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9 회)
금필은 귀로에 올랐다.
말갈족들에게 억류되여있던 3천의 발해인들은 풀려나 제 고장에서 다시금 삶을 이어가게 되였다.
금필은 원정과정에 징발하여 키운 군사들을 현지에 적절하게 배치해놓고 그동안 북방의 모든 촌락들에도 고려조정의 지배체계를 세워놓았다.
금필은 이번의 북방원정에서 실로 큰 공적을 세웠다.
동북방의 안정이라는 초기의 목적을 달성하였으며 그보다는 고구려의 옛 땅을 적지 않게 되찾았던것이다.
발해의 남경남해부와 동경룡원부였던 이 땅은 이전에 남옥저와 북옥저가 고구려에 합쳐진 땅이였다. 이제 거란이 발해를 타고앉게 되면 이 땅도 발해땅이였으니 응당 저들의 땅으로 되여야 한다고 우길 우려가 있는 땅이였다.
거란의 이러한 도발을 사전에 막을수 있게 한것이였다.
왕건은 금필을 개선장수로 맞아주었다.
《짐은 그대를 믿었소. 그대 아니면 누가 이런 큰일을 해내겠소.》
왕건은 거듭거듭 치하했다.
《황공하옵니다. 하오나 이번 걸음에 저는 직분에 넘는 일도 하였사옵니다. 벌을 내려주소서.》
《알고있소. 일부 말갈족들을 귀화시킨것이겠지. 그건 내 뜻이기도 하거니와 짐은 떠날 때 이미 그대에게 전권을 주지 않았소. 벌할 일이 아니요.》
왕건은 금필의 귀에 대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금필아우! 자네이자 이 왕건이고 왕건이자 자네 금필아우가 아닌가!》
금필은 황황히 무릎을 꿇었다.
《망극하오이다, 페하!》
왕건은 만족하여 금필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럴수록 금필은 더욱 송구해하였다.
(아우로서, 신하로서 할 일을 했을뿐이오이다.)
그러나 이 순간에 금필에게 찌프린 눈길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왕건의 총애를 시기하는 눈빛들이였다.
금필의 동북방 령토안정공적은 실로 큰것이였다.
갓 걸음을 뗀 청소한 고려가 모든것을 남쪽의 후백제와 신라에 대처하기에도 힘이 부친 그때 동북방의 령토안정을 실현함으로써 금필은 신생고려의 후방을 든든케 하고 고려내정을 강화하는데에 이바지한것이였다.
특히 그는 주변의 종족들에 대한 문제를 잘 다루었던것이다.
언어와 피줄이 다른 말갈족들의 거주지를 본래의 제 고장에 한정시키면서도 그들을 배척하지 않고 포섭하는 슬기를 보여준것이였다.
장구한 세월의 소용돌이속에 적지 않은 력사자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금필의 행적에 대해서도 세세히 기록되여 전하는것은 없다.
그러나 그가 걸은 이 땅의 곳곳마다에는 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남아있다. 지금도 안변, 문천, 금야, 정평, 북청일대에 가면 이때 있은 그에 대한 민간설화들을 어렵지 않게 들을수 있을것이다.…
금필은 왕건과 함께 서북방 안정에도 앞장섰다.
921년 10월, 왕건과 함께 금필은 또다시 평양성으로 갔다.
《페하! 아시겠지만 지금 거란은 발해를 거의 다 타고앉았소이다. 멀지 않아 거란은 압록강을 넘자고 할것이오이다. 우리가 이에 대처하지 않는다면 고구려의 옛땅 수복도, 국토통일도 공상으로 되고말것이오이다.》
《옳은 말이요. 지금 우리에겐 서북방의 안정이 최대의 급선무요. 평양성 보강에 박차를 가해야겠소.》
《그래서 하는 말이온데 페하! 저는 피로하지 않으니 페하와 함께 가게 해주소이다.》
《고맙소. 그럼 함께 갑시다.》
이렇게 되여 왕건을 따라나선 길이였다.
