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회) 
 

금필은 지금 능산, 술희와 함께 자기 집 사랑방에 앉아있었다.

새벽닭이 울고있었다. 어제 저녁 궁예의 목을 따려다가 왕건의 출현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이들은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 마군장들과 차후의 방향을 의논하다가 이렇다할 락착을 짓지 못한 상태에서 돌려보낸 뒤 그대로 밤을 밝히고만것이였다.

《시중형님은 지금 우리가 궁예를 조용히 없애치우려고 하는것을 못마땅해하시는거요.》

금필이 입을 열자 술희는 도리머리질했다.

《궁예가 지금 시중형님을 해칠 생각에만 옴해있는터인데… 그런 궁예를 제거해야만 우리가 산다는것을 그래 시중형님이 모를 사람이란 말씀이요?》

《그건 옳으나 그 방법에 한해서는 우리가 하는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말이네.》

《하오면 궁예를 조용히 죽여야지 거리에 방문을 내붙이고 죽여야겠소?》

술희는 다시한번 짜증을 냈다.

《그렇게 소문을 내며 들어가다가는 되려 먼저 죽고말겠소.》

술희는 알다가도 모를 소리라는듯 두덜거렸다.

《아니야, 술희아우. 시중형님은 분명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러는거야. 좀더 생각해보자.》

금필은 다시금 머리를 싸쥐였다. 닭울음소리가 또 들려오는걸 보니 좀 있으면 날이 밝을것이였다.

이때 밖에서 법석 떠드는듯싶은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금필이 문밖에 대고 소리쳤다.

문지기군사가 사색이 되여 달려왔다.

《대문밖 보초를 저희들이 서겠다고 하옵나이다, 나리! 지금 내군이 집담밖을 둘러싸고있소이다.》

《뭐라구?》

금필은 놀라 일어섰다.

대문밖을 나가보니 정말로 내군의 군사들이 보초를 서고있었다. 그것도 좌우에 쌍보초를 세웠다. 그에 이어서 줄줄이 담밖을 에워싸며 내군병졸들이 늘어서있었다.

《이건 도대체 뭐냐?》

금필이 엄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왕께서 대신들의 집 수비를 내군이 하라고 명하였다 하오이다.》

군교 하나가 횡설수설했다.

금필은 아차! 하고 신음소리를 내였다. 궁예가 선손을 쓰고있는것이였다.

《내군은 대왕의 안전을 지키는 군사이거늘 어찌 하찮은 신하의 집까지 돌본단 말이냐? 그럴 여유가 있으면 궁성수비나 더 잘하도록 해라!》

금필이 짐짓 질책하자 군교는 이렇게 대꾸했다.

《대왕께서 후백제자객의 습격을 우려하시여 금필장수의 집은 특별히 찍어서 보냈소이다.》

《실로 감사할 일이노라. 대왕전하께 아뢰여라, 이 금필이 백골난망이라 하더라고.》

금필은 돌아들어왔다.

(이놈들이 내 집을 포위하였을 땐 시중형님의 집도 다름이 없으렷다.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한발 늦은게 아니요?》

술희가 눈을 흡떴다.

《아직은 초장만 친 꼴이다. 이렇게 하자. 술희는 죽기로 송악에 달려가서 식렴에게 군사를 이끌고 쇠두레로 오라고 해. 송악군사로 시중형님의 집을 둘러싸야 하겠다.》

《알겠소, 형님!》

술희는 두주먹을 부르쥐였다.

《능산형은 이길로 마군장들을 찾아가서 자기 군사들을 다 찾아쥐고 여차하면 움직일수 있게 대기하라고 이르시게.》

《금필형은 어찌하려오?》

《나는 이길로 시중형님의 집으로 가겠소. 우선은 형님의 신변을 지켜야 하오.》

《옳은 말이요. 자, 그럼 떠나세!》

셋은 각기 자기 말을 타고 대문밖으로 나섰다.

《어디로들 가시려는것이오이까?》

군교가 앞을 막아나섰다.

《제집으로 간다. 네가 무엇이기에 길단속을 하려드느뇨?》

능산이 소리치자 군교는 굽석하며 응수했다.

