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 회) 
 

 

라주로 떠나가는 왕건을 바래우는 금필의 마음은 착잡했다.

금필은 아직도 궁예에게 묵묵히 복종하는 왕건이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대세가 자기에게 기운것을 모르지 않겠는데 받아들이지 않고있는것이였다.

어제밤 금필은 의형제들과 함께 왕건에게 들이댔었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온 시각이 도래했소이다. 어찌하여 형님께선 하늘이 준 이 기회를 외면하는것이오이까?》

《형님께서 우리와 언약한 대의를 귀중히 여기신다면, 대의를 위하는 마음이 분명하다면 지금 이 시각에 의기를 들어야 하오이다.》

능산은 가슴을 두드렸고 술희는 방바닥을 쾅쾅 내리쳤다.

《그대들의 진정은 고맙기 그지없소. 나를 믿어주는 그 마음을 내가 왜 모르겠소. 하지만 난 응할수가 없소.》

왕건은 죄송한 표정을 짓고있었으나 한편으론 웬일인지 불만스런 내색도 비껴있었다.

《그리 아시고 아우들은 고정하시오.》

왕건은 쓸쓸히 작별을 고하였다.

(웬일일가?… 어찌하여 주저하고있는것일가?…)

금필은 왕건의 속내를 알수 없었다.…

떠나가는 왕건의 좌우에 환선길과 리흔암이 부장으로 따르고있었다. 그뒤로 지금껏 궁예를 따르던 측근장수들이 줄줄이 련달았다.

궁예는 금필과 술희를 후방업무를 맡아보는 림시직무로 돌려놓아 왕건에게서 떼여버리였다. 하여 왕건의 손발이나 다름없는 그들을 멀리 뒤전에 밀어던지고 자기의 측근들로 왕건을 둘러싸놓았던것이다.

어찌보면 왕건이 이들을 데리고가는것이 아니라 이들이 왕건을 생포해가지고 가는것 같았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였다. 마군장인 능산도 철원에 떨어지였고 홍유와 배현경도 부대를 환선길과 리흔암에게 인계한채 무졸장수가 되여 도성에 남았다. 복지겸이 병부령으로 되여있었으나 그도 군사를 직접 쥐고있는 자리는 아니였다.

신통히도 궁예는 왕건을 따르는 장수들만 떨구어놓았었다.

왕건을 경계하고있는것이 헨둥하니 알렸다. 이제 궁예가 한걸음 더 나아가 왕건의 신변을 해치려 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랴.

금필은 온몸이 졸아드는 기분이였다.

《형님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주저앉아있는것이 옳은 일이요?》 술희가 두눈을 부릅뜨고 부르짖었다.

《어찌겠니, 형님이 저러한데야…》

능산이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였다.

《지금은 가만 있는 수다. 좀더 지켜봐야지 별수 있느냐?》

금필은 화가 북받쳤으나 참을수밖에 없었다.

이 시각 후백제의 도성안에서도 론의가 분분했다.

견훤과 마주앉은 간무는 자기의 리간계가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는것을 곱씹고있었다.

첩자들의 활동이 드러난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는것이였다. 아지태를 왕건이 제거한것은 후백제에 손해가 아니다, 그로 해서 궁예가 왕건을 신임하는것이 아니라 더욱더 경계하게 되였다, 궁예와 왕건사이에 넘지 못할 담이 쌓아진 이것이 태봉의 조락을 예고하는것이다, 이제 이들 둘사이에 최후의 결투가 벌어질것이며 그속에서 태봉이 서서히 무너질것이다, 조만간에 궁예세력과 왕건세력이 피가 튀는 싸움을 벌릴것이며 그것은 하루이틀에 끝나지 않을것이니 그 과정에 태봉의 몰락이 촉진된다는것이 간무의 주장이였다. 그것은 옳은 판단이였다.

그러나 간무도 한가지만은 내다보지 못하였다. 그는 궁예와 왕건이 지지기반으로나 력량상에서 비슷하다고 잘못 판단한탓에 이후의 결과를 옳게 예견하지 못하였던것이다.

