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2 회)
9. 발해를 포섭하다
왕건이 송악궁성에 돌아오니 새로운 소식이 기다리고있었다.
신덕이라는 발해장수가 군사 500명을 데리고 청새진으로 들어왔다는것이였다.
압록강을 건너오는 발해사람들은 모두 대동강북쪽 청천강류역에 정착시키기로 되여있었지만 왕건은 이들만은 송악으로 데려오도록 령을 내렸다. 발해의 실상을 직접 만나 파악하려는것이였다.
왕건이 발해조정의 실정을 자세히 알고싶어하는데는 까닭이 있었다.
두해전 발해왕 대인선이 왕건에게 두 왕실사이에 혼인을 맺자고 제의를 해온것이 진전이 없기때문이였다. 발해왕이 자기 딸을 왕건에게 부인으로 맞도록 청해왔었는데 그것은 고려와의 동맹을 실현하여 거란으로 하여금 발해침공을 저지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왕건은 이 제의를 심중하게 대하였었다.
발해가 하도 위급해지니 고려에 경황없이 손을 내민것이였다. 고려와 발해가 왕실사이에 혼인을 맺음으로써 거란으로 하여금 고려를 봐서라도 침공을 멈추었으면 하는 의도였던것이다.
대신들은 이구동성으로 왕건에게 발해왕의 제의를 수락할것을 건의했었다.
동족인 두 나라 왕실이 인척으로 련결되는 일은 자못 의의가 큰것으로서 그것만으로도 발해와 고려는 하나로 합쳐지는것으로 되기때문이였다. 동족통합의 대의가 현실로 되는 큰 걸음이였다.
왕건은 즉시 수락의 뜻을 알리였었다.
그런데 그후로 발해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오지 않았었다. 전쟁의 소용돌이속에 그 일까지 다그칠 겨를이 없는 모양이였다.
왕건은 그사이에 924년 7월과 9월에 걸쳐 두차례나 거란에 사신을 파하여 발해를 유린하지 말것을 요구했었다.
고려의 요구에 거란은 일시 공격을 멈추고 자기들은 료동지역만 내여주면 더이상 발해와 싸울 생각이 없노라며 발해가 저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고려만은 탐하는 일이 없을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거란은 한해가 지나자 다시금 발해를 공격해왔다. 지금의 현실이 보여주는바와 같이 발해를 송두리채 삼키려고 작정을 하고 나선것이였다. 신의를 모르는 이런 놈들이 고려라고 약조를 지킬리 만무한것이였다.
왕건은 여차하면 발해에 출병할 결심을 이미 내리고있었다. 실은 후백제가 때때로 고려를 괴롭히지만 않았어도 고려는 그 사이에 발해를 지원했을수도 있었다. 고려에 있어서 후백제 견훤은 생각할수록 그지없이 미운 존재였다.…
왕건의 요구대로 신덕을 송악으로 데려오는 일은 금필이 자진하여 맡아나섰다.
금필은 닷새만에 청새진고을에 당도하였고 즉시 되돌아서 열흘만에 돌아왔다. 신덕이 심한 부상과 고열로 해서 제발로 걸을수 없는데다 그의 부하들 역시 사정이 비슷하여 수레로 이동한탓에 오는 길은 더디여진것이였다.
발해장수 신덕은 금필과 비슷한 나이로 쉰고개를 바라보고있었다. 그의 부대는 거란군에 밀려 발해수도로 되돌아갈수 없는 처지에 이르자 진평(명문)고개를 넘어 고려지경으로 들어오게 되였던것이다.
왕건은 그를 통하여 발해정세를 더 자세히 알수 있었다.
료동은 이미 거란에 완전히 장악되여있었다.
발해는《고려후국》이 차지하고있던 료동남동쪽은 물론 발해의 15주에 속한 안원부, 회원부, 장령부, 부여부 등 료동전체와 막힐부, 철리부, 동평부 등 송화강과 흑룡강류역까지 내주고있었다. 거란은 현재 발해의 수도인 상경룡천부를 서쪽과 북쪽으로부터 에워싸며 조여들고있었다.
고려와 면한 서경압록부도 지금쯤 떨어졌을것이라고 하면서 고려 왕실과의 혼인문제는 알수 없다고 하였다.
발해는 지금 마지막갈림길에서 힘겨운 싸움으로 몸부림치고있었다.
금필은 왕건에게 료동출병을 더는 미를수 없다고 제기했다. 능산과 술희는 물론 최응과 최언위, 최지몽도 같은 생각이였다.
왕건은 드디여 결심을 내렸다.
남쪽은 얼마간 떼우는 한이 있더라도 발해를 지원하기로 락착이 되였다.
발해출병준비로 송악과 서경이 끓어번졌다.
