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0 회)
8. 후백제와 대결하다 925년 10월, 왕건은 금필에게 후백제공략의 총대장의 중임을 맡겨주었다. 개국초기 북방정복을 떠날 때 마군대장군으로 봉하여졌던 금필이 이번엔 정서대장군으로 봉하여진것이였다. 고려의 서남쪽 즉 후백제를 정복하는
대장군이라는 뜻이였다. 금필에 대한 왕건의 두터운 믿음의 표시였다. 왕건은 금필에게 이번 후백제공략의 첫 순서로 연산진(충청남도 조치원)을 찍어주었다. 연산진은 원래 고구려가 차지한적이 있은 곳이였다.
지금은 견훤이 고려가 남쪽으로 내려오는것을 막기 위한 주요거점으로 삼고있었다. 먼저 이곳을 쳐서 견훤의 기를 꺾고 그 기세로 공격을 확대할
기도에서였다. 왕건이 후백제에 대한 단호한 공격령을 내린것은 견훤이 고려에 대한 인식을 바로 가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후백제는 신라를 탐하여 소소하게 땅빼앗기작전을 끊임없이 벌리고있었다. 신라를 보호하고 포섭하려는 고려의 전략적기도를 정면으로
부정해나서고있는것이였다. 겉으로는 고려를 인정하고 화친을 표방하고있지만 속으로는 고려를 억제하고 저들이 신라를 취하기 위해 무진애를
쓰고있었던것이다. 후백제는 아직은 고려를 얕보면서 고려와 맞서서 우렬을 겨루어보려는 야심에 넘쳐있었기에 고려를 탐하는짓도 서슴지 않고있었다. 가끔 가다
고려의 작은 성을 기습하군 했던것이다. 얼마전에는 견훤이 왕건에게 편지로 위협하는 망동까지 하였다. 고려는 건국 즉시 주변의 여러 나라들에 사신을 파했었다. 고려국의 건국을 알림과 동시에 우방의 관계를 청한것이였다. 제일먼저 축하의 사절을 보내온것은 발해였다. 신라가 그뒤를 따랐다. 고려의 궁성에 먼저 들어선것은 신라사절이였지만 축하답신의 국왕서명날자는
발해가 앞서고있었다. 그러나 후백제만은 묵묵부답이였다. 두해가 지나서야 견훤은 신년축하서신형식으로 마지못해 답신을 보내왔다. 그래도 나이가 왕건보다 썩 우인 제 체면을 차리느라고 견훤은
공작새깃부채와 지리산참대화살을 선물로 받쳐서 보내왔다. 왕건은 이를 감사히 여겨 서로의 화친과 동족의 통합을 호소하는 장문의 회신을 보내여 화답하였다. 그런데 심술이 많은 견훤이 왕건의 편지를 놓고 자자구구 따지면서 트집을 걸었다. 나이로 보나 국왕의 년한으로 보나 자기가 우위인데 왕건이
교만하게 동급으로 자기를 대한다는것이였다. 왕건은 이 사실에 앙천대소했다. 나이가 들면 노여움이 잦다더니 견훤이 꼭 그 모양이구나. 나라간에, 국왕간에 서로가 동등한 례우로 대함은 고금에 굳혀오는 관례인데 서로가 간격을 두어야 한다고 하는것은 상하의 관계로 대하라는 뜻이
아닌가. 이건 상식을 벗어난 무례한 작태이다. 이대로 두었다간 이후에 우리보고 후백제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라고까지 할런지도 모를 일이다. 아서라, 견훤이 자기를 너무도 모르고있구나. 좀 다듬어주어야 하겠다. 이렇게 생각한 왕건은 한편으로 대응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 따돌리는 일종의 《무언지계》를 쓰기로 하였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고려의 주먹맛을
한번 톡톡히 보여주리라 작정했다. 그래서 취한 조치가 금필을 정서대장군으로 임명한것이였다. 후백제를 군사적으로 압박하리라는 고려의 립장을
내놓고 선포한것이였다. 왕건은 금필에게 후백제의 변방인 연산진앞계선에 5천의 기마군을 출동케 하였다. 견훤도 즉시에 비슷한 수의 군사를 증파하여 연산진을
보강했다. 그리고는 이제나저제나하고 고려군이 공격해오기만을 기다렸다. 일이 그쯤 번져지게 해놓은 뒤에 왕건은 연산진쪽은 잠시 내쳐두고 금필과 함께 유유히 서경(평양)순행의 길에 올랐다. 그런줄도 모르고 잔뜩 긴장해있던 후백제군은 고려군이 세월없이 앉아버티기만 하자 차츰 탕개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열흘쯤 지나서야 견훤은 왕건이 연산진이 아니라 평양성으로 간것을 알았다. 간자를 통해서 이 사실을 알게 된 견훤은 쓴 입만 다시였다.
