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 회)
몇년안팎에 사서삼경을 무불통달하고 십년이 지나고난 뒤에 글에서든 무예에서든 그를 따를자가 없게 되였으니 스승인 대사 범교마저도 손털고 나앉아
대견함보다는 두려움이 더 짙은 얼굴을 하고서 훈계같은건 일체 집어치운채 이제는 날개를 펴도 되겠소하고 조심히 권고하였다. 그즈음에 와서 궁예의 미모는 놀라웁게 달라졌다. 기골은 장대하면서도 윤이 도는 옥골선풍이요. 얼굴은 칠색무지개인데 눈이 하나뿐인것조차
본래는 인간세상에 그것이 진짜 이목구비였던듯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 역시 왕가의 혈통을 이은이가 다르구나. 때를 보아 세상을 건질이가 틀림없으렷다. 가려는 궁예에게 홀딱 반하고말았다. 그와 더불어 란세를 한번 바로잡아보는수다, 이런 생각으로 날을 이어왔다. 속세의 무지렁이들을 어떤 수로 주위에 끌어모으며 한무리로 꿰여차고 단숨에 대사를 도모할수 있을것인가. 가려는 자기가 어느결에 궁예의
모사가 되여 세상을 한번 휘저어볼 생각까지 하게 된것이 놀라웁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꿈이 싫지 않았다. 얼마든지 해낼수 있다는 생각이 날이갈수록 부풀어만 갔다. 그래서 바로 그날 범교대사가 궁예보고 이제는
세상밖을 나가보아 후회가 없으리라 일러줄 때 제 먼저 머리를 끄덕였고 궁예와 나란히 세달사를 떠났었다. 그후로 궁예를 따라서 개산의 농민군 두령 기훤을 찾아갔다가 뛰쳐나오고 다음해에 북원의 농민군 두령 량길을 찾아가서야 비로소 장수축에 든
궁예를 보좌할수 있었다. 《보종께선 좌선중이시오?》 누군가의 말소리에 가려는 흠칠 상념에서 깨여났다. 날씨가 하도 좋아 잠시잠간 졸며마며 마음편히 머리쉼겸 지나온 날들을 더듬어보고있는중인데 웬놈이 달콤한 내 기분을 깨는것이냐. 메밀눈이
돼가지고 앞을 노려보니 환선길이라는 자칭 궁예의 제일부장이라 으시대는 곱게 뵈질 않는 그 작자가 대청마루에 올라서고있는것이였다. (오라질놈! 고작해서 재간이란게 칼 휘두르는것밖엔 없는 놈이 뭐라구? 좌선중인가구? 하도 궁예를 따라다니더니 이젠 좌선을 다 알고…) 코웃음이 나는것을 참으며 가려는 적당히 응수했다. 《날씨가 하 좋더라니… 그래, 무슨 일로 오셨소?》 《궁예대왕께서 여기 와계시나 해서 왔소.》 《지금이 사시 초엽이라 잠선중이 아니신지…》 《하오면 이후에 와야겠군.…》 (저놈은 언제 봐야 말버릇이 못되단 말이야.) 중문밖으로 사라지는 환선길의 뒤통수를 쏘아보며 가려는 혀를 찼다. 다른 장수들은 자기가 궁예와 너나들이로 통하는것을 알아차려서인지 몸가짐도
조심하고 언행도 단정한데 똑 하나 저놈만은 자기앞에서 배도 더 내밀고 말투도 반말이 례사라 밉살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건 그렇고, 가만… 저것이 또 우봉엘 다녀왔나? 생각이 이에 미치자 가려는 또 한번 코웃음을 쳤다. 우봉령주의 딸을 본 날부터 마른침을 삼켜가며 궁예를 부추기는 꼴이 여간 가관이
아니여서였다. 어젠가 그젠가 아니, 사흘전 같았다. 헤식은 웃음을 지으며 궁예앞에 나타나서 저것이 하던 말이 생각키웠다. 《선종어른께선 이제 금방이라도 대왕으로 등극하셔야 할터인데 당장에 침전에서 보필할 왕후가 책봉되지 않고있으니… 이 일은 시급히 바로잡지
아니할수 없는 일이므로 내 이길로 우봉에 다시 다녀오려 하오이다.》 (이놈아, 녀색하고는 담을 쌓고사는게 우리 스님들인줄 네가 모른단 말이냐? 그것 말고도 할 일이 너무 많아 까무러칠 지경인데 저것은 때없이
찾아들어 색타령이람…) 가려가 밸이 치솟아 한마디 하려는데 궁예가 씩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바람도 쐬일겸 다녀오기는 하나… 가고오는 길에 송악에 들려 궁성축조나 잘되여가는지 알아보라.》 환선길이 떠나간 뒤에도 가려는 잡친 기분을 쉬이 돌리지 못하였다. 《미륵정토》를 꿈꾸는 우리에게 불법을 파계하라 한사코 부추기는 저놈을 어떻게 다스려놓아야 하나 하고 생각하는중에 가려에게는 문득 환선길이를
처음 만나던 때 일이 떠오르는것이였다. 언제던가, 그래, 우리가 기훤이패에서 떨어져나와 량길을 찾아갔을 때 량길의 수하장수로 자처하던 저것이 우리 형님에게 먼저 내기를 걸었었지.
