 어떻게…》

금필은 반가움이 앞서 뒤말을 잇지 못했다. 추석날 숭겸의 제사때 보고는 여직 보지 못했던 그였다.

《금필형님을 보고싶다 하시여 모시고왔소.》 술희가 소개하자 부인은 정히 머리를 숙여 인사하였다.

《시형분께 문안 드리옵니다.》

《어서 들어오시오, 어서…》

금필은 토방마루로 내려왔다.

《자, 다들 들어오시오.》 술희가 영문밖에 대고 또 한번 소리쳤다. 누가 또 왔나 하여 군영대문쪽을 보니 금필의 부인 림씨와 술희의 부인 흥씨가 함께 들어서고있었다.

《거참, 눈이 잘도 내리는군…》

술희는 부인들이 모처럼 찾아온것이 흥겨웁다는듯이 푸접좋게 눈타령을 하며 부인들이 토방으로 올라서는것을 거들어주었다.

《이 동서가 삼을 달여왔소이다. 시형분들의 몸을 추세워야 하겠다면서…》

림씨부인이 찾아온 사유를 귀띔했다.

《삼을 달여오셨다구?!…》

금필이 황송해하는데 림씨가 뒤를 이었다.

《방금전에 페하께 들려 먼저 올리고 오는 길이오이다. 페하께선 아우분들께도 가져간다 하시니 어서 가보라 하시였소이다.》

세 부인들은 들고온 베보자기를 풀고 단지들을 꺼낸 다음 뚜껑을 열고 단지채로 금필과 술희앞에 차려놓았다. 단지안엔 살진 산삼이 세뿌리씩 들어있었다. 김이 문문 나는 누런 산삼을 들여다보는 금필과 술희의 눈뿌리가 금시에 축축해졌다.

《구실도 못하는 이 못난이들에게 무얼 이런걸 다…》

금필은 말끝을 맺지 못하였다. 숭겸의 부인을 보는 그 순간에 떠나간 숭겸이 생각나면서 다시금 자책감에 휩싸여져서였다.

한몸을 바쳐 왕건을 지켜내면서 그가 바란것이 무엇이였던가.…

금필은 숭겸의 몫까지 합쳐 왕건을 잘 보필해올리라는 뜻이 담겨있는 산삼앞에서 머리를 들수 없었다.

금필은 산삼을 드는걸 보고 가겠다며 손수 산삼을 집어 자기 입가까이에 가져다 올리는 숭겸 부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눈앞이 흐려지고 목이 꺽 메였다.

이마에 내리드리운 흰 머리칼오리들이 눈뿌리를 아프게 자극했다.

이전에 림씨가 그의 머리칼은 좀처럼 희여지지 않는다고 부러워하던 일이 이 순간 불쑥 생각키웠다. 하기는 송악에 처음 왔을 때 그의 모습은 얼마나 아릿답고 생신하였던가. 처녀때 그의 얼굴모습은 마치 금방 터쳐나려는 한송이 도라지꽃망울같이 예리고 고왔다. 거기에 머리칼이 남달리 칠흑빛이여서 녀인들의 부러움을 더 샀다. 녀인들은 그가 산삼을 먹으며 자라서 그렇다고들 하였다.

숭겸의 부인은 처녀때 심마니(산삼을 캐며 사는 사람을 말하는데 삼군 혹은 심메군이라고도 부른다.)였다.

광해주(춘천) 삼군마을에서 숭겸의 집과 이웃하고 살던 부인은 마을이 큰물에 진 사태에 밀려 흔적이 없어진 뒤에도 남들은 다 떠나가도 외지로 떠나간 숭겸이 찾아오리라 믿으면서 고집스레 그 자리를 지키였었다.

