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회)

 

… 류수같이 흐르는 세월속에 어느덧 궁예가 송악으로 도읍을 옮긴지도 1년이 지나갔다.

그사이 궁예는 내정을 다지는데 골몰하였다. 그렇다고 군사업무에서 손을 뗀것도 아니였다. 그는 왕건이 군세를 확장해가는 모양을 흥미있게 지켜보고있으면서 병부령 환선길이 찾아와 왕건의 군사를 솎아내야겠다고 몇번 제의하는것을 그때마다 거절하여버리였다.

왕건이 자기 수하의 배군들을 정비하여 자신에게 수군을 만들어바치겠다고 하는 소리에 궁예의 귀가 솔깃해진것이였다. 례성강대안으로부터 정주, 강화, 인천에 이르는 해안에는 왕건이 부리는 배들이 백여척이나 되였다. 그것은 궁예가 이미 알고있는바였다. 그 배들은 아무때건 전함으로 돌릴수 있는것이였다.

왕건이 수군을 창설하겠다는 제의는 빈말이 아닌것이였다. 앉은자리에서 떡먹듯 손쉽게 수군을 얻는 일이였다. 궁예수하의 어느 장수가 이런 큰일을 해낼수 있을것인가. 왕건이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궁예로서는 꿈도 꿀수 없는 일이였다. 이런 판에 왕건의 군사를 갈라내야 한다니 그것은 결코 안될 말이였다.

궁예는 지금까지 자기가 키워온 군사가 한쪽팔에 불과하고 왕건의 군사가 자기의 또 다른 한팔이 되고있다는것을 절감하고있었다. 왕건을 여위게 할것이 아니라 더 살을 찌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궁예였다. 왕건만 틀어쥐면 된다, 그를 또 하나의 이 궁예로 만들자, 궁예는 이렇게 생각을 굳혀나갔다.

궁예는 환선길과 리흔암이 정 시끄럽게 나온다고 생각될 즈음에 그들 둘을 잠시동안 북방순찰명목으로 송악밖 멀리로 내보내였다.

환선길과 리흔암이 군사를 끌고 서북방순찰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금필은 아쉬움을 금할수가 없었다. 금필은 수군확장을 위한 일로 정주포구에 내려가있는 왕건을 찾아갔다.

《형님, 우리가 관심하던 곳으로 그네들이 눈을 돌렸소이다.》

《하지만 그들은 인츰 돌아오고말것이요.》

뜻밖에도 담담한 왕건의 대답이였다.

《환선길과 리흔암, 그 두사람은 세상을 보는 눈이 우리만 못하다오. 우리같은 뜻을 품고 그에 지향하는 사람들이 아니란 말씀이요. 그들은 지금 내가 너무 비대해져서 저들 지위가 약화될가보아 그 걱정에만 옴해있는 그런 인물들이요.》

《그럴가요?》

《선종자신이 아직은 북방의 의미를 다 모르고있소. 내가 북쪽을 미리감치 관심할것을 조언하자 그는 남쪽의 량길세력을 막는것이 더 급하다며 시끄러워하는 눈치였소. 참, 그대는 알고계시오? 견훤이란 사람이 신라조정에 반기를 들었다는걸. 백제재건의 기치를 들고 어지간히 세력을 늘쿠고있다 하오.》

《백제를 재건하련다는 말씀이오이까?》

《그렇소. 내 4촌아우 식렴이 알아온 소식이요.》

금필은 왕건이 4촌아우 식렴의 정보선을 리용하고있다는것을 이미 알고있었다.

《이 땅에 우리처럼 재기를 뜻하는 사람이 또 있구만요. 그가 우리와 동조하는 세력이 되여야 할텐데…》

《그가 옛 백제땅을 수복하겠다고 나선것은 리해할수 있는 일이지요. 그러나 이후에 그는 우리와 대결하게 될것이요. 옛 고구려가 지향하던 겨레의 통일을 바라는 우리와 백제를 고수하려는 그들사이에 양보와 타협이 이루어지겠는지는 아직 누구도 알수 없는 일이요.》 《그렇구만요.》

금팔은 다시금 마음이 무거워졌다.

