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회) 

2. 뜻을 키우다

 

동켠하늘에 려명이 비끼기 시작했다.

어둠은 밤새 깃들었던 자리를 쉬이 내여주기 싫은 모양 느릿느릿 안개발속으로 스며들어갔다. 잇달아 거밋한 성곽의 자태가 서서히 드러났다.

옛 평양성이였다.

천년강국으로 위용떨치던 모습이런듯 웅건한 그 자태는 여전하였다. 성벽중허리까지 덮여있는 이끼며 그우에 또 줄기를 쳐나간 이름모를 풀들, 더우기는 성가퀴 구석마다에 잡초들이 자라고 날새들의 둥지까지 보이는것으로 보아 지금은 이곳이 인적이 드문 곳으로 되여버렸음을 알수 있게 하고있다.

성터는 아직 단잠에서 깨여나지 않고있었다. 고요한 정적만이 흐를뿐…

바로 이때 뚜거덕 뚜거덕… 새벽하늘을 깨치며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성벽 웃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때아닌 인기척에 놀란듯 성벽우의 안개발이 설레설레 흩날리고있었다.

누구일가, 이 새벽에…

성벽우로 사람들의 형체가 하나, 둘 솟아올랐다. 희붐히 밝아오는 하늘을 배경으로 말을 탄 사나이들의 모습이 우렷이 드러났다.

일행은 여섯이였다. 칼을 차거나 창을 꼬나든 차림들이였다. 이들은 지금 밝아오는 동녘하늘을 바라보고있었다. 해가 막 솟아오르려는 시각이였다.

순간 맨앞에 서있던 말이 오호호흥!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한길 솟구쳤다. 말우에 앉은 사내가 잽싸게 말고삐를 챈것이였다. 울음소리와 함께 말은 성루로 올리달렸다. 다른 말들도 약속이나 한듯이 앞의 말을 뒤따랐다.

바로 그 시각에 동켠하늘이 이글이글 타번지면서 뻘건 해가 이마를 솟구었다. 순간에 하늘땅은 온통 한모양새로 뻘겋게 물들어버렸다.

그러자 맨앞의 사내가 또다시 말고삐를 챘다.

오호호흥!…

말은 다시한번 솟구쳐오르며 울음소리를 터뜨렸다. 뒤따라 다른 말들도 겨끔내기로 솟구쳐올랐다.

사내들은 하늘끝에라도 오르려는듯 한번 또 한번 련속해서 솟구치기를 거듭했다. 그러면서 목청껏 웨쳤다.

오- 평양성아!…

아- 고구려땅아!…

이들의 웨침소리는 하늘가 멀리로 끝없이 메아리쳐갔다. 격양된 이들의 심중을 담은듯 고동색노을에 감싸인 안개발은 기세차게 성벽을 휘감아올라 붉게 타는 하늘가로 흩날려갔다.

해는 어느새 다 솟아올랐다.

아침해빛에 성곽아래 흐르는 패강(대동강)과 그 너머 안개우로 점점이 솟아있는 산봉우리들이 눈부시게 빛을 뿌렸다.

이제는 사내들의 자태도 완전히 드러났다. 하나같이 건장한 체구에 애젊은 나이들이였다.

맨앞의 사내는 해처럼 둥근 이마에 광채가 흐르는 눈이며 보기좋게 솟구쳐오른 코날이며 위엄있게 네모진 턱이며 부드럽고 여유가 넘친 볼이며가 한눈에도 총명함과 지혜로움, 넓은 도량과 깊은 인정미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얼굴이였다. 그는 송악의 젊은 성주 왕건이였다.

그의 뒤를 따르는 사내들은 다름아닌 유금필, 박술희, 능산이들이였다. 이들 말고 또 두사람, 그들은 왕건의 4촌아우 왕식렴과 왕신이였다.

이들이 이곳 평양성에 그것도 이른새벽에 해가 떠오르는 시각을 맞추어 올라와 해마중을 하고있는 까닭을 아직은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있었다. 옛 고구려도읍 성터우에서 솟는 해를 마중하며 가슴속깊이에 묻어둔 고구려재건의 포부를 맘껏 터쳐보고있는것을…

성벽아래쪽에서 또 다른 인기척이 들려왔다.

수염발을 보기좋게 드리운 세 로인이 무슨 말인가 중얼중얼 주고받으며 성터로 올라오고있었다.

셋중에 두 로인은 비단옷차림이였다. 머리에 두른 비단두건우엔 꿩깃까지 꽂고있었는데 식자깨나 있음직해보였다.

두 로인은 왕건의 사부들이였다. 한 로인은 변씨성을 가졌고 다른 로인은 마씨성을 가졌다. 변씨로인은 고구려 이전의 부여국에서 왕실의례를 맡아본 귀족의 후손이라 일컫는 사람이고 마씨로인은 그보다 썩 거슬러올라가서 단군왕대의 팔가중의 하나인 마가벼슬을 지낸 조상의 후손이라 자랑하는 사람이였다. 이들이 바로 이전엔 왕건의 아버지 룡건의 모사들이였고 지금은 왕건을 가르치는 사부의 중임을 맡고있는 사람들이였다.