인원과 무기, 군량을 갖추는 한편 선발대를 급히 무어 떠나보내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후 발해조정에서 고려왕실과 혼인을 맺을 발해공주가 송악을 향해 떠났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두해전의 약속이 비로소 실현되고있는것이였다.
나라사이의 대사니만큼 여기에 또 적지 않은 품을 들여야 했다.
이런 국혼은 고려건국이래 처음 있는 일이였기때문이였다.
금필은 왕명을 받고 동북방 국경으로 떠나갔다.
발해공주가 두만강을 넘어오므로 그리로 마중을 가는것이였다. 그동안의 동북방실정을 다시금 료해하고 필요한 대책을 세우도록 겸해서 임무가 내려졌다.
금필은 천여리 먼 북행길에 또다시 올랐으며 왕건으로부터 받은 전권을 행사하였다.
골암진북쪽의 고을들과 성들, 촌락들이 일일이 장악되고 고려의 지배체계가 새롭게 세워졌다.
발해는 이미 두만강 남쪽의 령유권은 포기하고있었다. 동족인 고려의 관할하에 들어가는것만으로도 안심하고있는것이였다.
발해는 당장은 수도방위에 전념하면서 시간을 얻어 흑룡강하류쪽으로 일시 물러섰다가 위기를 넘긴 뒤 다시금 일어서려는 생각을 하고있었다.
발해왕 대인선도 고려가 현재 저들을 도울 겨를이 없다는것쯤은 알고있었다. 고려가 신라를 쥐기 위한 후백제와의 주도권 겨루기에만도 적지 않은 힘을 들여야 했기때문이였다. 그것은 단시일안에 해결될 일이 아니였던것이다. 후백제와 장기전을 하는 속에서 고려가 발해를 군사적으로 돕는다는것은 그야말로 어려운 일이 아닐수 없기때문이였다.
하지만 왕건은 무너지는 발해를 보고만 있을수 없어 이제 발해공주와의 혼인을 맺는 대사를 치르고서는 빨리 원정을 단행해야겠다고 결심을 내리였었다.
금필은 이곳 동북방지역에 귀화하여 살고있는 녀진족(이즈음에 와서 말갈족을 녀진족이라고 불렀다.)에 대해서도 세세히 료해했다. 적지 않은 녀진족들이 고려땅에 정착하였으며 이들의 생활방식도 어지간히 현지에 적응되여가고있었다. 고구려와 발해, 그뒤를 이어 고려의 보호속에 년년이 생계를 이어오는 과정에 이들은 단군이래 개화만발하는 조선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적지 않게 받아들이였던것이다.
이들은 고려인들의 온돌식살림집을 특별히 좋아했다. 고려땅에 정착한 녀진인들은 말할것도 없고 발해땅으로 되돌아간 녀진족들도 점차 온돌을 받아들이였다. 이들은 새초나 짐승가죽으로 지붕과 벽을 둘렀을망정 부엌을 겸하는 통방의 한쪽면에는 어김없이 온돌을 만들어놓았었다. 이들의 조상대에는 상상도 할수 없었던 새로운 풍경이였다.
금필은 녀진인족장들도 여러명 만나 고무해주었다. 이곳 녀진인들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고려장수 유금필만은 신뢰했다.
후에 이곳 녀진인들은 후백제와의 최후결전때 금필의 호소에 응하여 9 500여명의 기마군응원대를 무어 출정하기까지 하였었다.
발해공주일행의 도착이 늦어지고있었지만 그들에 대한 영접은 왕건에게서 직접 받은 명령이였기에 금필은 언제까지든 기다리지 않을수가 없게 되였다.
두만강까지 올라간 금필은 그곳에서 설을 쇠고 새해를 맞았다.
왕건과 발해공주와의 혼례는 다음해인 926년 봄에 가서야 치르어졌으며 고려의 발해원정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926년 4월에 후백제의 볼모로 송악에 와있던 견훤의 조카인 진호가 급사하였기때문이였다.
진호의 죽음은 력사에 남긴 또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후백제의 모략에 의한것인것만은 틀림없었지만 증거를 쥐지 못하였다.
고려조정에서는 이 사실을 숨기고있을수도 없는것이여서 즉시 완산주에 통고하였다.
기다렸다는듯이 후백제가 반응했다. 고려가 의도적으로 진호를 죽였다고 단정하면서 견훤은 왕건의 4촌동생 왕신을 죽여버렸다. 그다음 고려의 령토인 웅진(공주)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조물성싸움끝에 약조하였던 화친과 정전을 깨버린것이였다.
고려는 또다시 후백제와의 전면전에 말려들면서 부득불 발해원정을 포기할수밖에 없게 되였다.
두만강에서 돌아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때에 벌어진 이 정황앞에서 금필은 땅을 쳤으나 어쩔수 없는 일이였다. 금필은 그 달음으로 웅진으로 내려가 한발 먼저 내려온 왕건과 함께 싸움에 몸을 잠그었다.
