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8 회)
5. 위기를 넘기다 905년 4월 8일, 궁예는 쇠두레로 다시금 도읍을 옮기였다. 궁예의 쇠두레환도를 반대해나섰던 패서출신들은 헛물만 켜고말았다. 궁예의 모사인 가려는 탄식했다. 그도 아지태에게 지고만것이였다. 궁예는 아지태에게 완전히 빠져있었다. 《지금 조정은 송악과 패서출신들의 안방이 되였다. 철원과 명주, 청주의 세력들에게도 권력을 나누어주어야 한다. 그래야 궁예가 마진의 궁예라
할수 있다. 지금은 송악의 궁예이다. 잘못하면 왕건의 궁예가 될수도 있다.》 아지태의 이런 감언리설이 궁예의 마음을 돌려먹게 한것이였다. 가려도 왕건을 경계는 하였지만 아지태처럼 이렇게 도읍까지 되옮겨가면서 그를 따돌리려고는 생각도 못하였다. 도읍을 옮기는 일은 나라의 기틀이
흔들릴수 있는 근본문제였기때문이였다. 아지태가 청주백성들을 1천여호나 강제로 이주시키면서까지 쇠두레궁성건설을 다그쳐나갈 때에도 가려는 궁예에게 기대를 걸고 간언을 멈추지
않았다. 그간에 생사를 같이한 정의와 의리를 봐서도 궁예가 자기 말을 들어줄줄 알았었다. 허나 궁예는 막무가내로 아지태의 편을 들고말았다. 도성건설에 든 비용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 그 비용을 감당하자니 자연히 조세를 늘이고 수탈은 더 심해졌다. 백성들은 물론 호족들도 피해가 막심했다. 아지태는 궁예의 이름을 빌어 응하지 않는 호족들을 파직처형하는것을 서슴지 않았었다. 궁예의 본색은 이미 드러난 상태였다. 이전에 백성들과 끼니도 나누고 농사까지 지었다는 그 궁예는 벌써 없어진지 오래되였다. 아무리 무식해도
이목구비는 다 갖춘 백성들인지라 알것은 다 알게 되는 법이였다. 이들은 점차로 궁예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궁예의 급속한 변화속도에
뒤질세라… (궁예, 내 애초부터 너를 믿은것은 아니였다만…) 금필은 실망을 금할수가 없었다. 궁예가 지난해에 나라이름을 그 무슨 《마진》이라고 고쳤을 때 벌써 금필은 머리를 가로 저었었다. 궁예는 고구려재건의 기치를 들고 선포하였던 《후고구려》라는 나라이름을 세해만에 꺼리낌없이 줴버린것이였다. 그것은 결국 궁예에게는
고구려재건의 의지가 없다는것을 말해주는것이였다. 《마진》이라… 금필은 마진이란 국호에 대해서도 개탄을 금치 못했다. 천하를 어루다듬어 품는다는 뜻에서 마진이라고 했다는데 이 얼마나 허황한
소리인가. 그의 천하란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천하를 도모하련다고 해서 철원으로 도읍을 꼭 옮겨야만 한다는 리유는 또 무엇인가? 궁예에게 실망하기는 왕건도 마찬가지이리라는것을 금필은 모르지 않았다. 왕건은 어디까지나 궁예를 돕자는 생각이였다. 그는 궁예나 그의 측근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든 관계치 않았다. 자기가 바라는 고구려재건,
나아가서 단군자손의 한 강역아래 겨레가 모여살게 되면 더 바랄것이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도 자기 힘을 키우고 세력을 넓히면서 차근차근 착실하게
해나가야 한다. 후백제도, 신라도 힘으로만 할것이 아니라 회유와 설복을 배합해야 하며 그러자면 주체인 자기의 힘을 키우는것과 함께 나라일을 잘