그런데 이쪽의 세번째 로인은 차림새부터가 두 로인과는 판판 달랐다. 칡베옷으로 적당히 몸을 가린 우에 사슴가죽으로 지은 둥거리같은것을 걸쳤는데 허리엔 굵은 칡바오래기를 허리끈삼아 둘러감았고 누런 털이 그대로 붙은 노루가죽으로 행전삼아 정갱이를 둘러치였다. 로인의 두다리가 범의 앞발통같은것은 물론이요 머리를 질끈 동인 가죽두건마저도 범의 대가리털가죽을 그대로 손질해서 두른것이여서 그 모양이 흡사 범의 형국 그대로였다. 하지만 로인의 얼굴생김새는 그리 무서워보이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사냥을 반업으로 살아가는터이라 차림새는 우악스러워보이나 느슨한 눈빛의 얼굴은 마음편한 느낌을 먼저 주고있다.

이 범로인은 이곳 평양성터에서 대를 이어오는 토배기였다.

《우리 제자분을 그렇게 보신단 말씀이시지요?》

마씨성의 사부로인이 범의 모양을 하고있는 평양성토배기로인에게 묻는 말이였다.

셋은 이미 많은 말을 주고받은것 같았다.

《곱씹어 말하는데 세상을 건질 인품과 도량이 엿보이오이다. 기대되는 인물이 분명하오이다.》

《고맙소이다. 우리 소임이 바로 그것인지라 로인장의 그 말씀이 정말이지 힘이 되오이다.》

마, 변 두 사부로인이 연송 머리를 숙여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초면에 낯을 익히자마자 다시는 상면이 어려우리라 하시는 말씀의 뜻은 무엇이오이까?》

《예로부터 천자를 알아본이는 인츰 자취를 감추는게 상례라 하였거니와 로인장께서도 그 말을 따르려고 하시는것은 아니온지…》

변사부가 떠보듯 묻자 범로인은 도리머리를 저었다.

《나는 누구처럼 천자까지는 가려볼줄 모르오이다. 그저 그가 류달리 이 평양성터를 자주 찾아오는지라 익히 눈여겨보아온터에 믿음이 가서 하는 말이오이다. 고구려를 그리는 마음으로 온몸을 끓이는 모습이여서 남다른 기대를 가져보는것이오이다. 말은 바른대로 지금같은 란세에 고구려같은 나라를 다시 일으켜서 겨레의 기강을 바로세워줄 인물이 나와주기를 고대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소이까?》

《그러할진대 로인장께선 어찌하여…》

《나이때문에 그러는거지요. 내 나이 어느덧 예순을 넘겼소이다. 이 평양성의 새 주인을 만나는 날까지 기다려낼것 같지 못하오이다. 》

《우리 제자분에게 기대를 가지시면서도 그러시오이까?》

《시일이 걸릴것이라 생각되여 그러는것이오이다. 그 제자분이 지금 당장에 눈을 돌려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옵고 아직은 송악린근과 그 이남이라고 짐작되오이다. 그대들도 그 제자분을 따라야 할것이므로 내 하는 말이지요.》

《하오면 우리와 송악에 가시오이다. 우리가 힘자라는껏 로인장을 모시겠소이다.》

《아니요. 고맙소만 난 여기 평양성이 좋소이다. 태를 묻은 이곳에 뼈도 묻어야지요. 죽어서도 여기서 평양성의 새 주인을 맞으면 되는거지요. 》

《말씀의 뜻을 알겠소이다. 아무쪼록 명을 이어주시오이다.》

《바라는바가 같으니 우린 죽어서도 다시 만날것이오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범로인은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대들도 래년초쯤 가서는 그 제자분을 더이상 돌보지 않으셔도 될것 같소이다. 제자분의 생일이나 쇠고서 말이오이다.》

《로인께선 우리 제자분의 생일까지 알고계시오이까?》

《알고있었소이다. 제자분은 이미 다 자랐소이다. 래년에는 스무살이 되지 않소이까. 나이만으로도 성년이 되는데다가 그는 이미 장한 뜻을 세운 뒤오이다. 도선대사는 벌써 그의 자를 약천이라고 지어놓고계시던데요. 약관(스무살)의 나이가 되면 하늘밑을 굽어보리란 뜻이오이다.》

《약천!…》

《도선대사가!…》

두 사부로인은 저마끔 부르짖었다.

