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5 회) 이듬해인 903년 3월 금필은 왕건의 부름을 받고 부여성을 떠나게 되였다. 군사들과 백성들의 바래움을 받으며 성밖을 나와 얼마쯤 달리던 금필은 말을 멈추었다. 림씨자매가 길을 막아나선것이였다. 《저희들을 함께 데려가주소이다.》 이들을 보는 순간 금필은 가슴이 찌르르 저려왔다. 그들이 자기에게서 무엇을 바라고있는지 짐작이 가기때문이였다. 전날 저녁 송별연이 끝난 시각에 자기를 찾아왔던 이들이였다. 제동생이 금필이 자기를 너무도 보고싶어하여 데리고왔노라며 이고온 광주리를
내려놓은 언니는 가타부타없이 술방구리부터 꺼내고는 제동생에게 술대접을 들리고 술을 가득 부었다. 《내 동생의 성의이니 사양말고 드시오이다.》 《고맙소이다.》 언니의 독촉에 서둘러 술대접을 받아들던 금필은 동생처녀의 손에 제손이 닿는 순간 그가 흠칠 몸을 떠는터에 술을 쏟치였다. 찰랑이던 대접의
술이 넘어나며 두사람의 손을 적시고말았다. 처녀는 당황하여 얼른 손을 소매깃안으로 여미는데 처녀의 그 눈에 익은 손을 보는 순간 금필도 부르르
몸을 떨었다. 사실 금필은 방금전에 이들이 대문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느닷없이 가슴이 뛰여 당황해났었다. 그것은 자기가 마음속으로 그리워하던 사람들의
출현으로 해서 일어난 심리의 파동이였다. 그 파동이 처녀의 여린 손과 부딪치면서 온몸을 울려준것이였다. 그럴수밖에 없는 일이였다.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조차 한번도 안아주지 못한 금필의 몸이였다. 외할머니의 품에서 뭇녀인들의 동냥젖으로 연명하던
짧디짧은 유년시절은 일찌감치 흘러가버렸다. 그뒤로 금필에게 녀인의 손은 더는 바랄수 없는것이였다. 이런 금필을 품어준 사람이 바로 이 처녀였다.
처녀의 손은 금필의 뇌리에 깊이깊이 새겨져서 지워버릴수 없게 자리잡혀있었다. 금필의 가슴이 이처럼 뛰는것은 이성에 대한 감정보다는 모성애에 접한 환희의 감정이 솟구친때문이였다. 자기가 이들을 잊을수 없으며 평생
은인으로 존대해야 하리라는 생각이 함께 갈마든때문이기도 했었다. 금필은 자기가 이들을 이제까지 한번도 찾아보지 못한것을 후회했다. 하여 다시금 머리를 숙여 사례의 말을 했다. 《이렇게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하오이다.》 《난 우리를 아주 잊은줄 알았소이다.》 이렇게 말을 받으며 언니가 이번엔 광주리를 헤치고 검누런 조찰떡을 한개 꿰여 권했다. 《우리 고장에 나는 검은찰조이오이다. 금시 쳐가지고 온것이니 어서 맛보시오이다.》 《이곳에도 검은찰조가 나는가?!…》 금필이 반색을 하자 언니가 핀잔조로 받아넘기였다. 《나리는 이곳도 다 같은 겨레가 사는 한강토인걸 모르시오이까?》 《참, 그렇겠소이다.》 금필은 이곳도 자기가 태여난 다지홀이나 지금의 송악이나 다 같은 겨레가 사는 땅임을 새삼스레 절감했다. 《고맙소이다. 그사이 한번도 찾아뵙지 못했는데 이렇게 떡까지 쳐가지고 오셨으니 어떻게 사례를 해야 할지 모르겠소이다.》 금필이 거듭 치하하자 언니가 손을 내저었다. 《그간에 고을을 돌보느라 로고가 크신 나리이신데 이게 무슨 대수이겠소이까. 생면부지도 그 은공에 절을 해야 할터인데 하물며 우리 목숨을
구해주신 나리께 고작 이렇게밖엔 인사를 못해올리니 송구할뿐이오이다.》 《생명을 구해준 은공으로 말하면야 내가 두분에게서 받은 은공이 더 큰것이온데 정말이지 어떻게 하면 신세갚음을 할지 안타까울뿐이오이다.》 《그건 걱정할게 없소이다. 나와 동생이 죽을 때까지 나리를 따르면서 신세를 갚도록 하겠소이다.》 《마음만 가까우면 천리도 지척이라 하였소이다. 내 여기를 떠나가도 마음속에 언제나 두분을 모시고 살겠소이다.》 《우리를 마음속에 두시겠다 하시니 되였소이다. 실은 우리 후백제도 따지고보면 옛 고구려에서 갈라져나온 한피줄이 아니오이까. 그러고보면
