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 회)

 

7. 북방회복에 나서다

 

행렬은 무겁게 움직이고있었다. 석탕골(양덕)에서 온천욕을 한 뒤 하루밤 묵어가자는 부하들의 제의를 뿌리치고 밤길을 이은탓이였다.

자정이 지난 시각이였지만 금필은 대오에 휴식구령을 주지 않았다.

대오는 한절반 잠에 취한채 느릿느릿 령길을 오르고있었다. 돌부리에 채이고 나무그루터기에 채이며 비틀비틀 걸어갔다.

길을 개척하는 척후대가 가끔 대오를 멈춰세우군 하였다. 이전엔 수레조차 다니였을 길이건만 그사이 사람의 발길이 미치지 않아 길우엔 잡초가 키를 넘었고 도중도중 관목림까지 우거져 하늘을 가리우기에 척후대가 쩍하면 도끼질을 해대야 했던것이다.

이런 길은 대낮보다도 밤에 주근주근 축내는것이 낫다는것을 금필은 경험으로 알고있었다. 하루라도 더 빨리 목적한 곳으로 가야 할 사정이였다.

이 길은 금필이 세해전인 918년 9월에 한번 지나간 길이였다. 지금처럼 북방을 장악하기 위한 걸음이였다.

그때 금필은 왕건으로부터 북방개정군을 이끌데 대한 어명을 받았었다. 지금처럼 자정이 지난 시간이였다.

화촉을 밝힌 어전뜨락에서 문무대신들의 한결같은 추천으로 북방평정의 중임이 금필에게 맡겨졌었다.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위수로 한 새 나라의 기틀이 선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어전은 낮과 밤의 구별이 없이 뒤설레고있었다.

새 왕조의 출현을 알리는 사절들이 사면팔방으로 떠나갔다.

국정의 요직을 차지한 문무대신들은 막중한 임무수행에 미흡한 구석이 있을세라 초행의 업무에 골몰했다.

왕건은 요직들에 철저히 실무에 준하여 사람들을 앉히면서 친인척들을 제한하고 학자들과 지방호족들을 주로 등용했다.

개국공신들은 대개가 군직에 그대로 머물고있었다.

건국초기 고려군은 궁예때의 마군, 보군, 수군, 내군체계를 그대로 유지하고있었다. 홍유, 배현경, 능산, 환선길, 리흔암이들이 마군장으로서 천명정도의 기마군사들을 거느리였으며 왕건에게 복종해온 지방호족들이 거느리고있는 가병들을 보군으로 하였다.(이들은 왕건의 령에 따라 임의의 시각에 동원되였는데 주로는 마군장들에게 소속되여 그들의 지휘를 받았다.) 수군은 왕건 개인의 부대로서 만세, 왕신, 유금필 등 장수들이 왕건과 함께 또는 왕건으로부터 일부 력량을 넘겨받아 지휘하군 하였다.

당시 수군의 력량은 3천을 조금 웃돌았다. 내군은 왕건의 개인가병력량으로 유지하였는데 궁성을 직접 수비하는 부대는 복지겸이 새로 맡았고 궁성외곽 방어부대로 송악성밖에 널려있는 부대들은 유금필, 왕식렴, 박술희들이 나누어가지고있으면서 왕건의 지휘에 따라 평시에는 송악성방어임무를 수행하면서 필요에 따라 전방으로 나가군 하였다.

개국공신들은 저희들에게는 조정의 각료직이 차례지지 않고있는것을 은근히 못마땅해하고있었다. 그들은 좀이 쑤셔 칼자루만 절컥거리며 이제나저제나하고 왕건이 무슨 자리에든 임명하기만을 기다렸다.

때로 볼이 부어 왕건을 찾아왔다가는 말없이 내여주는 화살 한통씩만을 받아가지고는 머리를 기웃거리며 되돌아나오군 하였다. 그들은 내군을 책임지고있는 복지겸이나 박술희에게 들려 궁중호위에 만전을 기하라는 훈시나 몇마디 하는것으로 속을 달래고있었다.

실은 그들에게 할일이 없는것도 아니였다.

후백제는 고려의 새 왕조를 지금은 지켜보자는 심산으로 자제하고있었다. 그러나 언제 공격해올런지도 모를 일이였다.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후백제는 궁예의 태봉국과 혈투를 벌려온 적수였던것이다.

