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 회)

 

금필이 옛 고구려의 군사요충지였던 골암진에 도착하여 사흘을 묵으면서 대오를 점검해보니 군사는 다시금 3천을 헤아리고있었다.

《우리도 귀가 있어 새 조정의 소식쯤은 알고있었소. 불원간에 송악으로 가려던 참이였는데…》

골암진성주는 반가움을 금지 못해하였다. 윤선이라고 부르는 이 성주로 말하면 궁예의 쇠몽둥이를 피해 이곳 골암진에 온 염주(연안)사람이였다. 십수년전 궁예의 부하들에게 소금을 강탈당하고 참을수가 없어 대든것이 단서가 되여 쇠두레도성으로 문중일족이 매모조리 끌려와 칼밑에 나란히 누웠던 일을 그는 지금도 치를 떨며 외우고있었다. 백쉰동이들이 소금가마도 한손으로 들어옮기는 장사인지라 그는 아무래도 죽을바엔 용이나 한번 써보고 죽자 하고 몸을 솟구친것이 그만에 성공하였다. 형리들을 쳐갈기고 칼을 빼앗아 일가족들의 결박을 풀어준 다음 앞장에서 길을 열어 대문을 까제끼고 도성을 탈출하여 내처 북쪽으로 치달아 닷새만에 지금의 골암까지 와서 주저앉은것이였다.

이후로 저를 죽이러 오는 궁예군사들을 죽기로 맞받아싸워 이겼고 나중에는 골암진이북 녀진인들까지 휘동해가지고 쇠두레로 쳐내려와 궁예를 혼비백산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금필은 그가 녀진인들까지 섞인 천여명에 가까운 기마군사를 이끌고 추가령(고산)너머 부양(경강)지경까지 내려와서 《궁예 이놈! 네가 쇠두레대왕이면 난 골암진대왕이다!》 하며 어디한번 겨루어보자고 을러메는통에 너무도 놀란 궁예가 신경통으로 목삐뚜름이가 되여 반삭을 곧은목으로 신고하게 만든 괴짜란 사실에 주목했다. 그동안에 나이를 먹어 몸놀림은 좀 더디여졌다해도 그는 동북방의 정세에 밝고 녀진인(말갈족)까지 단속해본 경험이 있는 로회한 수단가였다. 이런 인물이면 금필이 자기를 도와도 크게 도울수 있는것이였다.

《성주께서 일을 잘 보시여 이곳까지는 오랑캐의 발길이 닿지 않고있는 모양이온데 정말로 장하오이다.》

금필이 치하하자 성주는 도리머리를 저었다.

《아니올시다. 소인이 구실을 바로 못해 고을 북쪽은 여전히 오랑캐들의 사냥터로 되고있은즉 새 조정앞에 부끄럽기 그지없소이다.》

《내가 알고있는바로는 여기가 이전엔 발해지경이였으나 오랑캐들은 그림자조차 볼수 없던 곳이라 하였던데요.》

금필의 물음에 성주는 탄식했다.

《여긴 당나라놈들이 발길 한번 못한 곳이지요. 발해조정에선 이 골암진이 청해성(북청)에 소재지를 둔 발해의 남경남해부관하라고 선포하기는 하였지만 이곳의 통치는 우리 고구려 본토배기들이 하게 하였지요. 그전에 발해가 우리 골암진을 거쳐 철령까지 지경을 넓혀나간 때가 있었지오만 그때에도 이 오랑캐족속들은 찾아볼수 없었다고 하오이다. 》

《그런데 오늘은 어이하여 오랑캐들의 사냥터가 되고말았소이까?》

《발해가 지금 사그러져가고있지 않소이까. 이 골암진 북쪽에 있는 발해의 남경남해부와 동경룡원부는 지금 관가부터가 허울뿐이고 도무지 맥을 추지 못하고있소이다. 수십년전부터 쓸어내려오는 이 오랑캐족들을 전혀 막아내지 못하고있지요. 이놈들이 발해인들의 촌락을 보기만 하면 덮어놓고 불을 지르고 로략질을 하기때문에 그놈들을 피해 지금 그곳 발해사람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고있소이다.》

《이전엔 발해사람 셋이면 호랑이도 때려잡는다고 들었는데 어쩌면 이렇게까지 맥을 추지 못할수가 있겠소이까?》

《그래서 하는 말이오이다. 이 골암진 북쪽이 옛날 옥저땅이 아니오이까. 고구려에 합쳐진 뒤론 줄곧 전성기를 누려온 곳이였는데…우리란게 겨우 제 고을지경이나 돌보는것들이니 그들을 도울 길이 없었소이다. 》

《어떻게든 발해사람들과 손잡고 대적을 했어야 할걸 그랬소이다. 》

《이제는 고려조정에서 이 북방을 중시하는 모양이니 다소 마음이 놓이오마는…》

성주는 슬며시 금필을 곁눈질했다.