《로인장께서 도선대사를 아시오이까?!》

《알지요. 이곳에 가끔 오군 하여 자별한 사이가 되였소이다. 금년 봄에도 오셨댔는데… 이젠 평양성도 마지막으로 보는것 같다며 작별인사를 했소이다. 이제는 세상밖에 얼굴을 내밀지 않으련다면서 할바를 다하였으니 조용히 승하하겠다고 하더군요. 자기 명도 다되였다 하면서…》

범로인은 말끝을 흐리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우리도 우리 제자분이 그만하면 문무를 갖추었다고 보고 이제는 울밖에 내놓아도 되리라 장담하였소이다. 실지로 제자분은 지금 송악의 새 성주이오이다.》

두 사부로인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도선 그 사람은 저 송악의 젊은 성주가 아직 세상에 태여나기도전에 벌써 그가 세상을 바로잡는 인물이 되리라 장담하였다고 하더이다. 그가 천자가 되리라 예언한거지요. 정말로 그렇게 될런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쩐지 나도 그 말을 믿고싶소이다. 저것 보시오. 얼마나 씩씩하고 믿음이 가는 기상들이오이까.》

범로인은 발길을 멈추고서 왕건이네들이 서있는 성루쪽을 가리켰다. 왕건일행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성루우에 서서 아침해발아래 눈부시게 펼쳐진 성아래쪽 경치를 부감하고있었다.

《한번 만나보지 않겠소이까?》

마사부가 여쭈자 범로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들은 지금 금시 깃을 차고 날아오르려는중이오이다.

방해되는짓만 될뿐이지요. 그럼 전 이만하고 물러가겠소이다.》

범로인은 머리를 숙여보이고는 성밑 숲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미처 인사말을 고를 사이도 없이 마, 변 두 사부는 범로인이 스며들어간 숲속을 한참이나 멀거니 바라보고 섰다가 비로소 정신을 수습하며 마주보았다.

《저 로인이 도선대사와도 면식이 있은것을 몰랐소그려.》

《이제는 깨도가 되오.》

둘은 다시한번 머리를 끄덕끄덕했다.

저희들도 이제는 할바를 다하였다는것을 새삼스레 느끼고있는것이였다. 두 사부가 바라온것이 바로 그것이였던것이다. 고구려재건의 중심인물을 키워내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이들의 과제는 끝나는것이였다.

마사부의 경우만 놓고보아도 그랬다. 그는 단군성왕을 받든 선대조상을 둔것을 가문의 다시 없는 자랑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이였다. 그래서 단군과 더불어 조상의 첫 나라를 세운 선대의 뼈가 묻힌 그 땅, 패강기슭의 박달산자락에서 지금까지 대물림을 하여왔다. 철이 들어 력사를 알게 되면서 어처구니없게도 단군성왕의 혼이 잠든 성스러운 고구려땅이 그 좀스런 신라것들과 외적 당나라것들한데 짓밟히고만 사실에 얼마나 통탄해마지않았던가. 그랬기에 신라조정에서 인재를 운운하며 더러운 손을 뻗쳐왔을 때에도 그는 너희네 신라것들한텐 엉치도 돌리지 않는다 하고 단마디로 거절하고는 계속 두문불출하여왔었다.

송악의 룡건이 출중하기 이를데 없다는 소문을 듣고있던 참에 그가 허위단심 찾아와 하도 곡진히 간청하므로 무료히 세월을 보내는것도 아쉬워 나선것이였는데 일이 좀 되는가싶더니 얼마 있지 않아서 다른 일은 그만두고 전적으로 아들의 사부소임만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아안았다. 이제는 대물림이 필요하다는것이였다.

그것도 놓치면 안되는 일이 분명한지라 변사부와 손을 맞잡고 그일에 전념하여오던 어느날 룡건은 변사부와 나란히 마사부를 어떤 초췌한 모양새의 스님앞에 대령시켜 선을 보이였다. 4년전의 일이였다.

사람을 볼 때 외형을, 정확히는 얼굴생김새를 기본으로 보는 마사부는 마주앉은 스님이 도무지 눈에 차지 않아 얼굴을 찡그리지 않을수 없었다.

자를 도선이라고 부르는 이 스님은 말없이 뚫어질듯 두사람에게 눈길을 주고있다가 스르르 눈을 감으며 턱을 끄덕끄덕하고마는것이 아닌가. 몇년전인가 신라임금의 권유에 못이겨 조정안에 들어가 식객노릇을 하다 그마저 싫어져 뿌리치고 나왔다던지…지금은 회향현(전라북도 임실군)의 백계산 옥룡사(도선의 호는 옥룡자이다.)에 거처하고있다는 등의 소리를 건성으로 들으며 마사부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아무랬거나 신라족속의 한가닥일진대(도선은 자기를 옛 백제땅 령암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도 조상이 서라벌 김씨라는것을 숨기지 않았었다.) 네까짓것이 고구려를 다시 일으켜세우려는 우리의 웅지를 알면 얼마나 알고 진심을 바치면 얼마나 바치랴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마사부의 속짐작은 대번에 깨여져나갔다.

