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 회)

 

6. 고려국을 세우다

 

궁예의 폭정은 나날이 더해만 갔다. 여기에 아지태가 곁불마냥 날뛰였다. 아지태는 궁예가 다시금 자기를 가까이 한 기회에 적수들을 완전히 제거할 생각인것 같았다. 그가 뜀뛰기를 할 때마다 줄초상이 났다.

태봉국의 모든 관청의 일들을 통솔하는 최고관청기관인 광평성의 장관인 평산사람 박지윤도 아지태에 의해 역모로 몰려 타살되였다.

그가 우봉의 송씨와 가까왔다는것이 그 리유였다. 둘사이에 태자책봉 역모가 꾸며졌다는 생거짓말로 제낀것이였다. 박지윤은 송씨가 태자책봉을 서둘러야 한다는 말에 깊은 생각없이 머리를 끄덕인것이 역모에 맞장구를 친것으로 몰리고말았던것이다.

아지태의 칼부림에 바빠맞은 류천궁은 병을 핑게로 정주에 내려가 은둔해버리고말았다.

옛 고구려지역출신들을 둘씩이나 조정에서 제거해버린 아지태는 그 자리에 청주출신측근들을 들어앉혔다.

이즈음에 벌어진 일들을 하나하나 정리해보던 금필은 더는 지체할수 없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 그길로 왕건을 찾아갔다.

《형님! 아지태 그놈을 제거해야 할가보오이다.》

《대왕전하의 한쪽팔인 그를 제거해야 할 리유가 뭐란 말이요?》

왕건은 영문을 알수 없다는듯이 모르쇠를 하였다.

(아지태가 운주사 중과 단골로 놀아난 사실을 알려준지가 언젠데 아직도 이렇게 미적지근하게 나올가.…)

금필은 속이 울컥했으나 지그시 눅잦히며 말을 이었다.

《형님도 지금껏 지켜보아 알다싶이 그놈은 고구려재건의 뜻을 거역해나선 우리 의형제들의 적이므로 죽어 마땅하다 그 말이오이다.

그놈의 입놀림 하나로 이 쇠두레로 도성이 옮겨진데다 마진이요, 태봉이요 하는따위로 국호까지 뒤바뀌여 후고구려란 국명을 더는 부를수조차 없게 되지 않았소이까. 그 죄가 그래 살려두어 가당한것이란 말이오이까?》

금필의 어성은 점차 높아졌다. 정말이지 생각할수록 이가 갈리고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놈이 아닌가. 송충이를 이마에 붙인 기분으로 궁예의 밑에 있기를 벌써 십년하고도 또 십년을 지나보내였다. 그 기간이면 고구려를 골백번도 더 세우고 남았을 아쉬운 세월이 아닌가. 금필은 이것이 분해서 참을수가 없었던것이다.

그런데도 왕건은 두눈을 감은채 묵묵부답이였다. 금필은 화가 치받쳤으나 다시금 자제했다. 그리고 말소리를 낮추었다.

《내 오면서 곰곰히 생각해보았소이다. 까짓놈 하나 없애지 않고서도 때가 되면 우리 일이 성사되지 않을리가 없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놈이 후백제 간자의 끄나불노릇까지 하였는데야…》

그제야 왕건의 두눈이 들리였다.

《참, 그놈이 최응을 손대려 한 후백제 간자의 끄나불노릇을 하였지? 하기는 아우의 말대로 고구려재건을 바라는 민심을 거역한 그죄 하나만으로도 이미 벌을 받아야 할 놈이였소. 처리하세나, 이 밤을 넘기지 말고… 이 일을 아우들과 잘 의논해서 하게. 가려에게도 피끗 아지태의 죄목을 알려주는게 좋을것 같네.》

《알겠소이다.》

금필은 급히 되돌아나와 능산과 술희를 만나 행동방향을 의논하고 뒤이어 가려를 불러내였다.

《금필장수가 어떻게 이밤에 나를 만나자 하시오?》

가려는 평시에 서로 만나도 눈인사나 나누는 정도였던 금필이 야밤중에 그것도 쇠두레바닥에서 제일 번다한 술집이자 곧 려인숙이기도한 《매화당》의 뒤골방으로 자기를 불러낸 그 속내를 알수 없어 콩콩 잔기침을 해댔다.

《보종대사! 요지음 대왕의 옥체에 무슨 변고는 없으실테지요?》

《변고라니요? 무슨 일이 있었소이까?》

가려는 화들짝 놀라며 한무릎 다가왔다. 혹시 궁예가 밤마다 내전에 나가 죄인 아닌 죄인을 다스리고 그대신 낮에는 침전에서 잠만 자면서 정사고 뭐고 다 집어치우기가 일쑤인것을 꼬집어 하는 말이 아닌가 하면서…

《내 사람들이 자객을 하나 잡아왔소이다. 한림학사 최응나리를 죽이려 하다 덜미를 잡힌거지요. 하온데 그놈의 몸에서 나온 살생부에 대왕과 함께 보종대사의 이름도 적혀있었소이다.》

《대왕과 내 이름이?!…》

가려는 한길 올랐다가 주저앉았다.

