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 회) 부으응- 뿔나팔소리가 길게 울렸다. 뒤이어 둥- 두둥- 둥- 북소리가 뒤따랐다. 이어 네모지게 친 방진대형의 기마군사들이 맞받아나왔다. 량측은 차전벌(북청부근)에서 접전을 시작했다. 이 싸움에서 지는 쪽이 이기는 쪽의 요구를 수락하게끔 사전약조가 되여있었다. 고려군이 지면 지금의 말갈족이 차지한 땅의 거주권을 인정해야
하고 말갈군이 지면 귀화하거나 차지한 땅에서 물러가야 하는것이였다. 그동안 금필은 귀속한 추장의 도움으로 북방의 모든 추장들에게 통첩장을 보내였다. 처음에는 적지 않은 추장들이 산발적으로 투항을 표시해왔으나 시일이 지나면서 형편은 달라졌다. 투항하자는 측보다 싸우자는 측이
우세해진것이였다. 옥신각신 다투던것이 칼부림까지 해가며 서로 싸울내기를 한끝에 고려와 싸우자는 측이 주도권을 쥐게 되였다. 하여 다급히
복종체계를 세운 다음 마침내는 대결에로 나온것이였다. 일단 마음이 합쳐진 다음에는 끝을 볼 때까지 해보는게 말갈족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는가보았다. (그렇다면 해보는 수다.) 금필은 여기에 쾌히 응해나섰다. 금필은 그사이 한쪽으론 통첩장을 보내는 한편 군사를 이끌고 북으로 올리밀어 적지 않은 촌락들을 회복해갔다. 그러느라니 고려원정군은 바다가지대를 따라 가느다란 폭으로 전개되고 말갈군은 산지를 따라 넓은 폭으로 대치되였다. 산지가 기본인 북방땅에서 그곳 지형에 어지간히 익숙되여있는 말갈군은 평지쪽으로 내리공격하게 되여있어 싸움은 그들에게 유리하였다. 그러나 금필은 걱정하지 않았다. 말갈군에 최대의 약점이 있었던것이다. 그것은 고려원정군에게 촌락들을 빼앗긴 말갈인가족들이 저희들의 군사를 따라 급히 산으로 같이
들어간것이였다. 이들은 저희들 조상전래의 생활방식이 아무리 극악한 환경에도 적응되게 되여있다 하더라도 이젠 고려땅의 기후와 풍토에 어지간히 젖어들어 그
강기를 이미 잃고있었다. 그들이 산중에서 사흘이상을 견디리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먹을것이 떨어지면 군사들은 장정들이라 하루이틀쯤 더 버틸수 있을테지만 늙은이나
아이들은 사정이 다르다. 이렇게 놓고보면 싸움은 고려군이 이긴 싸움이였다. 와! 드디여 량쪽의 기마군사들이 맞붙어돌아가기 시작했다. 말갈군사들은 사냥에 몸이 배여선지 몸놀림이 원활했다. 이들가운데는 고려군에 못지 않게 마상재에 능한 군사들도 많았다. 요리조리 몸을
꼬아가며 창과 협도를 휘두르는 솜씨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고려원정군은 싸움판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인데다 지금 접전중에 있는 기마군사들은 금필이 손때를 묻혀 키운 정예병들이였다. 얼마쯤 지나서 말갈군사들의 수가 줄어들면서 그들은 차츰차츰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뒤를 쫓아 고려군이 한걸음 두걸음 산지로 들어서는 바로 이때 산지의 숲속에서 화살이 비오듯 날아오기 시작하더니 순간에 고려군 서너명이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금필은 급히 징을 울려 고려군을 멈춰세웠다. 숲속에 몸을 숨긴채 화살만 날리는 말갈군사들의 복병매복전술에 말려들 필요가 없었던것이다. 잠시후 금필이 기마군사들을 철수시키자 말갈군도 활쏘기를 멈추었다. 첫 접전은 싱겁게 끝나고말았다. 숲속에 들어간 말갈군사들쪽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창과 칼이 부딪치고 아츠러운 비명소리가 자욱하던 싸움터가 금시 쥐죽은듯 고요해졌다. 하늘에 까마귀 몇마리가 날아예며 까욱거릴뿐이였다. 금필은 희생된 고려군사들을 감장케 했다. 죽은 말갈군사들도 함께 처리하게 했다. 말갈군사들이 산에서도 내려다보이는 곳에 시체들을 날라다놓게
