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 회) 료동을 타고앉아야 할 시기가 분명하건만 힘에 부쳐 손을 쓰지 못하는 그 통분함을 무엇으로 누른단 말인가. 정말이지 야속한 세월이였다. 금필은 급보로 말을 몰아갔다. 멀어져가는 금필을 추연한 안색으로 바라보고있던 왕건이 이윽해서 식렴에게 얼굴을 돌렸다. 《이보게, 식렴아우! 금필아우에게 뭘 좀 지워보낼것이 없나?》 왕건의 목소리는 한결 가라앉아있었다. 《저… 평양성의 특산인 문배주가 있소이다. 페하께 대접해올리려고 얼마간…》 식렴은 왕건이 성을 낸것을 후회하고있다는것을 알아차렸다. 《그걸 몇동이 딸려보내게.》 《알겠소이다.》 식렴은 허둥지둥 돌아섰다. 《금필아우에게 인츰 돌아서라 이르게. 아래쪽 사정이 여의치 않은건 아우도 알테지? 금필아운 연산진쪽에다 싸움을 걸어놓고 왔었네.》 《알겠소이다, 형님! 제 오늘 정말 잘못하였소이다. 구실을 못하는 이 아우를… 용서해주소이다.》 《됐다. 아우야!》 왕건은 식렴의 어깨를 툭 쳐주었다. 식렴의 눈시울도 젖어있었다. 왕건은 이 시각에도 후백제의 공격을 우려하고있었다. 나라의 내정은 내정대로 돌봐야 하면서도 남으로의 진격을 멈춰세우지는 못하겠고 그러면서도 북쪽은 북쪽대로 또 가능한껏 손을 대야 하는 실로
드바쁜 세월이였다. 나라를 하나 거둔다는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인가. 허나 이들은 이 정도에 만족할수가 없었다. 갈가리 찢기워진 동족의 나라를 다 모아 더 큰 하나의 나라를 꼭 세워야 하였다. 뜻을 높이 세웠으니 그만큼 할일도 많았고 누구보다 더 속을 태울수밖에 없는것이다. 허나 이들은 이것을 생의 본업으로 삼고 인생의 락으로
여기며 살아야 할 운명을 지닌 당대의 선각자들이였다. 청새진(희천)으로 올라간 금필은 성축조정형을 료해하고 다그치도록 조처했다. 한편으로 주민가호를 다시금 료해하고 군사를 모을수 있는껏 더 모았다. 계속해서 압록강대안까지 올라가면서 지형을 료해했다. 미구에 이곳도 거란군과의 격전장이 될수 있다는 점을 예견해서였다. 보름가까이 품을 들인 뒤에야 금필은 평양성으로 돌아왔다. 식렴과 하루밤을 같이 하고나서 다음날로 송악으로 향하였고 송악에서 하루밤을 묵은 뒤 지체없이 연산진으로 말머리를 돌리였다.… 금필은
연산진공격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후백제의 장수 길환이 직접 나와 장수사이의 접전을 요청하기에 싸움은 두 장수사이의 일 대 일접전으로 시작되였다. 이날은 후백제장수 길환의 운수가 나쁜 날이였다. 금필이 쌍검도가 특기인것을 알고있었는지 그는 길다란 대에 가운데날은 길고 량옆의 날은 좀
짧은 삼지창을 들고 나왔다. 금필의 쌍검도날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창격으로 해치우려 한것이였다. 량쪽 군사들이 일자형으로 마주 벌려서서 지켜보는 가운데 두 장수는 말을 몰아 달려나왔다. 창을 든 쪽이 먼저 상대를 찌르게 되여있어 칼을 든 쪽이 불리한것이 상례인데 후백제장수는 어찌된 영문인지 자기에게 차례진 유리한 그 기회를
놓치였다. 실은 그의 불찰이 아니라 금필이 칼날로 창날을 비껴쳐서 위기를 면한것이였다. 창날이 비껴진 그 순간에 후백제장수의 옆을 스치며 어기는 순간 금필은 다른쪽 칼날로 앞으로 내여민 그의 목을 슬쩍 베여버렸다. 순식간에 후백제장수의 머리가 툴렁 떨어져버렸다. 그런데도 말은 머리없는 몸뚱이를 싣고 그냥 앞으로 내달렸다. 고려군서렬앞에서 멈추어진 말은 앞발을 들며 제자리걸음을 하였다. 그때까지도 후백제장수는 말고삐를 쥔 손을 풀지 않고있었다. 목에서 솟구치는 피줄기만 보이지 않았다면 꼭 살아있는 사람모양으로 날씬한 기마자세를 하고있었다. 후백제군 전렬이 술렁이였다. 이쪽, 저쪽에서 우 하는 함성과 함께 앞으로 나올듯 움씰하다가는 멈춰서는것이 싸울 용기를 잃은것이 분명했다. 꼭지를 떼자마자 저들의 총대장을 잃고만 싸움이니 용기가 날리 만무였다. 바람에 눕혀지는 갈대밭처럼 적진이 뒤로 젖혀지기 시작했다. 퇴각하는것이였다. 금필은 무모한 죽음을 내는것이 달갑지 않아 추격을 멈추려다가 생각을 달리하였다. 우선은 후백제군의 기를 꺾어놓아야 하는것이 지금의