군사를 출병시킨 조정의 뜻이 그게 아니냐 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이 오랑캐들이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것들이요?》

금필은 다시금 성주에게 물었다.

《기억하고계시겠는지 모르겠소만…내 십여년전에 이 오랑캐들을 한번 걷어모아가지고 궁예를 혼쌀내려 했던 때가 있었소이다. 그때 그들과 어울리면서 좀 알아보니 이 오랑캐들의 본고장은 저 북쪽의 흑수(흑룡강)류역이였다고 하오이다. 원래 이 족속들은 고구려때부터 애를 먹여온것들로서 처음엔 흑수에서 물고기잡이나 사냥따위로 살아왔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한걸음, 두걸음 송화강으로 거슬러올라오기 시작한것이오이다. 송화강은 흑수의 지류인데 우리 태백산(백두산)에서 시작되는 강이오이다.

고구려가 이를 그냥 놔둘리 있겠소이까. 그래서 몇번 쫓아냈는데 그저 그때뿐이여서 고구려조정에선 아예 고구려에 복속되라고 몇번이나 손을 내밀었던 모양이온데 원체 생활방식이 떠돌이족속이여서 거주지에 의한 통치가 불가능하므로 다루기가 말짼데다 이것들이 한사코 귀속은 거부해왔다고 하오이다.》

《그토록 강대했던 고구려가 왜 그런 족속들을 완력으로라도 눌러버리지 않았는지 이상하오이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사오이다. 거슬러올라가보면 그들도 단군이래 고조선의 령역에서 살아온 종족이오이다. 비록 고조선령역의 북쪽 변강이였을망정…그래서 고구려때에도 조상이래 이웃해온 그들에게 생존권까지는 박탈하지 않고 그저 거주지역만 제한하는 정책을 쓴것이오이다. 》

《그런 리유가 있었군요.》

《사실 그들도 이전엔 우리 동족과 반목보다는 친목해서 살아온 종족이오이다. 우리에게 의지해서 살아왔다고 해야 할것이오이다.》

《하기는 고구려사람인 대조영이 발해국을 세울 때에도 말갈인장수 걸사비우가 합세해주지 않았소이까.》

《그렇소이다, 발해 역시 고구려를 뒤이은 나라인지라 이 족속들을 고구려때처럼 우대한것이오이다. 이들이 생활습성상 촌락을 형성하지 않아 행정통치체계안에는 붙잡아두지 않았지만 일정한 무인지경을 떼여주어 그안에서 떠돌아다니며 살게 하였소이다.

그런데 번성하던 발해가 주저앉기 시작하자 이 족속들이 뿔난 망아지모양 놀아나기 시작한것이오이다. 지금 거란이라는게 발해를 먹기 위해 최후의 일전을 준비한다 하옵는데 발해는 속수무책이니 답답하오이다. 제 집안 단속도 못하니 참…》

《그 족속들의 갈래가 여러개가 아니오이까?》

《그렇소이다. 제가 알기로는 저 료동북쪽으로 올라간 무리가 있는가 하면 우리 고려지경 압록강을 넘어오는 무리 또 두만강을 넘어오는 무리 등 비록 오합지졸이긴 하온데 갈래 또한 여간 복잡하지 않은줄 아오이다. 이앞으로 내려와 돌아치는 족속들은 두만강을 넘어 내려온 흑수말갈족의 본줄기놈들인줄로 아오이다.》

《참 답답한 족속들이로군.…발해땅에 살면서 발해를 도와 거란족과 맞설 생각은 않고 왜 남의 지경은 침노한단 말이요?》

《그게 문제오이다. 발해가 바람앞의 등불신세인데 이 족속들은 제살궁리만 하고있는것이지요. 이 족속들의 큰 무리 하나는 거란과 짜고 발해수도를 공격하기까지 하였다지 않소이까.》

《배은망덕한것들같으니. 》

금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 조상대대로 우리 동족과 생사를 같이해온 종족이라면서 왜 지금같은 때에 발해를 도와 함께 싸울 생각을 못하는가. 게다가 되려 반변까지!…그 하나만으로도 용서받을수 없는 족속들이다.)

