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3 회)
《류달이 이놈은 내가 두번씩이나 사람을 파해 추궁했는데도 매번 봐야 갓난애
꼬투리만큼씩밖에는 보내오지 않는 좀상이오이다.》 《그곳에서 무엇을 주로 가져오나?》 왕건이 묻자 식렴은 골살을 찌프렸다. 《제일 요긴한 철기지요.》 《그렇다면 엄하게 다스려야지. 내가 이미전에 내린 어지가 있지 않는가. 병쟁기납입에 불손한자들을 어떻게 하라고 했던가?》 《그래서 어제 내가 직접 사람을 몇명 골라서 내려보냈소이다. 버릇을 좀 떼줘야겠소이다.》 《그것 잘했네.》 왕건은 괘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있었다. 금필은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그 류달이가 틀림없다면 그가 곤장이나 맞고있게 해서는 안된다. 지금이 어느땐가. 그도 고구려후손일진대… 제 본분을 하게 해야 한다.) 《제가 한번 걸음을 해보겠소이다.》 《아우가?! 어제그제 전장에서 돌아선 몸으로 일없겠소?》 왕건은 걱정은 하면서도 그래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내가 아는 류달이라면 그렇게 두어선 안될 사람이오이다. 그럼 전…》 금필은 옹근 하루를 달려 구월산으로 찾아갔다. 금필이 문화고을에 들어서니 류달은 이미 관청뜨락에 부복한채 문초를 받고있었다. 《서경의 분부자 조정의 분부이온데 이 사정, 저 사정 고을사정만 내세우면서 임금의 어명을 흥정하려드는 그 죄 죽어 마땅하나 식렴대광께선
벌을 낮추시여 매 스무대를 내리였으니 류달은 어서 벌을 받으라.》 서경에서 내려온 관리의 목소리는 자못 엄엄했다. 《정치란 백성들의 호구지책을 잘 감당하는것이여야 하거늘 백성들을 농사를 짓게 하지 않고 부역에만 전적으로 나서라 하는건 잘못인줄 아오.
농사를 잘 지으라는것도 어명으로 알고있소.》 류달은 형틀에 엎드리기를 완강히 거부하고있었다. 금필이 자세히 살펴보니 소시적의 그 류달이 분명하였다. 《류달은 두말 말고 벌을 받으라! 집장사령! 어서 형을 집행하지 못할가!》 서경관리는 데리고온 형리며 라졸들에게 거품을 물고 고함을 쳤다. 그러자 고을장정 서넛이 형틀을 타고앉으며 맞받아 소리쳤다. 《매는 우리가 맞겠소. 류달어른은 머리털 하나 다치지 못하오!》 류달의 가병들이였다. 《뭣이?…》 서경관리며 집장사령이며 곤장묶음을 들고 다가들던 라졸들의 두눈이 퀭해졌다. 《관가의 령을 거역하는건가?》 서경관리는 서슬이 딩딩한 눈으로 류달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쪽도 숙어들 자세가 아니였다. 서로 노려보며 불찌들을 튕기는 품들이 일이
나도 크게 날것 같았다. 《가만!》 금필은 나서지 않을수 없었다. 《형리는 형을 잠시 중지함이 어떤가?》 《아니? 유대광나리께서 어떻게?… 우린 지금…》 서경관리는 난색이 돼서 손을 내저었다. 《알고있소. 내 생각에는… 고을의 사정이 어떤것인지 좀 알아보고 형을 집행해도 늦지는 않으리라 보오.》 금필은 형집행을 중지시킨 뒤 류달을 방으로 들게 했다. 《류달형!… 나를 알아보시겠소?》 《아니 이게 누군가! 동갑이… 금필형이 아닌가!》 둘은 얼싸안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였지만 강산이 세번 변하였을망정 홍안시절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리가 없는 이들이였다. 《류달형이 계시면서 조정을 노엽히다니… 리해되지 않소이다.》 금필이 나무라자 류달은 얼굴을 붉혔다. 《평양성의 식렴이 우리 고을 등골을 너무 긁고앉았기에 내 엇드레를 하고나선거요. 쇠부리터는 늘이라면서 사내꼬투리들은 계속 뽑아가니 일손을
당할수가 있소?》 《나라사정을 생각해야지요. 우리 고려는 지금 전쟁을 하고있지 않소. 후백제를 굴복시키고 통일을 하려는 전쟁을 말이요.》 《그걸 모르는바 아니나… 수하의 백성들이 허리펼새없이 부대끼는것이 고까와서… 내 생각이 짧았소. 나도 고려사람이요. 내 마음을 고쳐먹고
