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 회)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보면 그의 이러한 심중도 십분 리해가 될것이였다. 순식은 퍼그나 오래전인 785년에 37대왕인 선덕왕의 뒤를 이어 일시 왕이 되였다가 38대 원성왕이 즉위하면서 밀려나 이곳 강릉땅에 내려온
명주군왕 김주원의 후손이였다. 조상인 김주원이 무슨 연유로 왕위에 올랐다가 밀려났는지 구체적인 내막은 전해듣지 못하였다. 같은 아비의 배다른 형제사이에 뒤바뀐것이고보면
분명 두 어미쪽 켠들이 서로 다툼질을 하다가 주원의 쪽이 힘이 딸려 밀려난 꼴이라 부실한 조상의 래력을 부디 시시콜콜이 전해내릴 까닭이
없은것이였다. 하지만 미안쩍은감도 없지 않았던지 원성왕은 자기 형인 김주원에게 명주군왕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명주(강릉)와 그 일대 10여개 성을
독자적으로 통치하도록 하였다. 조정의 어느 대신도 명주군왕에게 이래라저래라 훈시할수 없게 했고 조세나 공물따위도 일체 없게끔 규정했었다. 일종의 소국군주의 특권을 부여한것이였다. 김주원은 응당 그래야 한다는 식으로 서라벌과는 담을 쌓고 제나름으로 소왕행세를 하며 살아왔으며 그 지위는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세습되여오고있었다. 아버지대에 와서 웬일인지는 모르나 순식의 부친인 허월은 10여년전부터 불교에 정신을 쏟더니 삼년전엔 명주군왕자리를 아예 맏이인 순식이
자기에게 넘겨주고 훌 집을 나가버리였다. 그때부터 순식은 명실공히 이곳 강릉땅의 유일한 소왕이 되여있었다. 서라벌조정이 죽을 쓰든 말든 내 알바 아니다 하고 그저 강릉땅 하나만을
다스리며 태평세월을 누려왔다. 그렇다고 궁녀들의 치마폭이나 뒤지고 앉아있는 그런 지린내나는 소인은 결코 아닌 순식이였다. 궁녀소리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실지로 강릉소국에서는 궁녀뿐이 아니고 한개 나라 조정에 짝지지 않는 관리기구와 직제까지 즐비하게 두고서 천문을
따져가며 농사와 물고기잡이를 하게 하고 젊은이들은 말타기와 활쏘기, 창쓰기와 칼쓰기를 장려하는데다가 고을의 쌀을 대고 군사까지 두어서 자체의
방비에도 만전을 기하고있었다. 선대에도 그랬거니와 순식이 대에 와서도 강릉은 여전히 서라벌이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하지 못하는 그런 일국의 위엄을 과시하고있었다. 이런 강릉땅을 아버지의 말 한마디를 듣고 궁예에게 바친 꼴이 되였으니 진속은 어찌되였든 세상에 이런 웃음거리가 어디 있으랴 하는 생각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봉장(여닫게 되여있지 않는 봉인한 창문)을 허벼보는 순식이였다. 그럴수록 순식은 부친의 처사가 한스럽기 그지없었다. 소시적에 《사서삼경》을 도통하여 세상을 다스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자부하던 부친이였다. 그런데 나이 마흔에 무슨 도깨비에 홀리웠는지