《그러면 가시오이다. 하오나 금필장수께선 들어가주시오이다.》

《뭐라구?!》

《오늘부턴 바깥출입을 마시고 집에 계시라는 대왕님의 분부이오이다.》

《그러면 옆집에 소풍하러 가는건 일없겠지?》

《그것도 아니되옵나이다.》

《그러니 두문령이란 말이냐?》

《그렇게 아셔도 무방한줄로 아뢰오이다.》

《오라질 놈!》

금필이 한손을 내지르자 군교의 울대뼈가 단박에 꺾어졌다.

풀썩하고 주저앉는 서슬에 옆에 섰던 병졸들이 쫘악 갈라지며 길을 열었다.

금필은 왕건의 집으로 말을 몰았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서 마주오는 한무리의 군사들에게 또다시 포위되였다. 군사들속에서 군교 하나가 한발 앞으로 나서며 종이말이 하나를 내밀었다.

《한림학사나리가 보내는 밀서이오이다.》

《한림학사가?!》

금필은 급히 쪽지를 받아 폈다.

《오늘 밤 술시에 궁성을 들이치소서. 마군장들이 반정의 기치를 들게 하시되 쇠두레백성들에게 먼저 이를 알리여 떨쳐나오게 하소서. 내군이 래일 밤 시중이하 장수들을 해치우게 되여있으니 분명히 오늘 밤에 하여주소서.》

(이것이로구나!)

금필은 무릎을 쳤다.

최응은 암살이 아니라 공개처형형식을 취하려는것이였다.

금필은 비로소 알아차렸다.

최응은 궁예를 왕건이 아닌 다른 부하들이 처리하되 세상에 들썩하게 소문을 내면서 거행하려는것이였다. 민심의 요구에 응한 거사라는것을 내외에 천명하려는것이였다.

이것이 바로 왕건이 바라는것이였다. 왕건은 제 손으로 상전을 들어내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사람이였다. 민심에 따른다는 명목을 명백히 해야 응할터이였다. 최응은 왕건의 이런 심중을 꿰뚫어보고 거사가 그렇게 흐르도록 유도하고있었다. 어제 저녁 금필이네의 거사를 찬성하였던것은 되면 좋고 되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보았기때문이였다. 모든것을 알아차린 금필은 그 즉시 형제들과 마군장들에게 군사를 일으키도록 전갈을 띄웠다.

술희는 식렴과 함께 송악군사를 이끌고 밤도와 달려와 왕건의 집을 둘러싼 내군을 모조리 생포해버렸다. 그다음 최응과 함께 다음행동에로 넘어갔다.

마군장들이 자기 군사를 찾아쥐는 일은 별 장애없이 진행되였다.

형세가 기운것을 알아차린 환선길과 리흔암이 본래의 자기 군사외에 궁예의 령으로 넘겨받았던 홍유, 배현경, 복지겸, 능산의 군사들을 미련없이 내주었던것이다.

왕건과 그 측근들의 집을 포위했던 군사들이 더러는 붙잡히고 더러는 쫓겨들어오자 궁성 내군장 은부는 온몸이 굳어졌다. 그는 허겁지겁 궁예의 침전으로 달려갔다.

《태봉의 마군장들이 의기를 들었다!》

《궁예를 몰아내고 시중을 임금으로 모시기로 하였다!》

철원도성에 우뢰같은 웨침소리가 울려퍼져갔다.

말을 탄 군사들이 거리와 골목을 누비며 목청껏 웨쳐대고있었다.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사람들이 하얗게 쓸어나왔다.

《시중을 임금으로 모셨다!》

《궁예가 죽었다!》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을 거친것이 마침내는 거사가 끝난것으로 소문이 퍼지고있었다.

때는 918년 6월 열이레날 하지무렵이였다. 술시(저녁 8시)경인데도 아직 어둠은 깃들지 않고있었다.

군사들과 백성들이 한데 뒤엉켜 거리를 누비며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임금으로 모시자고 웨쳐댔다.

하지만 왕건은 집안에 들어박힌채 움쩍도 하지 않았다.

지금 왕건의 집 토방마루에서는 식렴과 금필이 서성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리고있었다.

《왜 아직 도착하지 않는것이요?》

식렴은 금필에게 짜증을 냈다.

《곧 나타날거요. 방금 능산에게 독촉을 했으니까.》

금필은 능산에게 마군장들을 왕건의 집으로 데려오라고 일렀던것이다.

때마침 대문밖에서 말발굽소리가 요란스레 들려왔다. 뒤이어 대문이 열리며 마군장들이 들어섰다. 홍유, 배현경, 복지겸, 능산이들이였다.