왕건이 다 무르익은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것은 결코 자기의 힘이 궁예와 비슷해서가 아니였다.

왕건은 자기의 손으로 궁예의 목을 딸 생각이 없었기때문이였다.

왕건은 궁예가 자기를 해치려 할 생각까지는 하지 않고있는 때에 그에게 반기를 드는것이 도의적으로 적합치 않다고 판단하였기때문에 기회를 미룬것이였다.

왕건은 계산이 치밀한 사람이였다. 그는 대의를 귀중히 여기는 사람이였지만 아직은 자기에게 칼을 겨누지 않는 사람을 해치면서까지 룡상을 탐할 사람이 아니였던것이다.

그는 후세가 자기를 평가할 때 도의를 어긴 사람이라는 딱지가 붙는것을 용납할수가 없었던것이다.

금필을 위시한 왕건의 의형제들이 바로 왕건의 이런 심중을 아직 알아차리지 못하고있는것이였다.

왕건의 이런 심중을 모르기는 후백제의 간무도 례외가 아니였다.

그는 심리모략전의 성공에 현혹되여 궁예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음으로써 사실상 왕건을 돕고있다는것을 모르고있었다.

간무는 또 하나의 모략을 꾸미였다.

그것이 력사기록에 전하여지고있는 왕창근의 《고경참문》사건이였다.

왕창근은 당나라 상인이였다. 그는 어떤 알지 못할 장사군이 특이하게 만든 큰 거울을 싼값에 사라고 하자 제꺽 응하였다.

그 거울이 간무가 품을 들여 만든 모략품이라는것을 알리 없는 왕창근은 그 거울을 지고 철원도성으로 들어갔다.

거울이 아주 귀한 물건이던 때인지라 보기드문 이 큰 거울은 즉시에 왕궁안에 알려졌다. 거울은 왕궁의 내시가 비싼 값을 치르고 사들여갔고 이내 궁예앞에 놓여졌다.

궁예가 방안에 흘러들어오는 해살에 거울을 비추어보니 거울면에서 깨알같은 글자들이 아롱다롱 빛을 뿌리며 드러나고있었다.

 

삼수중의 사유아래

상제가 아들을 내려보내니

먼저 닭을 잡고 다음에 오리를 잡아

자년에는 중흥대사를 도모하리라

 

사년이 되면 두 룡이 보일것이니

하나는 청목뒤에 숨어있고

또 하나는 흑금동쪽에 나와있도다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부르면서 서로를 징벌하리

때로는 솟구치고 때로는 기울면서

서로가 겨루다가

사유에서 축은 반드시 멸하리니

이후에야 백성들은 편하고

임금은 길하리라

 

거울에 새겨진 글은 대체로 이러했다.

궁예는 거울에 새겨진 글의 뜻을 잘 알수가 없어 생각을 굴리다가 학자들을 불러들여 해득하게 하였다.

 

삼수가운데 사유라함은 신라를 지칭함이요

상제가 아들을 내려보냈다 함은 천자가 내린다는 뜻이렷다

청목뒤에 숨은것은 송악의 왕건이요

흑금동쪽에 나와있는것은 철원의 궁예이니

둘이 다투다가 궁예가 멸한다는것이로다

닭을 잡고 오리를 잡는다 함은

신라를 먼저 취하고 그다음 압록강까지 올리민다는 뜻이니

이것은 왕건이 천하를 도모한다 함이로다

 

해석을 마친 학자들은 아연실색했다. 이대로 올렸다가는 궁예의 쇠몽둥이에 무사치 못할것이였다. 하여 이들은 글자의 뜻을 반대로 외곡해 올렸다.

 

고경참문에 가라사되

삼국의 통일은 지금의 궁예대왕의 몫이로다

하늘이 예언하되 이후에 궁예대왕은

압록을 넘고 료동을 지나

천하를 지배하는 천자가 되리라

 

최응은 이들의 어깨너머로 거울의 글자를 먼저 해득하고 후백제의 모략임을 즉시로 알아차렸으나 모르는척 외면하였다.