금필은 세해전에 홍유와 함께 내려가 안정시켰던 청주성의 정세가 다시 불안해지는통에 한달가량 내려가있다가 며칠만에야 올라왔다.
후백제의 사촉을 받은 청주의 몇몇 토배기부호들이 작당을 하고 그때처럼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적발되는 사건이 있어서였다. 금필은 이 소식에 접한 즉시 자진하여 내려가 수습하고 올라왔다. 왕건은 금필이 너무 무리한다 념려하여 쉬고있으라 한것인데 서북방의 형편을 알고있는 금필이로서는 떠나는 왕건을 그냥 앉아보고만 있을수가 없었던것이다.
왕건이 지금 서북방의 정세와 평양성의 보강을 놓고 얼마나 고심하고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금필이였다.
건국초기에 이미 대도호부로 격을 높였던 평양성을 이듬해인 919년에는 서쪽의 수도라는 의미에서 서경이라 부르게 한 왕건이였다. 그때 성주로 광평시랑 렬평을 임명하고도 안심치 않아 4촌아우 왕식렴에게는 평양성에 죽을 때까지 틀고앉아있을 각오를 하라고까지 말하지 않았던가.
지난해에 금필과 함께 평양성을 시찰할 때 왕건은 그사이에 왕식렴이 이태어간에 룡강과 함종(증산), 안북(안주)을 타고앉아 성을 쌓는 공적을 세웠는데도 도무지 만족하지 않고 다음해까지 운남(녕변)과 성주(성천), 진국(숙천)에 새로 성을 더 쌓으라고 지시하였었다.
금필은 왕건을 따라 평양성에 들어간 즉시 팔을 걷어붙이고 왕식렴을 도와나섰다. 두해전부터 시작을 떼서 어느덧 마감고비에 이른 연백(연안과 배천), 해주, 봉산, 황주 등지의 주민들을 평양성으로 이주시키는 일에 몸을 잠그었으며 운남과 성주, 진국에 성을 쌓는 일은 직접 현지에 나가서 도와주기까지 하였다.
왕건이 송악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금필은 왕식렴과 함께 전해에 왕건이 직접 현지에 나가 지적해준 청새진(희천), 구주(구성), 박천, 운산을 비롯한 주요 요충지들에 새롭게 성을 쌓거나 이미 있던 고구려때의 성들을 보강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몇해안에 평양성은 고려의 부수도로, 북방개척의 전초기지로 확고히 자리잡히게 되였으며 청천강이남지대를 장악하는 일은 거의다 결속되였다.
고려는 이에 머무르지 않고 부지런히 압록강계선으로 세력을 확대해나갔다.
대관령마루우에 장삼을 두른 로승 하나가 나타났다.
활활 부채를 젓고선 그는 허월대사였다.
찌는듯싶은 더위를 짜증내듯 세괃게 휘젓던 그의 손이 갑자기 얼어붙은듯 굳어졌다. 한발만 옆으로 옮겨짚으면 바위밑 그늘안에 들련만 그는 내리쬐는 해볕을 고스란히 들쓰고서 무엇엔가 홀린듯 꼼짝않고 서서 한곳만 응시하고있었다.
줄레줄레 뒤따라 고개마루에 올라선 호위군사들이 무얼 그렇게 들여다보나싶어 허월의 어깨너머로 목을 빼들었다가 배를 그러쥐고 입을 싸쥐며 킥킥, 킬킬 웃어댔다.
네활개를 펴고서 세상모르게 곯아떨어진 대관령고개 수비군사들을 본것이였다.
수비군사는 두명인데 둘다 웃저고리는 벗어꽁져서 베개를 하고있었고 아래도리는 무릎아래까지 내리끄른채 꿈나라를 헤매고있는판이였다. 와르릉 다르릉 코고는 소리에 푸푸 입풀무질소리가 가락에 장단을 맞춰가는데 더우기 가관인것은 둘이 똑같이 한본새로 두다리사이에 달려있는, 함부로 내보이지 말아야 하는 그것을 때아닌 대낮에 흐뭇하게 드러내놓고서 산천경개를 마음껏 구경시키고있는 꼴이였다.