자기의 협도(일곱자길이에 네근정도 나가는 무기, 칼날의 길이는 석자인데 끝이 조금 뒤로 젖혀지고 칼등에 상모를 달았다.)와 궁예의 예도(칼날의
길이는 석자반정도 되고 날이 가늘고 끝이 뾰족한 칼)가 붙어봐서 제가 이기면 궁예의 까까머리를 베여버리고 제가 지면 부하가 될수 있다고 했던가.
그래서 붙어본것이 해가 세기장 지날 때까지 끝이 나지 않다가 환선길 저놈의 턱수염이 뭉텅 잘리워나가서야 손을 들었댔지. 그것도 량길이 그 대목에
이르러 중지시켜서이지 그냥 이었더라면 저게 영낙없이 목떨어진 귀신이 되고말았을것이다. 그 주제를 해가지고도 지금도 궁예다음엔 무조건 자기노라고
노상 으시대고있는것이다. 가려는 환선길이나 리흔암이처럼 처음부터 량길의 수하에 있다가 궁예에게 돌아선 장수들보다 홍유나 배현경, 복지겸이처럼 각기 제스스로 무은
부대를 가지고있으면서 량길과는 복속이 아니라 련합의 방식으로 어울렸다가 궁예를 따라나선 장수들에게 더 믿음이 갔다. 그들은《불국정토》건
《미륵대제국》이건 그런것은 알바 아니라며 그저 고구려같은 나라를 일으키려는 뜻만 세웠다면 죽어 백골이 진토돼도 여한없이 따르겠노라
맹약했던것이다. 조건을 전제로 한 련합이였고 뜻을 명백히 한 련합이였다. 사람이란 뜻이 있어야 하는것이다. 맹목적인 복종은 실속이 없기 쉽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려는 환선길이네보다 홍유네들을 더 믿게
되는것이였다. 가려의 생각은 틀린것이 아니였다. 자기를 의성사람이라고 하는 홍유나 서라벌가까이에서 살았다는 배현경이나 면천이 고향이라고 하는 복지겸이나
다 그들은 저들의 선대는 본시 고구려사람이라고 하나같이 말하였다. 고구려를 잊을수 없고 고구려를 재건하는것은 선대로부터 이어오는 가문의 뜻이자
자신들의 인생목적이라고 내놓고 말하는 이들이였다. 이들이 궁예에게 모여온것은 바로 대대로 이어오는 가문의 소원, 고구려재건의 뜻을 궁예가
실현하련다고 하였기때문이였다. 그래서 궁예를 따르고있는것이였다. 궁예가 고구려재건의 기치를 들도록 부추긴것이 바로 가려였다. 궁예는 가려와 함께 세상을 주름잡을 포부를 익히면서 백성들을 불러일으킬 명분을
놓고 적지아니 고심했다.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져 조락의 길을 달음치는 신라에 대해 기대를 거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고구려같은 강대국을 일으켜세우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어디건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재건의 기치를 들었더니 아닐세라 사람들이 저저마다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기도 시기려니와 장소도 잘 골랐었다. 마침
이곳이 녕월이북이라 지금은 신라관할이지만 옛날엔 대부분이 고구려땅이였던것이다. 기훤이나 량길이 그만한 세력으로 왜서 이렇듯 분명한 뜻을 세워
