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회)

 

우봉으로 돌아온 송령주는 보름안으로 집안일을 결정해버리였다.

그사이 궁예쪽에서 내려온 측근인 환선길의 말을 좇아 딸을 궁예에게 들여보내기로 하였으며 송악으로 떠나겠다는 금필의 제의도 들어주었다.

송씨가 이렇듯 부랴부랴 결단을 내린것은 전에없이 부산해진 주변의 움직임때문이였다.

송씨가 놀란것은 송악의 령주 룡건(왕건의 아버지)의 행동이였다.

정주의 류천궁이며 평주(평산)의 박지윤이며 주변의 령주들이 자기와 뒤질세라 궁예에게 복속의 뜻을 표하러 갔다올 때에도 묵묵부답이던 그가 돌연 제 아들을 궁예에게 데리고가서 송악의 성주로 대신 임명받게 하였던것이다. 자기는 외진 곳인 김화태수로 임명받아 송악을 뜨게 되는 불편함도 그는 달갑게 받아들이였던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것일가? 송씨의 좁은 소견으로는 그 깊은 속을 다는 헤아릴수가 없었다. 어쨌든 이제는 누구든 궁예에게 가붙지 않고서는 자기 존재를 유지할수 없다는데로 곬이 흐르고있는것만은 명백하였다.

주변일대에서 누구보다 재력이 넉넉하고 군력 또한 제일인 룡건이였다. 신라조정에서 내린 품계 8등급에 해당하는 아찬벼슬까지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가 자기는 한적한 곳으로 밀리워나면서까지 아들을 바쳐가며 궁예에게 가붙은것이다.

힘은 약해도 남에게 지고싶지 않아하는 송씨는 번개불에 콩닦듯 딸의 일을 밀어나갔다. 궁예가 응하는지 거절하는지도 모르면서 궁예 측근의 말 한마디를 믿고 일사천리로 밀고나갔던것이였다.

그의 집안에 곡성이 터졌다. 딸이 죽기로 거부해나서면서 금필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었다. 실로 난감한 일이였다. 금필은 송씨의 딸이 불쌍한 생각은 들었으나 제 자신이 그를 취할 생각은 꼬물만큼도 없었던것이다. 무릇 사랑이란 량쪽에서 붙는 불이 같아야지 어느 한쪽에서만 붙어서 되는 일도 아닌것이다. 게다가 처녀는 이미 궁예에게 바쳐지기로 되여있는 몸인것이기에 자칫하다가는 금필에게 당치않은 허물이 들씌워질수도 있었다. 하여 금필은 송씨의 슬하에서 나올것을 결심한것이였다.

송씨도 말리지 않았다. 금필이 궁예의 눈에 든것을 봐서는 언제든 다시 요구해올것 같아 미리 궁예에게 찾아가라고 권유하고싶은 생각도 없지는 않았지만 생뚱같이 제 딸이 제 입으로 금필이 마음에 있다고 발설하고 나선 이상 이후에 이 사실을 궁예가 알면 금필과의 사이가 불편하기 짝이 없게 될것이 분명했기때문이였다. 딸은 어차피 궁예에게 가야 할것이므로 금필이가 궁예 가까이에 있게 해서는 절대로 안되였다.

금필이 왕건을 찾아가기로 마음을 정하고있을 때 마침 술희가 찾아왔다. 술희와 능산은 송악으로 오는 길에 송악의 젊은 령주가 유명하다는 소문을 적지 않게 들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궁예보다 송악의 왕건을 더 따르고있다는것이였다. 그래서 의논하기를 능산은 먼저 송악으로 가서 주변을 돌면서 송악령주를 더 알아보기로 하고 그사이 술희는 우봉에 가서 금필을 데리고 내려오기로 한것이였다.

그런데 능산이 당초의 약속과는 달리 제잡담 왕건을 만나고는 궁예를 찾아가다니…

금필은 그럴수 없다고 도리머리를 저으면서도 내심 불안을 금치 못했다.