신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충주와 원주, 횡성, 제천일대를 량길이 차지하고있을 때에는 그래도 제 땅덩이안에 있는 반란군이니 무슨 수든 써서 아무때건 평정하리라는 생각으로 위안이라도 하고 참아올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땅이 태봉국에 뒤이어 고려의 땅이 되고말았다. 제땅이 아닌 남의 땅이 되고말았으니 그 땅을 되찾으려면 고려에 싸움을 거는 길밖에 없을것이였다. 량길이 차지했던 땅 말고도 청주와 명주일대를 포함해서 궁예때에 떼운 땅이 좀 많은가. 그 많은 땅을 눈 펀히 뜨고 떼우고서 신라가 가만있을텐가. 아무리 기울어져가는 나라라 해도 아직은 나라인것이다. 국력을 총동원하여 죽기로 접어들면 영 승산이 없는 일도 아닐것이였다. 그러니 신라도 덮어놓고 얕잡아볼 대상이 아니였으며 결코 마음을 놓을수가 없는 경계해야 할 대상이였다.

신생고려의 안전을 위해서나 이후 겨레의 통합을 위해서나 고려에 있어서 군사를 강화하는것은 급선무중의 급선무였다. 장수들이 조정의 각료직에만 눈밝히며 둥 떠있을 때가 아닌것이였다.

새 왕조의 궁중안전도 아직은 장담하기 어려웠다.

개국한지 보름만에 반정을 가해온 환선길, 리흔암패당을 놓고봐도 그랬고 아직 궁예시절의 옛 지위를 그리워하면서 새 왕권을 인정하지않고 반신반의하는 세력들도 적지 않았다.

이런 속에서도 왕건은 초지일관하게 정사에 주력하고있었다.

왕건이 왕식렴에게 평양수복의 중임을 맡겨 조용히 떠나보낸것은 조정의 각료발표와 거의 같은 시각이였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되살려 당장은 북방통일의 전초기지로, 나아가서는 대고구려재건의 중심지로 되게 하려는것이였다.

왕건이 평양성과 그 이북지대를 차지하기 위한 사업을 서두른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였다.

신라것들은 평양성북쪽지대가 무인지경이 되였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였다. 저들의 통치기반을 그곳까지 확대할 힘도 없었거니와 당나라에 쉬여버린지 오랜 그 무슨 약조를 구실로 언질을 잡힐가보아 떨고있는 족속들인지라 무책임하게도 무인지경을 운운하며 외면하고 회피해온것일뿐이였다.

이 일대에는 옛 고구려때 그대로의 고을과 향리제도가 존속되고있었고 사람들은 근면하게 생계를 펴나가고있었다.

아직은 궁예시절이였던 904-905년경에 룡강, 평원, 한천일대의 호족들이 왕건에게 사람을 파하여 복속되기를 요청한것만 놓고봐도 알수 있었다. 그때 이들은 자기들뿐아니라 성천, 회창, 녕변, 구성, 의주 등지의 백수십개 고을이 《후고구려국》란 국명으로 계속 자기 존재를 과시하고있다고 하였다. 발해와는 같은 동족으로서 서로 공존하고 협력하되 발해조정에는 속할지언정 발해의 5경 60주에는 속하지 않는, 다시말하여 직접통치는 받지 않는 특수한 지위를 보장받고있다고 하였었다.

대동강북쪽에서부터 압록강너머 료동까지의 구간에 펼쳐진 발해국에 속하면서도 또 독자적인 지위를 가진 이 《후고구려국》을 포섭하는것은 실로 중대한 의의를 가지는 일이였다. 그것은 이 《후고구려국》을 포섭하는것이 고구려의 옛 령토를 회복하는 사업인 동시에 후삼국의 통일을 위한 고려의 주동적인 지위를 더 굳게 해주는 사업이기때문이였다.

고려가 평양이북의 땅과 인구를 더 차지하게 되면 그만큼 령토와 인구수에서 후백제나 신라를 압도할수 있게 되기때문에 새 나라 고려에 있어서 평양수복은 빠를수록 좋은것이였다.

평양북쪽에 대한 평정을 시급히 요하는 사정은 이외에도 또 있었다. 그것은 지금에 와서 발해가 쇠퇴의 길을 걷고있는것과 관련되여 있었다. 발해를 먹으려는 거란의 잦은 침공이 더더욱 심해져 발해의 운명이 바람앞의 등불마냥 위태롭게 된것이였다.