분발하리다. 가서 식렴에게 이 류달을 너무 하대만 말란다고 하시오.》 《식렴은 좋은 사람이요. 나를 믿듯이 그를 믿어도 되오. 부탁하는데 그의 한쪽팔이 되여주시오.》 《잘 알았소, 금필형!》 류달은 무엇인가 생각을 더듬더니 시 한수를 읊조렸다. 어릴적 죽마고우 뜻밖에 만나보니 그간의 몸사림이 부끄럽기 그지없네 나라 생각 않는자 짐승이라 하였으니 늦게나마 떨쳐나서 내 나라를 받들리라 《고맙소, 류달형!》 《금필형! 난 사실 권력에는 조금도 마음이 없는 사람이요. 그건 자네가 더 잘 알겠지. 우리 부친도 생존해계실 때 권력은 절대로 따를게
아니라 하셨지. 궁예시절에도 그랬거니와 지금의 고려조정에도 우리 부친께선 제 먼저 무릎걸음하고 찾아가진 않으셨으니까. 백성을 책임지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니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게 우리 부친 지론이였지, 가난구제는 임금도 손을 드는 일이라면서… 림종의 시각에 나에게 한 부탁은 문화고을
백성들만이라도 잘 먹여살리라는거였네. 그거면 내 인생은 성공한것이라고 하였지.》 《허나 나라일이 잘되여야 고을일도 집안일도 다 잘되는법이 아니겠소? 이런 옛글이 떠오르는구려. 백성은 천만 창날이요, 나라는 한벌 갑옷이라
백성이 창날되지 아니하면 어찌 나라가 지켜지리오.》 《잘 알겠소. 내 꼭 그리하리다. 한가지 부탁할건 우리 고을 청장년들을 군역으로 뽑아가는것만은 좀 덜어주었으면 하는거요. 쇠부리터 일은
남정들의 손이 가야만 하는 일이 아닌가. 농사하고는 또 다르네.》 《페하께 상주해서 그리하도록 하겠네. 겸해서 부탁하는데 이곳의 일판을 지금의 열배쯤 늘여주게. 지금도 그러하거니와 앞으로도 철기는 끝없이
요구될테니까.》 《알겠소, 금필형!》 《그럼 믿고 가겠소.》 금필은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섰다. 결과를 들은 식렴은 입이 째지게 좋아했고 왕건도 기분이 좋아 연신 수염을 내리쓸었다. 금필은 왕건과 함께 한달나마 청천강이북의 고을들을 돌면서 새로 쌓았거나 쌓고있는 성들을 료해하고 봉화대며 역참들까지 일일이 점검했다.… 어느덧 한해가 저물고있었다. 이해에 벌어진 일들을 하나하나 더듬어보던 왕건은 4촌동생 왕신의 죽음을 상기하자 다시금 분을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이해가 저물기 전에 복수전을 하리라 마음먹은것이였다. 산과 들이 빙설천지로 화한 이무렵에 왕건은 출병을 명령하였다. 목표는 후백제의 운주성(충청남도 흥성부근)이였다. 왕건은 원래 나무잎이 떨어지기 시작할무렵 먼저 홍유를 시켜 운주성을 까게 하였다. 그런데 홍유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왕건은 홍유를 내놓고 질책했다. 《나이는 속이지 못하겠구려. 그렇다해도 고려의 일등무장이신 홍대광께서 그냥 돌아서다니 될 말이요?》 《대광》이란 호칭은 고려 초기 왕건이 정한 벼슬등급의 하나로서 정2품에 해당된다. 《대광》우에 《중대광》(종1품), 《삼중대광》(정1품)이 있는데 이에 해당되는 사람들도 문서표기때를 제외하고는 보통 《대광》으로 불리웠다. 왕건이 품계가 간단치 않은 홍유인데도 구실을 못한다고
내놓고 야유하고있는것이였다. 홍유는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자기가 나이가 많은것까지 거들며 비꼬아 나무라는것이 그지없이 불쾌했지만 패자에게 무슨 할말이 있으랴싶어
마음껏 분풀이를 해주십사 하고 그저 엎드려 욕만 먹고있을따름이였다. 그런데 왕건의 다음말이 홍유의 자제력을 잃게 했다. 《금필이 그 사람을 보내야 하는건데… 평양성에 가있는 사람을 데려올수도 없고…》 금필이라면 성사할 일을 홍유 자기에게 맡긴탓에 그르쳤다는 소리였다. 열번을 잘하다가 한번을 그르친것을 가지고 이다지도 속아픈 소리를 할수 있는가, 페하께서 이 홍유를 이렇게까지 박대하시다니… 홍유는 왕건의