왕건에게 놀림을 당했다는 생각으로 심기가 좋지 않았으나 견훤은 흔연히 웃으며 한마디 내뱉았다. 《구상유취라…》 입에서 젖내가 난다는 소리였다. 왕건의 얕은 수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뜻이였다. (뛰는 놈우에 나는 놈 있는줄 네가 이제 알렷다.) 견훤은 자기도 왕건을 골탕먹이리라 벼르며 돌아섰다. 그 시각 왕건은 평양성 북성(지금의 최승대) 다락우에 올라있었다. 왕건이 평양성으로 일시 방향을 돌린것은 서북방의 정세파악을 위해서였다. 식렴의 보고에 의하면 발해정세가 현재 아주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다는것이였다. 발해가 거란에 밀리우면서 동쪽으로 한걸음, 두걸음 퇴각을 거듭하고있는통에 기름진 료동벌이 거란의 수중에 장악되고있었던것이다. 왕건은 두주먹을 부르쥔채 먼 료동쪽을 응시했다. 고려가 수복하여야 할 옛 고구려땅이 거란에게 유린되고있는것을 보면서도 당장은 어찌할수 없는것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무슨 수든 써야 했으나 방도가 없었다. 지금의 국력으로는 료동까지
쳐들어가 거란을 공격할수가 없었던것이다. 《식렴공! 압록수를 넘어 내려왔다는 발해군사가 얼마나 되오?》 옆에서 금필이 식렴에게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되지 않소.》 《한 오천만 되여도 되돌려세워서 한번 휘저으며 들어가봄즉 한데…》 《오천이 다 뭐요. 오백도 안되는 적은 수요.》 식렴의 풀기없는 대답에 뒤이어 금필이 다시금 묻는 소리가 들리여왔다. 《조만간에 넘어오는 수가 불어나지 않을가요?》 《생각처럼 될일이 아니요. 아직은 그들이 마구잡이로 퇴각하는것이 아니니까. 우리쪽으로 내려온 군사들은 주력의 퇴각을 엄호해주고 포위에
들었다가 겨우 빠져나온 뒤에 할수없이 방향을 바꾼 모양이요. 발해군의 주력은 이미 압록수 상류쪽으로 옮겨간 상태요.》 《그쪽에서 싸우다가 사정이 긴박하면 혹 우리쪽으로 방향을 돌려 내려오지 않을가요?》 《그렇게는 하지 않을것이요. 아무리 사정이 위급해진다 해도 저희들 도성쪽으로 물러서겠지 아무렴 남의 땅으로 물러서겠소?》 그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아직은 저들의 광활한 종심지역이 있는데야 무엇때문에 이웃지경으로 넘어갈텐가. 어떻게든 저희네 땅안에서 대응책을
강구할것이였다. 왕건이 걱정하는것은 거란군이 일부 력량을 돌려 압록강을 넘어 고려땅으로 진격해내려오지 않겠는가 하는것이였다. 십분 있을수 있는 일이였다.