《이 오라질것들아! 냉큼 일어나지 못할가!》
허월이 콩 발을 구르며 소래기를 질러서야 두 수비군졸은 후닥닥 놀라 일어섰다.
《꼬락서니 좋다. 송악에선 룡이 충천했는데 여기선 아직 잠을 자?》
허월은 다시한번 발을 굴렀다.
《어서 냉큼 달려가지 못할가. 너희 군왕에게 아비가 왔다고 일러라!》
뻥해있던 두 군졸은 그제야 허월을 알아보았다. 즉시에 군졸 하나가 고개아래로 줄행랑을 놓았다.
《너희들은 좀 쉬거라.》
허월은 뒤따라 당도한 교군군들을 돌아보며 나직이 일렀다.
그리고는 바위그늘밑에 탈싹 주저앉았다.
오늘따라 퍼그나 늙어보이는 허월이였다. 륙순을 넘기고서도 탱탱하던 그의 두볼이 눈에 알리게 움푹 패였다. 아들 순식의 일로 해서 더 그러해진것 같았다.
지금 허월의 가슴속은 불붙는 아궁속같이 부질부질 타고있었다. 고려가 일어선지도 세해를 넘긴 오늘까지 아들 순식은 송악에 복종하기를 완강히 거절하고있었던것이다.
송악 조정에선 여간 분개해하는 눈치가 아니였다. 일부 성급한 축들은 당장에 강릉으로 군사를 파하자고 열번은 더 왕건에게 간청했다. 다행히도 왕건이 때가 되면 어련히 찾아오지 않으리오 하며 만류하는터에 지금껏 그런대로 무난히 넘겨왔었다.
하지만 허월을 보는 주변의 눈총은 여간 매서운것이 아니였다. 아비라는게 있어가지고 아들을 그 모양으로 두어두는가 하는 질책의 눈빛들이였다.
주변의 눈총은 말고라도 왕건앞에 면목이 없는 허월이였다.
궁예때부터 삼국통합을 이룰 적임자는 왕건이라 점찍고 제스스로 송악에 찾아와 살고있는 허월이였다. 이런 허월을 왕건은 시종일관 극진히 대해주고있다. 송악산 서북쪽자락의 부소압골안에 자리잡고 있는 령통사에 거처를 정해주고 드넓은 령통사안에서도 노란자위인 《숭복원》을 허월 자기에게 관리하라 맡겨준 왕건이였다.
령통사는 왕건의 증조부인 보육이 첫 주추돌을 박은 절이였다. 지금은 사찰이 열배로 커져 고려의 《국사》(국가를 대표하는 절간)로서의 위엄을 한껏 떨치고있는 곳이다. 령통사의 중심에 있는 보육이 처음 지은《숭복원》은 현재 왕궁의 원당으로 쓰이고있다. 《숭복원》안에는 왕건의 7대조부인 호경으로부터 고조부 강충, 증조부 보육, 조부 작제건, 부친 룡건에 이르기까지의 력대조상들의 초상과 목상들이 모셔져있었다. 왕건은 때때로 조상들을 찾아와 그들의 명복을 빌고 고려의 앞날을 기원했다. 건국 이듬해부터 어김없이 지켜오는 의례행사였다.
왕건이 그토록 신성시하는 고려조정의 내원(왕가안의 절간)을 허월 자기에게 관리하라 맡긴것이였다.
허월이 이전에 도선과 깊이 어울리면서 그와 같은 생각으로 왕건 자기를 떠올렸다 해서 국부처럼 대해주고있는것이였다.
이제는 왕건이 새 나라를 세우고 동족을 통합하자고 나선 때이라 제자신 누구보다도 먼저 나서서 솔선 모범으로 강릉땅을 고려에 바쳐야 할 때인데 아들녀석은 아비의 그 마음을 도저히 리해하지 못하고 따를념을 안하고있는것이다.