다스려야 하는것이다. 그런데 궁예는 무지에 횡포를 덧쌓으면서 변하고있었다. 도대체 선정이란 말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되고말았다. 그가 덕으로 민심을 다스리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이젠 단 한명도 없게 되였다. 금필은 왕건이며 자기 형제들이 혼신을 다하여 바쳐가는 이 겨레통합의 대의가 희망의 첫걸음에서부터 무참히 좌절되고있는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왕건형님은 지금 얼마나 속을 썩이고있으랴.… 옆에서 위로의 말이라도 한마디 해주었으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련만…) 생각이 이에 미치자 금필은 왕건이 보고싶어 죽을 지경이였다. 하지만 금필은 라주를 뜰수 없었다. 견훤이 라주를 수복할 목적으로 군사를 키워놓고 공격할 때를 기다린다는 정보가 들어왔기때문이였다. 견훤이 전력을 다해서 공격해오면 버티기가 힘들었다. 세해전 이곳 라주를 점령할 때에도 백제의 힘을 분산시키느라 금필은 왕건의 밀서를 가지고 신라에 갔다오지 않았던가. 그가 신라 대야성
성주를 만나 후백제의 기를 꺾어 신라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겠으니 완산주에로 허위공격을 하는체 해달라는 왕건의 부탁을 전하고 성주가 이를
받아들였기에 라주공략이 성공할수 있었다. 그때 왕건은 라주공략의 비밀을 지켜야 하였으므로 정확한 지명은 밝히지 않고 그저 후백제의
서쪽바다가옆구리 한귀때기를 치련다고만 하였었다. 뒤따라서 신라군이 대야성밖으로 나와 완산주로 공격해오는 기만행동만 하면 견훤은 동서 량쪽에서
공격을 받게 되므로 어느 한쪽에도 력량을 집중할수 없게 되니 그 기회에 마진군은 목적한 지역을 쉽게 타고앉는것은 물론이요 공고히 유지할수 있게
된다는것이였다. 계속해서 왕건은 그러면 신라가 득을 보는것은 도대체 뭐냐고 반문할수 있는데 덕을 봐도 크게 본다는것, 그것은 바로 후백제의 서쪽
옆구리를 마진군이 시종 압박하게 되면 후백제는 온 신경을 서쪽에 곤두세우고 동쪽의 신라땅은 이전처럼 탐할념을 못하게 되는데 이것이 신라의
령토안정이라는 큰 득이 아닌가고 주를 달았었다. 대야성 성주는 금필이 가져온 왕건의 밀서를 조정에 올려보내여 임금의 윤허를 받고 즉시 군사를 일으켰다. 대야성 신라군의 허위공격은 마진군이 점령한 라주지역을 무난히 지탱하도록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고 볼수 있었다. 지금도 금필은 왕건이 세해전 그때처럼 신라에 부탁하여 대야성쪽에서 또 한번 공격해나오도록 하여주든가 아니면 마진군이 직접 후백제의 꼭뒤
어디바르쯤이든 한번 되게 때려서 견훤이 라주수복기도를 포기하게 해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고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뿐이였다. 형님도 힘드시겠지, 여기 일은 내 힘으로 해야 한다. 금필은 이렇게 생각을 돌리고말았다. 그런데 왕건에게서 급히 올라오라는 련락이 왔다. 왕건이 보낸 호위군사들은 금필을 쇠두레로가 아니라 충주로 안내하였다. 평택까지 배길로 이틀을 대고 다시 륙로로 하루반을 달려 금필은
충주남쪽의 온천골에 둔치고있는 왕건의 군막에 도착하였다. 금필은 왕건과 능산, 술희를 만나 그간의 회포를 나누며 하루밤을 쉬였다. 다음날로 금필은 왕건이 주는 밀서를 품고 소백산맥을 넘어섰고 저녁에는 상주에 있는 신라의 사화진 성주 김효종과 마주앉았다. 《왕건은 세해전에 마진이 금성을 치도록 우리 신라가 후백제를 끌어붙이면 이후론 절대로 신라를 넘보지 않겠다고 약속했댔소. 그때 그 약속을
받아간것이 금필장수 당신이 아니요?》 사화진 성주의 기상은 사뭇 준렬했다. 그도 그럴것이 그때 왕건은 밀서에서 자기는 앞으로도 신라군과 굳게 손잡고 후백제만을 칠것인바 후백제가
신라를 침범하는것은 크든작든 절대로 내버려두지 않으리라 약조하였던것이다. 겸해서 마진군도 신라지경을 범하는 일이 없으리라는 뜻도 명백히
하였었다. 그때 왕건의 밀서를 최종적으로 검토하고 신라임금을 설득시켜 왕건의 요구대로 해주도록 한 사람이 바로 지금의 사화진 성주 김효종이였다.