백성들을 규합하지 못하는지 이상했다. 그것이 바로 그네들의 약점이라고 보았던것이다. 어쨌든 가려는 신심을 가지고 쉴새없이 뛰고뛰였다. 한해전 이맘때 송악의 이전 성주 룡건과 만났을 때 그가 곱씹어 다짐을 받아간것도 바로 고구려재건의 기치였다. 룡건은 고구려재건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아낄것이 없다며 자기 본터까지 아니, 아들까지 궁예에게 미련없이 바치였었다. 그때 받은 충격을 생각하면 가려는 지금도 현훈증이 날 정도였다. 하늘이 돕지 않고서야 그렇듯 막강한 인력과 재력에 권력을 지닌 룡건이 제발로 찾아올수 있었으랴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만하면 첫걸음은 잘 뗀셈이였다. 대세의 흐름을 제때에 타고 면바로 돛을 올린것이였다. 지금 형세로 나간다면 세상을 걷어쥐는것은 잠간이요
멀지 않아 반드시 천하를 굽어보게 될것이였다. 가려는 회심의 미소를 머금은채 다시금 상념의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 우중충한 산자락들에 둘러막혀있어 퍼그나 안침져보이는 널직한 골짜기에 어둠이 슬밋슬밋 내려앉고있었다. 골안의 이곳저곳에 락엽속에 버섯 돋듯
점점이 널려있는 초막들에도 어둠발은 서서히 스며들었다. 그중에 류달리 덩지가 큰 초막 하나가 유표하게 보이였다. 다른 초막들보다 내굴이 세괃게
뿜어나오는것도 표가 나지만 초막앞에 너른한 공지가 닦아져있는데다 한쪽에 대여섯필의 말들이 주런이 매여져있는것이 어둠속에서도 똑똑히
보인때문이였다. 초막안의 고콜대에선 광솔불이 아닌 노루기름등잔불이 너울거리며 초막안에 고소한 냄새를 풍기고있었다. 《다 내 불찰이야. 애초에 그 애꾸놈을 믿지 말았어야 하는것을…》 몸집이 우람한 장년의 텁석부리 하나가 들었던 옹배기를 내리치며 부르짖었다. 《너무 상심마소이다. 아무때나 그 버릇을 떼주면 되는것이지요.》이러며 다른 털부숭이가 이발을 부드득 갈았다. 초막안에서는 여럿의 장정들이 둘러앉아서 화로불에 노루고기점을 굴려서는 술사발과 번갈아가며 입안으로 넣고있었다. 무언가 괘씸한 일을 당하여 그 분을 삭이기가 대단히 힘들다는 표정들이고 다른편으론 그 분풀이를 반드시 하리라 벼르는 자세들이였다. 옹배기를 내리치며 남달리 분해하는 털부숭이가 바로 이곳 북원일대 농민군 두령인 량길이였다. 의지가지할데 없어 믿고 찾아왔으니 미천한 몸 좀 건사해주시오 하며 머리를 조아릴 때 그만 깜빡 속아서 그 애꾸눈 중대가리를 받아준것이 큰
실책이노라고 연신 자책하는 량길이였다. 사람이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량길은 신의를 제일로 쳤고 배신을 제일로 증오했다. 까짓놈 제 하나 변심했다면 그런대로 넘어갈수도 있으련만 궁예
그놈은 량길이 자기가 지금껏 애써 키워온 끼끗한 장수들까지 절반이 썩 넘게 후려차고 달아난것이다. 코밑을 닦아주며 자래운 환선길이나 리흔암이
같은것들이 자기를 버린것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서는 량길이였다. 그보다 량길이 더 아수해하는것은 홍유, 복지겸, 배현경이들이였다. 홍유는 제천근방의 느릅재에서 만났고 복지겸은 려주 당고개에서, 배현경은 제천 서쪽 박달재에서 만났다. 신통히도 이들 셋은 날자는 서로
달라도 똑같이 고개길에서 마주쳐 인연을 맺았었다. 고을관청의 탐관오리들을 치러 가는 길에서였다. 홍유부대와 느릅재에서 만난것도 둘이 다
제천고을을 치러 가는 길이여서 우연히 만나 손을 잡았고 복지겸부대와는 려주고을을 치러 가는 길에 당고개에서 만났다. 배현경이네 부대와는
중원(충주)고을을 치러 가는 길에 또 길이 같아 함께 거사를 치른 뒤 손을 잡았다. 이들이 합류한탓에 량길은 중원과 북원, 서원(청주),