불교에 입문한다, 명산대찰을 유람한다 하더니 쉰고개에 이르러서는 아예 집을 나가버리고말았다. 소문에는 가야산 해인사의 누구와 지리산 천왕사의 누구와 하며 명망높은 대사, 선사들과만 어울린다 하였는데 일전에 한번 날아오는 소문으로는
백계산 옥룡사의 도선대사와 어깨동이를 하고서 가보지 않는데 없이 팔방돌이를 하고있다는것이였다. 사람의 얼굴을 한번만 보고도 그의 명이 길고짧음을 즉시에 판단한다거니 산자락의 생김새만 보고도 그 마을 운수를 대번에 진단한다거니 하는
좌우지간 귀신 씨나락 까는 소리같이 알아듣지도 못할 소문을 줄창 내며 다니는 부친이여서 남보기조차 거북하였던 순식인데 때아니게 불쑥 나타나
한다는 소리가 중대가리에 애꾸눈인 궁예라는 날도깨비에게 조상 부끄러운줄 모르고 머리를 숙이라 하였으니 순식이 살다살다 이런 일을 당하리라 어찌
생각이나 하였을것이냐. 다행히도 강릉땅의 주인은 여전하리라는 담보를 곁들였기망정이지 하마트면 조상의 땅을 송두리채 떼울번 하였던것이다. 하지만 순식은 한가지만은 알고있었다. 부친이 아주 미친것은 아니고 순식이 바로 자기의 안전을 위해 그리고 뭔가 앞날을 내다보고 당장의
부끄러움은 잠시 참고 이겨내라 하고있다는것이였다. 제자신 태를 묻은 땅이고 제 살붙이가 대를 물려가야 할 땅임을 알고서 훈시를 하는것만은
분명한지라 순식은 내키지 않는 요구를 들어준것이였다. 하면서도 순식은 한가지만은 오금을 박았다. 이후에 이 순식은 그 누구에게든 두번 다시는 머리를 숙이지 않으리라는것이였다, 궁예에게 굴복하는것이 일생에 마지막 한번뿐이라고. 동쪽에서 불어오는 싱그러운 바다바람을 등지고서 오대산 왼쪽너머로 삼사백리 가면 있다는 쇠두레쪽을 겨누고서 순식은 이윽토록 눈을 흘기며
서있었다. 궁예 네가 고구려를 재건한다구? 없어진지 이백년도 넘은 나라를 네가 다시 세워? 삶은 소대가리가 다 웃겠다.… 코웃음을 짓던 순식의 입귀가
갑자기 이그러졌다. (지금 이 땅이 뉘땅인데 고구려타령인가? 서라벌도 귀를 막지는 않고있을터인데 감히 이 신라땅에 고구려를 다시 세우겠다 칼춤 추는 놈팽이를
가만 두어?) 부릅뜬 그의 눈이 이번엔 남쪽의 서라벌쪽으로 겨누어졌다. 코막고 답답한것들이로구나.… 순식은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지금껏 등지고있는 서라벌에 대고 이래라저래라 훈수를 틀기도 멋적은것이였기때문이였다. 그보다는 고구려를 다시 세운다는 놈팽이에게 《항복》 까지 한 자기를 의식해서였다. 그 애꾸눈이가 고구려를 다시 세우려 할줄이야.… 그런 속통머리인 놈인줄 알았으면 애초에 《항복》 같은건 하지 않았을터인데… 순식은 쓴입을
다시며 돌아서고말았다. 고구려를 다시 세우겠다는 놈이든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소귀신모양으로 죽었소 하고 코빼기를 숙이고있는 놈들이든 자기가 그들을 흉볼 계제가
못된다는데서였다. (누가 어디서 무슨 작당을 하든 그건 내 알바 아니다. 어쨌든 이 강릉땅은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한다. 이곳은 죽으나사나 이 순식의 령지이고
김주원조상의 땅이다.) 세상이 어떻게 뒤바뀌든 자기 령지만은 끝까지 지키리라 다짐하며 순식은 말우에 올랐다. 수비군사들에게 몇마디 훈시하고 말고삐를 채였다.