심기가 어느 정도 곤두서있는지는 가늠을 못하고 그만에 천성인 울뚝밸을 살리고말았다. 《페하, 소인 물러가도 되겠소이까?》 실은 실컷 욕을 먹고나서 다시금 출정을 간청해서 만회를 하리라 작정하고 들어선것이 졸지에 뒤집혀지고말았다. 《벌도 청하지 않고 그렇게 물러가겠다고? 그지없이 방자하다, 홍유!》 왕건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럼 어서 벌을 주시오이다.》 《썩 사라져라, 보기도 싫다!》 《?… 페하!…》 《나가라지 않느냐, 썩 나가!》 왕건은 자기보다 나이가 썩 우인 홍유에게는 대체로 존대말을 했었는데 지금은 아예 코흘리개취급을 하고있었다. 왕건의 노성에 홍유는 꿈틀 놀라 쫓기듯 대전밖으로 나와버렸다. 하지만 임금의 버림을 받은 홍유는 제정신이 아니였다. 대전뜨락밑에서 허둥거리며 행여나 다시 불러주지 않을가 하여 오락가락하다가 날이 어두워서야 집으로 돌아온 홍유는 이마를 동이고 자리에
눕고말았다. (썩 나가라구? 이젠 이 홍유같은건 필요없단 말이지!) 신음소리를 내던 홍유는 (금필이라면 해낼수 있다구? 금필이면 단가!) 하고 속으로 대답질을 해보는 속에 금필에 대한 시기심이 저도모르게
솟구쳐올랐다. 금필의 공적이 아무리 산같이 낟가리를 올렸다 해도 홍유 자기가 그만 못하단 말인가. 금필이 궁예시절부터 싸움때마다 명성을 떨쳐왔지만 그건
다 왕건의 그늘아래서 나누어가진것이다. 말은 바른대로 궁예를 뒤엎는 거사때에도 금필이 그가 우리 마군장들을 보고 이래라저래라 훈수는 틀었지만 실은 그때 그의 장단이 아니래도
우리 할바는 알아서 할수 있었다. 우리 마군장들이 능란하게 맞춰주었으니 말이지 제까짓 일개 부장이 혼자서야 무슨 맥을 추었을것이냐. 남보다 승벽이 센 홍유는 금필에 대해서는 늘 이런 생각을 하고있었다. 홍유는 금필의 출중함을 인정은 하였지만 나이로 봐도 손아래사람이고 시작부터 제가 직접 키운 군사를 거느리고있지 못한것을 꼬집어 늘 금필을
내려다보고있었다. 홍유도 처음엔 금필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있었다. 금필이가 홍유 자기처럼 고구려재건의 뜻은 같았기에 당초엔 바늘틈만 한 간격도 없었던
사이였다. 아지태가 살아있을 때 궁예보고 홍유는 신라출신이니 경계하라는 간언을 한 사실이 누구의 입을 통해선가 홍유의 귀에 들어온적이 있었다.
그때 홍유는 아지태의 목을 베겠다며 길길이 뛰였는데 마침 금필이 나서서 홍유어른의 고향인 의성은 지금은 신라땅이지만 이전엔 고구려땅이였다고,
의성보다 훨씬 남쪽아래인 영전고을까지도 다 고구려땅이였다고, 그건 내가 알고 궁예자신도 다 아는 일이니 한쪽귀로 흘려보내라고 위로해서야 간신히
분을 삭이였었다. 그때부터 홍유는 금필과 자별한 사이가 되였다. 홍유가 금필과 버그러진것은 고려건국 초기 북방개척임무를 누구에게 맡길것인가를 론하는 어전회의때부터였다. 북방개정군을 누구에게 책임지우겠는가
하는 론의마당에서 적임자로 처음엔 홍유가 거론되였는데 두세마디안팎에 금필에게로 확정이 되고말았다. 대신관료 거의 모두가 금필을 천거하였고
왕건도 금필에게 찬성했다. 홍유는 그때 자존심이 몹시 상하였었다. 제가 금필이만큼은 재목이 되지 못한다는것으로 인정이 되고난 뒤라 홍유는 심사가
뒤틀려 애꿎은 금필이만 원망하면서 그때부터 금필에게 고까운 생각을 품고있었다. 이것은 산전수전 다 겪은 로련하고 속통도 좁지 않은 홍유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구석이였다. 하건만 박달나무에도 좀 쓸 자리는 있다고 손꼽히는
로장이고 경우가 대쪽같다는 홍유에게도 시기심이 자리 잡힐 틈사리는 있는가보았다. 그는 금필이 북방을 성공적으로 개척하고 돌아와 왕건의 치하를
받을 때에도 박수는 치고있었으나 입은 삐쭉하니 내밀고있었다. 이런 홍유인지라 왕건이 금필을 빗대고 자기의 무능을 질책하자 그만 임금앞이라는것도
가리지 않고 성격을 살리고만것이였다. 한번 뒤틀린 감정은 쉽게 펴이는것이 아니여서 이후에도 홍유는 금필이 하는 일이라면 무턱대고 흠을 잡으려들어
제 인격을 스스로 떨어뜨렸다. 홍유를 밀어버리고 솔선 싸움에 나선 왕건의 운주성공격은 시작부터 애를 먹이였다. 후백제가 이를 미리 내탐하고 력량을 보강한때문이였다.