그런데 가려가 이 글을 해득하고 궁예에게 진언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고경참문의 진뜻인즉 시중이 대왕님을 반역하고 왕위에 올라 삼국을 통일한다는것이오이다. 청목은 송악이라 건시중을 말하는것이고 닭은 신라 계림을, 오리는 압록강을 말하는것이오이다. 이런 예언은 <도선비기> 에도 씌여있는줄로 아오이다.》

궁예의 얼굴이 흙빛이 되였다.

《나도 이전에 그 도선이란 요승이 그런 글을 남겼다는 소리를 들은바 있다. 왕건이 나를 배반한다고 씌여있다?! 그 말을 믿어야 되겠소, 믿지 말아야 되겠소?》

궁예는 가려에게 울상이 되여 물었다.

《고경참문이 아니더라도 그것은 기정사실로 된 일인줄 아뢰오이다.》

가려는 머리를 조아렸다.

《하오면 왕건을 그냥 둘수 없다는 말이 아니요?》

《지체할수 없나이다. 대왕께서는 속히 결단을 내리소서!》

가려는 간절히 요청했다.

궁예의 주먹이 우들우들 떨기 시작했다.

《하늘이 그에게 마음을 주었다면 따르는수밖에 없지 않느뇨?》

《천부당만부당한줄 아뢰오. 하늘은 손을 쓰는 사람에게 마음을 줄것이오이다.》

《모를 소리요.》

궁예는 맥없이 주저앉았다.

《간절히 비나이다. 왕건을 제거하시옵소서. 더이상 미루어서는 아니될줄 아나이다.》

가려는 마루바닥을 피가 지도록 긁고있었다.

《알겠노라, 잘 알겠노라!》

궁예의 외눈에 살기가 내뻗치였다. 궁예는 그바람으로 라주에 어지를 날리여 왕건과 이하 장수들을 모두 쇠두레로 호출하였다.

궁예의 호출을 받고 라주를 떠나 쇠두레로 올라오던 왕건은 송악에서 멈춰섰다.

금필이 보낸 밀서를 가지고 전령이 달려내려와 막아선것이였다.

환선길과 리흔암을 위시한 궁예의 측근들은 서둘러 쇠두레로 올라갔다.

이들은 왕건이 송악에서 로독을 풀어야겠다고 하자 눈들이 굳어졌다. 궁예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쉬고프면 쉬는 왕건의 태도가 이전에 없던것이였기때문이였다.

그러거나말거나 왕건은 송악에서 하루밤을 묵었다. 금필이네들이 하루건 이틀이건 안전신호를 보내올 때까지 송악에 꼭 머물러있으라고 부탁하였기때문이였다.

그러나 왕건은 하루만에 다시금 쇠두레로 향하였다. 금필의 말만 듣고 송악에 머물러있다가는 자칫 궁예의 의심을 사서 뜻밖의 화를 입을수도 있다고 생각한것이였다.

이무렵 금필은 최응을 만나고있었다. 사태의 진면모를 따져보아야 했기때문이였다.

최응은 며칠전에 금필이네가 꾸민 궁예제거계획을 들은 뒤 찬성의 뜻을 표하였었다. 왕건이 제스스로 궁예를 제낄 사람이 아닌만큼 이 일만은 의형제들이 해야 한다는것을 알은때문이였다.

금필은 지금 왕건이 송악에 머물러있는 동안에 궁예제거를 단행하려고 서둘렀다.

마군장들에게 이 계획을 알려주고 협조해나서게 할 임무는 능산에게 맡겨주었다. 궁예의 목을 따는 일은 술희와 자기가 직접 하기로 하였다.

왕건이 라주로 내려간 뒤부터 금필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였다.

그것은 왕건이 반정에 응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금필은 그사이 생각을 거듭한 끝에 드디여 왕건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게 되였다. 그가 차마 제 손으로 제우에 있는 임금을 제거할수가 없어 거절하였다는것을 깨달은것이였다.