《어서들 들어가서 시중을 일으켜세우시오.》

이들이 들어서자 금필은 지시하듯 웨쳤다. 그리고는 식렴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약속대로 합시다!》

《알겠소, 금필장수! 여기 일을 부탁하오!》

식렴은 살같이 말을 몰아나갔다. 그는 이제부터 또 다른 일을 해야 하였다.

《자, 시간이 없소. 어서들 들어가십시다.》

금필이 재촉하자 마군장들은 왕건의 침실문을 거침없이 열어젖혔다.

《시중! 때가 된듯 하오이다.》

《어서 일어서주시오!》

네 장수가 덥석덥석 절을 하며 독촉했다.

왕건은 침상우에 실내옷차림으로 단정히 앉아있었다.

그는 네 장수들을 한명한명 바라보고나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나에게 참으로 어려운 요구를 하고계시오. 내 다시한번 생각해보았는데 어쩐지 응하고픈 용기가 없소. 정녕 그러하오이다.》 왕건은 눈마저 감아버렸다.

홍유가 방바닥을 쳤다.

《이러시면 아니되오이다, 시중!》

배현경이 침착하게 뒤를 이었다.

《예로부터 어두운 임금을 페하고 밝은 임금을 모시는것은 천하에 다시 없는 의리라 하였소이다. 지금이 그때이라 밖에서도 백성들이 새 임금이 나서라고 웨쳐대고있는것인데 하늘의 이 뜻을 어찌 외면하시오, 시중!》

《궁예가 먼저 칼로 우리를 쳐왔으니 맞받아치는것은 정당방위에 해당한 일이로되 그걸 모른다 하시니 우릴 죽으라는것이요? 정녕 그것이요?》

홍유가 거듭해서 다그치였다.

《형님! 후세에 부끄럽지 말기를 바라옵니다. 왕년에 다진 대의를 형님은 잊으셨소이까?》

능산이마저 무릎걸음으로 다가붙었다. 그는 왕건의 무릎을 마구 두드렸다.

이때 안방문이 소리없이 열리더니 갑옷을 받쳐든 부인 류씨가 조용히 들어와 무릎을 끓었다.

《장수분들의 말씀을 들으매 일개 내인의 마음도 의분이 솟구치는데 대인께선 어쩌면 그리도 목석이시오이까. 대인께서 이러하심은 하늘을 외면하고 백성을 무시하는것이오이다. 더이상 지체마시고 속히 일어서시옵소서!》

그 말에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왕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늘의 뜻이 그러하고 백성의 뜻이 그러하다 하니 미거한 이 몸이 그 뜻을 받들겠소이다.》

홍유가 문을 차고 나오며 소리질렀다.

《어서 자리를 보아라!》

뒤미처 따라나온 네 장수가 뜨락바닥에 주런이 엎드리고 금필이 미리 준비해두었던 호랑이가죽을 마루우에 펴놓았다.

좀 있어 방문이 열리더니 갑옷을 입은 왕건이 천천히 나와 호피우에 올라섰고 뒤이어 홍유가 부르짖었다.

《지금 이 시각부터 시중은 임금이시오. 임금님! 신하의 절을 받으소서!》

《신하의 절을 받으소서!》

네 장수는 약속이나 한듯 이마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깊숙이 숙이여 하는 고두배를 세번씩 하였다.

임금과 신하의 구별을 알리는 첫 의식이 끝나자 금필은 소리쳤다.

《마군장들은 빨리 궁성을 공격하시오!》

《알겠소, 금필장수! 임금님을 잘 호위하시오. 우린 먼저 가겠소!》

네 장수는 대문을 박차고 나섰다.

그리고는 모여있는 군사들과 백성들에게 목청껏 웨치였다.

《시중이 임금이 되시였다!》

《궁성을 치고 임금님을 모셔가자!》

《앞으로!》

《앞으로!》

네 장수의 뒤를 따라 군사들이 질풍같이 내달렸다. 그뒤로 백성들이 따라 달리였다.

말발굽소리와 함성소리가 거리를 뒤흔들어놓았다.

일부 백성들은 여전히 왕건의 집을 둘러싼채 목이 터져라 환호성을 올리고있었다.

금필은 하늘땅을 진감하는 환호소리를 들으며 터질것만 같은 흥분을 겨우 누르고있었다.