왕건이 예견한대로 환선길과 리흔암은 한달도 채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송악에서 3백리남짓한 곡산까지 곧추 잡아 북으로 올라갔다가 남강(대동강지류)을 따라 상원까지 서쪽으로 또 3백리, 그다음엔 평양성에도 썩 못미친 곳에서 다시 남으로 4백리를 숨가삐 이어대고만것이였다.

그런데도 궁예는 별다른 내색을 안했다. 확실히 궁예는 북방장악에 욕심이 없었다.

물론 남쪽이 우선인것은 사실이지만 이왕에 군사를 파한바에야 그정도로 한정하고 돌아서다니, 그 꼬락서니가 곱게 보일리 없겠는데 전혀 별다른 반응이 없는것이였다.

(역시 일목대왕이다.)

금필은 이렇게 단언하고말았다.

 

가을에 접어든무렵 송악에서 급보가 날아들었다.

량길의 군대가 궁예를 치겠다며 송악을 향해 올라오고있다는 소식이였다.

《량길이 네가 죽고싶어 몸살이 난게로구나.》

궁예는 이발을 부드득 갈았다.

량길은 북원(원주, 려주, 양평, 횡성)일대를 차지하고있는 농민군 두령이였다. 한때는 궁예도 량길의 부하로 있었었다. 궁예가 그의 군사 5백을 넘겨받아가지고 명주(강릉)를 친 다음 그와 결별하고 새로이 세력을 넓히면서 철원으로 올라오지만 않았던들 량길과 궁예는 아직까지 사이좋은 부자관계나 형제관계로 있을것이였다.

절을 나와 농민군대렬에 들어온 궁예가 량길의 그늘아래서 허리를 펴게 된 그 은혜를 저버린채 배반의 길을 걷자 량길은 어떻게 하나 궁예를 사로잡아 버릇을 가르쳐주어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해를 보내고있었다.

배은망덕해도 분수가 있지, 내 살붙이처럼 믿고 수하군사를 적지않게 뚝 떼주고 장수들도 거의다 붙여주었는데 보답은커녕 그걸 밑천으로 오히려 딴살림을 차려?!

그것으로 끝나는 일이면 작히나 좋으랴. 궁예의 세력은 어느결에 량길을 누르는데로 번져져 지금에 와서는 량길의 존재마저 위태로와졌던것이다.

아니되겠고나, 어떻게든 궁예 저놈을 제거해야 한다, 버릇이나 가르쳐 바로잡기에는 이미 그른놈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량길이 서둘러 송악에 싸움을 걸어온것이였다.

원체가 고지식하고 거짓을 모르는 이 농군출신 무장은 죽일바에는 은밀한 급습이나 자객을 파하는 수도 있건만 굳이 옹고집으로 정면대결을 해온것이였다.

《량길의 군사가 몇이나 되느냐?》

궁예의 물음에 가려가 아뢰였다.

《어르신께서 나오신 다음에 절반으로 푹 줄어 2천이 못되던것이 그사이 사면팔방으로 거두어서 4천가량 되게 불어났소이다.》

《4천?! 그러니 우리와 일 대 일이란 말이냐?》

궁예는 어지간히 놀란 눈치였다.

궁예는 량길과 함께 있을 때에도 둘사이 시합은 따로 해보지 않았으므로 단둘이서 붙어봐서 꼭 이길수 있다는 자신은 가질수가 없었다. 지금껏 불어난 군사면 량길과 능히 싸워서 이길수 있으리라고 평소에 생각하고있었는데 지금 따져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궁예의 머리속에 피끗 왕건이 떠올랐다.

그렇다, 왕건을 내세워보자, 이번 기회에 그를 한번 시험해보는수다.

궁예는 즉시 군사를 일으켰다. 그다음 만장이 보는 앞에서 왕건에게 지휘를 맡겼다. 궁예의 허리에 매달려있던 군령검이 왕건의 손에 넘겨졌다.

그날 밤 궁예의 군사는 내군만 약간 남겨놓고 총출동되였다. 왕건휘하의 송악군사중에서도 수군을 제외한 전원이 동원되여 남으로 내달았다.

량길의 군대와 마주친 곳은 가평(경기도와 강원도경계)에서였다.