패강(대동강) 북쪽이 발해관할이였던 까닭에 발해땅은 다 저들이 정복해야 한다는 명목을 내들고 쳐나올수 있는것이였다. 애초에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하였다. 적어도 압록강대안까지는 고려가 이미 차지하고있으니 탐할념을 말라고 알려야 하였다. 그런 취지의 서신은 이미 보내였다. 원래
서신의 골자는 발해침공을 그만두라는것이였다. 거기에 고려의 령유권이 이미 압록강에 이르렀다는것을 첨부했었다. 고려가 거란의 발해침공에
군사적으로 대응하고있다는것을 알고 조처함이 좋으리라는 암시였다. 이 서신을 만드는 일은 최응과 최언위가 하였었다. 여기서 잠간 언급하면 신라 사량부 사람인 최언위는 왕건을 받들겠다며 이미 고려건국 이듬해에 송악으로
찾아왔었다. 그는 자기를 로출시키지 말아달라 부탁하고
조용히 궁성 뒤뜰에 거처하면서 주로 궁중의 의례부문과 외교일면을 돕고있었다. 거란과의 외교전은 주로 최언위가 보좌하고있었다. 그런데 거란은 고려의 서신을 받은 그 당시에는 공격을 멈추고 발해와 타협하려는 흉내를 내더니 얼마 있지 않아서 다시금 공격을 시작하였다.
결국은 한숨 돌리고보려는 속심에 불과한것이였다. 고려에 대해 조심은 하면서도 그렇다고 무서워하지는 않는다는 속내가 빤히 알렸다. 시급히 대비하지
않으면 안될 적수였다. 문제는 고려가 시급히 압록강대안까지 실질적인 령유권을 확립하는것이였다. 청천강북쪽일대의 인구수를 늘이는 일을 다그쳐야 하였으며 그보다 먼저는 군사를 파하여 땅부터 차지해야 하였다. 그런데 그 일이
늦어지고있었다. 《식렴아우! 압록수너머 적정은 파악하고있나?》 왕건이 급히 말허리를 끊었다. 《아직은 다른 정황이 없소이다.》 《적정련락체계는 어떻게 세워놓고있나?》 《의주에서 구주(구성), 안수진(안주)을 거쳐 평양성까지 사이에는 봉수체계를 완비하였소이다.》 《내가 묻는건 압록수대안의 전방경계를 어떻게 세워놓았나 하는거네.》 《그 일은 아직… 엊그제 군사들을 파한 상태이오이다. 지금쯤 도착은 하였을터이니 인츰…》 《오(다섯명조)는 얼마나 파했는가?》 《열다섯조를 파했나이다, 페하!》 《일처리를 원만히 할수 있게 준비시켰을테지?》 《그렇소이다. 우리에게 넘어온 발해군사들중에서 한 절반 추려내여 고루 배속시켰소이다.》 《그 지점들을 알려줄수 있는가?》 《있소이다.》 식렴은 왕건의 심기가 몹시 불편해있음을 느끼며 조심조심 지명을 대였다. 《고산진은 왜 빼놓았는가?》 《고산진이란건…》 식렴은 얼떠름해서 왕건을 쳐다보았다. 《고산진도 모르는가? 그 너머에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즙안성이 있지 않는가.》 왕건은 압록강하류일대가 아니라 중상류쪽을 말하고있었다. 《그곳까진 미처…》 《조상의 옛 도읍성을 흘린단 말인가. 고산진은 즙안도성의 외곽방어성이였어. 고구려때 성터가 있을터인데 그곳을 타고앉았다가 여차하면
압록수를 건너가 즙안성까지 차지할 생각쯤은 했어야지.》 왕건의 어조는 어느덧 나무람에 가까왔다. 식렴은 왕건의 다불림에 진땀을 흘렸다. (너무하시군. 지금까지 청천수일대 성들을 수축보강하는 일만도 눈코뜰새 없었는데 압록수까지 그것도 중상류 고산진까지 손을 대지 못했다구
나무라시다니…) 식렴은 왕건이 자기를 덮어놓고 추궁하는것이 섭섭했다. 금필도 식렴의 수고를 모르지 않을 왕건이 너무 욕만 하는것 같아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그런중에도 왕건이 그쪽 지형을 그렇듯 자세히