사정인것이였다. 이날 고려군은 퇴각하는 후백제군을 맹렬하게 추격하여 임존군(충청남도 례산군)까지 30여리를 따라가면서 무려 3천의 목을 베여버리였다. 그시각 견훤은 5천의 군사로 조물성(경상북도 의성부근)을 공격하고있었다. 고려가 연산진으로 주공방향을 잡아 나오는것을 간파하고 그
반대쪽에서 역공으로 올리밀려는것이였다. 역시 견훤은 엉큼했다. 연산진쪽은 두눈 꾹 감고 먹이로 던져버리고 대신 조물성을 타고앉으려는 속심인것이였다. 조물성은 사화진에서 동쪽으로 하루길도 채 되지 않는 곳인데 고려군의 보호속에 있는 신라땅이였다. 조물성을 타고앉으면 그 북쪽에 있는
고창성도 위험해지는데 고창성도 비밀리에 고려군과 타협하고 고려의 보호를 받고있었다. 이 두개의 성을 차지하면 고려와 신라사이 경계지대의 일부
구간에 후백제가 쐐기를 치는것으로 되는데 이러면 신라를 포섭하는 길로 나가는 고려의 한쪽발목이 묶이울수 있는 위험이 조성되게 되는것이였다.
다른쪽발목이라고 할수 있는 사화진 서쪽지역도 후백제와 더 가까운 쪽이므로 위험의 도수는 더 커지게 될것이였다. 그것뿐이랴. 후백제는 고려의
동남쪽에로의 진출을 전면 차단하고 마음먹은대로 신라를 삼켜버릴것이였다. 그 다음엔 배를 두들기며 승이 나서 고려와 싸워보자고 달려들터이니 이것이
견훤의 속심일것이였다. 스무날전 금시 연산진을 공격할것처럼 군사를 출병시켰던 왕건에게 놀림당한 앙갚음을 하는겸 품을 들여 꾸민 각본이였다. 시각을 다투는 급정황이였다. 왕건은 급보를 받은 즉시 직접 출병하였다. 군사를 이끌고 밤낮으로 달려 사흘째 되는날 저녁에 조물성앞에 당도했다. 하지만 조물성은 이미 견훤에게 떨어져버렸다. 조물성을 타고앉은 견훤은 기고만장해서 왕건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고있었다. 견훤의 군사가 5천을 넘는 반면에 왕건이 급히 이끌고온 군사는 2천을 조금 넘었다. 이 대 일, 중과부적이였다. 형세는 이미 견훤쪽으로 기울어졌다. 금필이 사태를 전달받고 군사를 갈라가지고 달려온 때는 왕건과 견훤의 접전이 한창인 때였다. 후백제는 조물성앞 싸움에서도 장수 대 장수의 일 대 일접전을 유도했다. 군사의 희생을 막자는 속심인것 같았다. 그들도 장기전에
대비하려는것이였다. 금필이 싸움판에 합세한 뒤 알아본즉 벌써 왕건과 견훤의 일 대 일접전이 두시간을 넘고있다는것이였다. 웬만한 장수라면 두시간이면 이미
결판을 내고도 남을 시간이였다. 하건만 둘은 아직도 갓 시작한 싸움을 치르는듯 펄펄 날고있었다. 삼국의 주도권을 누가 쥐는가를 가르는 결투장이였다. 왕건과 견훤 두 거인은 맹수들마냥 물고뜯으며 맴돌이를 했다. 량쪽의 군사들은 목이 다 쉬여버려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굳어져있었다. 금필은 왕건이 직접 칼을 휘두르는 모양을 오랜만에 지켜보았다. 견훤은 반백의 수염발을 날리며 날아예는 모양이 꼭 수사자 한모양이였다. 왕건은 조선범의 날랜 위용을 한폭의 그림에 담은듯싶었다. 그 하나하나의 무예가 세기에 처음보는 명화인듯 현란하고도 미끈했다. 두편은 이미 응원 같은건 잊어버린채 온넋을 구경에 쏟고있었다. 유시 초엽(오후 5시경)에 이르러 해가 서산에 걸리자 그제사 하나, 둘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두 거인의 싸움이 다섯시간을 경과한것을
알아차린것이였다. 후백제쪽에서 견훤의 나이를 걱정해서인지 모사 하나가 달려나와 싸움을 멈출것을 요청했다. 여기에는 금필의 3천군사가 지원옴으로써 량측의
력량이 동등해진데도 영향이 있었다. 고려측에서는 모사 최지몽이 나서서 그 요청을 수락했다. 최지몽은 신라출신으로 왕건의 인품에 반하여 송악으로 찾아온 인물이였다. 그는 부패한 신라조정에 반감을 품은 최치원과 가까이하였는데 그의
권고로 왕건을 찾아왔고 최언위의 추천으로 왕건의 곁에서 최응을 돕고있었다. 최응이 병석에 눕게 되여 이번 싸움에 왕건을 수행했던것이다. 최지몽의 화답으로 량측은 싸움을 중지하고 담판으로 넘어갔다. 다음날 왕건과 견훤은 담판장에 마주앉았다. 금필은 마주앉은 견훤을 보느라니 문득 궁예시절 목포앞 덕진포싸움때 스쳐보았던 그때의 견훤의 모습이 생각났다. 근 10년이 지난 사이에 견훤은 퍼그나 늙었다. 그도 이젠 어느덧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른것이였다. 그나이에 그렇듯 용을 쓰는 그 괴력에