아직 궁성은 점령하지 못했지만 이제 저 궁성 내전 룡상에 왕건은 앉게 될것이였다.

성공의 축배를 들 시각이 눈앞에 다가오고있었다.

네 장수의 궁성공격에 환선길과 리흔암이까지 합세했다. 그 당시까지 리흔암은 제가 이전에 궁예의 령으로 차지했던 웅주고을에 틀고앉아 뚱땅거리고있었다. 그러나 쇠두레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고 조만간에 왕건에게로 조정이 넘어가리라는것을 어렵지 않게 판단하고 날쌔게 올라왔었다. 대세의 흐름이 그로 하여금 왕건에게 가붙게 했던것이다.

그런데 내군장 은부는 예상외로 발악하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막아서고있었다. 내군은 여전히 은부의 지휘에 변함없이 복종하고있었다. 이들은 물러서면 죽는다는 생각에 옴해있는것 같았다. 하기는 아직도 대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야 어디라고 감히 물러설수 있으랴.

싸움이 길어지고있었다. 시간이 어지간히 흘렀는데도 성은 깨여지지 않고있었다. 금필은 조급해났다. 성을 깨지 못하고 새날을 맞을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이밤으로 일을 끝내야 하였다.

금필은 피뜩 생각되는것이 있었다.

(궁예를 성밖으로 끌어내야 한다. 그가 형세가 기운것을 알고 자결할지도 모르나 열에 하나 잔명을 유지할 생각을 하였다면 빠져나갈 구멍을 찾을수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 잠시 구멍을 열어주는것도 수가 될것이다.)

생각이 이에 미친 금필은 즉시 궁성쪽으로 군사를 띄웠다.

금필의 제안은 네 장수들의 찬동을 받았다.

능산은 즉시 자기가 맡은 산허리와 잇닿은 북문쪽의 군사를 솎아내게 했다.

홍유가 충차를 끌어다 남문을 짓이겨댔다. 이어 군사들이 쓸어들어가 내군을 북문쪽으로 몰아내기 시작했다.

은부는 북문의 빗장을 열어젖히고 궁예를 안은채 말을 몰아 빠져나갔다.

네 장수는 궁예를 추격하게 하는 한편으로 궁성의 내전으로 쳐들어가 궁성을 점령해버렸다.

그 시각 가려는 평온한 기색으로 단정히 앉아있었다.

이제는 고함소리, 비명소리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인츰 환호성이 터져오를것이였다. 물론 왕건을 추대하는 환호일것이였다. 그건 조금도 믿어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현실이였다.

이 시각 가려는 단 한가지만을 생각하고있었다.

사람은 사람을 잘 만나야 하는것이야. 내가 애초에 궁예가 아니라 왕건을 만났더라면… 그런데 하늘은 얄미웁게도 나에게 왕건이 아니라 궁예를 먼저 만나게 하였으니… 그와 운명을 함께 하는수밖에…

가려는 벼락치듯 들이닥치는 군사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차종지를 입가에 가져갔다. 쓰디쓴 독약물이 거침없이 목안으로 흘러들어갔다.

금필이 가려를 죽이지 말라는 왕건의 분부를 받고 달려왔을 때는 그가 이미 자결한 뒤였다. 그의 무릎앞에 《불사이군》이라는 네글자가 씌여진 종이장이 놓여있었다. 충신은 두 임금을 모시지 않는다는 뜻이였다.

가려가 자결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왕건은 아쉬움을 금치 못해하면서 그를 잘 안장하라고 당부했다.

《끝내 나를 외면하고말았소만 그는 참 아까운 사람이요.》

왕건의 이 말에 모두가 머리를 끄덕이였다. 결말은 어찌되였든 가려는 고구려의 재건을 바란 사람이였던것이다.

궁성안은 인차 정리되였다.

대낮같이 밝은 뜨락은 언제 싸움이 있었던가싶게 깨끗했다. 불어오는 새벽바람에 피비린내만 풍기지 않았다면 한차례의 격전이 있었다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할 지경이였다.

박술희는 기고만장해서 룡상옆에 버티고서있었다.

싸움이 시작돼서 끝날 때까지 술희는 단 하나 내전과 룡상을 지키는 일을 해왔다. 내군이 달아나면서 혹시나 내전에 불이라도 놓을가 싶어 금필이 식렴, 최응과 짜고 술희에게 임무를 주었던것이다.