겨레를 하나로 모으시려는 나리의 뜻은 정말이지 그른데가 없는 바른 소리오이다.》 금필이 언니의 거침없는 달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해하며 《아니, 저의 평생의 소원까지 다 알고계시오이까?》하고 칭찬하자 언니는 섭섭하다는듯
말을 받았다. 《나리께서 우리 고을백성들에게 말씀하지 않았소이까. 마진은 고구려의 뒤를 이어 겨레를 하나로 만들려는 나라라구요. 백제의 시조이신 온조왕도
고구려시조 동명성왕의 자손이시니 한겨레, 한피줄이 분명하거니와 이전에 이루지 못한 겨레의 통합을 지금에라도 이루어놓는다면 그이상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소이까.》 《정말이지 식견도 넓으시고 사리도 밝소이다.》 금필이 거듭해서 감탄하자 언니는 한무릎 다가앉으며 말을 받았다. 《사람이 제 조상이야 알아야 하지 않소이까. 또 조상이 같고 피줄이 같으면 마음도 같아야 할것이로소이다. 저와 동생이 나리를 해치려
했는데도 도리여 우리를 용서해주시였고 또 우리가 나리의 신상을 지켜드린것도 서로가 한피줄이여서 마음이 한곬으로 흘러 그리된게 아니겠소이까!》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오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온데 외람된 청을 하나 드려도 받아주시겠소이까?》 《무슨 청이오이까. 내 기꺼이 들어주리다.》 《분명히 청을 들어주시겠다 하였소이다.》 《그렇소이다.》 《하오면…》 자세를 바로 하고난 언니가 정색한 얼굴로 금필에게 말하였다. 《나리께서 우리 동생을 받아주시오이다.》 《?!… 이제 무어라 하셨소이까?》 《동생을 나리에게 맡기오니 받아달라 하였소이다.》 《뭐라구요?!…》 금필은 놀랐다.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지금 자기에게 청혼을 하고있는게 아닌가! 비로소 말뜻을 알아차린 금필은 얼굴이 해쓱하니 질렸다.
당장에 쿵- 하는 북소리가 가슴속에서 들려나왔다. 《그건… 이 사람에겐 어울리지 않는 청이오이다. 받아들이기가… 진실로 어렵소이다.》 금필은 떠듬거렸다. 머리속에선 위-잉 벌 우는 소리같은게 들려오기까지 하였다. 지금까지 무언가 아리숭하게 여겨지던것이 비로소 바로 이것이였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금필이였다. 아닌게아니라 금필은 자기가 이들과 도저히
떨어질수 없는 인연으로 맺아져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부부간의 결합이라는 인륜대사로까지 이어지리라고는 생각도
못해보았다. 《저같은것을… 무엇을 보고… 》 두서없이 중얼거리며 허둥이던 금필은 얼결에 동생처녀의 눈길과 마주쳤다. 그 순간 그는 이내 눈길을 내리깔아버렸다. 마주친 처녀의 눈빛이
너무도 강렬하고 눈부셔서였다. 간신히 마음을 진정하며 다시금 눈길을 들어보니 처녀는 어느새 제 언니의 등뒤로 몸을 가리워버렸다. 바르르 떨리는 어깨만이 보이였다. !… 금필은 너무도 모르고있었다. 처녀가 자기를 얼마나 사모하고있는가를… 금필을 간호해주는 사이에 처녀의 마음속엔 어느새 사랑의 씨앗이 움터올랐었다. 금필이 움에서 나와 군영으로 돌아가는 날 나직이 속삭이며《감사하오이다. 두분의 수고를 평생 잊지 않겠소이다.》라고 한 그 말이 매일,
매시각 처녀의 귀전을 울려주고있은것을… 처녀의 눈에 비낀 금필의 모습은 웅건하면서도 멋있었다. 거짓이라고는 도저히 찾아볼수 없는 그 눈빛만 보고도 처녀는 황홀해하였다. 어떤
악귀도 그 선한 눈빛앞에선 전률하여 달아나버릴것이라고 굳게 믿게 되는것이였다. 그 눈빛이 번뜻 번개의 섬광마냥 허공을 가를 때는 또 어떨가?!
