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회)

 

3. 장도에 오르다

 

무오년인 898년 봄 어느날, 이날 송악고을은 아침부터 술렁거리였다. 궁예가 앞으로 나라를 세울 도읍지로 내정한 이 송악성으로 순행을 오는것이였다.

송악성(력사기록에는 발어참성으로 되여있다.)은 이해 2월에 완공되였다. 오늘은 왕건이 부친과 함께 궁예에게 찾아가 송악성을 새 나라의 도읍지로 꾸려놓겠다고 약속한 때로부터 꼭 두해가 되는 날이였다.

이태전인 병진년에 왕건의 부친 룡건은 송악고을을 궁예에게 통채로 바치면서 그의 부하가 되기를 자청하였었다. 다른 령주들처럼 본래의 지위를 담보하는 조건하에서의 복속이 아니라 완전히 바치는것이였다. 대신 그는 아들 왕건이 성을 쌓을 때까지만 성주로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다음 처분은 궁예에게 전적으로 맡긴다는 뜻을 분명히 했었다. 그때 궁예는 송악일대가 손쉽게 장악되는것을 기뻐하면서도 그의 터세가 두려워 룡건을 송악과는 거리가 먼 림진강상류쪽의 금성(김화)태수로 임명하였다.

하여 룡건은 한적한 산골고을에 가있다가 1년만에 세상을 하직하고말았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의 처사를 가긍히 여기면서 혀를 찼다. 사람이 늙으면 그리도 무력해지고마는것인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고서도 여생을 마칠수 있었을것인데…

머리를 기웃거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허나 그것은 룡건의 깊은 속을 모르는 사람들의 생각이였다.

거처는 송악고을에 두고있었으나 룡건은 삼남은 성이 차지 않아 멀리 당나라 해변일대까지 마실 다니듯 주름잡던 당대의 큰 장사치였을뿐아니라 유능한 정략가이기도 했다. 대세를 관망하는 그의 눈이 밝고 정확했기에 지금은 궁예에게 대세가 쥐여졌지만 그것은 한때일뿐이라는것을 그는 어렵지 않게 내다보고있었던것이다.

그는 아들 왕건이 아직 어린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일시 바람새좋게 나가는 궁예를 먼저 내세우고 그다음의 대사를 아들 왕건이 결속하게 하려는 놀라운 계산을 하고있는것이였다. 그가 자기한생의 전부이기도 한 송악고을 전체와 아들까지도 통채로 궁예에게 바친데는 이런 깊은 속궁냥이 있었기때문이였다.

이 시각 왕건은 작고한 부친을 생각하고있었다.

(아버지가 새로이 개축된 이 송악성을 보았다면 얼마나 기뻐하랴!…)

왕건은 기세있게 일떠선 송악성곽을 추연한 안색으로 바라보았다. 어제 밤 왕건은 금필이를 비롯한 형제들에게 송악성이 새로이 수축되게 된 사연과 성이 완공되자마자 궁예가 발 빠르게 이곳을 보러 오게 된 그간의 내막을 구체적으로 말해주었다.

궁예는 왕건의 부친 룡건과의 첫 상면때에 벌써 고구려재건의 기치를 드는것이야말로 천하를 얻는 성공의 열쇠로 된다는것을 단단히 주입받았었다.

사실 궁예가 옛 신라의 지경을 벗어나 동으로, 서로 종횡무진하며 일시에 차지한 지역으로 말하면 모두가 옛 고구려의 땅이였다. 이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 신라에 대한 반감이 높은것은 신라것들이 당나라를 끌어들여 강대하던 고구려를 무너뜨린 천추의 대죄에 대한 증오심에서였다. 이들이 궁예에게 길을 내여주고 성문을 열어주는것은 후안무치하고 부패무능한 신라의 통치에서 벗어나 옛 고구려같은 나라를 세우기를 기대하기때문인것이였다. 이런 민심을 타고 이들의 지향을 모아나갈 때만이 천하를 얻을수 있다고 설득시킨것이였다.