도선이 아주 어릴적에 월유산 화엄사에서 불교에 입문하여 불경을 도통하고 그후에는 무주 동리산에서 혜철이란 불명을 가진 대사밑에 제자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불교의 새로운 종파를 내오고 그자신 천문과 지리풍속을 꿰뚫고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판별해내는 묘리까지 터득하였다 하는데까지는 그런대로 잘은 둘러친다 하고 흘려듣고있었는데 이게 무어냐, 그가 자칭 지었다는《도참지리설》을 강론하면서 《송악명당기》요 《평양성명당기》요 하는데서 이제 세상을 건질 인물은 꼭 옛 고구려땅에서 나고 그 인물은 평양성에 의거하여야만 흥하리라는 예언으로 말을 맺는 대목에 와서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치고 나서지 않을수 없었다.

그가 신라족속이면 어떠랴. 바로 고구려땅에서 혼탁이 된 이즈음의 란세를 바로잡을 인물이 나리라는 예언을 하고있는데야. 고구려를 다시 일으켜야 단군겨레의 래세가 굳건히 이어진다고 굳게 믿고있는 저들의 속마음을 아니, 당대의 민심을 다름아닌 이 도선이 학문으로 뒤받침해주고있지 않는가.

마사부도 변사부도 비로소 룡건을 리해했다. 그리고 도선을 스승으로 섬기기로 언약했다. 한편으로 둘은 새로운 눈으로 룡건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가 과연 세상을 건질 성인군자가 됨즉한가 하는 눈더듬을 해보는것이였다. 그런데 룡건은 마, 변 두 사부와 어깨동갑인데다 머리칼이 희슥희슥해지는 로인줄에 들어서고있었다. 그가 천리밖이요 만리밖이요 하고 땅을 주름잡고 바다건너 당나라까지 나드는것을 봐서는 대인이 분명하나 날라오는것은 글보다 물건이 우선이요 지켜보느라면 장사외에 다른 재미는 모르는 사람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세월은 류수라 하였거니와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나이를 먹어가며 송악땅에서 룡건의 그늘아래 세상만사가 다 되리라고 생각한것이 잘된 일같지 않다 하는 생각이들무렵에 이르러 룡건이 부탁하기를 제 아들 왕건을 가르쳐달라고 하는것이였다.

아하, 그러니 룡건 너는 아니되겠고 아들에게나 기대를 가져보자는 속심이냐 하는 생각에 적지아니 탕개가 풀리는감이 없지 않았으나 그것도 바이 허술히 여길 일은 아니여서 한번 받들기로 마음을 세웠으면 죽을 때까지 지키고보는게 사람의 도리이다 생각되여 지금껏 성의껏 일해왔었다. 그런데 바로 오늘 왕건을 위시한 젊은 무사들을 따라 이 평양성터에 와서 평양성토배기로인으로부터 왕건이야말로 세상을 건질 인물이라는 말을 들었으니 변, 마 두 사부의 기쁨이 어떠했으랴. 왕건의 부친 룡건의 속내를 이제는 말짱히 리해한것은 물론이고 이제 더는 왕건을 거들지 않아도 되는바 이미 깃을 털고 일어선 왕건은 거침없이 창공에 날아올랐으니 이제 더는 여한이 없는 이들이였다.

다음해인 897년 정월 열사흗날(양력 1월 31일), 왕건이 스무살이 되는 생일날 저녁에 마, 변 두 사부는 왕건앞에 허리를 굽히고 하직인사를 하였다.

왕건이 송악에 함께 있자고 하였으나 둘은 평양성에서 기다리겠노라 하고 나란히 떠나갔다. 마사부는 변사부까지 데리고 박달산 심산유곡 단군의 뼈가 묻혀있는 고향으로 가서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였다.

항간에 왕건의 앞날을 예언하여 퍼뜨린 유명한 중 도선도 왕건이 스물한살이 되는 해인 898년 겨울 지리산 서쪽자락의 백계산 옥룡사에서 조용히 세상을 하직하였다.

아직은 왕건이 세상에 이름을 날리기 전이였고 이들의 예언이 맞아 떨어질런지는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운 때였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말을 믿었으며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기다렸다.

그렇게 될수밖에 없는 일이였다. 세상을 건질 뛰여난 인물을 애타게 바라던 세월이였던것이다.

인걸이 얼마나 중요한것인지야 더 말해 무엇하랴.

하나의 작은 촌락에도 좌상이 온전해야 륜리와 풍속이 유지되고 생계가 무난히 이어질진대 하물며 나라야 더 말해 무엇하랴. 두말할것없이 임금이 똑바르고 신하들이 대발라야 흥하고 번영하는 법이다.

천년강국으로 이름 떨치던 고구려가 순간에 망한것도 당대의 군신들이 부실한탓이였다. 인재의 부족이 멸망의 원인이였다고 말해도 그르다 할 사람이 없을것이였다. 대바르고 결단성있는 애국명장 연개소문이 살아있는 동안은 주몽성왕의 대를 탈없이 지켜온 고구려였다.