날이 밝을무렵이였다. 전야에 밥짓는 연기가 뭉실뭉실 피여오르는것을 보고 민가부락인줄로만 여긴 선두부대가 내처 나아가다가 량길부대의 전초에 걸려 멈춰섰다. 량길은 이미 북한강을 넘어와 전개해있었던것이다.

왕건은 즉시 선두부대에 공격서렬을 지어 전개하도록 했다. 그리고 주력부대들은 덤비지 말고 넓게 자리를 차지하고 아침밥을 짓게 했다.

《지금이 좋은 시각이 아니요?》

환선길이 삐치고들었다.

《밥을 짓느라 정신들이 없는가본데 우리가 선수를 칩시다그려.》 리흔암이 잇달아 초를 쳤다.

《선수는 상대가 이미 쳤소이다. 저들이 불을 피운것은 우리보다 먼저 와있음을 알리는거란 말이요. 우리가 밤새워 걸어올 때 저들은 충분히 휴식을 했은즉 이제 공격하면 피로한 우리 군사가 먼저 맥을 뽑게 되리라는건 불보듯 뻔한 일이요.》

《방금 도착하고서도 우리를 얼려넘기려고 밥짓는 흉내를 내는지도 모르지요?》

홍유도 끼여들었다.

《그런 생각도 없지 않아 나도 속는척 같이 연극을 노는것이요. 아무랬거나 아침은 먹어야 싸움을 할것이 아니겠소.》

《그 말에도 일리는 있소만… 적을 과소평가해도 해롭지만 과대평가해도 리롭질 않지요.》

원회가 또 삐치고들었다.

(이것들이 여기를 장마당 흥정판으로 여기는게 아니야?)

금필은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는 장수들의 꼬락서니에 화가 동해 제잡담 구령을 내리였다.

《그만들 하시고 모두 대장님앞에 렬을 지으시오.》

우리 형님이 대장이니 그 아우인 내가 종사관쯤 된다고 보아 무방하지 않느냐 하는 배심이였다.

즉시 반발하는 눈길들이 금필에게로 쏠렸다. 저놈 봤나, 제가 뭐라고? 하는 눈찌들이였다. 그러면서도 어름어름 렬을 지어섰다.

왕건은 때맞춰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부터 부장들은 내 말을 명심해 들으시오.》

왕건은 부장이라는 대목에 힘을 넣었다.

그제사 이들의 목이 움츠러들었다. 왕건이 나이로는 저희들에 비길 바가 못되는 햇내기이나 지금 저희들우에 서있는 대장이라는것을 깨달은것이였다. 아무리 백전로장으로 자부하는 뼈대굵은 장수라고 하지만 궁예의 령으로 이들 모두가 지금은 왕건의 부하로 되여있는것이였다.

왕건은 궁예가 하사한 군령검을 높이 들고 령을 내렸다.

《좌군은 환선길, 리흔암장수가 지휘하시오. 여기에 복지겸, 신원, 원회장수가 배속되시오. 우군은 홍유, 배현경장수가 지휘하시오. 여기엔 김락, 김언, 종희장수가 배속될것이요. 중군은 나와 유금필, 능산, 박술희부장들이 맡겠소. 오늘 싸움에서 금필부장은 나의 종사관임무를 감당하시오.》

《알겠소이다. 》

금필은 위엄있게 머리를 조아렸다. 모두가 그 본을 따서 머리를 조아렸다.

왕건은 대형을 지은 뒤 계속해서 임무를 하달했다.

《먼저 좌군이 일격을 가하여 될수록이면 싸움을 결속하도록 하시오》

《알아들었소이다.》

환선길과 리흔암이 군례로 대답했다.

《좌군의 결속이 아니되면 중군에서 련결하겠소. 중군이 결속을 못하면 그땐 우군이 투입될것이요. 나는 오늘 싸움에서 될수록이면 좌군의 일격으로 끝을 맺게 되기를 바라오.》

왕건이 좌군에 특별히 의의를 부여하는데는 그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우군을 맡긴 홍유, 배현경은 궁예가 량길과 떨어져나간 이후에 받아들인 장수들이였다. 반면에 좌군에 속해있는 환선길, 리흔암, 복지겸, 신원, 원회들은 량길의 수하에 있다가 궁예를 따라나선 사람들이였다. 그들은 누구보다 량길을 잘 알것이므로 허점을 면바로 쳐서 되도록이면 첫 싸움에서 결속하기를 바란것이였다.