탄복하기에 앞서 금필은 측은한 생각이 먼저 갈마들었다. 용력에서는 모르겠으나 처신에서는 너무나 나이값을 못한다는 생각에 미친것이였다. 전해인 924년 8월에 있은 일만 해도 그러했다. 그때 견훤은 사신을 통해 왕건에게 절영도의 옥색말 한필을 보내였었다. 그런데 항간에서 《절영도의 명마가 고려로 갔으니 후백제는 곧 망할수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 말을 전해들은 견훤은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례의로 바쳐왔던 말을 되찾아갔다. 무례하기도 하거니와 치졸하기 그지없는
작태였다. 견훤이 절영도 말을 보내게 된 동기도 알고보면 낯간지럽기 그지없는 일이였다. 그때 후백제는 신라의 남해쪽 한귀퉁이를 살그머니 타고앉은 일이
있었는데 고려가 이것을 알고 추궁해오자 어떻게 좀 리해를 구하려는 뜻에서 비위를 맞추느라 선물형식을 취하면서 이후로는 절대로 고려의 기분을
거슬리는짓을 않겠다는 약조를 표시한것이였다. 그런 약조로 보내왔던 말을 되찾아갔으니 약조를 지키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할수밖에 없는 일이였다. 하기에 왕건은 되돌아가는 말의 안장에 《무모한 싸움으로 인명을 줄이지 말고 화친의 약속을 지켜 동족사이에 서로 편안케 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끼워보냈다. 그런데 그에 대한 회답편지가 또한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 선대 의자왕의 원한을 풀지 못하였는데 신라와 화의를 하라니 실로 가소롭기 그지없다. 신라를 벌하는것은 우리 후백제의 권한에
속하는것이로되 고려가 이래라저래라 할수가 없다. 앞으로 이 견훤은 나의 활을 평양의 다락우에 걸어놓고 나의 말을 패강의 물에 미역 감길
생각이노라.》 왕건도 금필도 모두가 아연해졌다. 견훤은 단순히 신라에 대한 복수심만이 아니라 고려까지 탐하겠다는 흉심을 감추지 않고있었다. (이런 놈에게서 화의를 바라다니… 대세의 요구를, 겨레의 소망을 거역해나서는 한 결코 달리 될수 없는 존재다.) 왕건은 금필과 토의에 토의를 거듭한 뒤 후백제공략에 나선것이였다. 그런데 견훤은 한수 더 떠서 오히려 고려에 맞공격해왔다. 어제 싸움을 통해 본바 그대로 견훤은 그 나이답지 않게 아직도 기력이 여전했다. 담판의 골자는 령토문제였다. 후백제는 라주지역을 돌려줄것을 요구했고 고려는 후백제가 차지한 신라땅을 되돌려줄것을 요구했다. 량측은 이 문제에서 한치도 양보하지 않고 버티였다. 하는수없이 두편은 군사들의 희생을 막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현상태에서 전쟁의 중지에만 합의했다. 그에 대한 담보로 볼모를 교환하였다. 후백제에서는 견훤의 조카 진호가, 고려에서는 왕건의 4촌동생 왕신이 교환되였다. 왕신은 식렴이 못지 않은 재력가이고 군사에 밝은 인물이였다. 식렴이 평양성으로 올라간 이후부터 후백제에 대한 정보수집활동은 왕신이 주관하고있었다. 후백제의 모사 간무가 이를 알고 왕신을 찍어서
요구한것이였다. 왕건은 또 한번 고통을 감수해야 하였다. 송악으로 되돌아오는 길에 왕건의 기분은 내내 침울하였다. 이번 조물성싸움에서 왕건은 억지화해를 하였다. 연산진으로부터 후백제의 면상을 때리면서 전격전으로 밀고내려가자고 한 노릇인데 음험한 견훤이 예상치 않게도 신라땅의 조물성으로
역공격해오는바람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던것이다. 연산진은 타고앉았지만 조물성을 빼앗김으로서 후백제공략기도는 성공했다고 볼수 없게 되였다. 당장에 거란에 대처할 병력이 모자라는 까닭에 손실을 피하느라 내키지는 않았지만 공격을 멈추고만것이 아쉽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왕신이까지
볼모로 보낸것이 속에 맺혀 내려가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은 참고 돌아설수밖에 없는 일이였다. 역시 견훤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