허나 연개소문이 죽은 뒤 조정의 중임을 맡은 그의 아들들이 뒤를 옳바르게 잇지 못하였다. 권력싸움에만 몰두하면서 시기질투하던 나머지 적국 당나라에 손을 들고 넘어가 제 나라를 무너뜨리는데 몸을 적신 역적까지 났으니… 나라를 지켜야 할 검이 형제간의 다툼질에 동강나고 조상대대 물려오던 귀중한 땅이 찢기우고 두쪽으로 갈라져 아래쪽은 신라에 먹히우는 치욕을 당하고만것이였다.

다행히도 웃쪽땅에 간난신고끝에 발해가 새롭게 일어서 겨레의 명맥은 이어졌다. 허나 이백년을 승승장구하던 발해도 이즈음에 와선 그 강기를 잃고있었다.

들려오는 소리 또한 흉흉한것뿐이였다.

거란족이 번성하여 발해지경까지 내려왔다는것이다. 이들이 당장은 당나라를 친다고 하나 열에 아홉은 발해를 먼저 칠것이 뻔하였다. 지금의 발해형세로 보아서는 거란에 손을 들지 않으리란 담보도 없다. 그만큼 이 거란족속들이 세력을 굉장히 불구었던것이다. 자칫하면 고구려를 이은 겨레의 명맥이 끊길수 있는 시점에 이른것이였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판국이였다.

그런데도 부패한 신라는 아무런 마련도 없었다. 하긴 제집기둥 벋치기에도 힘든 처지인데야…

그러니 겨레를 일으켜세울 방도는 정녕 없단 말인가. 겨레를 이끌 인물이 그렇게도 없단 말인가.

단군이래 수수천년을 번영해온 이 땅, 이 하늘아래 겨레를 하나로 이끌어올릴 영걸이 이다지도 나지지 않는단 말인가.

밥숟가락을 드는 사람이면 누구나 고대했다. 하늘에 빌고 땅에 빌며 일일천추로 고대했다.

이 땅, 이 겨레를 일으켜줄 인걸을 내여주소이다. 찢기여 신음하는 이 땅의 아픔을 가셔주고 하나로 합쳐줄 위인을 내려주소이다.

오직 이 하나의 소원만이 강토에 서리고 하늘에 서려있었다.

어디서 주먹깨나 휘두르는 장수가 하나 나도 그곳으로 와 쏠리였다.

저 건너마을에 먹물깨나 묻힌 식객이 하나 나타나도 우르르 몰려가 떠받들며 후날을 의탁했다.

이같은 민심이 어찌 평양성이나 송악에만 한한것이랴.

실은 이때 벌써 저아래 북원(강원도 원주일대)쪽에서도, 쇠두레(철원)쪽에서도, 무주쪽에서도 저마다 인물들이 나서서 무리를 짓고 제나름의 기치를 펄럭이고있었다.

그쪽에 비하면 송악의 왕건은 아직 입에서 젖내가 가시지 않은 애숭이였다.

적어도 쇠두레에 있는 궁예가 그렇게 생각하고있었다. 출중은 해도 먹은 나이는 속이지 못한다는것이였다. 허나 앞일은 두고보아야 할일이였다.…

쇠두레(철원) 성곽안의 북쪽면 안침진 곳에 날아갈듯 네귀가 치켜 오른 청기와집 남향을 면한 대청마루우에 서른하고도 두셋은 더 먹어보이는 체소한 스님 하나가 조는듯 두눈을 감고서 그린듯이 앉아있었다.

이 사람의 이름은 가려이고 불교명은 보종이였다. 궁예가 이전에 세달사라는 절에서 범교라는 대사로부터 선종이란 불교명을 받을 때 궁예를 일생 따르라는 부탁을 담아서 한날한시에 지어준 이름이였다.

(범교가 궁예에게 달아준 선종이란 불명에는 착한 마음으로 불문에 복종하라는 뜻이 담겨있었다. 그의 몸에서 가끔 가다 드러나보이는 사나운 성격을 우려하여 지어준 이름이였다.)

가려는 궁예가 세달사에 찾아갈 때 함께 동무해간 사이였다. 아니, 그보다 썩 이전에 녕월산골의 어느 한 마을에서 궁예가 홀어머니슬하를 떠나기 전부터 그의 유일한 동무가 되여준 사이였다.

궁예가 어릴적에 마을이 좁다하게 돌아치며 남의 집 자는 애기 코침주기, 호박넝쿨 잘라놓기, 오줌누는 계집애 머리채 뒤로 당겨주기, 이웃집아낙네 물동이 깨쳐주기 등 하여튼간에 못된짓은 골라가며 하는것을 늘쌍 보아오면서 그때마다 가려는 진저리를 치며 머리를 돌려버렸었다.