이전엔 궁예와 맞불질을 피하는게 상책이여서 거짓으로 굽어들라 한것이고 지금은 진짜로 굽어들어야 할 때인데 순식이 이놈은 궁예때 머리숙인 그것만 한스럽다 외우면서 이미 맹세한대로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굽어들지 않는다며 버티기를 하는지가 벌써 세해를 넘고있는것이다.
그간에 무슨 말인들 하지 않았으랴. 장문의 편지를 써서 사람을 보내기를 그 몇번…
하지만 편지로는 도저히 아들녀석을 일으켜세울수가 없어서 삼복더위를 물리기 바쁘게 늙은 몸을 일으켜 직접 걸음을 한것이다. 대세의 흐름에 아들녀석을 합류시키기 위해서였다.
그사이 왕건이 얼마나 큰일을 하였던가. 허월이 바란대로 왕건은 끝내 새 나라 고려국을 일으켜세웠다. 이 고려국을 기틀로 해서 이제 삼국땅을 통합하기 위해 쉴사이 없이 더 큰 걸음을 내디디였다.
허월은 왕건의 활약을 경희에 찬 눈으로 주시하고있었다. 그가 북방령토부터 장악하는것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하고있는 허월이였다.
원래 도선이나 허월자신은 왕건이 대동강이남을, 구체적으로는 후백제와 신라를 먼저 차지하고 다스려야 하리라고 생각하였었다. 그러나 왕건은 북방을 장악하는데 먼저 손을 댔다. 그것이 신생고려국의 국력을 강화하는 기본묘책임은 물론 미구에 신라와 후백제를 보다 수월하게 그리고 실수없이 타고앉기 위한 국력확보라는 이중의 효과를 얻는 전략임을 간파했을 때 허월은 놀라움보다는 경악에 가까운 탄성을 질렀었다.
그의 선견지명이 허월 자기같은건 대비도 안되는 높이에 올라있은때문이였다.
허월이 감탄하는것은 그것뿐이 아니였다.
왕건은 용인술에도 능하였다. 인재를 알아보는 정확한 눈을 가지고 있을뿐아니라 적재적소에 두고 요긴하게 쓸줄 알았다.
금필을 비롯해서 하나같이 용맹하고 충실한 장수들을 거느리고있고 최언위, 최지몽이같이 신라를 탈출하여 허위단심 찾아와 그의 두뇌가 되여주고있는 명인문사들을 두고있는것이 그 증거라 해야 할것이였다.
왕건은 확실히 덕과 포옹력이 있었다.
응하지 않는 사람은 타내지 않고 물릴줄도 아는 사람이 바로 왕건이였다. 《숭복원》의 어느 한 벽면에는 천문도가 한장 걸려있다.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으나 좀체로 보기는 힘들었던 《천상렬차분야지도》란 천문도였다. 고구려때의 유명한 석각천문도를 복제한것이였다.
고구려가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겨온 뒤 이 천문도는 새롭게 완성되였는데 세로 여섯자, 가로 넉자 되는 돌판우에 평양성에서 볼수 있는 1 467개의 별들이 282개의 별자리구획으로 갈라져 하나의 원안에 표기되여있다. 이 천문도를 보면서 력서도 만들고 날씨도 예보하면서 나라를 다스리는데 써왔다는것이였다.
이 천문도는 668년 당나라가 침입해왔을 때 평양성사람들이 대동강 물밑 모래속에 깊이 파묻고서 목숨을 바치면서도 그 장소를 루설하지 않아 영원히 고구려땅에 숨겨졌고 침략자들의 손에 들어가는 비운을 면하게 되였다는것이였다.
《숭복원》에 걸려있는 천문도는 이 석각천문도를 본뜬것인데 고려가 건국한 해에 평양성에서 이름모를 한 젊은이가 가지고와서 왕건에게 바친것이였다.