심마니들은 산사람중에도 제일가는 산사람들로서 여느 사람들은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는 독특한 언어를 사용했다. 심마니들사이에만 통하는 신비로울 정도의 그 언어를 일반사람들은 흉내조차 낼수 없었다. 소금을 곰소라고 하는것을 하나 가려듣고서 재미가 나서 따라다녀본 어떤 사람이 뱀을 건뎅이라고 하는것을 열흘만에야 겨우 알아내고는 두번다시 배울 용기를 잃고 돌아서고만것이 바로 심마니들의 언어세계였던것이다.

뭇사람들이 혀를 차든말든 심마니들은 제나름의 세계에 만족하고 살아가고있었다.

이들은 산삼을 캐는것보다 심어 가꾸며 퍼쳐가는것을 락으로 삼고있었다.

이들의 생의 보람은 조상의 얼을 지켜간다는 자부심이였다. 산삼이 단군조상의 얼이라는것이다. 풀이해서 말하면 산삼이 시조 단군의 얼굴이며 몸이며 팔다리며 정신이라는것이였다. 단군조상님이 자기의 온몸과 넋을 이 산삼에 불어넣어 후대들이 그 기운으로 살아가게 하였다고, 이 산삼을 겨레가 사는 이 땅 곳곳에 고루 퍼쳐갈 소임을 자기들에게 맡기셨다고 믿고있는것이 바로 심마니들이였다.

심마니들은 단군성왕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겨레가 사는 땅이 흡사 산삼모양 한가지인데 태백(백두산)이 그 머리꼭지요, 그로부터 동서 량옆으로 흘러내린 압록강과 두만강아래쪽은 뿌리이고 그 웃쪽은 줄기와 잎이라고 하셨다는것이다. 그래서 태백산 아래쪽에서 나는 산삼은 단맛은 다 같지만 산삼뿌리의 성질이 더 짙어 더우면서도 쓴게 특징이라면 태백산 웃쪽에서 나는 산삼은 줄기와 잎의 성질이 더 짙어 온화하면서도 신맛이 더 난다는것이였다. 그리고 산삼의 모양에서 벗어나는 흑수와 료하너머 땅엔 산삼을 퍼쳐도 잘 되지 않을것이니 이를 알고 조상의 땅을 명심해서 산삼을 퍼쳐가라 하셨다는것이였다.

금필은 이전에 숭겸에게서 전해들었던 이 말이 이 시각 전에없이 무겁게 새겨져왔다. 심마니들속에 전해오는 말이라 하지만 실은 겨레모두의 소원이 담긴 말이 아닌가. 단군이 산삼의 모양에 비기면서까지 그토록 간곡하게 허실없이 가꿔가라 부탁한 땅인데 이후에 동북쪽엔 부여가 나라를 세우고 남쪽엔 진국이 또 나라를 세워 동족의 나라가 세개로 나뉘여지고말았다. 고구려가 다시금 겨레를 하나로 합쳐 단군성왕의 뜻을 이으려 하였으나 그 당시의 백제나 신라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한사코 거부하고 동족간의 다툼질에만 신경을 쓰다가 이웃종족인 당나라를 끌어들이면서까지 자기 동족들을 해친 신라의 행위로 하여 고구려와 백제는 무너지고 이 땅, 이 겨레는 또다시 찢기우고 흩어졌다. 사분오렬로 흩어진 이 땅의 웃부분이 또다른 이족(거란)의 발굽에 짓밟혔는데도 그 아래쪽에선 여전히 동족간에 다툼질만 일삼을뿐 서로가 합치려는 생각을 도저히 하지 않고있다. 지금도 이 땅, 이 겨레를 하나로 만들고저 주동이 되여 나선 고려에 합심해나오면 좋으련만 신라는 우유부단하고 후백제는 결단코 맞서나올뿐이였다. 세상엔 말로 되지 않을 때엔 적절히 주먹찜질이 가해져야 되는 례가 드문하다. 지금의 삼국땅에 벌어진 각축전이 바로 그러하였다. 말로만 해서는 끝을 볼 일이 아닌지라 몸싸움으로 겨룰내기를 하고있는것이였다.