이런 룡건을 궁예는 진심으로 존경하였다. 자기에게 길을 틔워준 스승이였기때문이였다. 아직은 스물밖에 되지 않은 그의 아들 왕건에 대해서도 심정은 다를바 없었다. 그가 이태만에 한 나라의 도읍으로 삼을수 있는 도성을 완성했다니 놀라운 수완이 아닐수 없었다. 그만큼 그가 부친의 뒤를 이어 송악일대를 한손에 장악하고있다는것을 증명하는것이였다.

스무살, 약관의 나이에 왕건은 비상한 경지에 이르고있었다.

궁예는 자기가 총애하는 능산이 왕건의 결의형제 동생이라는것을 알고서도 이를 시기하지 않았다. 거기에 금필이도 끼였다는것을 알고는 이마를 한번 치였을뿐 인차 고개를 끄덕이는것으로 스쳐버렸다.

왕건이가 있으면 그만이다, 그들이 왕건의 수하인것은 나의 수하인것이나 같은거니까, 그는 이렇게 만족하고있었던것이다.

《쇠두레행렬이 나타났소이다!》

전령의 웨침소리에 모두의 눈길이 성밖 고개길로 쏠렸다. 고개길 마루우로 기치창검이 웅기중기 솟아오르고있었다. 미구에 행렬이 나타났다. 말울음소리,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들이 소란스럽게 들려왔다.

《제법이네!…》

술희가 한마디 뇌까렸다.

《굴러온 돌이 배긴 돌을 뺀다더니…》

정작 궁예에게 도성을 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심기가 뒤틀릴만도 하였던것이다.

송악의 군사들 눈찌도 례사롭지 않았다. 마치도 궁예의 군사들과 한판 시합이라도 벌리려는듯싶은 모양들이였다.

좌중의 분위기를 느껴서인지 왕건은 미간을 찌프리며 손을 내저었다.

《쓸데없는 말일랑 그만두게.》 하고는《참, 금필아우! 의장대 지휘는 아우몫이 아니던가?》 하고 화제를 돌리였다.

《그렇소이다. 그럼 전…》

금필은 말머리를 돌려 먼저 성안으로 들어갔다.

송악성 본성의 동문을 지나 성안에 들어서니 드넓은 련무장이 펼쳐졌다. 선봉문을 지나 다시금 열리는 청합문을 지나니 아득히 올려다보이는 스물한단의 화강석계단우에 경희전이 나지였다.

의장대는 그앞 뜨락에 정렬해 서있었다.

경희전은 왕건이 집무를 보던 곳인데 미구에 궁예가 여기에 도읍을 정하면 기본 조회청이 될 곳이였다.

금필은 경희전 앞뜰에서 의장대와 시위군사들의 상태를 다시한번 점검했다. 이들은 왕건의 가병중에서도 제일 정예한 부대였다. 투구를 쓰고 장창을 꼬나든 자세들이 자못 위풍당당했다.

송악성 내군은 금필이 맡고 외군은 술희가 맡고있었다. 이들이 맡고있는 군사가 각각 3백이였다.

왕건의 군사는 이외에도 왕식렴이 도성밖에 둔치고있는 3백의 창기병이 있고 왕신이 지휘하는 5백의 수병이 있다. 그리고 장사거래상 안전을 위해서 매소물현(인천), 홀구현(강화), 정주(개풍) 등지에 남의 령지에 임대료를 내면서 둔치고있는 수초(포구초소)병들을 합하고 왕건이 직접 부리는 수부들까지 합하면 수군만도 천에 이르렀다. 이들은 여느때는 고기잡이를 하거나 물품을 나르다가도 령만 내리면 일시에 군사가 되고 부리던 배는 그대로 전함으로 타고나가게 준비되여있었다.

왕건은 성은 성대로 쌓으면서도 정예한 륙군과 수군을 1천씩 준비해놓음으로써 상대적인 독자성을 유지할수 있게 해놓고있었다.