병신심보 고운데 없다더니 궁예가 꼭 그랬었다. 하기에 가려는 궁예가 멀찌감치에 얼핏 나타만 나도 줄행랑을 놓았었다. 자기같은건 팽이치듯 휘갈겨놓을상싶어서였다.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이런 생각으로 늘 궁예를 멀리하였는데 어느날이던가 그만에 지금까지와는 정반대로 그와 찰떡에 꿀발리듯 맞붙어버리는 사이가 되고말았다. 그날 동네애들과 개울가에서 목욕을 하다가 벌어진 싸움끝에 궁예의 도움을 받고서부터였다. 마을애들이 가려 자기를 보고 륙발이라고 놀려주면서 (가려는 남달리 발가락이 여섯이였다.) 륙발이는 헤염도 잘 칠터이지 하며 머리를 눌러 물을 먹이는터에 화가 나서 맞손질을 해보았으나 어림도 없는 일, 원체가 작고 약한 체질이라 무리매를 맞고 물까지 잔뜩 먹어 정신이 몽롱해지는 때인데 별안간 머리우에서 괴성이 울리고 쩜버덩, 툭탁소리가 들리더니 건듯 제 몸이 누구에겐가 들려오르는것이 아닌가.

누굴가, 날 살려주는이가…

창황중에 눈을 치뜨고 보니 이게 누구냐, 자기가 지금까지 뱀보다 더 소름끼쳐하던 바로 그 건너집아들 애꾸눈이였다.

《병신도 사람이다. 사람을 죽이려들어?…》

그의 그 말 한마디에 동네애들은 기겁을 하며 엎드렸다. 주동이 되였던 아이는 코피가 랑자한 얼굴을 아예 자갈바닥에 박고있었다.

《다시한번 그랬단 봐라. 꼬투리건 알이건 싹 까치우고말테다. 명심하라! 륙발이를 놀려주는건 나를 놀려주는것이다.》

동네애들이 달아난 뒤 가려는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애꾸형님, 이 륙발이를 아우로 삼아줘요.》

그 순간 눈앞엔 별찌가 번쩍, 한쪽귀엔 벼락치는 소리가 딱!

가려는 다시한번 나 죽는다고 비명을 질렀다.

귀뺨이 얼얼한중에 궁예의 목소리가 하늘 멀리에 선듯 들려왔다.

《애꾸니 륙발이니…우린 병신이 아니다!》

《알겠어요, 형님!…》

《아우야!…》

《형님!…》

둘은 제각기 외마디소리를 지르며 서로 그러안았다.

동병상련이라 했던가, 둘은 타고난 불행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날 가려는 궁예와 나란히 강변에 앉아 하늘에 별이 돋을 때까지 있다가 제 어머니들이 찾아나와서야 자리를 일었다.

허나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각기 제 집으로 이끌려간 두 사내애들이 어머니들앞에서 분을 터뜨린것이다.

왜 병신자식을 낳아 이런 맘고생을 시키느냐, 애초에 죽여버렸으면 이런 일도 없을것이 아니냐 하면서…

《그게 무에 그리 큰 흠이라고 그러느냐. 버선속에 가리워지고마는것을 가지고… 건너집 애는 천냥중에 구백냥 나가는 눈이 하나밖에 없는데도 언제 한번 기가 죽어있는걸 보았냐?》

가려는 어머니의 그 말에 울음을 그쳤다. 그에 비하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것이였다.

그래, 정말이지 그가 불쌍해… 동정심이 북받쳤다.

《너무 상심말아. 너는 지체가 있는분의 자식이다.》

《예?!…》

가려는 무슨 소린가 하여 어머니를 마주보았다. 아버지에 대해 물으면 언제나 묵묵부답이던 어머니가 지금 아버지에 대해 말을 하고있는것이였다.

《이제는 너도 알 때가 된가부다. 너의 아버지 되는 사람은 식자가 여간 아닌분이였다. 조정에서 문서를 엮어바치던 대단한 선비였느니라. 나는 산속의 아녀자라 자세히는 모르겠다만 너의 아버지는 뭔가 조정에 대고 바른소리를 한것이 노여움을 사서 이곳으로 파직되여 와계셨지. 그때 시중들던 나를 잠시 품어주었느니라. 그래서 네가 태여났다. 네 아버지는 병으로 인춤 돌아가셨지만 너는 비천한 출신이 아니니 마음을 크게 먹고 일어서야 한다. 내 말뜻을 알겠느냐?》

가려는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나서 처음으로 자기의 앞날을 생각해보게 되였다.

(그래, 기가 죽어 살 리유가 무어람! 그렇게 식자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면 나도 한번 일떠서보는거다.)

《어머니, 나 이제부터 글을 배우게 해줘요.》

《그래라, 글을 배우게 하고말고.》

그 순간 가려는 궁예를 생각했다.

《어머니, 건너집 외눈이형님과 함께 공부하게 해줘요.》

《오냐, 이밤으로 가서 그 집 어미와 의논을 하자꾸나.》

가려는 어머니와 함께 그예 자리를 일었다.

그 시각 궁예는 제 어머니로부터 더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있었다.