괴양(괴산), 제천, 함양 등지의 10여개가 넘는 고을들을 일거에 차지할수 있었다. 량길은 이즈음에 와서 그들이 자기에게서 떨어져나간 리유가 무엇일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하군 하였다. 그들이 자기와 한 맹약을 버리고 하필이면
그 애꾸눈이 궁예를 따라가다니… 궁예가 자기보다 식자가 있는것을 보고 반했을가, 아니면 내가 인정이 모자라 그랬을가 등등으로 생각해보았으나
어느것 하나 알맞는 리유는 아닌것 같았다. 하다면 내가 궁예보다 무엇이 모자라 그들에게서 버림을 받았을가, 나는 본시부터 마음이 푸근한데다 남을 깔보는것따위는 애당초 싫어하는
사람이다. 나는 아직까지 심보가 고약하다거나 속이 좁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하였다. 도중에 우리에게 끼여든 궁예보다는 그래도 시작부터 부대를
이끌어온 이 량길의 공이 더 큰것을 그들이 과연 모른단 말인가? 백성들의 등을 글겡이질하는 신라관리들을 나만큼 증오하고 나만큼 많이 목 버인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내가 관청을 친 뒤에 남보다 재물을 더 가진게 있었더냐 따져보면 그런것도 없다, 열이 생기면 열을, 백이 생기면 백을
부하들과 똑같이 나누었다, 누구든 내수하에 든 사람이면 다 똑같이 대해주었고 나처럼 믿었다, 그래서 다들 나를 칭찬하며 감심해하지 않았던가,
관청놈들 꼴 보지 않고 굽신거릴 일 없으니 이제사 사람 사는것 같다며 이구동성 눈물을 머금지 않았던가, 그런데 졸지에 나와 등을 지다니… 아무리
머리를 쥐여짜보아도 량길은 그 원인을 찾을수가 없었다. 《그래 맹손아우는 고덕재너머에서 군사를 얼마나 모았소?》 량길이 이발을 쑤시며 묻자 곰가죽등거리를 걸친 장수가 제꺽 대답하였다. 《량백은 실히 될것이요.》 《검바우 너는?》 《방치고개너머에선 오십밖에 거두지 못하였소이다. 하지만 싸리재등너머에선 백을 모았소.》 검바우로 불리운 장수가 뜨직뜨직 대답했다. 《그쪽도 생각보다는 많지 않구나.》 량길은 한숨을 내쉬였다. 《금년안으로 정한 이천은 어떤 일이 있어도 확보해야 한다. 궁예가 명주(강릉)의 순식이네를 굴복시키고 얻은게 천에 가깝고 쇠두레에 가서
얻은 군사만도 오백을 넘는다고 한다. 궁예에게 가붙은 송악군사도 오백이라던지 천이라던지… 좌우간 작당을 잘하고 덤벼야지 오히려 코를 떼울수가
있다. 다들 좀 더 분발하자.》 《알겠소이다.》 《그럼 오늘은 이만하자.》 량길이 하품을 하며 일어서려는데 구석에 앉아있던 그중 젊어보이는 장수 하나가 엉거주춤하며 한마디 던지였다. 《저… 우리도 어디 가서 모사를 한명 청해와야 하지 않겠소이까?》 《모사를?…》 《그렇소이다.》 《나에겐 그대들이 다 모산데 새삼스레 모사는 무슨 모사요?》 량길은 도리머리질을 했다. 《우리같은 까막눈들이야 이 마음뿐이지 어디 두령님을 보필할 재목이 되오이까? 그래도 모사라면 글을 알고 그 무슨 나라같은걸 세울 료량까지는
할줄 아는 사람이여야 하옵지 않겠소이까.》 《나라를 세울 료량?! 하하하…》 량길은 허구픈 웃음을 터뜨리다가 인차 정색해졌다. 《나라라는게 누구나 다 세우는건줄 아는가. 아무나 쉽사리 세울수 있는게 나라라면 얼마나 좋겠나. 그래, 누가 나라를 세운다던가?》 《궁예를 따라다니는 그 보종이란 중놈이 그러는줄 아오이다.》 《가려 그놈이?… 하하하. 그러니까 가려가 궁예의 나라를 세운다는건가?