단군이 꿈꾼 산삼모양의 땅을 거두자면 먼저 그 뿌리에 해당되는 태백산(백두산)아래땅부터 하나로 만들어야 했다. 그 일이 지금 제자리걸음을 하고있는것이였다.

《제수님! 우리 힘을 낼터이오니 믿어주시오이다. 숭겸의 몫까지 합쳐서 페하를 잘 받들어 꼭 대사를 이루겠소이다.》

금필은 숭겸의 부인이 받쳐주는 산삼을 정히 받아들며 맹세했다.

숭겸의 부인은 술희에게도 산삼을 제 손으로 집어서 그의 손에 들려주었다.

둘이 산삼을 다 먹고나자 부인은 품에서 종이 두장을 꺼내여 각기 한장씩 그들에게 주었다.

《페하께옵서 우리 주인의 명함을 쓰시여 보냈소이다. 받으시옵소서!》

금필이 종이장을 받아펴보니 《숭》이라는 글 한자가 씌여져있었다. 술희에게는 《겸》자가 씌여져있었다.

《<신> 자가 씌여진 종이는 페하께서 가지시였소이다.》

(!…)

왕건은 지금 숭겸의 이름을 의형제들이 한자씩 뜯어 나누어 가지게 하고있었다. 그를 생각하며 일어나 분발하자는 절절한 호소였다.

아, 신숭겸!…

이들은 이전에 왕건이 숭겸에게 손수 성과 이름을 지어주며 고무하던때 일을 상기했다.

숭겸에게 능산이란 본래이름대신 지금의 새 이름을 지어준것은 고려가 선지 이태후인 920년 가을이였다. 그해 10월에 후백제군이 신라땅인 대량성(경상북도 합천)과 구사성(충청북도 보은)으로 침입해왔을 때 신라 경애왕의 요청에 따라 왕건은 고려군을 급파하여 이를 막게 했었다. 그때 군사를 이끌고 내려간 숭겸(능산)은 그 일을 순조로이 치르어 왕건을 기쁘게 해주었다.

그 시각 왕건은 서경순행을 끝마치고 송악으로 금방 떠나려던 참이였다. 그는 승전보고를 안고 송악에 도착한 숭겸에게 동부인하여 올라오라 이르고 다지홀(평산)에서 맞이하고는 그곳에서 한주일간이나 사냥을 하면서 그와 즐기였었다. 그때 축하연을 베푼 자리에서 숭겸을 부인과 나란히 앉혀놓고 명하였었다.

《고려의 명장인 그대일진대 아직까지 아이적 이름으로만 불리우는것이 그지없이 거북하고 민망스럽도다. 그대의 공적 산같이 높으나 언제 봐도 자랑을 모르니 겸손한 그 성품에 누군들 감복하지 않겠는가. 내 그래서 그대에게 거듭 신자를 성으로 주고 숭겸이라 이름하여 그대의 공로와 미덕을 찬양코저하니 부인도 함께 기뻐하라.》

왕건은 자기 어머니와 같은 심마니출신인 숭겸의 부인을 남달리 귀히 여겨오는지라 숭겸의 이름을 지어주는 자리에서도 그를 찍어서 축하해주었다. 지금 왕건은 의형제들에게 숭겸의 부인을 봐서라도 숭겸을 잊어서는 안된다는것을,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해야 하리라는것을 상기시키고있었다. 금필은 술희와 함께 거듭해서 맹세했다.

기어이 대세를 돌려세우자. 삼국은 고려의것이 되여야 한다. 이 길에서 물러설 길이 우리에겐 없다.

밖에서는 눈보라가 일고있었다.

송악산 정수리에서부터 내리불리는 바람세를 타고 그 남쪽자락밑에 펼쳐진 도성우로 뽀얀 눈가루들이 하늘을 덮으며 흩날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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