송악의 이러한 실태를 보고받았을 때 궁예의 심경은 다소 착잡했다. 혹시 왕건이 딴생각을 하고있는것이 아닐가.… 이런 자기 생각을 부채질하듯 왕건을 경계하라는 조언이 계속 뒤따랐다. 환선길, 리흔암이 같은 측근장수들이 더더욱 그러했다. 왕건이 군사를 너무 많이 가지고있다는것이였다. 이제 송악에 가면 군사를 줄이라고 하든가 일부를 내놓게 해야 한다는것이였다.

왕건도 능산으로부터 궁예쪽의 이같은 동향을 미리 알고있는지라 뻗대일 대응책은 세워놓고있었다. 그러나 내심 긴장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제는 왕이나 다름없는 궁예가 어떻게 나올런지도 궁금하기 짝이 없는 일이였다.

뿔나팔소리와 대고소리가 범벅이 되여 울리는 속에 궁예가 왕건의 안내를 받으며 경희전뜨락안에 들어섰다.

금필이 이전에 쇠두레에 가서 보았을 때 궁예는 먹장삼을 입고있었다. 허나 송악에 찾아온 오늘의 궁예는 누런 금빛도포를 장삼우에 걸치고있었다. 그의 좌우뒤로 리흔암, 복지겸, 은부, 홍유, 배현경, 김락, 김언, 종희 등 장수들이 따랐다. 환선길은 쇠두레수비로 떨어졌다고 하였다. 금필은 환선길이 없는것을 보고 실망했다. 든것 없이 거들먹거리는 그 환선길에게 이곳 송악의 본때를 보여주려고 했었는데…

금필은 쓴웃음을 지은채 궁예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왕건이 눈짓을 하고있었다. 금필은 칼을 추켜들며 경례구령을 웨쳤다.

의장대대렬의 머리우로 창날들이 일제히 솟구쳐올랐다.

궁예는 만족한듯 두손을 들어 합장해보였다. 그리고는 스스럼없이 경희전의 계단을 한개한개 짚고올라가 자리를 잡고앉았다.

궁예는 경희전마루에 앉아 눈앞에 펼쳐진 전경을 보며 또 한번 속으로 감탄을 했다. 뒤로는 성벽너머로 송악산이 우뚝 솟아있고 동서남 세면이 앞으로 탁 틔였는데 뜨락에 빼곡이 들어서있는 송악군사들을 지나 세겹 성벽을 벗어나면 다시금 운치가 넘치는 계곡들사이로 드문드문 정자가 서있고 그앞 멀리로 풍덕벌이 시원하게 펼쳐져 산지와 대조를 이루고있었다.

날아갈듯 추켜든 고구려식 합각지붕들을 이고선 관청건물들도 불만 했지만 송악군사들의 복장으로부터 병쟁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군사들의 혈기왕성한 모습들이 궁예자신이 데리고온 쇠두레군사들과는 대비가 되지 않았다.

(례성강류역과 림진강, 한강하류일대가 땅이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하니 인마 또한 기름질수밖에…)

궁예는 여유가 넘쳐보이는 송악성안팎풍경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있었다. 따라온 장수들의 표정을 훔쳐보니 그들도 퍼그나 감동된 기색들이였다.

한껏 주눅든 얼굴을 하고있던 리흔암이 궁예에게 다가와 속살거렸다.

《그만하면 궁성의 모양새가 갖추어진듯 하옵니다.》

《내 보기에도 별로 부족한것이 없을듯 하오.》

궁예가 흔연히 대꾸했다.

《그래서 하는 말이온데… 어르신께서는 속히 조처하시오이다.》 《무엇을 조처하란 말이요?》

《저 …송악성주를…》

리흔암이 말꼬리를 맺지 못한채 몸을 옹송그렸다.

《또 그 소리요?》

궁예는 짐짓 얼굴을 찡그렸다.

도읍을 송악에 정하자는것은 송악성주의 지반을 리용하자는것이였다. 그런데 송악을 쥐고있는 왕건을 조처하다니 도대체 어쩌자는 말인가? 이 궁예가 그저 틀고앉으면 만사가 다 해결되는것으로 아는 모양이였다. 궁예는 코웃음을 치지 않을수 없었다.

말우에서 천하를 정복하니 그것으로 끝인줄 아는게지. 차지하기도 헐치 않지만 제것으로 만들기는 더욱 힘들다. 궁예는 칼부림 하나면 단줄 아는 수하장수들을 생각하며 도리머리를 저었다.