《솔직히 말하건대 왕자님은 서라벌임금의 자손이오이다.》

《왕자님?! 임금의 자손?!…》

《그렇소이다. 서라벌 경문왕의 서자이오이다. 낳아준 친어머니는 경문왕의 후실 설씨로소이다.》

《?!…》

궁예는 흠칠 몸을 떨었다.

위잉- 하고 벌우는 소리가 귀전을 스쳐가더니 뒤이어 쿵- 하고 한몽둥이 치는 소리가 머리속을 울렸다. 그다음은 가슴속에서 쿵당쿵당 방아질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궁예는 가슴을 움켜쥐였다.

(내가… 서라벌 임금의 서자라고?!…)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모멸감이 온몸을 엄습해왔다.

《그러면… 어머니는요?》

궁예는 아연해진 눈길을 들어 간신히 물었다.

《나는 왕자님의 유모였소이다.》

어머니는 차분히 앉아 그간의 만단사연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궁예의 아버지 경문왕의 이름은 김응렴, 신라43대 희강왕의 손자였다.

응렴은 그 당시 화랑들중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로 떠받들렸었는데 어느날 임금인 헌안왕(신라47대왕)이 한번 만나보자 하여 불리워갔다가 대번에 그의 눈에 들어버렸다. 헌안왕은 자기의 두 딸중 하나를 고르라 하고는 부마로 택하겠다고 선포했다. 느닷없이 닥친 일이라 당황한중에 며칠간 말미를 달라 하고 집에 돌아와 사실대로 이야기하니 부모친척모두가 찬성하면서 둘째공주가 절색이니 그를 택하라 이르는것이였다. 그런데 이미전에 보아온 설씨라는 려염집처녀가 있었던 응렴은 쉽사리 마음을 정할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망설이는 응렴에게 그의 스승이 찾아와 조언을 주었다.

임금의 뜻이니 따라야 할뿐더러 그럴바에는 맏공주에게 장가를 가야 좋으리라는것이였다. 스승의 조언이라 중히 받아들여 왕의 사위가 되였다. 그런데 잔치를 치른지 석달후에 왕이 갑자기 병이 들어 누워버렸다. 그는 죽기 전에 유언하기를 사위 응렴이 나이는 어려도(당시 응렴은 열여섯살이였다.) 지혜롭고 덕을 갖추었으니 임금으로 정한다고 언명했다. 그리하여 응렴은 스무살도 되기 전에 신라의 사직을 떠맡고 48대왕으로 룡상에 오르게 되였다.

애젊은 나이에 룡상에 오르고보니 세상에 모든것이 다 내것이요 내 마음먹어 아니되는 일이 없는것이 바로 임금인듯싶었다. 그는 왕후 녕화부인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그보다 인물이 더 고운 동생 정화공주를 두번째 왕비로 맞아들였고 이듬해에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설씨처녀까지 후궁으로 맞아들여 뒤대궐에 거처하게하였다.

젊은 혈기가 내키는대로 색을 밝힌것이 끝내 화단이 되여 두 왕후와 후궁 설씨사이에 시앗싸움이 터지고야말았다. 설씨가 아들을 낳자 맏왕후는 제가 낳은 아들이 태자책봉에서 밀려날것을 우려해 설씨의 아들을 없애버릴 흉계를 꾸미게 되였다.

그 일이 경문왕이 제일로 믿고 의지해오는 늙은 일관에게 맡겨졌다. 일관은 경문왕에게 상주하기를 설씨가 낳은 왕자는 날 때부터 뾰족한 이가 있는데다 눈과 이마에 살기가 서린것이 반드시 이후에 자기 아버지를 죽일 기상이라고 주어섬겼다.

(자기 아버지를 죽이다니?… 그럼 나를 죽이리란 말이 아닌가?!…) 일관의 말을 믿는데 버릇된 경문왕은 그 말을 곧이듣고 온몸을 떨었다.

(내가 죽어 신라의 천년사직이 흔들리느니 차라리 그 화단을 제거해 왕실의 안녕을 기하리로다.)

생각을 굴리던 경문왕은 경솔하게도 피덩이자식을 없애버리라고 령을 내려버렸다.

왕명을 받은 놈이 그날 밤으로 피덩이 애기왕자를 안아다가 련못가 다락우에서 물우로 내던져버렸는데 때마침 그밑에서 련밥을 따고있던 유모가 떨어지는 아기를 받아안았다.

자기의 불행을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어린 왕자가 제가 내던져지는 그 순간에 갑자기 울음을 터뜨려 유모가 간신히 손을 쓸수 있었던것이다.

받아안고보니 애기는 기절하였는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정신없이 애기를 흔들기만 하다가 비로소 생각이 들어 뒤대궐로 달음쳐가보니 설씨는 벌써 누군가가 숨을 끊어놓았었다.

모든것을 알아차린 유모는 기겁해서 뛰쳐나왔다. 자기도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몸이란걸 깨달았던것이다.