하하하, 이 사람 점박이! 자네라면 혹여 몰라도 그 애꾸가 나라라니 당치 않은 점괘일세. 두눈이 또렷한 우리도 그런 생각을 못하는데 외눈깔
그놈이 그런 룡꿈을 꾼단 말인가!》 《외눈이 더 밝을수도 있는 법이옵지요. 들려오는 소리는 분명…》 《그렇다면 결단코 용서해서는 안될 놈이다. 지금 있는 나라는 어찌하고 또
나라타령이란 말이냐?》 량길은 얼굴이 시뻘개서 소리쳤다. 《하오면…두령님은 무엇을 위해 지금껏…》 《나는 조정은 증오하지만 나라는 나무람 안한다! 내 지금껏 탐관오리들을 치고 땅을 넓히는것은 조정이 정신을 차리고 어진 임금을 앉히기를
바라서야. 농사군을 존대하는 어진 정사만 펴는 때에 가선 내 이 두령자리를 미련없이 내놓겠네. 지금 우리가 차지한 고을들은 각기 아우들이 성주가
돼서 돌보도록 조정과 약조만 하면 될것이고.》 《농사군을 존대해줄 그런 임금이 나지리라 생각하오이까?》 《지금처럼 뒤바꿈이 되는 꼴을 봐서는 아닌 말로 기다려봄즉도 하지 않을가?》 《힘들것이오이다. 저 썩어빠진 서라벌족속들속에서 언제 그런…》 《우리가 서라벌까지 세력을 뻗쳐간 뒤에 우리 손으로 골라앉힐수도 있는거지.
그리고도 미타하면 조정의 대신자린 자네들이 앉아 지키면 될것 아닌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앉아서 우리 맘에 들 땐 머리를 끄덕이고 그렇지 않을 땐
가로 젓기만 하란 말이야. 하하하…》 량길은 제김에 만족한듯 또 한번 시원하게 웃어제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지금 당장은 힘을 회복해서 저 궁예란 놈을 우선 때려치워야 하는거야. 그놈이 감히 나라까지 세우려든다면 그거야말로
내버려둘수 없는 일이다. 이전처럼 또 세쪼박으로 갈라져서 싸움으로 세월을 보내게 할순 없단 말이야.》 《궁예란 놈은 조만간에 눌러놓는다치더라도 그런 놈이 아래켠에 또 하나 나타난것은 어찌하겠소이까?》 점박이장수는 여전히 고개를 기웃거렸다. 《강진인가 령암인가 하는데서 비장노릇 하였다는 그 견훤이란 사람 말인가?》 《예.》 《참, 그 사람은 옛적 백제를 잊지 못해한다면서?!》 《그렇다고 들었소이다.》 《그 사람도 참 답답하이. 행차후 나발이라고 지나간 옛적 나라를 생각해선 뭘한다는건가. 나도 소문을 좀 들었는데 그는 백제왕가의 후손도
아니라던데… 룡상을 꿈꿀 처지도 못되는 주제에 이상도 하군. 분풀이를 하고싶으면 나와 손잡고 서라벌조정을 갈아댈 생각을 해야지. 참, 어이없는
일도 다 있군.》 이러며 량길은 입을 쩝쩝 다시였다. 량길은 견훤을 자기같은 농군출신으로 알고있었다. 사시절 부지런히 몸을 놀려서 제가 지은 낟알로 배불리며 사는 재미면 다지 그 이상 더
바랄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조정관속들이 하도 농군들의 등껍질을 벗기는지라 이건 정말 참지 못하겠구나 하고 들고일어선것이 자기도 이상할 정도로 무리가 늘어 사방
수백리를 거두는 대두령이 된 후에도 그는 늘 농사군시절을 그리워하였다. 자기를 떠받드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부터 제 어깨에 실리는 책임감의 무게로