(형님도 참… 그렇게 마음이 용해가지고 어떻게 대사를 이루겠다는것이요. 큰일을 위해 작은 허물쯤 각오해야지요.)

금필은 혀를 찼다. 그러면 그 일은 우리 동생들이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자 금필은 단호하게 결심을 내리였다. 최응과 짜고 궁예를 제거한 뒤에 라주에 련락을 띄워 왕건을 모셔다가 룡상에 앉히자는것이였다.

이 일이 제대로 기회가 맞지 않아 차일피일 미룬것인데 궁예의 호출로 왕건이 라주를 떠나 송악에 올라올 때까지 성사되지 않고있었다.

(오늘 밤을 넘길수 없다.)

금필은 최응과 만난 뒤로 능산에게 부탁하여 홍유, 복지겸, 배현경이들과 함께 부대를 장악하고 신호만 내리면 도성을 둘러싸도록 했다.

왕건의 신변은 왕식렴이 맡으면 될것이였다.

자정이 가까와올무렵 내군을 제거할 마군장들의 군사들이 도성의 문을 까려고 접근하고있을 때였다.

《건시중의 행차이시오.》

길잡이군사의 웨침소리와 함께 왕건의 행렬이 성문앞에 들이닥치였다.

(송악에 머물러있어야 할 형님이 어떻게 돼서 철원도성에 들어서고있는가?)

금필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된 일이시오이까? 왜 우리 말을 듣지 않고 올라오셨소이까?》

금필은 실망이 가득 실린 눈으로 왕건을 바라보았다.

《그래서는 아니되오. 아우, 내 들어가 대왕에게 도착인사를 하고 나올테니 돌아가있으시오.》

왕건은 엄한 눈길로 금필을 한번 바라보더니 두말없이 궁성안으로 들어가고말았다.

(안되겠구나!)

금필은 급히 돌아섰다. 능산에게 기다리라고 하고는 제잡담 왕건을 뒤따라 궁성안으로 들어갔다. 중대문앞에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게 되여있는 궁성안의 례법 같은건 안중에도 두지 않고 말을 탄 그대로 들어갔다.

《이게 무슨짓인고?》

내군을 책임지고있는 은부는 와뜰 놀라 대청밑으로 뛰여내려왔다. 은부는 농민군시절부터 궁예의 신변호위를 도맡아오는 측근이였다.

금필이 내전뜨락에 들어서니 왕건은 금시 궁예앞에 부복하고 선 상태였다.

《대왕께 아뢰오. 지금 이 시각에 시중을 살해할 음모가 꾸며졌다 하기에 이를 막으려고 들어왔소이다.》

《시중을 살해하련다고?!…》

은부의 볼편살집이 푸드득 떨리였다.

《그렇소.》

금필은 한손을 칼자루에 쥔채 주위를 둘러보며 대꾸했다.

《누… 누가 시중을… 죽인다고 했단 말인고!》

궁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질렀다.

《후백제첩자의 토설이라 하나이다. 시중이 쇠두레성안에 들어서는 즉시 살해된다고 하였다 하오이다.》

금필은 거침없이 꾸며대며 궁예를 노려보았다. 네가 정말로 그럴 생각이 아니라면 어디 증명해보아라 하는 자세였다.

《그… 그건 누구의 말인고?》

궁예는 다시금 마루를 굴렀다.

《시중의 4촌아우 식렴의 보고인줄 아뢰오.》

금필은 우선은 대답을 해놓고볼양으로 주저없이 대꾸했다.

궁예는 왕건이 4촌아우의 정보선을 리용하고있는줄 아는터라 말문이 막히였다. 실지로 제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들이대는것 같아 속이 졸아들었다.

《그래 후백제첩자들이 내가 시중을 죽인다고 했다더냐?》

궁예가 다시금 소리질렀다.