했다. 말갈측의 죽은 군사가 예상외로 많았다. 금필은 안타까왔다. (왜 이들은 승산도 없는 싸움을 하여 죽음을 당하는것일가?) 다음날 날이 밝았는데도 말갈측에서는 조용했다. 금필은 생각끝에 군사를 동원하여 죽은 말갈군사들의 시체를 날라다주게 했다. 그런데 무지한 말갈족속들이 례의에도 어긋나게 시체를 날라간 고려군사들에게 살질을 해대여 또 몇명이 쓰러졌다. 《장수어른! 어서 령을 내려주소이다.》 고려군사들이 안타깝게 호소했다. 허나 금필은 입을 앙다물고 돌아섰다. 더 지켜보자. 저들도 사람일진대 제 처자권속들을 굶기면서까지 맞서겠는가. 금필은 기다리기로 했다. 저녁이 되자 숲속에서 말갈인 로인 하나가 비척비척 내려왔다. 고려군쪽에서 밥짓는 냄새가 바람에 날려간것에 반응한것 같았다. 금필은 로인에게 밥을 먹이게 했다. 그런데 밥을 다 먹고난 말갈로인이 돌연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더니 금필에게 달려들었다.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것 같던 로인이 어떻게 그런
비호같은 몸놀림을 취하는지 모를 일이였다. 금필이 상체를 뒤로 젖히며 제때에 로인의 손목을 비틀어돌리지 않았더라면 영낙없이 변을 당하는 순간이였다. 《밥을 먹여주었는데 칼부림으로 밥값을 내?》 군사 하나가 눈깜짝할새 주먹을 휘둘렀다. 금필은 군사의 손을 막고 넘어진 로인을 부축한 뒤 헐떡이는 로인의 손에서 비수를 뽑아내였다. 비수의 손잡이엔 천이 매여져있었는데 그것을 펼치니 이런 글발이 씌여있었다. 《래일 아침 량측의 장수가 겨루어 해결하자.》 금필은 즉시 답신을 써서 로인의 손에 쥐여주었다. 《아침에 말갈인 가족들에게 우리가 해주는 밥을 먹게 하면 응하겠다. 그들을 인질로 삼지 않겠다는것을 약속한다.》 답신의 내용이였다. 로인은 비척비척 다시 숲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량쪽의 군사들이 대치한 가운데 말갈족의 우두머리추장이 금필과 마주섰다. 그는 비장한 얼굴로 한쪽에 몰려서있는 말갈족처자들에게 소리쳤다. 《접전이 끝난 뒤 내가 이겼으면 고려의 밥을 먹지 않을것이고 내가 지면 먹어도 될것이다.》 가족들은 밥그릇을 든채 우들우들 떨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갈족우두머리추장은 쌍대검의 능수인듯싶었다. 길이가 넉자 세치나 되고 너비도 길이의 반푼이나 되는 어찌 보면 방패같기도 한 말갈특유의 넙적한 대검을 량손에 들고 나선 그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온몸이 졸아들만큼 무시무시했다. 금필도 부하가 가져다주는 쌍검도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오랜만에 쥐여보는 칼이였다. 금필은 자기가 칼을 써보지 않은지 벌써 석달이 지났다는 사실에 긴장해졌다. 상대도 긴장되여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획- 휘이익! 허공을 가르는 쌍대검소리가 들려왔다. 말갈족우두머리추장이 먼저 몸을 날려온것이였다. 그의 몸은 보이지 않고 전후좌우로 날아예는 쌍대검날만이 보이였다. 이쪽이 반격할 조그마한 틈도 없는 몸놀림이였다. 금필은 번개같은 그의 칼날을 피하기만 하였다. 열합이 넘고 스무합이 넘었는데도 금필은 여전히 피하기만 하면서 공격할 생각은 도무지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공격할 여유가 없는것같았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하려나싶은 순간에 금필의 한쪽 칼날이 추장의 발치께를 슬쩍 건드렸다. 