(이제 왕건을 만나면 모든것을 알수 있으리라.)

금필은 달아오르는 조바심을 누르는데 적잖이 품을 들여야 했다.

이틑날 금필을 마주한 왕건의 얼굴은 예상외로 담담했다.

《나를 찾아온 손님이라니 반갑기는 하오나 이는 순서가 아니니 나로선 옹색할뿐이오이다.》

석축공사장을 등지고 서있는 왕건의 첫마디 대답이였다.

금필은 주춤했다. 받아들이기 난처하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대들은 소문을 들어 알겠는데…지금 내노라 하는이들은 다들 쇠두레로 간다오.》

왕건의 옆에 서있던 장수가(그는 식렴이였다.) 끼여들며 곁드는 말이였다.

《우리 성주님 말씀의 뜻은 그쪽으로 가는게 순서라는것이요.》 《새도 나무를 봐가며 둥지튼다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어찌 그러지 않으리오. 》

금필이 애써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우린 이미 쇠두레사람을 만나본 사람들이오다.》

술희가 툭 쏘아붙였다.

《선종이 그대들을 보고도 돌려보냈단 말씀이요?》

식렴이 또 물었다.

《붙잡아두려고는 하였지만 거절했지요.》

금필이 내친김에 말을 이었다.

《하온데 이곳 송악도 선종의 령지가 되였다는게 사실이온지?》 금필의 물음에 왕건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실은 나도 선종의 부하이오이다.》

《선종의 부하라구요?》

금필은 실망한 나머지 금시 다리맥이 탁 풀리는것만 같았다.

아깝고나, 이런 헌헌장부가 그 누구의 부하라 자칭하다니…금필은 왕건이가 이처럼 몸을 사리는것에 은근히 부아가 돋았다.

《실망하게 되오이다.》

금필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튀여나온 말이였다.

《그럴거요. 별 볼것 없는 사람을 놓고 공연한 수고를 하신가보이다. 그럼 전…》

왕건은 머리를 숙여보이고 돌아섰다.

《가만!》

금필은 급히 손을 들어 멈춰세웠다.

《왜 그러시오?》

왕건이 천천히 되돌아서며 물었다.

《한합 겨루어보십시다.》

금필은 무작정 무술시합을 요구했다. 금필은 지금 속이 뒤틀려 견딜수가 없었다. 왕건이 자기를 영 모르지도 않겠는데 아닌보살하는것이 괘씸했던것이다.

사실 금필은 우봉령주 송씨를 호위하여 송악에 두어번 왔다갔다 하였었다. 왕건의 아버지 룡건이 송씨를 마중하고 바래우기를 그 몇번, 하다면 늘 아버지를 따라나섰던 왕건이 송씨의 옆에 그림자처럼 붙어다닌 자기를 그렇게 모른다고 할수 있겠는가.

실은 왕건도 지금 금필을 몰라볼 까닭이 없었다. 허나 왕건은 금필이 궁예와 만난 뒤 그와의 사이를 알수 없어 경계하고있는것이였다.

왕건은 사부로부터 례성강대안과 송악린근에 왕건 자기 다음으로 꼽을수 있는 인물은 우봉의 금필이라는 귀띔을 자주 받군 했었다.

왕건은 한번 금필을 만나 무술시합을 해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제발로 찾아왔으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으랴.

금필이 칼을 뽑아들자 왕건은 마침이다 하고 속으로 환성을 올렸다.

《이게 무슨짓이요? 무엄하기 짝이 없군. 한갖 호위군사가 성주님앞에서 감히 칼을 빼들다니? 거두지 못하겠소?》

식렴이 금필의 앞으로 뛰쳐나오며 욕을 했다.