《그럴리야 있겠소이까. 우린 후백제자객들의 준동인줄로 알고있소이다.》

《후백제 자객들이?…》

궁예는 한쪽눈을 찡긋했다.

《그놈들이 진작부터 이 궁성을 노리리란걸 미처 생각 못했소이다. 만약에 대비해서 지금 도성밖을 마군장들이 둘러싸고있소이다.》

《?!…》

궁예의 외눈이 꼿꼿해졌다가 다시금 허둥대기 시작했다.

(마군장들이 도성을 둘러쌌다고?! 하마트면 내가 일을 당할번 했구나!…)

궁예는 식은땀을 흘렸다.

자기가 왕건을 제거하려고 한 사실을 이들이 눈치챈것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왕건이 들어서는 즉시로 마군장들이 도성을 둘러막을수 있는가? 후백제첩자의 토설이란 꾸며댄것일것이였다. 왕건을 다치지 못하게 하려고 죽기를 각오하고 나선것이였다.

궁예는 등골이 오싹해왔다. 정말로 왕건을 죽였다 해도 저자신이 살아남지 못할번 하였던것이다.

《그대는… 걱정이 지나쳤도다. 아무렴… 태봉의 궁성이 후백제의 자객들에게 놀림을 당할소냐?》

궁예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시중은 돌아가 쉬도록 하오. 그간 고생이 많으셨소.》

궁예는 짐짓 왕건을 위로해주었다.

《대왕께서도 심신을 안정하소서.》

왕건은 궁예앞을 물러나왔다.

금필은 왕건의 뒤를 바싹 붙어 따라갔다.

《금필아우! 아우는 오늘 괜한 수고를 하였소.》

왕건은 뒤따르는 금필에게 나직이 질책했다.

성문밖에 대기하고있던 마군장들이 왕건을 에워쌌다.

《무사하시였소이까?》

《십년감수로소이다.》

두서없이 아뢰는 그들의 인사에 왕건은 말없이 고개만 숙여보였다. 그리고는 손짓으로 자기 뒤를 따르라 일렀다.

금필의 용단에 의해 위기는 일단 지나갔으며 궁예는 왕건을 제거하지 못하였다.

궁예는 소스라쳐 놀랐다. 일개 부장인 금필이 꺼리낌없이 내전으로 쳐들어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한것이였다. 마군장들이 거의다 왕건을 보호하고 나선것도 궁예에게는 여간 큰 충격이 아니였다.

사실 궁예가 왕건을 제거하지 못한것은 금필의 위협때문만도 아니였다. 궁예가 왕건을 겨누었던 칼을 일시 내린것은 최응의 계략때문이였다.

최응은 궁예가 가려와 짜고 왕건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은것을 간파하자 즉시 궁예에게 《조언》을 주었다. 왕건을 제거하는 그 시간이 곧 태봉국이 무너지는 시간이라는것을 설득시킨것이였다.

견훤이 바로 이걸 노리고있다. 임금의 손으로 신하를 죽여서 우리의 안을 허물자는것이다. 지금 왕건을 제거하는것은 태봉군사의 사령탑을 허물어 후백제로 하여금 식은죽먹기로 태봉을 타고앉을 기회를 만들어주는것으로 된다. 견훤의 수에 절대로 넘어가서는 안된다.…

궁예는 일단 주저앉았다. 최응의 말을 따른것이였다.

하지만 최응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금필이네가 궁예를 제거하지 못하고있는 때에 왕건이 위험도 아랑곳 않고 궁예를 찾아와 도착보고를 하고만것이였다.

최응은 이후의 사태수습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한편 궁예는 왕건을 그냥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다시금 절감하고있었다. 그가 궁예자신을 직접 해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를 따르는 측근들이 자기를 어느때건 해할것이 분명하였기때문이였다.

궁예는 이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기실 궁예는 자기가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제 먼저 왕건을 제거해야 한다는것을 알고있었지만 눈앞의 적 후백제때문에 잠시 멈추었을뿐이였다.