꿰뚫고있는데는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청새진(희천)을 수축하는 일은 끝내였나?》 청새진도 고구려때 세워진 성이였다. 청새진은 청천강상류쪽에 있었다. 왕건은 청천강쪽으로 다시 지점을 옮겨짚으면서 식렴을 다궂고있었다. 《지금 진척중에 있소이다. 그곳도 손이 딸려 최근엔 가보질 못하였소이다.》 이제는 식렴도 어지간히 볼이 부었다. 내가 뭐 하루밤에 천리라도 가는줄 아는가보지? 몸이 열개라면 몰라도… 식렴은 어느덧 입을 한발나마 내밀고서 거친 숨을 내쉬였다. 《꼭 제가 가야만 일이 되는가?》 왕건은 벌컥 화를 내였다. 《부하들을 다그어야 할게 아닌가, 부하들을…》이러며 왕건은 계속해서 시까슬렀다. 《그런 모양으로 일하니까 자넨 아직까지도 청천수이북의 주민가호는 장악을 못하고있는거야. 질질 끌기만 하고…》 《아니, 형님! 말은 바른대로…》 식렴이 더는 참지 못해 례의마저 잃고 형님자를 쓰고 나왔다. 아니, 식렴공이… 금필이 황급히 식렴의 팔소매를 당기며 왕건에게 아뢰였다. 《페하! 식렴공이 그간에 일이야 오죽 많이 하였소이까. 하는껏 하였사오만 원체 아름이 넘친 일이라…》 《그런 변명은 듣고싶질 않네. 말은 바른대로 그래 전장에서 드잡이로 세월을 보내는 자네만큼이야 힘이 들었겠나.》 《아니, 저야 무슨…》 금필은 왕건이 자기는 춰올리고 식렴은 나무라는데 그만 당혹해났다. 그래 황급히 말을 이었다. 《페하! 제가 식렴공을 도울셈치고 청새진까지 올라가보고 오겠소이다.》 그런데 이 말이 식렴의 노여움을 샀다. 《걱정마시오. 내가 맡은 일은 내가 알아서 하지 않으리오.》 식렴은 왕건이 들으라는듯 내뱉았다. 《그곳 말고도 식렴공이 손댈 곳이 오죽 많소이까. 이왕에 식렴공을 돕자고 페하를 모시고 온 길인데… 내 얼핏 다녀오리다. 페하! 제 그리
하겠나이다.》 《그대는 이 사람을 뭘로 보시오. 내가 알아서 한다면 그만이지… 가만 보니 공은 지금 내가 이곳에서 몸이나 내고있다 나무람을 하는게
아니요?》 식렴은 왕건에게 할 말을 금필에게 하고나섰다. 《아니, 식렴공은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금필은 당황해났다. 그를 위안한다는것이 화만 더 돋구어놓았던것이다. (이런 랑패라구야…) 금필은 씩씩거리는 식렴을 보며 어쩔바를 몰라했다. 《식렴이, 너 말 다했냐?》 왕건의 얼굴에 노기가 서려올랐다. 무슨 말인가 하려는듯 하더니 이내 얼굴을 돌려버렸다. 하지만 왕건의 침묵은 그 이상의 분노를 말해주고있었다. 금필은 이 모든것이 꼭 제 잘못으로 해서 생긴 일만 같이 생각되였다. 특히 식렴에게 죄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가 이곳 북방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였던가. 왕건을 급히 올라오라 하였을 땐 얼마나 북방일이 속이 탔으면 그랬을가. 이 순간에 금필은 식렴에 대해 많은것을 생각했다. 식렴은 왕건의 4촌동생이지만 친동생이상으로 왕건을 따르는 사람이였다. 아닌 말로 그는
왕건과 생각하는 품에서나 일을 해나가는 솜씨에서나 조금도 짝지지 않는 또 하나의 왕건이였다. 그가 왕건을 받쳐주는데서 발휘되는 수완이나 능력은
금필이같은 의형제들은 도저히 따를수 없는 수준에 있었다. 식렴의 재정적안받침과(그 당시 왕건집안의 재산관리는 전적으로 식렴이 맡아하고있었다.