《사전에 막았기망정이지 큰일이 날번 했소이다.》

《그놈을 어찌했소이까? 당장에…》

가려는 다시금 솟구치며 입에 거품까지 물었다.

《우리 손에 있으니 안심하시오. 그보다 더 놀라운것은 그 자객이 바로 지금까지 모사 아지태와 즐겨 무릎을 맞추어온 운주사의 중놈인 사실이오이다.》

《무엇이라구요? 아지태가… 그러니 아지태가 후백제의 자객과 한속통이라 그 말씀이시오?》

《그렇소이다. 그는 후백제의 끄나불이였소이다.》

《이런 날벼락이라구야…》

평시에 몸수습이 여간 깐깐하지 않던 가려였건만 이 순간만은 혼맹이가 쑥 빠진것이 흡사 뱀이 삼켰다가 토해버린 개구리모양이였다.

《그만 진정하시고 차나 한잔 마시고 얼른 대왕에게 가서 아뢰시오. 인츰 아지태를 묶어가지고 따라가겠소이다.》

《알겠소이다, 알겠소이다.》

가려는 차고 뭐고 내동댕이치고는 황황히 사라졌다.

한편 옆방에서는 능산과 식렴이 아지태를 결박하고있었다. 아지태는 식렴이 차나 한잔 마시자고 《매화당》으로 청하자 자기가 시종 긁어내리는데만 전념하고있는 그 왕건의 4촌동생인지라 경계심도 없지않았으나 큰 물주이고 호족인 그가 뭔가 리속나는 일거리라도 흥정하자고 그러는지 어이 알랴 하는 생각에 발볌발볌 찾아온것인데 그만에 창에 치운 쥐신세가 되고말았다.

궁예는 내전으로 나가다가 허둥지둥 들어서는 가려와 마주쳤다.

《대왕전하! 아지태가… 아지태가 후백제의 첩자이오이다.》

《뭐, 뭣이?!》

궁예는 한길 뛰여올랐다.

《그런 놈을 끼고있었으니… 금필장수가 이제 아지태를 끌고오겠다 하였소이다. 시중도 온다 하였으니 그에게 비상동원령부터 내리게 하여주소이다. 태봉국에 위기가 도래하였소이다.》

《이게 무슨 변괴인고?…》

후백제 자객의 화살에 맞고 죽을번 한 일도 겪어본 궁예였다.

궁예는 치를 떨며 고함쳤다.

《빨리 시중을 불러들이라!》

왕건이 들어서자 궁예는 군령검을 주며 소리쳤다.

《시중은 어서 전권을 행사하라!》

금필이 술희와 함께 아지태와 운주사 중을 끌고 내전뜨락에 들어서자 왕건은 명령했다.

《아지태를 끌어내라!》

즉시에 아지태가 끌려나왔다. 머리는 풀어헤쳐져있고 입에는 자갈이 물려있었다.

《아지태는 대왕의 총애를 리용하여 자기의 지반을 닦으면서 청주세력으로 조정을 타고앉으려고 하였다. 네가 지금까지 무고한 대신들을 마구 죽인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지만 감히 대왕전하가 신라 경문왕의 아들이니 뭐니 랑설을 일삼으면서 미천한 사생아가 한 나라의 임금이라니 될번이나 한 일인가고까지 하면서 대왕님을 제끼고 룡상에 앉을 개꿈을 꾼것은 절대로 용서받을수 없는 죄로다.》

왕건의 일장열변에 궁예의 얼굴은 더 해쓱하게 질리였다.

왕건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아지태는 또한 후백제군과 내통하여 대왕의 충신인 모사 최응을 죽이려고 하였다. 최응을 죽이려다 잡힌 운주사 중이 바로 그 증거다. 운주사 중을 끌어내라!》

왕건이 다시금 소리쳤다.

운주사 중은 이미 모든것을 단념하였는지라 후백제 간무의 지령을 받고 궁예를 헐뜯는 소문을 퍼뜨린것으로부터 최응을 죽이라는 지령을 받고 움직인것까지 죄다 털어놓았다. 그는 원래는 궁예를 죽이려 했으나 기회가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는것까지 숨김없이 토설하였다.

문제는 이 중놈이 아지태와 어느 정도 역모사건에 결탁되여있는가 하는 그것이였다.

아지태는 자기를 추어주는 중의 감언리설에 넘어가 그와 술자리를 같이한것은 사실이나 최응을 죽이라거나 궁예를 죽이고 그 자리를 타고앉겠다 한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까밝힐수가 없었다. 입에 자갈이 물려있었던것이다.