궁예는 이날 왕건을 치하하는데 품을 아끼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후 궁예는 드디여 송악에로의 천도를 선포하였다.

이날 금필은 능산, 술희와 더불어 술자리를 마련했다. 왕건을 청하여 상좌에 앉힌 다음 금필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성주님, 오늘 밤 우리 형제들은 다시한번 마음을 모아 맹세하옵니다. 도성은 잠시 내여주었을뿐 반드시 성주님의 도읍이 되게 하겠소이다.》

《세 호걸분들이 미거한 이 몸을 그토록 받들겠다니 그대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겠다는걸 다시한번 맹세하오이다. 허나 형제분들에게 한가지 명백히 할것이 있소. 내가 송악에 도성을 쌓은것은 미구에 솟아오를 우리 후고구려국의 도읍지를 마련하려 함이였소. 이왕이면 평양성이여야 더 좋았을것이지만 거긴 아직 우리의 손이 가지 못했으니 당장은 내 본거지인 이곳 송악을 정한것이요. 그러니 앞으로는 누구의 도읍이 되여야 하니 하는 말은 삼가해야 할것이오이다. 지금은 궁예를 따라야 하오이다. 그가 우리가 바라는 고구려재건의 기치를 받아물고 민심을 몰아가는 이상 우리도 사심없이 그를 따라야 할것임을 명심하는것이 좋을듯 하오이다.》

《알아들었소이다.》

《내 말을 리해해주어 감사하오이다.》

왕건은 머리를 숙여 사례했다.

이날 금필은 큰 충격을 받았다. 뜻을 우선 중시하는 왕건의 깊은 마음속을 다시한번 들여다보았던것이다. 그의 됨됨이를 알게 하는 또 한차례의 계기였다. 궁예라는 인물로는 안된다고 확신하는 금필이였지만 당장에 왕건이 행하는바가 어디 하나 그른데가 없는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그렇다, 왕건이 궁예를 따르는 이상 나도 궁예를… 아니, 왕건을 따르는것이다. 동방의 천년강국으로 겨레의 위용과 슬기를 떨쳐온 조상의 나라 고구려, 고구려만 재건할수 있다면 무엇인들 이겨내지 못할것이냐.)

금필은 숙였던 머리를 버쩍 들었다. 창밖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초불에 이글이글 불타고있었다.

궁예는 드디여 송악에 자리를 옮겨앉았다.

아직 세상에 대고 정식으로 나라이름은 선포하지 않았지만 조정의 틀거리는 기본상 갖추어진 상태였다.

송악도성에 국정의 각 부서들이 전개되였다.

지방의 령주들과 궁예의 측근장수들이 요직을 차지하였다. 환선길은 병부(군사관계 담당부서)의 병부령이 되였고 리흔암은 대룡부(호구와 조세, 공납업무부서)의 대룡부령이 되였다.

왕건에게는 정기대감이란 벼슬이 내려졌다.

《정기대감이라는게 군사를 부리는 장수의 직책이라 이젠 우리 성주님이 조정안엔 필요가 없으니 전장으로나 나가보라는 소리 아닌가?》

능산이 례외라는듯 미간을 찌프렸다.

《이젠 송악이 일목대왕의 거처가 되였은즉 형님이 그와 가까이 있는것은 여러모로 보아 좋지가 않소. 차라리 전장에 나가 실적을 쌓으시는것이 나을것이라고 생각하오.》

금필은 며칠째 생각했던바를 직방 터놓았다.

《란세엔 장수가 천하를 얻는 법이오이다. 형님휘하의 수륙군 2천이면 무엇이 두렵겠나이까.》

술희도 맞장구를 쳤다.

《하긴 그렇소. 우리 형님에겐 쇠두레에 없는 수군이 있고 바다가 있지. 민심도 우리 형님을 받들고있으니 뒤전에 밀렸다 락심할게 아니라 힘을 키워야 할것이오이다.》

능산도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렇소이다. 》

금팔을 위시한 세형제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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