이 세상의 불의가 모조리 순간에 산산이 부서져 날려가버릴것만 같았다. 사람의 됨됨이는 그의 눈빛만 보고도 알수 있다는것을 처녀는 알고있었다. 그의 가슴속에선 이미 사랑의 꽃망울이 부풀대로 부풀어서 지금 막
터치려고 모지름을 쓰고있었던것이다. 동생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언니로서 그 정상이 너무도 가긍하여 더는 어쩔수 없다고 단정하고 이처럼
금필을 찾아온것이였다. 허나 금필은 쉽게 답을 주지 못하였다. 《난 지금 군령을 받은 몸이오니 이러시면 안되오이다.》 금필의 목소리는 떨리였다. 《밤새 다시금 생각을 모아보았소이다. 나리와 떨어지면 우린 죽소이다. 거절하시려거든 우릴 죽이고 가소이다.》 금필은 이들이 만약의 경우까지 생각해보고 결심을 굳힌것을 알수 있었다. 아직은 이곳이 전장인데다 언제건 견훤에게 다시 빼앗길런지도 모를
곳이였다. 《이 몸은 죽음도 각오해야 하는 군사이오이다. 거기서도 아시다싶이 군사의 일이란 앞날을 기약할수가 없는것이오니 귀한 옥체를 함부로 내던지려
마시고 단념하시오이다.》 금필이 거듭 거절하자 언니는 한걸음 물러섰다. 《하오면… 동생을 내인으로 받아주지 못하시겠으면 우리를 심부름군으로라도 받아주옵소서. 일생 나리의 시중을 들며 살겠나이다.》 금필은 난감해졌다. 사람을 책임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그는 잘 알고있었다. 녀인에 한해선 더욱 그러하였다. 금필은 녀성을 아주
신성하게 여기는 사람이였다. 전장을 종횡무진하는 속에서도 얼핏 길가에서 어기는 녀인들조차 그는 무심히 보지 않았다. 저 녀인이 혹시 나에게 젖을
물려준 고마운 그 녀인은 아닌지… 아니면 그 후손일런지도… 이 파란만장한 세월속에서도 가냘픈 그 몸으로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나 이악하게 생계를
이어가고 집안을 지켜가는 녀인들… 전란에 휘말려 떠나간 남정네들이 이름모를 들판에 쓰러져갈 때 뒤이어오는 그 모든 고통을 말없이 받아안으며
후대를 낳아키우고 가문을 지키고 나라를 받들어가는 그들이였다. 실은 이들에 의해 향토가, 나라가 지켜지는게 아닌가. 이 하늘아래 사람 사는
세상이 존재하게 하는 크낙한 힘이 되여주는 녀인들, 이들의 머리우에 평화로운 삶이 깃들게 하고 자손만대 번영을 이루게 해야 한다. 그 길은
겨레를 하나로 되게 할 때 비로소 열린다. 금필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였다. 하여 그는 녀인을 깔보고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 하루밤 거치고 날밝으면 잊어버리는 그런 부류의 인간들을 경멸하였다. 하물며 생명의 은인인
이들임에야… 금필은 자기의 일생에서 중요한 결심을 내려야 할 시각이 닥쳐왔음을 깨달았다. 사내대장부로 나서 반드시 겪어야만 할 일, 인생의 반려자를