궁예는 왕건에게 왕위를 넘기면 어떨가 하고도 생각해보았었다. 허나 그것은 생각하기조차 괴로운 일이였다. 어떻게 솟구쳐오른 인생길이고 어떻게 일으켜세운 나라였던가?!…

궁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기에게 스스로 화가 동하자 그 병적증상이 다시금 폭발하였다.

네놈들이 이제는 나를 우습게 본단 말이지? 나를?!… 하다면 내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이제 보여주렷다.

울화병에 의심증까지 겹쳐든 궁예는 또다시 관심법과 쇠몽둥이를 휘둘러 죄없는 사람들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이를 보다못해 부인 강씨가 막아나섰다. 이미전에도 몇번 말려보았으나 도무지 막무가내였던지라 이번엔 녕월산골에 은거해있는 궁예의 이전 유모가 써보낸 편지까지 내보이며 애원했다. 궁예의 유모는 태봉국이 선 이듬해에 궁예가 보낸 사람을 따라 올라와있었으나 궁예의 폭정이 너무도 심해지자 간다온다 소리없이 내려가버렸었다. 아무리 설복해도 귀등으로 흘리고마는 궁예앞에 손을 내젓고 등을 돌려버린것이였다. 이런 유모에게 마지막기대를 걸고 사람을 띄워본것인데 유모는 두번다시 쇠두레엔 가지 않는다며 편지 한장만 보내였었다.

골백번도 더한 말을 또 곱씹어 아뢰는바 정에 살고 정에 죽는것이 사람이어늘 부디 정을 귀히 여겨주시오이다. 인정을 모르고 인정을 멀리하면 아무일도 안되는 법임을 명심하소서. 폭정은 자멸이오이다. 아직은 늦지 않았으니 이제라도 부디 선정을 베푸옵소서.

또 한가지는 한번 세운 뜻 중히 여기시고 오락가락마시고 부디 지켜가소서. 민심을 무겁게 대하시고 신의를 어기지 말아주옵소서. 내 감히 에미의 자격으로 부탁하는데 나를 에미로 생각한다면 자식으로서 에미의 이 마지막부탁만은 들어주소서.

편지의 내용인즉은 이러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코방귀를 끼고 나앉았다.

흥! 나를 죽이려 하는데도 선정이란 말이냐? 말도 아니될 소리. 뭐, 나보고 신의를 어기지 말라? 신의를 어긴게 누구게? 그게 바로 나라를 세워준 이 궁예도 몰라보는 무지렁이들이 아니던가? 누구보고 신의타령이야? 이제 보니 그 유모란것도 속통이 글렀어. 나를 외면하고 가버린것부터가 신의를 어긴게 아니고 무어야. 그 주제를 해가지고도 나를 훈계해? 에미의 자격이라구? 에미란게 도대체 뭘하는 족속들이야. 부정한 음행이나 일삼고 제가 낳은 새끼 하나 거두지 못하는것들이 아니야. 그런것들이 나에게 신의를 따져?…

사람의 생각이 외곬으로만 흐르고나면 무지의 극치에 이르는 법이다.

궁예는 저를 버린 신라왕실에 대한 원한을 애꿎은 녀인들의 음행에다 걸며 녀인일반을 증오하는데로 나아갔다.

너라고 다를소냐? 이 간특한 족속아! 너와 살을 섞을 때 내 벌써 직감했다. 뼈까지 녹여내는 그 요사스러운 음행이란… 에잇,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너같은 어지러운 족속들은 매모조리 없애치워야 해.

궁예는 강씨부인이 내보이는 유모의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리고는 살인을 그만두라고 거듭거듭 애원하는 부인을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죽여버렸다. 그것도 시뻘겋게 달아오른 쇠꼬치로 녀인의 제일 여리고 깊은 곳을 찔러 죽이였다. 녀자란 날 때부터 거짓과 간음을 타고난것이기에 미륵보살의 이름으로 벌을 주는것이라고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나중에는 두 아들마저 자기의 씨가 아니라며 쇠몽둥이로 때려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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