량길이쪽에서는 이쪽에서 밥을 다 지어먹을 때까지 접어들지 않고있다가 해가 중천에 떠오르고 안개발이 깨끗이 가셔진 뒤에야 드디여 붉은색기를 들어보이고 북을 쳐 싸움을 걸어왔다.

왕건도 그들의 본을 따라 화답하게 하였다.

량쪽의 첫 진이 접전을 시작했다.

금필은 왕건의 허락을 받고 환선길이 책임진 좌군의 서렬에 나와 전방을 살폈다. 그는 량길의 움직임을 바늘끝 하나 놓칠세라 주시했다. 그가 중군이 아니라 우군(전군)에 나와 첫 접전을 주관했으므로 금필은 그를 똑똑히 가려볼수 있었다.

상대가 싸움준비를 충분히 하도록 시간을 주는 그 아량부터가 남달랐다. 량길이 도의를 귀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는것이 알리였다.

그는 지금 자기를 배반한 옛 부하들과 싸우려는것이였다. 죽어도 도의를 가르치고 죽자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였다.

궁예의 명주공략이 성공하기를 바라서 십수년을 손때묻혀 키운 측근의 장수들을 아낌없이 딸려보냈는데 그들이 명주성을 점령하고는 량길이 저를 버리고 궁예를 따라가버릴줄이야.…

지금 량길이 얼마나 분노하고있을것인가를 금필은 짐작할수 있었다. 그럴수록 금필은 량길에게 동정이 갔다. 왕건자신도 량길을 죽이리만큼 개인적인 적대감을 가지고있는것은 아닐것이였다. 궁예를 치러 오는 상대측 대장인것으로 해서 이제 그를 죽이지 않으면 안되는 사정이 안타까울것이였다.

금필은 자기나 왕건이 겉으로는 궁예의 부하일망정 속으로는 절대로 그의 부하가 아니라고 생각하고있었다.

《이놈들! 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 오늘은 네놈들의 제사날이 되는 날이다.》

량길이 일진의 전렬에 나서서 고함치는 소리였다.

그 서슬에 딩딩해서 나서던 좌군의 장수들이 삽시에 자라목을 한채 덜덜 떨기 시작했다.

금필이 보느라니 꼭 뒤보다 멈춰선것 같은 흉한 자세들이였다.

저런 꼬락서니라구야…

량길의 칼날이 번뜩하자 메돼지도 한손으로 메친다는 신원과 원회가 눈깜짝할새 목없는 귀신이 되고말았다.

《리흔암 이놈! 너도 사람이냐?》

량길의 호통소리에 리흔암은 몇합을 못해보고 칼을 떨구고말았다.

《환선길 이놈! 사람인지 짐승인지 네 상통을 다시 보자!》

그래도 리흔암을 돕는답시고 말을 몰아 달려나왔던 환선길이 량길의 벽력같은 고함소리에 꽁지가 빳빳해서 되돌아 뛰였다.

사기가 오른 량길의 일진이 터진 물목처럼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뜻밖의 사태에 누구보다 놀란것은 왕건이였다.

죄진 놈 뒤 가려워하는줄을 미처 예견 못하였던것이다.

왕건의 시선이 의형제들에게로 가서 멎었다. 셋은 동시에 튀여나오며 령을 청했다. 왕건이 능산과 술희에게 먼저 령을 내렸다.

《두 동생이 먼저 막아보게.》

《알아들었소이다.》

능산의 언월도가 춤을 추기 시작하자 량길의 군사들이 풀단처럼 베여져 넘어가기 시작했다. 왼쪽으로는 술희의 철퇴가 파죽지세로 량길부대의 한쪽귀를 허물어나갔다.

그러자 앞장에서 배반자들의 목을 베여 사기를 올려놓고 중군으로 물러섰던 량길이 능산과 술희로 하여 다시금 역전되는 형세를 보고만 있을수 없어 다시 싸움판에 뛰여들었다.

싸움판이 좁다하게 길길이 뛰며 좌충우돌하는 량길의 무예가 다시금 어지러이 눈앞에 펼쳐졌다. 능산도 술희도 어지간히 지친지라 형세는 다시금 량길에게 유리하게 번져갔다.