그 당시 효종은 신라조정의 시중 겸 대장수라는 임금 다음가는 관직을 차지하고있었다. 그가 이곳 사화진이라는 변방 한끝에 내려와 앉은것은 한해전 새로 앉은 경명왕과 척을 지게 된때문이였다. 척진 리유란게 다른것이 아니고
경명왕이 효종의 김씨계렬이 아니고 박씨계렬이라는 그 하나의 리유로부터 야기된 맹목적인 계파간 갈등이였다. 서로 물고뜯으며 엇갈라 조정의 대물림을 해오고있는것을 잘 아는 효종인지라 흰것도 검은것이라고 때없이 우기며 흠을 잡자고들터인데 무슨
정신으로 박씨일당의 칼날우에 올라서서 뜀뛰기를 하고있으랴싶어 제꺽 사표를 내고 물러났다. 그리곤 정사고 뭐고 싹 잊어버리고 속세에 스며들어
산천경개나 벗 삼으며 여생을 마치자 하고 대궐을 나서려는데 일이 그렇게만은 되지를 않았다. 그대마저 없으면 이 나라가 무슨 꼴이 되겠소 하며
옷자락을 부여잡는 사람들이 적지 아니 있었던것이다. 그래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래도 숨을 쉬고있는 동안은 나라를 지탱하는데 조금이라도 몸바침이 조상에게 도리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고쳐먹은것이 바로 여기 변방 사화진의 성주노릇을 하다 죽겠다는것이였다. 그의 시야에 그중 위태롭게 비쳐진 곳이 현재의 사화진이였기때문이였다. 대야성이 후백제 도성 완산주와 2백리가 못되는 서쪽전방
요충지인것으로 해서 견훤의 첫 공격대상이 되였다면 사화진은 후백제가 마진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도 먼저 차지하려 덤벼들 곳이 분명한때문이였다. 견훤이나 궁예나 사화진을 떨어뜨려야 그뒤의 신라땅을 먹기가 수월하다는것을 모를리 없는것이다. 사실 견훤이나 궁예가 신라땅을 무작정
떼먹으려드는것은 단 하나 자기의 세력권을 넓히기 위해서였다. 결국 두 맹수가 신라라는 고기덩이를 놓고 싸움질을 벌려놓은 꼴이다. 누구든 더 많이
떼먹고 세력을 불구어서 종당에는 둘중 하나가 거꾸러져야 끝이 날 판국이였다. 신라가 자기 명을 부지하자면 어느쪽에든 한쪽에 가붙어야 한다는 말도 그래서 나온 말이였다. 다른 수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견훤이와 궁예가 실컷 싸우다가 지쳐서 제풀에 둘 다 지리멸렬해버리고마는 때를 기다리는것이였다. 하지만 그것도
십분 가능해보이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둘이 싸우면서 실컷 뜯어먹고나면 걷어쥘 나머지가 있게 될런지 그것이 우선 알수 없는노릇이였다.
끄트머리라도 조금은 남아있어야 다시 일어설것이 아니냐. 다 떼우고 다 없어진 뒤에 다시 일어선다는것이 신라가 될런지 백제가 될런지 아니면
고구려가 될런지는 그때 가봐야 알 일인것이다. 에잇, 될대로 되여라, 나도 모를 일이로다 하고 외면하고말자니 그것도 맑은 정신에는 도저히 할짓이 아니였다. (어쨌든 숨이 지는 날까지는 조상의 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 당장은 위태로운 사화진에 몸을 던지자. 그곳이 내가 묻힐 곳이 될것이다.)