정해야 하는 일에 부닥친것이였다. 금필은 드디여 입을 열었다. 《좋소이다. 송악에 가서 우리 형님과 의논하고 후에 알려주겠소이다.》 《그 말씀을 믿고 기다리겠소이다.》 비로소 두 녀인은 길을 내주었다. 《그사이 몸성히들 계시오.》 금필은 말을 달렸다. 자매는 이윽토록 멀어져가는 금필을 바래우고 서있었다. 그들의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여있었다. … 금필은 부여성을 떠나 사흘만에 정주에 도착했다. 포구엔 백여척이나 되는 배들이 촘촘히 떠있었다. 능산과 술희가 먼저 달려나왔다. 《금필형님!》 《능산형! 술희아우!》 그들은 서로 얼싸안았다. 지금 이곳 정주포구에서는 궁예의 령으로 수군이 보강되고있었다. 목포와 금성(후에 라주로 됨)을 치자는 왕건의 제의로 이루어진
일이라는것이였다. (그러니 형님이 끝내 궁예를 설복했구나!…) 금필은 환성을 올렸다. 그게 언제던가… 그래, 지난해 여름이지. 왕건의 응원으로 부여성이 다시금 함락된 그때 금필은 왕건에게 이런 제의를
했었다. 《형님! 이번 부여성싸움을 치른 뒤에 내 좀 생각해본것이 있는데 들어보시겠소이까?》 《무슨 생각을 했나. 어서 말을 하라구, 어서!》 《이번 부여성공략때 우리가 금강하구로 수군을 올리밀었더라면 싸움이 한결 수월했으리란 생각을 했소이다. 아닌게아니라 우린 지금 숱한 수군을
가지고있으면서도 이렇다하게 써먹지 못하고있지 않소이까.》 금필이 수군을 써먹어야 하리라는 생각을 더 굳히게 된것은 이후에 식량기근을 타개하려고 식렴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 그가 배길로 쌀을 날라다준
때였었다. 《정말 그렇구만! 아우!》 왕건은 그때 금필의 말을 듣고 철써덕 무릎까지 쳤었다. 《아무때건 크게 쓸 때를 노려 내 지금껏 살만 찌우고있다만… 그래, 아우생각엔 어떻게 써먹으면 좋을것 같은가?》 《견훤의 옆구리를 바다로 해서 한번 쳐보는게 어떨가요?》 《바다쪽으로?!… 음… 해볼만 한 일이네. 아니, 꼭 해야 할 일이네. 그렇다면… 후백제의 어디쯤 쳐불가?!》 《울포(군산)나 옥포(김제)가 어떨런지… 하기야 바다는 형님이 더 잘 아시니…》 《울포나 옥포라… 이왕이면 아우! 목포가 어떤가?》 《목포라 하였소이까?》 《그렇네. 강진이나 려수같은 후백제의 남해안은 너무 멀고 울포나 옥포는 너무 가깝네. 그러고보면 목포가 그중 적합해. 후백제의 엉치 한쪽을
타고앉으면 그건 전략상으로 여간 의의가 큰게 아니잖은가!》 《정말 그렇소이다, 형님!》 금필은 자기가 궁냥한것을 왕건이 너무도 크게 가지를 쳐나가는데 일순 얼떠름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십분 가능한 일이였으며 잘 꾸며서 감쪽같이
해제끼면 되는 일이였다. 문제는 궁예가 이를 받아물겠는가 하는것이였다. 《궁예대왕이 말을 들을가?》 《어떻게든 받아물게 해야지요. 그건 형님만이 할수 있는 일이오이다.》 《그렇구나. 금필아우는 오늘 정말 기막힌 생각을 해냈소. 장하오, 장해!》 왕건은 기뻐서 어쩔줄 몰라했다. 궁예가 수락을 하겠는가고 걱정은 하였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