고을로 내려가는것이였다. 누가 뭐라든 제 내키는대로 제나름의 길을 가는것이였다. 순식은 지금 이 시각에 부친인 허월대사가 쇠두레가 아니라 송악에, 더 정확히 말하면 부소압골안의 절간(후날의 령통사)에 앉아서 궁예가 아닌
왕건에게 기대를 걸고서 그의 성장을 지켜보고있는줄은 꿈에도 모르고있었다. … 귀가 류달리 큰 하늘소 한마리가 마흔고개를 갓 넘긴듯싶은 나그네 하나를 등에 태우고서 디뚝디뚝 걸어가고있었다. 해는 중천에 떠있으나 뽀얀 운무속에 가리워 희뿌연 형체만 보일뿐이고 그래서인지 한낮인데도 주위는 어둑시근한것이 영 정신이 들지 않는
날씨였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채로 조는듯마는듯 두눈을 지르감고앉아 가는 나그네 역시 심사가 그다지 편한 기색은 아니여 보였다. 이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사량부사람 최치원이였다. 그는 열한살에 당나라에 류학하러 갔고 열일곱살에 당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강남도 선주
률수현의 현위로 임명되였고 직무를 잘 감당하여 승무랑 시어사란 벼슬등급과 내봉공의 관직을 받았는가 하면 그 지역 농민폭동군을 진압하는 장수의
종사관노릇까지 하면서 이름을 날리였다. 그후 스물여덟살 되는 해인 895년에 신라로 돌아와 한림학사니, 수방부대감이니 하는 따위 벼슬자리를
두루 돌다가 조정대신들의 시기질투에 치워서 대산군(충청남도 풍산), 부성군(충청남도 서산), 천령군(경상남도 함양) 태수로 밀리다가 894년
2월엔 정사를 바로잡는답시고 10여개 조의 시정의견서를 제기하고 아찬의 벼슬등급에 올라 다시한번 조정에 몸을 잠그었다가 모든것이 귀찮다며
제스스로 초야에 몸을 묻어버린 사람이였다. 누구나 쉬이 차례지지 않는 공부길이고 쉬이 누릴수 없는 벼슬길을 애젊은 나이때부터 걸어볼대로 걸어보고 부귀와 명예도 누려볼대로 다 누려보아
이제는 더 바랄것이 없어 대궐을 나섰는가 생각하는 사람이 혹여 있을런지도 몰라 저리 말해두는데 이 사람은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였다. 제가 나서 태를 묻은 고향을 흠이 좀 있다 해서 나무랄 사람도 아니고 그래도 한 나라의 정사를 도와달라는 부탁인데 그렇게 생각없이
외면해버릴 그런 사람은 더더욱 아니라는것이다. 배운것, 겪은것이 보통사람과는 전혀 다른 이 사람이 그 학문과 그 경륜과 그 지체를 다 버리고 조정과 등을 진채 고향길에 아니, 구체적으로는
방랑길에 오른 그 속내인즉은 세상만사가 도저히 제 뜻대로 되지 않는데 허무감을 금할수가 없어 그리하였다는 그것인것이다. 꼬집어 말하면
기울어져가는 신라조정에 대한 환멸이고 자기 힘으로는 조정을 바로잡을수 없다는 패배감이 그 원인이라는 소리였다. 헌강왕에 정강왕, 진성녀왕에 이르기까지 임금님네들밑에서 일해본즉은 그리고 지금의 효공왕까지 넘겨본즉은 아닌 말로 어느 하나 비루먹은
강아지 한가지로 도저히 구실을 바로하는 임금님이 없다는게 그의 견해였다. 비온 뒤 대순 돋듯 도처에서 솟아오르는 나라님네들 말로 하면 《반란의 무리》들인 농민폭동군들이 이 나라의 천년사직을 밑뿌리채
뒤흔들어놓는데도 어느 임금 하나 이를 바로잡을 궁냥을 하지 못하고있었다. 그저 울상이 되여 절절매기만 할뿐이였다. 문제로 되는것은 제가 궁냥을
못할것 같으면 신하들의 진언이라도 제대로 받아들여야 할텐데 그 일도 바로 못하는것이였다. 보다 못해 뭘 좀 상주할라 하면 간신이요 역적이요 별의별
루명 다 뒤집어씌워 목자르려드는터라 눈뜨고 그 꼴 보느니 차라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달아나는게 상책이다 하고 돌아서고만것이였다. 인걸이 인걸을 알아본다 하였으되 내 그만하면 나라 하나쯤 거두는 일은 힘들이지 않고 도울수 있는 몸인데도 그걸 알아보지 못하니 더 상종해
무엇하랴, 그쯤하고 물러나와 산수풍경이나 돌아보며 기분을 가라앉히자 이런 생각으로 이 사람은 지금 제 말대로 하면 유람길에 오른것이였다.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스님들과 말동무하며 지낸다는 형이나 한번 만나볼가. 거기 가면 이전에 낯을 익힌 정현스님이 계시겠다. 참, 그가
도선대사와도 련계가 있는 사람이니 혹여 그한테서 도선의 행처를 알수 있으렷다.) 이런 생각을 해보는 최치원의 뇌리에 문득 도선과 처음 만나던 때일이 어제런듯 떠올랐다. 885년 신라 헌강왕시절 당나라에서 돌아와 조정문턱을 넘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띄운것이 도선이였다. 자기보다 한해 먼저 조정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도선이 여간 반가와하지 않았었다. 둘은 이내 친숙해졌는데 그것은 서로가 말이 통하고 글이 통해서였다. 둘 다 세상을 보는 눈이 한가지로 서로 통하였으니 대화의 초점은 지금의 란세를 바로잡는 길은 똑바른 인재를 골라서 키워야 한다는것과 그가
란세를 바로잡아나가도록 밀어주어야 한다는 그것이였다. 시작은 늘 최치원이 먼저 떼군 하였는데 그의 견해를 요약해보면 이러하였다. 이 세상은 음과 양의 두 실체가 고르롭게 결합되여 이루어지고 유지된다. 음과 양의 두 실체는 구체적으로 보면 수화목금토 즉 오행이다.