왕건은 이를 기특히 여겨 젊은이를 등용하려 하였으나 그는 자기는 벼슬에는 뜻이 없고 평양성의 성지기면 만족하다면서 돌아갔었다. 이때에도 왕건은 아쉬워는 하였지만 그의 요구대로 돌려보내주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그 젊은이가 바로 도선과도 면식이 있는, 왕건이 고구려를 재건할 인물이 되리라 믿고 바라마지 않았던 평양성의 그 토배기로인의 아들이라는것이였다.
그가 평양성의 재보인 천문도를 왕건에게 가져다준것을 보면 그도 자기 아버지처럼 왕건을 겨레의 통합을 실현할 인물로 신뢰하고있었음을 말해준다.
손잡고싶은 사람일수록 더더욱 강요하지 않는 이런 왕건이여서 허월은 더 속이 탔다. 그래서 어느 여가엔가 자기의 이 심중을 금필에게 하소연해보았는데 그때 금필도 왕건이처럼 말하였다. 아무때건 손을 잡게 될것이니 조급해말고 기다려보자고, 때를 보아 자기도 줄을 당겨보겠다면서…
하지만 허월은 세월없이 앉아 기다리고만 있을수 없어 강잉히 길을 떠난것이였다. 그러나 그는 금필이 자기보다 한발 앞서 은밀히 맏손자 수원에게 편지를 띄운줄은 모르고있었다.
허월이 대관령고개우에서 땀을 들이고있는 그 시각에 순식은 맏이 수원과 마주하고있었다.
《맏이야, 아무래도 네가 얼핏 송악엘 다녀와야 하겠구나.》
《무슨 명목으로 가야 하오이까?》
《송악에 계시는 너의 조부께 문안을 가는 명목이다.》
《조부님께 말이오이까?! 지금껏 그런 일이 없다가 부디 오늘에 와서 문안을 드려야 하는 까닭은 무엇이오이까?》
《너의 조부께서 그러기를 바라기때문이다.》
《조부님께만 문안드리면 되는것이오이까? 조부님은 왕건과 함께 계시지 않소이까!》
《그렇다. 그러니 왕건에게도 문안을 드려야지.》
《왕건에게 문안을 드리는것이 진목적이 아니오이까?!》
《그렇게 알아도 무방하다.》
《내놓고 말씀하시지요. 항복하러 가라고…》
《그렇게 생각되느냐?》
《조부님께서 여간 불편하지 않으실텐데요. 조부님의 뜻을 더 이상 외면할수 없다는걸 저는 알고있소이다.》
《부디 항복이란 말은 하지 말자. 나는 죽어도 항복은 하지 않을테니까.》
《알만 하오이다, 아버님의 마음을… 허나 대세는 따르고보아야 할것이오이다. 저라도 가야 할 일이지요. 아버님 분부대로 하겠소이다.》
《조부께선 지금 대관령고개에 와계실거다. 어서 가서 조부님을 모시고 송악으로 떠나거라.》
《조부님이 대관령에 와계신줄 어떻게 아오이까?》
《륙감이다. 고려국이 선지 삼년이 지났는데 조부께서 더이상 참고 계시겠냐? 더위도 물러가고있으니 분명 찾아오셨을게다.》
《아버님은 정말 귀신같소이다. 실은 제가 사흘전에 고려국의 맹장인 금필장수에게서 보내온 밀서를 받았댔소이다. 조부께서 불원간 찾아갈것이니 아버지와 잘 상론해보라 하였소이다.》
《그런 일이 있었느냐? 정말로 귀신같은건 그 사람이로구나.》
《조부님을 하루밤만이라도 성안에 모셔야 하지 않겠소이까?》
《아니, 조부님은 이 강릉땅엔 들어오지 않으실게다.》
《그럴가요?》
《이미 강릉땅은 포기하신분이시다. 더 큰 땅을 바라시는분이시지. 그래서 이 조상의 땅을 바치라 하는것이다. 이전엔 궁예에게, 지금은 왕건에게…》
《그러면 우리도 더 큰 땅을 바라야 하지 않겠소이까?》
《그래서 너를 가라 하는것이다. 하지만 그 땅에서 너는 꼬리노릇밖에 하지 못할것이다.》
《꼬리는 아니옵고 작은 머리일테지요. 강릉땅의 주인은 영원히 우리여야 할테니까요.》
《물론이다. 하지만 그건 전적으로 네 수완에 달린거다.》
《아직은 아버님 수완에 달렸지요. 아버님, 너무 상심하지 마옵소서. 일은 잘되여나갈것이오이다.》
《조상의 땅을 중히 여기는… 이 아비의 마음을 네가 알아주니… 고맙구나.》
순식은 누구에게든 머리를 숙이기가 싫어서 그런다는 속생각은 끝내 터놓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 수원은 아버지의 그 속내를 짐작하고도 남았기에 지체없이 길을 떠났다.…
허월은 아들 대신 나타난 손자를 보며 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손자라도 데리고갈수 있게 된것을 다행으로 여길수밖에 없었다. 손자가 가는것은 아들이 가는거나 같다고 보아도 무방하기때문이였다.