《페하께서 입궐하신다!》

우렁찬 웨침소리가 내전뜨락에 울려퍼졌다.

열어젖혀진 중대문으로 말을 탄 왕건이 들어섰다.

그뒤에 금필이 바투 따르고 뒤이어 홍유, 배현경, 복지겸, 능산, 리흔암, 환선길이 들어섰다. 그뒤로 기타 장수들이 줄을 지어 따랐다.

왕건은 천천히 대청우에 차려놓은 룡상우에 올랐다.

금필과 술희만이 왕건의 좌우에 서고 나머지 장수들은 모두 내전뜨락에 멈추어섰다.

《모두 내 말을 들으시오!》

홍유가 나서서 웨치자 좌중은 일시에 조용해졌다.

기둥마다에 꽂아놓은 홰들이 불찌를 튕기는 소리만이 들릴뿐 내전은 순간에 엄숙한 분위기에 잠겨들었다.

홍유가 다시금 목을 빼들고 웨치였다.

《하늘의 뜻을 따라 무인년(918년) 류월 열닷새날 인시중무렵(새벽 4시)으로 태봉은 새로이 임금을 모시였도다.

이제부터 새 임금을 따르려는 문무대신들은 신하의 례를 표해야 할것이노라.

페하! 홍유 신하의 례를 올리나이다.》

홍유가 제 먼저 무릎끓고 절을 하자 모두가 뒤따랐다.

《페하! 배현경이 신하의 례를 올리나이다.》

《페하! 복지겸이 신하의 례를 올리나이다.》

《페하! 능산이 신하의 례를 올리나이다.》

다른 장수들과 대신들도 일일이 고두배를 했다.

왕건이 두손모아 목우에까지 올리고는 머리를 반쯤 숙여보이며 이에 화답했다.

대낮같이 밝은 빛에 왕건의 근엄한 얼굴이 드러났다.

이 순간 왕건을 바라보는 금필의 가슴은 터질듯 방망이질했다.

얼마나 고대하던 날이였던가!

이날을 위해 땅을 주름잡고 바다를 주름잡았다. 말우에서 내려볼 날이 없이 뛰고뛰였다. 그렇게 뛰고뛰여 초년에 세운 뜻을 이룬것이다. 물론 아직은 첫걸음이였다.

왕건의 얼굴도 상기되여있었다.

왕건의 웅글은 목소리가 내전뜨락에 울려퍼졌다.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오이다. 우로는 하늘을 따르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따르기를 일년 열두달 삼백예순닷새 어느 하루도 소홀히 하지 않겠소이다.

국명은 <고려>요, 년호는<천수> 라 하오니 이를 만방에 크게 알리는바이오.》

이로써 왕건은 41살 장년나이에 고려국의 태조가 되였다.

《페하 만세! 만만세!》

《고려 만세! 만만세!》

왕건을 환호하는 함성이 하늘땅을 진감했다.

궁예의 폭정이 끝나고 왕건의 새 정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였다.

새 나라 고려국이 선포되는 장엄한 순간이였다.

대고구려를 이으려는 왕건과 금필형제들 아니, 이 나라 백성들의 소망이 실현의 첫걸음을 떼는 순간이였다.

만세의 함성은 쇠두레궁성안팎으로 멀리멀리 울려퍼져갔다.

이날 궁예는 은부의 도움으로 살아났으나 며칠후 부양(평강)부근에서 농부들의 손에 잡혀 맞아죽었다.

왕건은 될수록이면 궁예를 죽이지 말고 데려오라고 분부했으나 일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궁예를 추격한 군사들과 부근 백성들이 그동안의 원한을 누를길 없어 붙잡자마자 숨을 끊어놓은것이였다. 궁예는 가을한 밀밭에 내려와 밀이삭을 줏다가 농부들의 눈에 띄여 변을 당하고만것이였다.

농부들은 허기져 몸도 가누지 못하는 궁예를 사정보지 않고 매질했다.

궁예는 쏟아지는 뭇매를 곱게 받았다.

아픔같은건 전혀 느끼지 못하였다. 다만 자기 얼굴에 내리꽂히는 농부들의 눈길이 너무도 매섭고 불이 철철 일어 자기가 지금 매를 맞아 죽는게 아니고 불에 타죽는다고 느꼈을뿐이였다.

궁예는 스르르 눈을 감아버렸다. 궁예의 죽음과 함께 《태봉국》도 사라졌다. 20년도 채우지 못한 력사의 한페지였다.