하여 생각도 이전보다는 더 넓고 더 깊이 하느라 밤잠을 설칠 때가 오죽 많았으랴. 그통에 세상을 보는 눈도 이제는 어지간히 미립이 텄다고
자부하는 량길이였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량길에게는 견훤이 이전 백제를 그리워한다는 사실이 가소롭게만 여겨졌다. 그러니 그가 조금만 더
있으면 필경 백제를 다시 세우겠다는 소리를 할수 있으렷다. 하다면 웃쪽에서 나라를 세우려 한다는 궁예는 또 어떤 나라를 꿈꾸고있는걸가. 《견훤은 그렇다치고 그 궁예란 놈이 세우련다는 나라는 또 어떤 나란가?》 량길이 누구에게라 없이 묻자 점박이장수가 기다렸다는듯 또 입을 열었다. 《후고구려국이라는걸로 알고있소이다.》 《후고구려국?!… 궁예가 고구려국의 왕가후손이라도 되는가?》 《그런것 같지는 않사오이다. 그는 본시 녕월 아래사람인걸로 알려져있소이다. 》 《왕가후손도 아닌것이 그 무슨 명분으로 감히 후고구려국을 운운한다는건가?》 량길은 궁예의 속내를 도무지 알수 없다는 표정이였다. 《궁예는 고구려를 바라고 견훤은 백제를 바란다 그 말이렷다?!…》 이렇게 묻고는 제 먼저 도리머리를 저었다. 《아니 되겠다. 넓지 않은 이 땅에 다 지나간 고구려는 뭐고 백제는 또 뭐란 말이냐. 저 웃쪽에 발해가 있고 이 아래쪽에 신라가 있어 이
땅이 두동강난것도 안타까운 일인데 이제 또 네동강이 나게 해? 재미가 들어 어느놈이 또 일어나 다섯동강 내고 여섯동강 내고… 끝없이 동강만 내면
나라라는것이 어느 하나 꼴모양 잡힌게 남아있을테냐? 그렇지들 않으냐?》 《듣고보니 그 말씀에 일리가 있소이다.》 량길의 부하들은 필경 그럴수도 있을상싶어 머리를 주억거렸다. 《서둘러야겠다. 금년안으로 대오확보를 끝내야겠어. 그리고 래년 봄부턴 우리도 북소리를 울려야겠다. 궁예 그놈에게 정식으로 싸움을 걸어
버릇을 가르친 뒤에 죽이든 살리든 결말을 보고는 아래켠으로 말을 몰아 견훤을 다잡아야겠다. 그러되 견훤에게는 먼저 서신을 띄우자, 새로 나라를
세울 생각은 거두고 손잡고 신라조정을 정리하자고.》 《그게 좋겠소이다.》 량길의 측근들은 수긍했다. 그러나 점박이만은 아무 말도 없었다. 이후에 그는 간다온다 소리없이 량길의 슬하를 떠나버렸다. 송악으로 간것이였다. 거기서 보통 군졸로
말없이 세월을 보내다가 궁예가 밀려난 뒤 왕건의 눈에 들어 병부령관리로까지 발탁되였다. 그가 어느때 죽었는지는 기록에 없으나 전장에 나가다가
급병으로 순직했다는 이야기가 민간에 전해져오고있다. 우봉땅의 금교역참(지금의 금천읍)이 있던 자리 조금 못미처에 있는 점박이고개가 바로 그가 죽은 곳이라고 전해오고있다. 그후의 사연은 어찌 되였든 그 당시 량길은 또 한번 배신을 당한 분함을 누르는데 적잖은 신고를 해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굳힌 마음을 돌려먹지 않고 내밀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대오를 늘이는데만 전념했다. 궁예를 눌러놓겠다는
하나의 생각뿐이였던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