효종은 이런 강심으로 자진하여 사화진에 내려와있었다. 이렇듯 비장한 각오를 하고 내려와있는 효종에게 왕건은 사화진일대의 10여개 성을 잠시 마진군에 내여달라고 하였다. 금필이 가져온 왕건의
밀서에 그렇게 밝혀져있었다. 서라벌까지는 절대로 들어가지않겠다, 사화진도 다치지 않겠다, 다만 사화진 북쪽일대의 열한개 성만 잠시 차지하겠다, 그것은
후백제의 견훤을 유인하기 위해서이다, 후백제 주력을 이곳으로 끌어다놓고 일망타진해서 다시는 어디로건 머리를
기웃거리지 못하게 해놓겠다고 밀서에는 씌여있었다. 리해는 되나 쉽사리 응하기는 정말로 난감한 제기였다. 세해전 라주공략때처럼 왕건은 신라와의 동맹관계를 실현하여 자기 목적을 이루려
하고있는것이였다. 응해야 하는가, 아니면… 효종은 이게 혹시 궁예가 파놓은 함정이 아닐가 하고도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인차 머리를 저어버렸다. (왕건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설사 궁예가 그리하라 시킨다 해도 막을 사람이다. 왕건만은 믿을수가 있다. 이 금필이도…) 효종은 왕건이 신의를 생명으로 치는 사람이라는걸 알고있었다. 그래, 왕건을 믿자. 사화진을 살리고 신라를 살리려면 왕건과 손을 잡는 길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난 뒤 효종은 다시한번 오금을
박았다. 《다시한번 묻겠는데 세해전에 우리와 한 약속을 지금도 믿어 일없겠소?》 《그때 한 약조는 지금도 유효하오니 그 점에 한해서는 안심하시오.》 《리해는 되오만 신라지경을 유린하면서까지 마진의 리익만 챙기려드는 그대들이 정말이지 얄밉기 그지없소그려.》 효종은 여전히 볼부은 소리만 내뱉았다. 《알만한분께서 그러시니 유감스럽소이다. 견훤이 지금 이곳 사화진을 노리고있지 않소이까. 우리가 미리 차지하고있어야 견훤이 이곳으로
올것이고 그래야 우리가 견훤을 아예 눌러버릴수가 있는것인즉 이것이 신라에 좋으면 좋았지 나쁠리야 있겠소이까?》 금필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였다. 《좋소이다. 나는 궁예라면 몰라도 금필장수 당신과 왕건 두사람만은 믿겠소이다.》 효종은 드디여 승낙을 했다. 이전처럼 임금의 윤허따위는 개의치도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 지금의 임금은 화랑도가 페지된 이후에 난
사람인데다 그게 아니더라도 무예라면 십리밖에서부터 손을 내젓는 약골샌님이요, 병법따윈 취미부터 없고 가야금이나 뜯을줄 아는 분내에 콱 배인 날라리였던것이다. 하여 왕건은 사화진일대를 힘 한번 쓰지 않고 순간에 차지하게 되였다. 왕건의 사화진출병에 누구보다 놀란것은 견훤이였다. 견훤의 수염발이 부르르 떨고있었다. 왕건이 사화진을 차지하였으면 그아래 사벌주(성주)도 먹히운것이나 같은것이다. 그다음 왕건은 어디로
갈것인가? 다음은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이 목표일것이다. 마진이 서라벌을 차지하면 균형상 후백제는 더는 지탱하기가 힘들게 된다. 신라의 절반이
아니, 전부가 마진의것으로 되고말것이니 후백제가 무슨 힘으로 맞설수 있단 말인가? 막아야 한다. 죽기로 막아야 한다. 그것이 사는 길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견훤은 라주수복계획을 포기하였다. 《후백제의 생사존망이 사화진에 달려있다. 사화진으로 출병하라!》 견훤이 목청껏 웨치여 진행된 사화진출병은 후백제군의 커다란 패배로 끝나고말았다. 《퇴각》하는 왕건의 군사를 쫓아가다 녹아났던것이다. 5천의 철기군이 절반나마 죽었다. 왕건의 군사들은 차지하고있던 사화진성에서 싸우면 더 유리하겠는데도 웬일인지 성밖으로 나와 개활지대에서 접전하다가 그만에야 퇴각하는것이였다.