웅진성을 방위하기 위한 싸움은 처절했다.
한해동안 힘을 키운 후백제는 기세를 올리며 공격을 거듭해왔다.
이번 기회에 형세를 되돌려보려는 잡도리가 분명하였다.
후백제의 기세찬 공격은 4촌동생을 잃은 통분함을 안고있는 왕건의 분노를 더욱 키질해주었다.
왕건은 웅진성전투에 고려의 모든 력량을 다 들이밀 작정을 하고있었다.
금필은 불안을 금치 못하였다. 이제 견훤이 또 다른 곳에서 공격을 해온다면 대비할 력량이 모자랐던것이다.
아닐세라 견훤은 웅진성공격을 멈추지 않은채 신라에로 또 한차례 공격을 개시했다. 고려의 발목을 붙잡아놓고 신라를 제 마음대로 주무르려는 속심이였다.
그런데도 왕건은 견훤이 눈앞에 있는것만 생각하면서 웅진성전투에만 정신을 쏟고있었다. 어떻게든 견훤을 잡아 버릇을 가르치겠다는 자세였다.
금필은 후백제가 신라를 마음대로 유린하는것을 보고만 있는것이 몹시 안타까왔다. 궁예때에도 후백제가 신라를 다치는 눈치만 보여도 왕건이 참지 못하고 제재를 가하군 하여 이런 일은 없었는데 지금의 왕건은 리성을 잃고있었던것이다.
바로 이때 송악에서 발해수도가 함락되였다는 소식을 가지고 전령이 달려왔다.
거란왕 야률아보기가 수십만 병력을 집중하여 발해의 도읍 상경룡천부의 홀안성을 끝내 타고앉았다는것이였다.
웅진성싸움에만 옴해있던 왕건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였다.
거란이 그다음 목표를 어디다 두겠는가 하는데 생각이 미친것이였다.
물론 그것은 넓으나넓은 중원대륙일것이였다.
왕건은 거란왕 야률아보기가 간단한 인물이 아니라는것을 알고있었다.
원래 거란족은 전통적인 유목종족이였다.
발해를 건국할 때 고구려의 후손인 대조영의 뒤를 따라 당나라에 반기를 든 종족들중에는 말갈족들과 함께 거란족도 있었다. 말갈족들은 발해국이 선 이후 발해의 령토안에서 씨족별로 제각기 울타리를 치고 뿔뿔이 갈라져 살았으나 거란족은 발해의 북쪽땅을 차지하고 독자적인 나라를 세웠다.
초기에는 거란도 8개 부족으로 갈라져가지고 3년에 한번씩 대족장을 뽑는 방법으로 통치를 유지해왔었다. 그렇게 200여년을 지내오는 과정에 일개 부족장에 불과하던 야률아보기가 주변의 다른 종족들을 제압하며 점차 머리를 쳐들기 시작했다. 그는 저들의 대족장을 살해하고 8개 부족들의 우두머리들을 규합한 뒤 《대료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왕이 되였다.
그는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던 조상들의 본을 따서 대륙정복의 야욕에 꿈틀거리는 마음을 안고 중원으로 눈길을 돌리였다. 그러나 거기로 가는 길은 발해에 의해 막혀있었다. 중원으로 통하는 료동벌이 발해의 령역이였던것이다.
야률아보기의 심복들은 발해를 먼저 치고 중원정복에 나갈것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는 발해의 군사력을 알고있었기에 발해에 동맹을 제의하면서 함께 중원으로 나가던가 그렇지 않으면 료동을 잠시 열어줄것을 요구했다.
발해가 이를 수락할리 만무였다. 함께 중원을 치는것도 무리일뿐더러 길을 열어주는것도 아니될 일로서 만약 거란의 중원공략이 실패하는 경우 그 책임을 그들과 져야 하는것은 물론 그 배상으로 중원에 료동땅을 떼울수도 있었던것이다.
거란의 중원공략이 성공하는 경우에도 결과는 같을것이였다.
중원을 차지한 거란이 료동을 내여줄리는 만무한것이고 강해진 거란이 발해를 우습게 여겨 타고앉은 그대로 입을 씻고 나앉거나 오히려 발해마저 삼키려들것은 뻔한 리치였던것이다.
거란을 비대하게 만들어주는것 자체부터가 발해가 죽는 길이였다.
문제는 거란의 요구를 들어주어 료동에 길을 열어주는것부터가 승냥이 입에 고기덩이를 넣어주는 격이 될것이라는 이것이였다.
발해는 애초에 오랑캐족과 동맹하는것 자체가 《해동성국》의 명성을 더럽히는것으로 된다며 싹 잘라 거절해버렸다.
료국(거란)태조 야률아보기는 분개하였다.