금필은 생각을 정리해갔다.

(고구려가 인정해주고 발해 또한 살펴준 그들일진대 무작정 때려몰아선 안되겠다. 그렇다면…)

금필은 왕건으로부터 북방의 종족들을 진압하면서 그들의 침입을 용납하지 말되 될수록이면 옛 거처지로 몰아내라고 임무를 받았었다.

금필은 고구려때에도 지금의 발해도 이들의 생존권은 인정해주었다는데 다시금 생각이 미치였다. 하다면 고구려를 계승한 우리 고려도 이들의 생사를 아예 모른다고 해서는 안될것이였다.

(그렇다, 우선은 설복을 해보자. 그래도 말을 듣지 않을 땐 힘으로 다스릴것이다.)

생각을 굳힌 금걸은 그사이 불어난 3천의 군사를 이끌고 질서있게 북으로의 행군을 시작했다. 일종의 무력시위를 하는것이였다.

말갈족들은 달아나기 시작했다. 제각기 작은 무리를 짓고 사는 이 족속들은 고려군의 어마어마한 위세앞에 혼쭐이 난것이였다.

금필은 백리가 썩 넘게 올리밀어 금야강을 건느고 금진강어귀까지 도달했다. 그곳에서 일단 진군을 멈추고 성을 쌓도록 지시했다. 바로 지금의 새 골암진성이였다.

그리고 청해성(북청)에 있는 발해의 남경남해부관아에 서신을 보냈다.

고려군이 금진강지경까지 말갈족들을 몰아내였으니 그다음 차후책을 강구하라는 내용이였다. 이제부터는 금진강지경까지가 고려의 령역이 되였다는 암시가 내포된 서신이였다.

발해가 동족의 나라이고 엄연한 주권국가임을 인정한데서 취하게 된 의례적인 조치였다.

청해성에서는 즉시 답변이 왔다. 상경룡천부에 있는 발해궁성에 현 상황을 통지했다는 내용이였다.

령토와 관련한 문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고려 역시 동족의 나라이고 현재로는 저희들이 유린당하고있는 땅을 고려가 수습하고있는데 대해 내심 안도하고있는지도 모를 일인것이다.

금필은 성공의 기쁨을 안고 골암진이 고려국에 자진 귀속하였음을 알리는 윤선의 친서도 함께 가지고 돌아왔다.

왕건을 비롯한 온 고려조정이 환성을 올렸다.

그렇게 일단락 지어졌던 동북방정세가 삼년이 지나 다시금 불안해진것이였다.

발해가 금시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이미 고삐가 풀린 말갈족들이 다시금 유린하고 나선데로부터 고려는 동족의 땅을 지켜야 하는 의무감을 안고 어쩔수없이 북방에로 또다시 손을 뻗쳐야 했던것이다.

금필은 새로 쌓은 골암진성에 유유히 입성했다.

성주 윤씨는 양아들 신달이까지 데리고 또다시 찾아온 금필을 반갑게 맞이했다.

윤신달은 정주(풍덕)태생으로 골암진성주 윤선과 성이 같다 하여 자진해서 그의 양아들되기를 주청하면서 북방개척에 한몸 내댄 사람이였다. 그의 후대중에 윤관이란 인물이 나와가지고 선대의 뒤를 이어 녀진족징벌에 크게 기여하여 조정으로부터 파경(파주)을 식읍으로 받아 파경윤씨의 조상이 되였는데 그런 까닭으로 윤신달은 파경윤씨의 원조상이 되는셈이다.

주연좌석에서 금필은 다시금 성주에게 물었다.

《그래 온전한 거처지도 없이 돌아치는 저 족속들을 어찌하였으면 좋겠소이까?》

금필이 묻자 윤씨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신의를 지킬줄 모르는 족속들이라 용서치 말아야 할줄 아오이다.》

《적절히 버릇은 가르치되 그들에게 살길은 열어주자고 하오이다.》

《세해전처럼 또 어루만지고말겠다는 말씀이시오?》

《그렇소이다. 》

윤씨의 눈시울이 치켜들리였다.