922년 8월 (음력), 순식은 자기대신 맏아들 수원을 보내여 투항의 뜻을 표시했다. 허나 그것은 강릉땅의 병합을 의미할뿐 아직 순식 개인의 항복은 아니였다.
조상의 땅을 남에게 바치는 일이 결코 헐한 일은 아니며 더우기 남의 턱밑에 머리를 숙이는 일은 더더욱 헐한 일이 아니였기에 순식은 5년후에 부친 허월의 부고를 통지받고서도 그의 묘소를 지키라고 둘째 장명에게 600명의 의장대를 데리고가게 하면서도 자기는 송악에 걸음을 하지 않았다. 력사기록에는 순식이 송악에 숙위를 서라고 군사를 보낸것으로 되여있지만 전해오는 이야기는 허월의 시신을 지키는 의장대를 보낸것으로 되여있다.
순식은 그 이듬해에 왕건의 요청으로 부친의 삼년상을 치르러 가서도 왕건으로부터 1품벼슬인 대광과 왕씨성을 하사받으면서도 투항한다는 소리는 입밖에 내지 않았다.(이때 둘째 장명은 왕씨성과 함께 원보라는 4품의 벼슬직을 하사받았다.)
하지만 왕건이 내린 성과 대광직을 수락한것은 본질에 있어서 투항을 의미하는거나 다름없었다. 이후에 고려가 후백제와 최후결전을 할 때 순식은 왕건의 호소에 응하여 자기 휘하의 군사를 통털어가지고 참전하여 왕건을 따르는 자기의 립장을 명백히 하였다.
왕건의 국토통합의지에 공감하여 고려에 투항해온 세력들은 이밖에도 부지기수였다.
순식이보다 두해 먼저 투항해온 강주성주 윤응의 아들이 그러했고 925년 10월에 투항해온 고을부성주 능문이 그러했으며 927년에 투항해온 고사갈이성(문경) 두목 홍달, 930년 1월에 투항해온 고창성 두목 김선평과 그 이웃성주들인 권행과 장길, 932년 6월에 투항해온 후백제 장군 공직이 그러했다.
고을부성주 능문도 한개 나라의 관직과 급이 같은 시랑, 대감 등의 관리들을 두고서 신라와는 별개의 소군주행세를 하던 사람이였고 고창성 두목 김선평은 서라벌 왕족갈래임에도 조정과 등을 지고서 주변의 여러 성주들을 부하로 삼고있을 정도로 일종의 소국군주행세를 하여오던 사람이였다. 그는 정세를 보아가며 고려군과도, 후백제군과도 내통을 하였는데 때로는 중립을 표방하고 때로는 이쪽, 저쪽에 의지하는 술수를 써가며 자기 존재를 유지하다가 930년 1월 고창성싸움을 치른 뒤에야 왕건에게 정식으로 투항하였다.
이랬든저랬든 어느 지방의 할거세력이든 종당에는 모두 소군주의 지위를 포기하고 고려의 지붕안에 들어왔다.
고려국은 삼국통일의 주역의 지위를 나날이 획득해가고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