이쯤 되였으면 응당 다시 튀여나왔어야 할 환선길과 리흔암은 얼굴도 내밀지 않고있었다. 량길의 호령 한마디에 오금이 저려했던지라 더는 용기가 없는 모양이였다.

하기는 오늘 싸움에 진작 나왔어야 할 궁예부터가 꼬리를 사린것을 보면 이들의 행동도 무리는 아니였다. 한때 량길의 부하로 들어가 그의 덕을 입은 몸으로 직접 칼을 들고 맞서기가 얼굴 가렵기 그지없는 일일것이였다. 환선길과 리흔암이 어쩔수없이 궁예의 본을 따는것 같았다. 금필은 이들이 왕건에게 대장의 직무가 위임된것을 놓고 속이 뒤틀려있던지라 차라리 이 싸움에서 패했으면 하는 생각이 더 꿈틀거리고있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아직은 그닥 알바 없는 어린 왕건에게 갑자기 복종하자니 이들의 속이 내킬리 만무할것이였다. 싸움에서 져도 책임은 왕건이 지게 되는것은 명백한 일이였던것이다.

사태가 역전되는것을 보고만 있을수 없어 금필이 참지 못하고 나섰다.

《형님!》

왕건도 금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금필아우! 아무래도 나서줘야겠소.》

《알았소이다.》

오금이 쑤셔있던 금필은 살같이 튀여나갔다.

《량길장군! 우리 잠시 둘이서만 대적해봄이 어떠시오?》

금필의 호통치는 소리를 가려들은 량길은 제꺽 한손을 들어보였다. 량길의 군사들이 주춤 멈춰서고 잇달아 왕건의 군사 일진도 멈춰섰다.

《그대는 누구인고?》

땀발이 부르르 일어선 수염투성이 량길이 두눈을 치뜨고 금필을 노려보았다.

《나는 송악성주의 측근부장 유금필이요.》

《나는 궁예를 보자고 왔는데 송악성주란 무엇이며 유금필이란 또 뉘냐?》

《궁예는 사정이 있어 오지 않았소. 내가 그를 대신할테니 어디 한번 분을 풀어보시오.》

금필의 대꾸에 량길은 코웃음을 쳤다.

《족제비도 낯이 있다 하였으니 궁예 그놈이 내앞에 얼굴 내밀기가 면구했던 모양이구나. 그렇게 속이 찔릴것 같으면 애초에 배반을 말것이지 비렬한 놈!…》

《이왕에 버릇을 가르치자고 나선바이면 저한테라도 가르침을 주시오》

《네놈이 궁예의 목을 따러 온 내 발목을 잡는 죄를 물어 잠시 대적하겠노라. 자, 내 창 받아라!》

맨처음 량길은 장창을 들고 나섰다. 이에 금필은 반월도(칼날을 손잡이가 긴 대에 단 무기)를 들고 맞섰다. 찌르고 되받아치는 접전중에 량길의 장창이 먼저 동강났다. 뒤로 물러섰던 량길이 이번엔 철퇴를 들고나섰다. 금필도 당화장으로 바꾸어들었다. 또다시 일격일퇴의 접전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금필의 당화장이 부러져나갔다.

입가에 비웃음을 띄우며 량길이 금필에게 둥뒤를 손짓해보였다.

(나의 쌍검도를?! 그게 소원이라면…)

금필은 등뒤의 쌍검도를 뽑아내여 량손에 비껴들었다.

량길은 자기의 기본재주무기인 열두자가 넘는 삼지창을 들고나섰다.

당대에 보기 드문 두 장수의 희한한 무예가 눈앞에 펼쳐졌다.

들판엔 바람마저 멎어 쥐죽은듯 고요한 속에 두 장수의 칼부림소리만이 휘파람을 울리며 허공에 날아옜다.

처음 한동안은 여유있게 물러서고 빗서며 대적하던 량길이 차츰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따금 휘둘러대는 량길의 공격에 금필의 몸도 흠칫흠칫 흐트러지군 하였다.