《량해하시오. 말로 통하지 않으니 힘으로 하려는것이요. 세상리치가 다 그러한것인데 무얼 그리 노여워하시오?》

금필이 자세를 허물지 않은채 뻗대자 왕건이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하하하…좋소이다. 하오면 어디 한번 겨루어봅시다.》

왕건은 호위군사의 허리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금필은 왕건이 스스럼없이 응해나오자 저도 모르게 긴장해졌다.

(지면 랑팬데…)

그는 쌍검도를 틀어쥔 손에 지그시 힘을 넣었다.

바로 이때였다.

공사장 한가운데서 소요가 일어났다. 성돌을 나르던 두마리의 황소가 싸움이 붙은것이였다. 무슨 연유로 두놈이 싸우는지는 알수 없으나 죽기로 붙어돌아갔다. 두어걸음 물러섰다가는 씽하니 맞받아나오며 지끈 이마를 맞쫏고 그리고는 또 물러섰다가 다시 달려들었다.

서로 물러섰다가 달려들기를 거듭하며 먼지구름을 일쿠는데 두 황소의 발굽밑에 사람이고 쟁기고간에 찍히우고 꺾이우는 꼴이 실로 란장판이였다.

저런 변이라구야!

이곳 저곳에서 비명소리만 날뿐 저마다 하- 입을 벌린채 멀거니 구경만 하고있었다.

그 모양을 바라본 왕건이 소리쳤다.

《누구 나설 자신이 없느냐? 저 소싸움을 멈출 사람은 빨리 나서라!》

왕건이 소리치자 그제야 정신들을 차린듯 부역군들과 군사들속에서 몇몇 발빠른 장사들이 튀여나왔다.

그들은 소고삐도 잡아채보고 소잔등에도 올라타보며 소들의 요동을 멈춰세워보려고 무진애를 썼다.

그러나 매번 소의 뒤발에 채우거나 공중돌이로 나떨어지며 헛물만 켰다.

이때였다. 지금껏 소싸움을 지켜보던 금필이 몸을 날려 앞뒤옆으로 련속 구르면서 수십보거리를 날은 뒤에 지끈하고 소가 골받이를 하려는 순간을 노려 두 황소의 대가리사이로 공중 뜨며 두팔을 높이 들었다가 내리쳤다.

퍽! 퍽!

금필의 두주먹이 허공을 가로긋는것과 동시에 들려온 소리였다.

다음순간 약속이나 한듯 두 황소가 공중거리로 뛰여올랐다가 내리꼰져졌다. 뒤이어 쿠쿵…하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피여올랐다. 좀 있더니 가라앉는 먼지사이로 주저앉은 두 황소가 그리고 두 황소사이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있는 금필이 보이였다.

야! 하는 탄성이 공사장우로 퍼져갔다. 금필의 두주먹이 각기 두 황소의 이마 급소를 친것이였다.

금필은 주저앉은 두 황소의 이마전을 쓸어보며 한참이나 차분히 앉아있으면서 소들이 코투레질을 하며 일어서는것까지 거들고서야 왕건이 서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소인이 조금 꼴불견을 보였소이다.》

금필이 허리를 숙여보이자 왕건은 웃음을 머금었다.

《까짓 소 두마리 바로 앉혀놓은것은 자랑거리라 할수 없겠으나 적당히 쓰다듬어 죽이지 않고 계속 일할수 있게 한것은 정말 자랑할만한 재주요.》

《저를 칭찬하는것이오이까?》

《그렇소이다. 우리 일을 돕지 않았소. 시합은 그쪽에서 이긴것이 되고말았으니 아무래도 손님에게 인사를 다시 올려야겠소이다.》

왕건이 머리를 숙여보이였다.

《우리보고 이겼다 하면서도 아직 손님이라 부르시오이까?》

금필이 다시한번 실망의 기색을 띠우자 왕건은 즐겁게 웃었다.

《그대들은 이미 송악지경안에 들어오지 않았소. 그런즉 내 마음속에 들어온것이오이다.》

《알아들었소이다.》

금필과 술희의 입이 그제야 벙글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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