그렇다면 중원을 먹지 못해도 좋으니 발해부터 꺼꾸러뜨릴테다. 이게 나의 가장 큰 소원성취로 될것이다.
그는 방향을 바꾸어 발해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발해는 전력을 다하였지만 끝내는 무너지고말았다.
발해는 이후에도 반거란항전을 계속하였으며 곳곳에서 후발해국이 계속해서 일어섰다.
력사에 기록을 남기고있는것만 하여도 10여개를 넘고있다. 발해의 재건과 부흥운동은 이후로 무려 150여년동안이나 이어져갔다.
그 과정에 많은 발해인들이 고려로 넘어왔으니 그 수는 력사에 기록되여있는것만도 15만을 헤아리고있다.
발해왕자 대광현이 근 3만의 유민을 거느리고 왕건을 찾아오는 력사의 대이동도 이때에 벌어진 일이였다.
발해정복에 열을 올리던 야률아보기는 발해수도 상경룡전부 홀안성을 차지한 다음 병을 만나 그곳에서 급사하였다.
사람들은 발해인들의 저주를 모아 하늘이 그에게 벌을 내린것이라고 하였다.
이후에 거란은 야률아보기의 아들인 야률배가 왕위를 잇고 중원으로 내달았다. 그곳에서 격전으로 세월을 주름잡다가 점차 쇠진하여 그 이후엔 력사에 자취마저 남기지 못하고말았다.
그러나 거란이 황페화시킨 료동땅과 송화강류역, 흑룡강류역에서는 녀진인(말갈족)들이 서서히 세력을 집결해갔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이들은 새롭게 일떠서 마침내 금나라를 세우는데까지 이르렀다.
금나라의 태조는 아골타라는 사람으로서 생녀진출신인 그는 지금의 길림에서 태여났다. 그가 바로 녀진의 72개 부족을 통합하고 료동으로 진격하여 송나라를 멸망시킨 사람이였다.
그는 생존시에 녀진은 말갈의 후예이고 말갈인은 고구려국의 속인이였던만큼 녀진인들은 마땅히 고려를 조상의 나라로 섬겨야 한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허나 이러한 사실은 아직은 썩 후날의 이야기였다.
왕건은 결연히 송악으로 올라왔다. 발해의 조락과 함께 번져질 북방의 정황에 대처해야 하였던것이다.
웅진성을 방위하는 싸움은 홍유와 박술희에게 맡기였다. 능산과 배현경이에게는 신라의 고창성에 내려가 그 아래 후백제군이 차지하고있는 조물성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견훤이 이곳저곳 쑤시고 올라오지 못하게 발목을 비끄러매놓으려는 의도에서였다.
송악에 올라온 왕건은 하루밤 머물렀다가 다음날로 금필과 함께 평양성으로 떠나갔다.
왕건과 함께 평양성에 도착한 다음날 금필은 서북방의 군력을 보강할 대책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식렴으로부터 귀에 익은 이름을 하나 듣게 되였다. 지방호족들을 발동시키는 문제를 론의하는 대목에서 식렴이 불만스레 내뱉은 이름이였다. 문화현의 두령인 류달이란자가 큰 거부인데 노는것은 몹시 쪼물짝하다는것이였다.
류달… 류달이라면 혹시 나와 동갑내기인 그 류달이 아닐가?
소시적에 치악산 경당패아이들을 휘동해가지고 가서 무술시합을 하면서 사귀였던 구월산 무사골의 박치기두목애 그 류달일수 있었다.
류달은 그날 금필과 활쏘기, 말타기에 이어 씨름과 수박치기로도 승부가 나지 않자 마감엔 자기 장끼인 박치기를 들이대여 금필을 넘어뜨렸었다. 그날 류달이 불의에 골받이를 하는 통에 금필은 큰 대자로 넘어지고말았다.
저녁에 초불앞에서 문장겨루기도 하였는데 거기서도 류달은 금필을 릉가했다.
그 당시 류달의 아버지는 구월산 아근에서 첫 손가락안에 드는 호족이고 장사치였다. 금필은 류달이가 크면 재목이 될수 있다고 보고 떠나올 때 은근히 속을 비쳤었다.
《우리 친하자구. 보아하니 류달형은 크게 될 인물이요. 나를 동생으로 삼지 않으시려우?》
금필의 말에 류달은 피씩 웃었다.
《지금은 제몸이나 건사합세. 어른들의 말을 들으니 짐승도 절기를 따라 거동을 하고 사람은 먹은 나이를 보고 말고삐를 쥐운다더군.》
어린 나이에 무슨 앞일을 론하랴, 경망에 가깝다는 핀잔이였다. 하면서도 그는 금필과 하루밤 자고 헤여지는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그런 류달이라 지금쯤이면 고을 하나 쥐고 노는건 아이들 장난으로 여기리라. 그런데 그가 쪼물짝하다는 소릴 듣다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