《아니, 올리밀어야 하오이다. 더는 저대로 놔둘수가 없소.》

《아버님!…》

윤신달이 민망스런 빛을 띤채 윤선을 설복하려들었다.

《걱정마시고 소인이 재간껏 헤아려 할터이니 성주님은 술이나 한 백말 준비해주시오이다.》

《화살은 백근이 아니라 천근이라도 내올수 있사오나 술만은 한말도 못 내겠소이다.》

자기를 다독이는듯싶은 금필의 말에 늙은 성주는 시뿌둥한 얼굴로 토라진 소리를 했다.

《원, 어르신도…이곳 새 골암진성의 술맛이 그렇게 유별하다는데 단마디로 거절하시다니요.》

《좌우간 유장수께서 우리 골암진백성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를 바랄뿐이요.》

《걱정마시오이다. 》

성주는 쪼프린 미간을 펴지 못하고있는데 금필은 호기있게 술대접을 들더니 단숨에 비워버렸다.

이튿날 금필은 군막에서 말갈인들을 처리할 방략을 짰다.

다음날엔 골암진성앞 금진강너머 빈 촌락들에 군사들을 파하였다. 집집의 아궁에 불을 지펴 피신했던 발해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사는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리고 곳곳에 매복을 조직했다.

말갈인들은 대개가 겁이 없고 날래여 나무를 타고 오르내리면서 등뒤나 우에서 내리공격하는 까닭에 산지에서의 일 대 일 접전은 랑패보기가 십상이라는 이곳 군사들의 조언에 따라 평지로 이들을 유인하려는것이였다.

이쪽의 속내를 알리 없는 말갈인들은 즉시로 반응했다. 몇명씩 조를 이룬 무리들이 대낮인데도 아랑곳 않고 여유있게 민가에 다가들었다. 그들은 사람이 없는것을 알고는 화를 냈다. 집주위를 돌아치며 밸풀이를 하는 놈, 골암진쪽에다 대고 주먹질을 하는 놈에 각이하게 상스런 몸짓을 해보이고는 다시 산으로 오르려고 돌아섰다.

이때를 노려 매복했던 군사들이 일시에 덮쳐들어 놈들을 꽁져왔다. 개중에 요행 빠져나간 놈들은 도망치면서도 밭에 서있는 조이삭 꼬투리들을 잘라 옷섶에 넣느라 야단이였다.

잡혀온 놈들도 도저히 겁이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얼굴들이였다.

우리 군사 하나가 무릎을 끓지 않는 말갈인에게 주먹찜질을 하자 그놈은 더욱 승이 나서 머리를 솟구치며 대들었다.

금필은 짐짓 엄한 표정을 짓고 말갈인을 손댄 군사에게 회초리를 안겼다. 매를 맞은 말갈인에게는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제가 술까지 따라주었다.

놈은 두눈을 띠룩거리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독이 든 술을 주는것으로 안것 같았다.

금필은 빙그레 웃고는 제가 먼저 잔을 비웠다. 재차 술을 따라주자 그제야 놈은 턱을 빼여들고 걸탐스레 들이마셨다.

나머지놈들도 이게 웬 횡재냐는듯 무릎걸음으로 다가들었다.

금필은 이들의 포승을 풀게 한 뒤 한되들이그릇들에 술을 넘치게 부어주어 마시게 했다.

술기운에 금시 얼굴들이 벌거우리해진 그들은 풀어진 눈으로 금필을 바라보며 연해연방 머리를 조아렸다.

금필은 이들에게 미리 준비했던 편지를 한통씩 쥐여주고는 모두 놓아주게 했다.

편지인즉은 이들의 추장에게 보내는 초청장이였다.

《이중에 누구든 너희들의 추장을 데리고 오는자에게는 크게 상을 주리라. 나는 이곳에 좌천돼온 고려장수다. 심신도 예전같지 않고 해서 너희네 추장과 더불어 화친하여 살고싶으니 생각이 있으면 즉시 찾아오도록 하라.》

말갈인들에게 초청장의 내용을 대강 풀이해주니 놈들은 머리를 끄덕이며 돌아서서 줄행랑을 놓았다.

《저놈들이 유장수의 유인계에 걸려들겠는지 모르겠소이다.》

골암진성주는 머리를 갸웃했다.

《걸려들것이오이다. 성주어른께서는 수고로운대로 잔치나 잘 차려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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