사람의 마음은 물, 불, 나무, 쇠, 흙과 같은 자연의 다섯가지 물질을 가려볼줄 아는데서 생기는데 이를 제 마음대로 다를줄 아는것이 인재요 바로
이 인재를 찾아서 내세우는것이 세상을 바로잡는 근본리치이다. 도선은 이를 적극 지지하고나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밝고 어두운 음양에 수화목금토 오행이 조화를 이룬것이 사람사는 이 땅인데 인재가 나는 곳은 제한되여있는바 내가 그 인재가 나서 흥하는
지맥과 지혈을 알고있으니 송악과 평양성이 바로 그곳이다. 최치원은 그때 자기는 실체를 우선 인정한다고 주장하였고 도선은 그 실체는 자연의 조화속에 있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인재가 기본이라는 점에서
둘은 견해가 일치했고 당시로서는 자기들의 눈에 차는 인재가 아직은 없다는데로 결론이 났었다. 당대에 찾아보다 안되면 다음대에 가서라도 인재는 나질것이니 세상에 몸담고 언제까지건 찾아보자는것이 둘의 견해였다. 세해를 넘기지 못하고
도선은 조정대궐을 떠나갔지만(그사이 최치원도 조정의 세파에 밀리워 지방관리로 전전했다.) 그가 지금쯤 어디서건 그토록 애타게 바라고바라던 지모가
갖춰진 인재를 찾아냈을지도 모른다고 최치원은 생각했다. (그래, 도선을 만나보자.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던가.)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떠난 길이였다. 최치원은 고삐를 툭툭 채며 하늘소를 독촉했다. 가야산 해인사로 먼저 가보려는것이였다. 최치원은 해인사에서 줄을 밟아 다음해인 899년 초에 드디여 도선이 은거해있는 백계산 옥룡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도선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는 때였다. 거기서 도선의 제자 운암으로부터 그사이에 도선이 송악에서 기대되는 인물을 하나 골라보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그때부터 최치원은 송악의 인물이라는 왕건을 눈여겨보면서 그의 활약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것을 유일한 락으로 삼았다. 그렇게 해를 넘기기를 십년 하고도 또 십년째되는 해에 그사이에 새로 사귄 또 하나의 재사 최언위를 알게 된 뒤에는 그더러 자기대신 송악에
가서 왕건을 도우라고 부탁까지 하였다. 마침 그때가 바로 왕건에 의해 고려국이 금방 일어선 때였다. 최언위는 최치원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이미전부터 왕건을 찾아가려 하였던 참인지라 기꺼이 송악으로 가서 왕건의 수하에 들었다. 그는 왕건의
밑에서 문서일반을 도맡아보았을뿐만아니라 많은 대외적문제들에서 요긴한 조언을 주어 고려의 부흥에 이바지하였다. 말년에는 박술희와 함께 태자의
사부로 있으면서 고려조정의 대물림에도 헌신하였다. 고려국이 선 다음부터 왕건의 모사로 활약한 최지몽도 최치원이 골라서 보내주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력사에는 최치원이 왕건에 대해 관심이
컸고 시종 그를 지지하는 립장에 서있었다는것이 엄연한 현실로 기록되여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