열흘이 넘도록 성에 대한 공격은 계속되였으나 성은 깨지지 않았다.… 금필은 왕건이 가을에 접어들어 송악으로 내려간 이후에도 평양성에 그냥 머물러있으면서 귀속해오는 발해유민들을 접수하는 일을 비롯해서 서북방을
보강하는 일에 전념했다. 식렴은 이들에게 거처지를 정해주고 호구등록을 하는 등 생계일면만 맡아하고 금필은 주로 군역일을 맡아했다. 부녀자와 아이들은 많지 않았고 대다수가 발해군사들이였거나 군속으로 징발되였던 남정들이였으므로 금필은 이들을 모두 군사로 돌렸다. 이들은 고려군사가 되는것을 극구 찬성해나섰다. 평양북쪽 서북방일대는 발해유민들의 정착으로 더욱 보강되고있었다. 금필은 서북방 정세가 일단 안정되자 송악으로 돌아섰다. 왕건이 다시금 후백제공략에 출정하였고 운주성이 깨지지 않아 고심한다는 소식이 전해져왔기때문이였다. (이해도 다 저물어가는 때에 그러다 신변에 무리가 가면 어찌하랴.…) 금필은 송악에서 지체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리였다. 그길로 운주성으로 달렸다. 금필은 운주성 가까운 눈덮인 들판에서 개미떼처럼 널려져 땅을 뚜지는 군사무리와 맞다들었다. 박술희가 성에 불린 턱수염을 요란스레 휘저으며 군사들을 다몰아치고있었다. 《금필형님!》 금필을 알아본 술희가 제잡담 내달려왔다. 그는 금필을 말우에서 건듯 안아내리고는 길우에 엎어놓고 덮쳐누르고 같이 뒹굴면서 반가와 어쩔줄
몰라했다. 《그런데… 싸움은 하지 않고 들판에 널려서 무엇을 하느냐?》 금필이 의아해하자 술희는 너털웃음을 쳤다. 《먹을것을 캐고있소이다.》 《먹을것을?… 군량이 떨어졌느냐?》 《그러하오이다.》 《하오면 송악에 알리든가 다른 대책이 있어야 할것 아니냐?》 《페하께서 군량은 저 운주성에 있는것으로 충당해야 한다시며 송악엔 절대로 기별을 말라 하셨소이다.》 《운주성이라면 후백제군사의것을 빼앗으라는 뜻이 아니냐?》 《그렇소이다. 운주성을 타고앉기 전에는 돌아갈 생각을 말라 하셨소.》 (페하께서 강심을 먹으셨구나.) 금필은 긴장해졌다. 왕건의 신경이 날카로와지고있었다. 그가 복수심 하나에만 치우치면서 대사를 그르칠가 걱정되였다. 금필은 왕건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그의 얼굴은 평소 온화한 모습일 때에도 한가닥 노기만은 감춰지지 않는 형상이였다. 그 노기는 눈초리에 비껴있었다. 그것이 여느때에는 위엄을
더해주는데 그쳐있지만 일단 분노하면 눈초리가 들리면서 노기가 서리발을 쳤다. 금필은 왕건의 그 쳐들리는 눈초리에서 분노의 감정도 억제의 감정도 함께 호흡하는데 버릇되여있었다. 식량마저 열흘분만 가지고 떠나왔다니 왕건이 얼마만큼 독을 먹고 나섰는지 가히 알만 했다. 죽으나사나 운주성을 까고야 돌아설 잡도리였다. 《형님! 술방구리 하나 차고있는것 있으면 내놓소이다.》 술희가 순대같은것을 손에 든채 금필에게 손을 내밀었다. 《페하께 올리기도 전에 너부터 줄 술은 없다.》 얼핏 대답하는 속에서도 금필은 술희의 손에 들린것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손에 든게 뭐냐?》 금필의 물음에 술희가 히죽 웃었다. 《형님이 이걸 알아보지 못하시다니요. 소시적 떠돌이때 이런걸 한두번만 자셨소?》 《뭐?! 그럼… 뱀이란 말이냐?》 금필은 눈이 커졌다. 《그러하오이다. 자, 어서 술을 내놓소.》 술희는 정말로 산 뱀을 들고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사방 빙설천지인 엄동설한에 구불거리는 산 뱀을 보면 기절초풍할것이였다. 허나 금필은 알고있었다. 남쪽지대에서는 뱀들이