둘은 서로 짜고맞춘 춤을 추듯 가락맞춰 돌고돌기를 거듭했다. 허나 나이탓인지 량길이 끝내 삼지창을 떨어뜨리고말았다.

쟁기를 놓친 량길은 졸지에 도마우에 오른 고기모양이 되였다.

그 순간 금필은 번개같이 량길의 갑옷자락을 끄당기며 그의 귀전에 대고 나직이 소리쳤다.

《두령! 그만 물러서시오. 난 송악성주의 부하이지 궁예의 부하는 아니요. 량길두령을 욕보이고싶지 않단 말이요. 내 말을 알아들었소?》

그러자 량길은 금필의 속생각을 알아챘는지 거퍼 황소숨을 몰아쉬고는 두눈을 질끈 감으며 말머리를 돌리였다.

이를 본 왕건의 군사들이 와 함성을 지르며 달려나왔다.

금필이 황급히 손을 들어 제지시키자 왕건도 금필의 속심을 제꺽 알아차렸는지 징을 울려 공격을 멈춰세웠다.

량길의 군사들은 물러가기 시작했다. 쫓기는 속에서도 량길은 금필의 모습을 눈여겨보았다.

(궁예의 무리속에 저런 장수가 있다니… 방금 그가 자기는 송악성주의 부하라고 했겠다. 송악성주! 궁예는 사람이 아니다. 부디 그를 몰아내다오. 나의 한을 풀어다오!)

량길은 돌아갔으며 그의 공격은 이렇게 격퇴되였다.

궁예는 왕건이 량길을 죽이지 않은것을 알고 대노하여 금필을 목매달라고까지 명령했다.

《어르신의 권위를 위해서 그랬소이다. 량길을 죽이기보다는 쫓아버렸다고 하는것이 민심을 모으는데도 더 좋을것이라고 생각한것이오이다. 》

왕건이 하도 곡진하게 설유해서야 궁예의 성이 누그러졌다.

이날의 격전이 있은 후로 왕건과 금필을 보는 주변의 시각이 달라졌다.

궁예수하의 많은 장수들이 이들을 은근히 따르기 시작한것이였다.

가평에서의 격전이후로 량길부대는 급속히 쇠퇴해져갔다. 포악한 궁예는 환선길과 리흔암을 다시 파하여 원주에서 량길의 남은 세력을 마지막 한명까지 죽여버렸다. 량길이 들어있던 군막안에 숨이 채 지지 않은 부상자들을 몰아넣고 불을 질러 태워죽였다. 량길은 쇠두레까지 끌어다 죽이려 하였으나 그는 궁예의 군사들을 뿌리치고 불붙는 집안으로 스스로 뛰여들어가 부하들과 함께 타죽고말았다.

불길이 휩싸인 집안에서 그의 마지막웨침소리가 울려나왔다.

《하늘이 내려다본다. 궁예 이놈아!… 신의를 모르는 네놈의 명이 오래 갈줄 아느냐! 내대신 하늘이 네놈의 버릇을 가르쳐줄것이니 그리 알라! 이 짐승만도 못한 놈아!…》

량길은 죽는 순간까지도 도의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도리라는것도 사람을 보아가면서 론하는것이다. 배신자에게서 도리를 묻는것자체가 어리석은짓이라는것을 그는 죽는 순간에조차 깨닫지 못하고있었다. 도리를 모르는자는 겉만 사람일뿐 속은 짐승이나 다를바 없는 흉물이라는것을 그는 알았어야 했었다.

배신자는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라도 미리감치 목을 베치워야 후환이 없을것이기에…

궁예는 량길이라는 골치거리를 제거한 뒤에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왕건을 내세워 남쪽으로 진격을 거듭한 끝에 한산주(서울, 경기도서부)와 중원일대(경기도 중남부일대)를 새롭게 장악하였다.

궁예의 거듭되는 진격앞에 옛 백제를 도모하려고 일어선 견훤이 바빠나서 선손을 쓰기 시작하였다.

900년 여름, 완산주(전주)에 도성건설을 끝낸 견훤이 서둘러 후백제의 건국을 선포하자 901년에 궁예도 나라를 선포하였다.

국호는 《후고구려》 (일명 《고려》라고도 함.)였다.

이로써 력사에 후삼국시기로 불리우는 새로운 판도가 조성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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