왕건은 이듬해에 수도를 쇠두레에서 자기 고향인 송악으로 옮기였다.

왕건이 나라이름을 《고려》라고 한것은 이미전부터 굳혀온 고구려계승의 뜻을 분명히 찍어 밝힌것이였다. 《천수》라는 년호도 하늘이 준 목숨이라는 뜻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는 겨레통합의 기치를 끝까지 실현하여 자손만대 번영하리라는 념원과 의지를 담고있었다.

바야흐로 새 나라의 새 력사가 시작되고있었다.

아직 겨레통합의 먼길이 눈앞에 놓여있었으나 신생고려는 신심에 넘쳐 첫발을 내디디고있었다.

왕건은 나라를 선포하자 즉시 조서를 내려 새 건국의 취지를 밝히였다. 뒤따라 관제를 설정하고 조정을 새로이 꾸려나갔다.

조정의 기구와 편제안은 최응이 내놓은것을 따랐다.

최응은 조정의 최고정무기관으로 광평성을 두고 그 책임자를 시중으로 부르도록 제안했다. 이미전부터 왕건이 정권을 쥐게 되리란것을 확신하고있었던 최응은 그간의 복잡다단한 소용돌이속에서도 여유있게 새 각료기구를 짜놓았었다.

광평성(최고정무기관), 내봉성(왕명하달), 의형대(사법검찰), 원봉성(교육, 외교문서작성), 물장성(전략물자보관) 등 태봉국의것을 그대로 따를것은 따르고 병부(군사행정), 창부(궁성의 경리일반) 등 신라것을 본딸것은 본땄으며 이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 순군부(군령기관), 백서성(문서작성), 도항사(배무이기관), 내천부(화페류통), 진각성(문서보관), 내군부(궁성호위), 내의성(왕명작성)을 더 내와 새 나라의 면모를 일신하게 하였다.

왕건은 최응이 하도 고맙기 그지없어 그에게 광평성 시중을 맡으라 하였으나 최응은 사양하였다. 나이도 나이려니와 선배들우에 올라서는것이 자기로서는 거북하기 짝이 없다는 리유에서였다. 왕건은 아쉬워하면서도 그의 뜻을 쫓아 그를 광평성 랑중(세번째 자리)으로 임명하였다가 다시 광평성 시랑(두번째 자리)으로 임명하였으나 최응은 여전히 사양하였다. 원봉성의 지사쯤 하면서도 페하를 능히 보필할수 있다 하며 그 자리를 차지하는것으로 만족해하였다.

최응의 됨됨이를 다시한번 가늠해보게 되는 계기였다.

최응은 두달후에 거행한 개국공신들을 표창하는 자리에서도 자기이름은 빼도록 하였다.

이때 왕건은 창업에 기여한 홍유, 배현경, 복지겸, 능산을 1등공신으로, 견린, 능식, 권식, 렴상, 김락, 련주, 마난 등 무장들을 2등공신으로, 기타 수천에 가까운 군사들과 관리들을 3등공신으로 평가하고 각각 상을 내리였다.

금필도 술희와 함께 왕건의 공식적인 표창을 사양하였다. 능산은 마군장임으로 공식적인 표창에서 빠질수 없지만 자기들은 형제들로서 응당 할일을 하였으므로 구태여 표창이 필요없다는데서였다. 들리는 말에는 이때 금필과 술희는 왕건이 손수 내린 술 한동이로 만족했고 최응은 술과 고기를 먹지 못하므로 왕건으로부터 붓과 벼루일식을 받은것이 고작이였다는것이다. 충신은 받드는 마음 하나면 그만이라는것이 이들의 생각이였던것이다.

왕건은 그때까지 변경의 고을을 차지하고 궁예의 통치를 거절해오던 령주나 성 우두머리들에게는 특사를 파견하여 포섭에 응할것을 알리였다.

한편으로 궁예의 학정을 피해 은거해있던 학자들을 찾아내여 학문연구에 종사하도록 조처하였다.

노비들을 조사하여 천명의 노비들을 국고를 털어 몸값을 물어준 뒤 자비로 살게 하였으며 조세항목을 대폭 줄이고 일부는 면제하도록 했다.

왕건의 정사에 백성들은 환호했다.

새 나라에 새힘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고려국은 서서히 솟아오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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