겨울이면 개울가나 밭최뚝 그리고 길옆 돌각담밑 땅속에 들어가 겨울잠을 잔다. 눈이 내린 뒤 가만히 각담겉면을 살피느라면 솜같은 눈우에 송곳으로
찔러놓은듯싶은 작은 구멍이 나있는데 그 구멍으로는 실오리같은 김이 몰몰 솟아오르는것을 볼수 있다. 뱀의 입김이 날아오르는것이다. 그걸 보고 밑을
파헤치면 영낙없이 또아리를 틀고 자는 뱀을 찾게 되는것이다. 오래전에 먹을것이 정 없을 때면 술희가 이렇게 뒤져주는 뱀을 금필은 적잖게
먹어보았었다. 물론 불에 구운것이였다. 식량이 다 떨어졌으나 아랑곳 않고 성을 공격하게 하니 술희가 지금 여가시간에 군사들에게 림시변통으로 코밑건사를 시키고있는것이였다. 금필이 휘둘러보니 군사들이 술희가 시키는대로 각담을 파헤치고 돌밭을 뚜지며 뱀잡이를 하고있었다. 개울가와 논뙈기들에서는 미꾸라지캐기도
하고있었다. 해받이쪽 논두렁밑을 한뼘만 캐서 뒤엎으면 손가락보다 더 굵고 살진 미꾸라지들이 뒤번져나오군 하였다. 뱀잡이보다 미꾸라지잡이가 더 실적이
있었다. 군사들은 지친 속에서도 재미가 나서 웃고 떠들어댔다. 《자, 이런… 빨리 속을 덥힐걸 내놓으란데요.》 술희가 등이 달아 독촉했다. 그는 어느새 뱀의 껍질을 벗겨버리고 흰 속살만 남은 뱀허리를 감아쥔채 안달복달을 떨고있었다. 《이 두꺼비사촌아, 너에겐 약이 없구나!》 금필은 견디지 못하는척 술방구리를 헐어내렸다. 술방구리를 받아든 술희는 뱀의 대가리를 이발로 물어뜯어버리고는 그 뒤부분부터 입에 넣고 와작와작 씹어들어갔다. 마지막 꼬리꼭지까지 깨끗이 씹어넘기고서야 술희는 술방구리에 입을 댔다. 《형님, 페하께 올릴건 따로 있겠지요?》 그 경황중에도 술희는 왕건의 걱정을 하였다. 《걱정말아, 네가 여기 있는걸 알면서 아무렴 한방구리로 굼때려 했겠냐?》 《우리 형님 정말 좋은분인데!》 술희는 눈깜짝할사이에 뱀 한마리, 술 한방구리를 없애버렸다. 《에익! 살았다.》 그제야 배를 문지르며 술희가 독촉했다. 《형님, 어서 가십시다. 빨리 가서 페하를 도와 이해가 넘어가기 전에 저 운주성을 까버립시다.》 《그러세!》 금필은 왕건의 군막에로 말머리를 돌리였다. 운주성공략은 어렵게 실현되였다. 금필이 나타나자 왕건은 일체 개입하지 않고 옆에 틀고앉아 보기만하였다. 금필은 왕건의 새 모사인 최지몽과 능산, 술희와 의논을 거듭한 끝에 적을 성밖으로 끌어내는 수를 써서야 겨우 성을 함락시켰다. 철수하는
시늉을 하여 후백제군을 끌어낸것이였다. 왕건은 그제야 직성이 풀려 돌아가자고 했다.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맞으며 귀로에 오른 금필의 얼굴에 피곤이 실려있었다. 전해에 두만강가에서 설을 쇠고 년초에 송악으로 내려온 즉시 소백산너머 조물성전투를 잇고 다시금 청천강가에 올라가있다가 또다시
한강중류계선과 금강중류계선까지 내려오기를 거듭하였으니 한해에 두번이나 남정북진을 한셈이였다. 허나 그는 피곤을 풀 사이가 없었다. 후백제와의 전쟁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였던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