식렴의 활약으로 왕건문중의 재산은 급격히 불어났다. 건국직후 왕건이 공신들에게 내린 수만금의 포상은 식렴의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보장된것이였다.
고려국의 재정적부담은 식렴에 의하여 만족하게 충당되고있었던것이다.) 정보수집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왕건도, 고려의 건국도 생각조차 할수
없는것이였다. 이것은 고려의 조정이 인정하고있는 사실이였다. 실은 금필도 개인적으로 식렴의 도움을 적지 않게 받아왔다. 다른것은 말고라도 스물두해전 금필이 부여성을 타고앉은 그해에 식렴이 이백섬의
량곡을 보내주지 않았더라면 고을의 기근을 이겨내지 못하였을것이였다. 그것이 금필 개인의 사생활을 위한것은 아니였지만 나라가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고있을 때에 특별히 관심하여준것을 모른다고 하면 안되는것이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금필은 그저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가 전부였었다. 그간 식렴이 료동정세를 두고 얼마나 속을 썩였으랴. 생각같아선 그도 단숨에 달려가 한바탕 싸움을 하고싶었을것이다. 누구보다도 왕건을 잘 알고 우리 의형제들과 뜻이 같은 그가 아닌가. 그 뜻을 실현코저 지금까지 모든것을 깡그리 바치고있는 사람인데 그런 그를 노엽히다니… 물론 왕건도 안타까운 심중을 어쩌지 못하고 식렴을 다그은것이고 식렴이 이를 삭여내지 못하고 금필에게 분풀이를 하여 번져진 일이지만 금필은
이 순간에만은 잘못이 자기에게 있다고 사죄하고싶었다. 《식렴공! 내가 그만 말을 잘못하였소. 노여움을 푸시오.》 금필은 왕건도 기분을 돌리기를 바라며 진심으로 사죄하였다. 《무엇을 잘못하였다는것인가?》 별안간에 왕건의 목소리가 울렸다. 금필이 쳐다보니 왕건의 얼굴엔 노기가 여전했다. 《일을 돕겠다 한것이 잘못이란 말인가!》 금필은 허겁지겁 왕건에게로 허리를 굽혔다. 《페하! 그런게 아니오라…》 《그러면 되였지 무슨 사설이 그리도 많은가?》 왕건은 격노했다. 《쥐꼬리만큼 일한것에 만족하고있을 땐가? 식렴이! 너 되겐 방자해졌어. 꼭뒤에 불이 붙었는데 그만한 욕도 삭이지 못해 엇드레질을 해?!》 왕건은 식렴을 내놓고 질책했다. 《페하! 고정하소서! 제가 잘못하였소이다.》 식렴은 얼굴을 붉히며 허리를 굽혔다. 《누구보다 내 마음을 잘 아는 그대들일진대…》 왕건은 획 바람을 일쿠며 돌아섰다. 《생각들이 없으면 다들 비켜서라. 내가 갈터이니.》 《페하! 제가 금필장수와 같이 해내겠소이다.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식렴은 그만 울상이 되였다. 《페하! 제가 곧 청새진으로 떠나겠소이다.》 금필은 왕건에게 허리를 굽혀 아뢰고 돌아섰다. 그리고 식렴에게 《식렴공! 페하께옵서 진정하도록 잘 위로해올리시오.》라고 속삭이고는 서둘러
말을 몰아 떠나갔다. 성루아래로 내려오며 얼핏 뒤돌아보니 왕건은 여전히 흐린 안색으로 이윽토록 자기를 내려다보며 서있었다. 그 순간 금필은 눈앞이 흐려와 얼른
얼굴을 돌려버렸다. 왕건이라고 지금의 사정을 어찌 모를것인가. 그가 료동을 두고 얼마나 속이 탔으면 저러는것이랴. 금필은 어금이를 깨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