(이밤으로 어디로든 도망쳐야 산다.)

유모는 밤새 줄달음을 놓았다. 도성밖을 벗어나 북으로 난 길을 따라 정신없이 뛰고 뛰였다. 제가 난 고향으로 갈가 생각도 해보았으나 그러면 부모친척들까지 화를 입을것이 명백한지라 방향을 돌려버렸다.

나도 나지만 죄없는 이 피덩이까지 죽게 할순 없다. 내 젖을 먹여키우던 왕자이니 내가 끝까지 돌봐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난 뒤에 지금껏 온갖 고생을 달게 여기며 왕자와 더불어 살아온것이였다. 죄스러운것이 있다면 다락에서 떨어지는 왕자를 받아들 때 손가락에 찔리워 한눈을 멀게 한것이였다.

전후사연을 다 털어놓고나자 유모는 무릎을 끓으며 부르짖었다.

《왕자님! 중한 옥체를 귀히 돌보지 못하고 천륜을 어긴 대죄를 지었으니 이년은 죽어 마땅하오이다. 죽여주소서!…》

유모는 방바닥을 치며 통곡하였다.

《무슨 소릴 하는것이오니까. 어머님!…》

궁예는 목멘 소리로 부르짖었다.

《그 말을 믿을수가 없소이다. 믿을수 없소이다.…》

《아니오이다, 왕자님. 하늘에 대고 맹세하는데 이건 죄다 사실이 옵니다.》

《사실이라니 하는 말이오이다. 제 피줄을 타고난 자식을 죽이라하는 그런 아비를 아비라 부를수 있는것이오이까? 녕화니 정화니 그네들도 자식을 낳는 녀인일진대 남의 자식이라 해서 그렇게도 모질게 죽이려들수 있는것이오이까? 이들을 사람이라고 할수 있는가 말이오이다.》

궁예는 통곡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 뚫어져라 방바닥만 내리쏘아보던 그의 한눈이 번쩍 들리였다. 새파랗게 얼어붙은 그의 얼굴에서는 이미 눈물자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 나는 이밤으로 집을 나가렵니다. 기어코 살아서 저 서라벌족속들을 씨도 남지 않게 짓이겨버리렵니다. 그전엔 어머니를 찾아오지 않겠소이다. 그럼 전…》

궁예는 일어섰다. 그는 이전날의 동네애꾸러기가 아니였다.

《이밤으로 떠난단 말씀이오이까?》

유모는 급작스레 변해버린 궁예를 아연해서 바라만 보고있었다.

그러거나말거나 궁예는 초신감발을 하는듯마는듯 하고는 휭 하고 마루를 건너뛰여 마당에 내려섰다. 그러다가 무언가 인기척을 느낀듯 획 몸을 돌렸다. 문지방옆에 선채 부들부들 떨고있는 가려네 모자를 본것이였다.

《형님!…》

가려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다 들었냐?…》

《예, 아니… 아무것도…》

가려는 기여들어가는 소리로 얼버무렸다. 가려도 가려 어머니도 방금 엿들은 그 사실이 너무나 엄청난것이여서 몸이 굳어져있었다.

《아무랬거나… 너 마침 왔다.》

궁예는 휘익- 소리를 내며 가려에게 다가오더니 무작정 그의 손목을 비틀어잡았다.

《이제부터 우린 한몸이다. 나와 함께 이길로 떠나자!》

《어머니가 형님과 함께 글공부를…》

《왜 글공부만 하겠느냐. 이왕이면 무예도 닦자꾸나. 량쪽에 날개를 다 달잔 말이다. 우리 산사람이 되자, 좋으냐?》

《좋아요. 》

《그럼 떠나자.》

궁예는 두 어머니의 의향같은건 물을념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 가려를… 부탁하옵니다.》

가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하직인사를 올려야 하잖겠어요? 형님!》

《뒤돌아보지 말아!》

궁예는 가려의 손목을 나꿔채며 삽짝문을 걷어찼다.

《왕자님! 마음을 너무 모질게 먹지 마옵소서! 어디 가든 인정을 귀히 여기소서! 부디 신의를 잃지 마소서!…》

유모는 흐느끼며 부르짖었다.

《?!…》

궁예는 흠칠 몸을 한번 떨었을뿐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고 내달았다. 그뒤로 가려가 허둥지둥 달음질을 쳤다.

둘은 온밤 숲을 헤치고 고개를 넘으며 북두칠성을 방향삼아 북으로 내달았다. 날이 샐무렵 백리는 실히 넘게 걸음을 한 뒤에 마주친 처음 보는 절간앞에서 둘은 주저없이 대문을 두드렸다.

가려는 이렇게 궁예와 더불어 세달사에 들어갔고 거기서 석삼년을 불문에 잠그었다. 천자문을 깨치고 불경을 외우며 무예를 익혔다.

이곳에서 가려는 궁예의 성장을 지켜볼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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