이제 발해가 거란에 먹히우는 경우 거란은 발해의 령역이라고 볼수있는 《후고구려국》(학계에서는 이 《후고구려국》을 《고려후국》으로 명명하여 궁예가 처음 내세웠던 《후고구려국》과 갈라보기로 하였다.)까지 먹겠다고 남쪽으로 더 내려올수도 있었다. 갓 태여난 고려에 있어서 남쪽의 신라, 후백제와 대치한 상태에서 북쪽의 거란과 또 싸움이 붙는 경우 좋은 결과를 장담하기는 어려운것이였다. 아무리 남쪽사정이 막급하여도 이제 북쪽에 가능한껏 손을 대야 하는 사정은 이때문이였다.

그것뿐이면 또 그런대로 아직은 숨을 돌리며 대응할수도 있을것이였다.

그보다 급한것이 동북방종족들이 자꾸만 남쪽으로 내려오고있는것이였다. 갈래를 알수 없는 동북방의 종족들이 두만강을 넘어와 발해의 고을들인 부거(청진)와 룡천(북청)을 유린하고 계속해서 그 남쪽으로 내려오고있었다.

그들은 인가를 기습하고 재물을 로략질하거나 장공인들을 랍치해가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괴롭히였다. 그 성화에 견딜수가 없어 사람들이 계속 남쪽으로 피해 내려오다나니 적지 않은 땅뙈기와 함께 사람까지 떼우는 판이였다. 룡천에 고을을 두고있는 발해의 남경남해부는 몇사람의 발해무관이 창을 꼬나든채 겨우 지탱하고있는 정도였다.

그 족속들(말갈족-후에 녀진족으로 불리우는 종족이다.)을 내쳐 두었다가는 무슨 화를 입을지 알수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북방령토가 고려땅임을 알릴 필요가 절박한 이때에 이 족속들의 좀스러운짓을 더는 묵과해둘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군사를 뭉텅 떼여 뒤로 돌릴수도 없게 되였다. 앞에는 금시라도 다시 전쟁이 터지면 국력을 깡그리 동원해야만 하는 후백제와 신라가 도사리고있었던것이다.

어전회의가 끝난 뒤에도 금필은 왕건과 마주앉아 밤늦도록 론의를 계속하였었다.

《현재 이 강토우엔 우리 고려와 함께 발해와 신라, 후백제가 병존하고있소. 이들은 모두 단군이래 이 땅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한 동족이요. 그런데 이 한피줄을 나눈 겨레가 서로 분렬되여 계속 싸우고있소. 서로가 싸우고 또 외적과도 싸우고…

그러다나니 가족과 친척들이 갈라지고 생사를 모른채 비참하게 살고있는게 부지기수요. 이 비극을 어떻게든 우리가 끝장을 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오. 명백히 하건대 더는 동족끼리 싸우지 말아야 하며 반드시 하나의 나라가 되여야 한다는거요.

그러한즉 취약한 신라는 계속 례절있게 대하면서 포섭해야 할것이지만 오만한 후백제는 힘으로 다스려야 할것 같소. 후백제는 신라는 물론 우리까지도 먹으려고 하는 만만치 않은 상대란 말이요. 어떻소, 금필아우?》

왕건이 금필에게 묻고있었다.

《옳은 말씀이시오이다. 그런데 발해와 거란 그리고 동북방종족들은 어떻게 하시려는것이온지… 제 생각엔 발해는 조락될것으로 보이온데… 그러면 거란이 우리의 적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것이오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있는 힘껏 발해를 도와야겠지만 아직은 우리 힘이 거기까지 미칠것 같지 않소그려. 결국 거란과 대치되는 형세가 될것인즉 거란과는 우선 외교전으로 견제해야 할것이라고 보오. 우리가 삼국을 도모한 뒤에라야 거란과 전면전을 할수 있을거란 말이요. 그렇지 않으시오?》

《옳은 말씀이로소이다.》

금필은 왕건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평양수복과 그 북쪽으로의 확대 그리고 동북방의 오랑캐족들을 몰아내는것이 최우선적인 급선무였다.

그 중임을 왕건은 금필에게 맡긴것이였다.

왕건이 동북방정세를 수습할 인물로 금필을 지목한데 대해 대신들은 하나같이 찬성했다. 몇사람이 홍유를 떠올렸으나 이내 거두고말았다. 지략에서나 무예에서나 홍유보다는 금필이 적임자였던것이다.