왕건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술희부장은 이 군령검으로 아지태의 목을 칠것이다.》

술희가 튀여나가 왕건이 내미는 궁예의 군령검을 받아들었다.

《이 천하에 간특한 놈! 우리가 어떻게 일으켜 세운 나라인데 네놈이 그걸 가로채려 해? 너따위 좀벌레가 천하를 욕심내?! 이 간악무도한 역적놈을 단칼에 목을 쳐라!》

왕건의 추상같은 웨침소리와 함께 술희는 군령검을 휘둘렀다.

아지태의 목이 쑥덕 베여졌다. 순간에 아지태는 목떨어진 귀신이 되고말았다.

악!-

비명소리가 뜰안에 울려갔다.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였다.

《금필부장은 즉시 성밖으로 나가 아지태의 측근들을 씨도 없이 멸살해버리라!》

왕건의 령이 떨어지자 금필은 즉시 말을 몰아 달려나갔다. 그 달음으로 아지태가 그사이 천거해서 조정의 요소요소에 들어앉혔던 청주출신 관료들의 목을 모조리 따버렸다.

(이 하늘아래 고구려를 바라지 않는자는 살아있을 자리가 없다!) 금필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부르짖고있었다.

하루밤사이에 조정은 말끔히 가셔졌다.

궁예는 너무도 놀라 입도 벌리지 못하고있었다. 왕건의 일처리가 너무도 급속도여서였다.

아지태에게 단 한마디라도 그게 사실인가고 물어볼 사이도 없은것이였다. 궁예자신을 반역한 역적으로 락인하고 목을 쳤으니 거기에 무엇을 더 물어볼것도 없는것이였다.

(무서운 사람이구나!)

궁예는 왕건을 쳐다보며 부르짖었다.

가려의 심정도 다를바 없었다. 왕건이 자기같은건 어느 순간에 목을 딸지 모른다는 생각이 부지중 엄습해왔다.

(저 사람을 그냥 두어서는 안되겠구나!)

가려는 온몸을 떨며 생각했다.

아지태의 목이 떨어진 이후부터 조정의 면모는 달라졌다. 대부분 관료들이 이전처럼 이 눈치, 저 눈치 보는데만 급급하던 옹송그린 자세가 아니라 어깨를 솟구고 곧바른 얼굴을 하고서 제법 민심을 살피느라 반달음을 놓았다. 철원도성 안팎 어데서나 왕건을 칭찬하는 소리뿐이였다.

변화되여가는 주변의 형세에 누구보다 경악한것은 물론 가려였다.

(지금 태봉의 칼자루가 왕건의 손에 쥐여지고있는것이 아닌가?)

분명 그렇게 되여가는 형국이다. 하다면 앞으로 나나 궁예의 운명은?…

생각할수록 등골이 오싹하고 후회가 막심했다.

궁예가 아지태의 말만 쫓지 않았어도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것이였다.

궁예가 변덕을 부리지 않고 초지일관하게 고구려재건의 뜻을 지켜 나갔더라면 왕건과 가려자신은 지금 이 시각도 나란히 성공의 한길을 달리고있을것이였다.

허나 일은 이미 틀어져버렸고 민심은 왕건에게로 기울고있었다.

궁예에게로 부는 아지태의 입김을 제때에 막아버리지 못한게 큰 한이였다. 아직도 먼길을 가야 할 삼국통일을 다 먹은 떡처럼 생각했던 아지태, 그의 입김에 붕 떠서 생뚱같이 중국의 중원까지를 내다보며 마진이요, 태봉이요, 허풍에 돛을 단 궁예를 내쳐둔 후과가 이제는 돌이킬수 없는 좌절과 죽음의 문어구로 떨어진것이였다.

이렇게 주저앉고마는것인가?!

그러나 가려는 여기서 주저앉고싶지 않았다. 마지막힘을 모아 다시 일어서고싶었다.

그는 궁예에게 엎드려 간절히 아뢰였다.

《대왕전하! 왕건을 멀리하소서. 그리고 자신을 지키옵소서! 이 가려가 끝까지 대왕전하를 받들겠소이다.》

궁예도 눈물을 흘렸다.

그는 가려의 말을 쫓아 왕건을 다시금 라주로 내려보내였다.

때마침 라주정세가 위급한것을 핑게대고 왕건을 조정밖으로 밀어버린것이였다.

허나 궁예의 조치는 림시방편에 불과한것일뿐 최선의 방책으로는 될수 없었다. 궁예도 가려도 모르고있은것은 바로 저들이 민심을 옳바로 타지 못한 그것이였다. 고구려재건이라는 민심을 리용하려고만 하였을뿐 진심으로 변함없이 그를 실현하려는 의지가 없은것이 파멸의 근본원인인것을 모른탓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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