그 순간 추장의 몸이 공중 솟구쳐올랐다 떨어졌다. 앗! 지켜보던 말갈군사들속에서 비명이 일었다. 그러나 추장은 두어바퀴 굴은 뒤에 모두발로 다시 솟구치며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는 더욱 세괃게 쌍대검을 휘둘러대며 금필을 덮쳐왔다. 금필이 다시 몸을 피하며 추장과 스치는 서슬에 이번엔 추장의 엉치어름을 칼날로 슬쩍 비껴쓸었다. 이번에도 추장은 몸을 솟구쳤다가 풀썩 주저앉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다시는 일어날 생각을 않고 금필을 노려보기만 했다. 거세게 숨을 톺으며
금필을 쏘아보기만 할뿐 일어설념을 못하고있었다. 말갈군사들이 다급하게 웨쳐댔다. 《대추장님, 일어서시오이다.》 《일어나 싸우시오이다.》 서너명의 말갈군사가 웬일인가싶어 달려나왔다. 그들이 자기 추장을 부축하려는 순간이였다. 《그만 두라! 어서 제자리에 가지 못해?》 말갈추장은 땅바닥을 치며 그들을 쫓아버렸다. 이때 금필이 추장에게 다가갔다. 《그만 합시다, 추장! 어서 의관을 바로하시오.》 그때였다. 번쩍 추장의 대검이 들리였다. 휘- 익! 그의 대검이 금필을 겨누어 올리찍히였다. 앗! 일시에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추장이 금필에게 일격을 가한것이였다. 죽었구나! 숨막힐듯싶은 정적이 들판에 깃들었다. 바로 이때 《어서 말갈인들에게 밥을 주라!》라는 목소리가 나직이 울리였다. 목소리의 임자는 뜻밖에도 금필이였다. 모두의 눈이 화등잔만큼씩 커진채 굳어졌다. 칼을 받았으리라 생각하였던 금필이 그린듯이 서있는것이였다. 쓰러진것은 추장이였다. 《말갈추장의 시신을 감장해주라!》 다시금 들려오는 금필의 목소리에 그제야 모두가 정신을 차리였다. 군사들이 추장의 몸을 들려는 순간 금필이 또다시 조용히 말했다. 《조심히 다루어라!》 그리고는 자기의 전포를 벗어서 추장의 아래도리를 씌워주었다. 그제야 군사들은 알아차렸다. 금필은 말갈추장의 아래도리와 엉치도리를 칼날로 베여버린것이였다. 그가 싸움을 포기하게 할 목적으로 처음엔 그의 바지아래도리를, 다음엔
바지웃도리를 베여놓은것이였다. 그가 다시 일어났다면 그는 영낙없이 알몸의 아래도리를 보여주었을것이였다. 말갈추장은 수치감을 이기지 못해 금필의 아량을 거절하였던것이다. 마지막힘을 다해 후려친 칼날이였지만 금필은 몸을 비켰고 추장은 제 칼날에
제 목이 찍힌것이였다. 아침식사를 시킨 다음 금필은 말갈인들앞에서 선언했다. 《약속한대로 그대들은 이 땅을 뜨도록 하라! 그러나 고려에 귀화하기를 원하는이들은 남아도 된다. 돌아가는이들은 그대들의 옛 거처지를 지키기
위해 발해와 함께 거란을 쳐야 할것이다.》 싸움이 끝난 뒤 적지 않은 말갈인들이 고려에 귀화하였다. 력사기록에는 3백명의 추장들이 자기 무리들을 이끌고 고려에 항복하여왔다고 한다.
그러나 나머지 과반수 말갈인들은 떠나갔다. 그후로 수백년동안 말갈족들은 고려의 북방에 얼씬하지 못하였다. 세월이 흘러 이들은 저들의 말과 글을 다듬고 녀진이란 이름으로 종족명이 바뀌여지면서 점차 자기의 세력을 확대해나갔다. 이들은 고려후기와 리조시기에 몇차례 두만강을 다시 넘어오기는 하였으나 그때마다 반격을 받고 쫓겨갔다. 이들은 그후 금나라로, 청나라로 나라명칭을 바꾸어가면서 령역을 넓혀나갔지만 광활한 중국대륙까지 먹어버린적은 있었어도 고려땅만은 더는 탐하지
못하였다. 말갈에서 녀진으로 이어지고 마감에는《대청제국》이란 나라로 력사를 기록한 이 종족은 중국 한족에게 동화되여 오늘은 력사에 그 이름만 남게 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