금필은 왕건이 내여준 3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원정길에 올랐다. 로정은 평양성을 거쳐가기로 하였다. 평양을 중시하는 왕건의 의도를 받드는 의미에서였다.

열흘가까이 평양성에서 묵으면서 군사를 정비한 뒤 천명의 군사를 식렴에게 넘겨주고 동쪽으로 방향을 돌리여 또다시 군사를 확보하면서 보름이 지나 지금의 이 아홀령(아호비령)을 넘었었다.…

《령마루다!》

앞쪽에서 울리는 탄성에 금필은 생각에서 깨여났다.

잠에 취해 느릿거리던 대오가 일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금필은 말을 몰아 령마루로 달음쳤다.

령마루에 올라서자 찬바람이 금필의 얼굴을 때렸다.

저 멀리 동해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리라.

금필은 안개자욱한 산발들이 발아래로 펼쳐진 장쾌한 전경에 한동안 취해버렸다. 휘뿌연 밤하늘아래 구불구불 뻗어나간 산발들이 눈뿌리가 모자라게 일망무제하게 안겨왔다.

금필은 찬바람에 옷자락을 펄럭이며 한참이나 서있었다.…

아홀령을 넘은 대오는 령밑에서 하루낮을 쉬고 같은 방법으로 밤에 마령(마식령)을 돌파하였다. 그다음부터는 동해를 오른쪽으로 면한채 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세해전에 금필이 옮겨쌓게 한 골암진의 새 성으로 가려는것이였다.

개국초기 골암진은 배화(지금의 문천지대)에 고을을 두고있었다.

골암이란 매바위란 말이다. 지금은 새골산으로 불리우는 곳이다. 골이란 매를 의미하는 말이고 새골이란 매의 일종인 새매를 달리 부르는 말이다. 골암진이란 결국 매바위산을 끼고 앉은 성이라는 뜻이다. 그때 이곳을 평정한 금필이 이곳에서 백여리 떨어진 금야(지금의 정평)로 올리밀고 새로 이 성을 쌓게 하였었다. 금진강을 끼고있는 그곳 지형이 신통히도 이전 골암성과 비슷한지라 금필은 성이름을 그대로 골암진으로 부르도록 하였었다. 이번엔 그곳에 진을 치고 차후 타개책을 세우려는것이였다.

금필의 이번 원정길에는 평양성에 와있던 골암진성주의 양아들 윤신달이 동행하고있다. 그가 그동안 제 아버지가 옮겨쌓은 새 골암진성으로 안내하고있는것이였다.

금필은 윤신달의 양아버지인 골암진성주를 처음 찾아가던 세해전 일이 다시금 눈에 선하게 안겨왔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마령을 넘어 북으로가 아니라 배화고을이 있는 남으로 행군하였었다. 세해전 그때 금필은 맞다들리는 촌락마다 인가수를 장악하고 고려의 새 왕조 건립을 알리는 동시에 호족들의 우두머리들에게 새 고려국의 임명장을 내리였다. 군사의 징발과 군량조달체계도 놓치지 않고 세워나갔다.

금필은 평양성을 떠나오면서부터 들리는 고을마다에서 이 일을 착실히 해나갔다.

성천과 회창, 양덕을 거쳐오면서 이 사업에 전심전력했었다. 그때 성천고을의 두령은 궁성파수장임명장이라는것을 내놓았었다. 자기의 6대조가 《후고구려국》(《고려후국》)의 궁성파수장이였다는것이였다. 《후고구려국》의 수도가 성천에 있다가 의주로 옮겨갈 때 6대조가 떠나가면서 후손들에게 남기고간 가보라고 하였다.

그는 당나라침략군이 성천도성을 공략하려다가 혼쭐이 나서 달아난 뒤로 신라놈들도 머리를 들이밀어보지 못한 곳으로 성천은 명실공히 본래대로의 고구려땅이였고 지금도 고구려땅이라고 하였다. 금필로부터 왕건에 의한 후고구려국인 고려의 성립사실을 두세번 곱씹어 확인한 다음 이같은 사실을 말하면서 그는 왕건의 명의로 된 고려국의 성주임명장을 만족해서 받아들었다.

금필은 걸음마다 일이 잘되여나가는것이 기쁘기 그지없어 걸어도 걸어도 힘든줄을 몰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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