철기군인 견훤의 군사들에게는 오히려 싸우기가 더 유리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왕건의 군사들을 추격하는 도중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말들이 진창에
빠져돌아갈 때 왕건의 군사들이 에워싸고 화살을 날리며 역습했다. 형세는 기울어졌다. 견훤은 할수없이 남은 군사를 거두어 퇴각하고말았다. 사생결단을 부르짖으며 달려왔던 처음의 기세는 가뭇없이 스러졌다. 견훤은 막 울고싶었다. 하늘마저 왕건이만 도와주는듯싶었던것이다. 완산주로 돌아온 견훤은 한동안 움쩍도 못하였다. 라주를 지키기 위해 후백제의 꼭뒤를 쳤으면 하던 금필의 소원은 실현되였다. 사화진전투후 왕건의 이름은 또 한번 세상에 드날렸다. 장수들은 저마다 왕건의 휘하에 들기를 원하였다. 장수들은 금필에 대해서도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라주공략을 성공시키는데서 왕건의 한쪽팔역할을 충분히 감당한것만 봐도 그래 그보다
앞서 부여성까지 진출하여 후백제의 북상기도를 애초에 꺾어놓은것만 봐도 그랬다. 그뿐이랴. 이번 사화진싸움에서도 금필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가
사화진성주 김효종을 설복하였기에 왕건의 사화진일대에로의 공격이 순조롭게 실현될수 있었다. 그의 군사외교수완이 남다른 경지에 이르고있음을 모두가
인정하게 되는 계기로 된것이였다. 사화진일대를 탈환해보려고 긴급출동하였던 견훤의 철기군 정예부대가 고스란히 진흙탕속에 고하고만것도 금필의 주도적인 발기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때는 오월말(음력)이라 례년에 드문 가물로 사화진성앞 강변벌은 마를대로 말라있었는데 남서쪽에서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결을 가늠해보고 금필은
미구에 보리장마가 질것을 알아차리고 왕건에게 견훤의 군사들을 개활지대로 끌어내다 치자고 제기했었다. 금필은 사화진벌판이 이전에 가끔 지나간적이 있는 우봉 웃쪽 곡산일대처럼 진흙땅인것에 주의를 돌렸던것이다. 이런 땅은 가물때는 돌보다 더
굳지만 비만 오면 졸지에 진득진득해져서 말이나 사람의 발목을 사정없이 묶어놓는 악지대로 되리라는것을 간파했던것이다. 날씨를 예측하는데서는
남들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왕건도 이번만은 고개를 저었는데 금필이 하도 완강하게 제기하는터라 응해나섰더니 결과는 금필이 예견한 그대로였다. 왕건은 이번에 사화진에서 후백제군을 격퇴하고 승리한것은 전적으로 금필의 공적이라고 내놓고 치하했다. 왕건과 함께 승전의 기쁨을 안고 귀로에 올라 송악으로 돌아온 금필은 림씨처녀와 백년가약을 맺았다. 혼례는 왕건이 주관했다. 이날 능산은 금필을 형으로 정하고 자기는 동생이 되였다. 장가를 먼저 간 사람이 형이 되여야 한다는것이였다. 능산이 새각시의 잔을 받으며 불쑥 《형수님, 강녕하시오.》한것이 발단이 되였다. 자기는 색시가 없으니 《제수님!》하고 부를수는 없다는
리유였다. 《능산형님, 그러니 내가 형님보다 먼저 장가들면 나도 형이 되겠소이다?》 술희가 초치고나서자 능산이 눈을 부릅떴다. 《고현놈! 형이 되고싶어 장가를 먼저 가겠단 말이냐? 순서도 모르는 이노-옴! 네놈의 아래것을 떼서 개를 줄가부다.》 능산의 다불림에 술희는 혼비백산했다. 《아이고 형님! 그것만은 아니되오이다. 내 그만 잘못하였소이다.》 둘이 주고받는 익살에 좌중은 웃음판이 되였다. 전장만 누비던 왕년의 무장들이 오랜만에 허리띠를 풀어놓은 밤이였다.… 왕건이 송악에서 형제들과 담소하는 그 시각에도 철원도성에서는 이들을 시기하는 험담이 계속되고있었다. 험담의 초점은 물론 왕건이였다. 아지태는 왕건의 주위에 사람들이 끓이는것이 심상치 않다고 주어댔다. 그의 입술이 귀가에 닿을 때마다 궁예는 살기를 번뜩이였다. 그무렵 궁예는 신경이 더욱 곤두서있었다. 궁예가 신라 경문왕의 아들인데 왕실의 버림을 받아 쫓겨난 몸이라는 소문이 철원도성에
퍼진때문이였다. 궁예는 자기의 불미스러운 경력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화가 머리끝까지 북받쳤다. 신라라면 이부터 가는 옛 고구려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것인가? 아무리 신라왕실의 버림을 받았다 해도 그 피줄이야 어디 가랴 하고
생각할것이다. 가뜩이나 외눈이여서 병신된 소외감때문에 성격이 이그러지기 쉬운데다 자기를 업수이 보지 않나 하는 경계심이 늘 마음 한구석에 깔려있는
궁예에게 이 소문은 치명적이라 할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날이 광포해져갔다. 궁예의 바로 이런 변화에 고소를 금치 못해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후백제 견훤의 모사 간무였다. 그는 삼국통합의 주역이 왕건이 될것이라는
예언을 한지 오랜 사람이였다. 신라 서라벌에서 태여난 그는 당나라에 가서 10년을 류학하고 돌아오는 길에 견훤에게 포섭되여 지금은 그를
돕고있었다. 그는 궁예의 명이 길지 못하다고 내다보았으며 또한 견훤도 왕건을 이기지 못한다고 진단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견훤을 도와 왕건과 맞서고있는것이다. 리유는 단 하나 고구려 출신 왕건에게 지고싶지 않다는것이였다. 약한 견훤을 도와줘서 강한 왕건을
꺾어놓고싶은 속심이였다. 저보다 우월한자에 대한 일종의 시기심과 반발의식의 작용에서였다. 그는 왕건에 대해 탄복하고 인정하면서도 그를 훼방하고있었다. 그가 궁예를 받드는 이상 그에게도 이제 손을 대볼 생각이였다. 때가 되면
왕건을 본격적으로 해치려할판이였다. 간무는 금필에 대해서도 지목하고있었다. 그의 활약이 남다른때문이였다. 라주를 잃은 뒤에 간무는 실패의 원인을 곰곰히 따져보았다. 그가 찾은 원인의 하나가 왕건의 간자전(첩보전)과 심리교란전에 대한 방비책이
없은것이였다. 왕건이 이미전부터 면식이 있던 목포의 오다린을 꾀여내고 그를 통해 금성태수 종례까지 포섭해서 큼직하게 떼여먹고서 수염을 뻑 쓸고
나앉아 배를 두드리고있을 때까지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 뒤늦게나마 간무는 간자전, 심리교란전의 위력을 깨달았다. 이제부터 해도 늦지 않다. 간무는 팔을 걷고나섰다. 궁예가 도읍을 옮긴 철원이 점차 후백제간자들의 활무대로 되여갔다. 궁예의 경력소문돌리기가 첫 서막이였다. 견훤은 간무의 이 놀음에 처음엔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점차로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온전한 사람의 정신을 흐려놓는다는데 주의가
간것이였다. 심리전은 사람의 정신을 타격하기 위한것이였다. 정신이 흐릿해지면 일은 벌써 그것으로 끝나는것이다. 그 힘은 칼로 사람을 쓰러뜨리는데
비할바가 아닌것이다. 견훤은 무릎을 쳤다. 련이은 실패로 우울해있던 견훤은 다시금 용기를 가다듬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