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 회)

제 1 편

달 비

 

제 4 장

 

정옥은 점심시간이 되기 바쁘게 사무실에서 나와 무궤도전차에 올랐다.

남편이 실화원고를 가지고나가다나니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소설도 그렇지만 실화나 수기나 일단 손에 쥐기만 하면 밤을 밝히는 성미인 남편은 저녁에 집에 들어오지 않고 직장에 눌러앉아 하루이틀사이에 끝장을 보고야말것이다.

정옥은 무궤도전차가 떠나자 차창쪽의자에 앉아 차창밖을 내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실화를 보다가 중도에서 그만두었으니 온통 의문만 생긴다.

무엇보다 큰 의문은 정선화의 이모사촌오빠인 서봉삼이가 왜 남들의 눈을 피해다니는가 하는것이였다.

선화는 왜 그와 함께 이모네 집으로 가고…

선화도 남들의 눈을 피해다니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죄를 지었다면…

화룡이나 처창즈에서부터 먼 장백땅으로 온것도 역시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을것이다.

혁명렬사릉에서 만났던 그 녀성도 나를 피해달아나다싶이 했다. 그리도 괴로와하면서… 그는 분명 정선화였다. 실화도 그 녀성이 썼고…

그는 과연 무슨 죄를 졌는가?

어쨌든 그 실화를 마저 읽어보면 사연을 알수 있을것이다.

실화원고를 통채로 가져간 남편이 야속했다. 아침식사를 할 때에도 일체 실화소리는 입밖에도 내지 않더니… 자기가 가져가려고 그런것 같다. 아예 관심도 없는척 해서 내가 거기에 마음을 쓰지 않게 《무방비상태》로 만들어놓고는 제꺽 손을 쓴것이다. 저녁에 원고를 가지고들어오라고 아무리 전화를 해야 남편이 들을리가 없다.

조급증은 불같지만 참는수밖에 방도가 없었다.

남편이 실화원고를 다 볼 때까지 정선화를 찾는데 신경을 쓰기로 결심했다. 정옥은 오전에 전화로 서성구역과 형제산구역 인민위원회를 찾아 서성구역체신소와 그중 가까운 동과 리들에 정선화라는 중국에서 살다 나온 녀성이 없는가 알아봐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지금은 김명화를 찾아가는 길이다. 김명화는 처창즈에서 유격대작식대원으로 있었기때문에 혹시 정선화에 대하여 알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에서였다. 정옥의 생각은 옳았다.

《뭐? 정선화? 정선화라… 정선화… 가만, 아니, 그 녀자가 지금두 살아있나?》

정옥이가 찾아가 사연을 말하자 김명화는 줄당콩을 두고 푹 퍼지게 삶은 통강냉이를 두사발에 갈라 담아가지고 들어와 상우에 놓으며 놀라서 마주 쳐다보았다. 강냉이사발에서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더운 김이 무럭무럭 피여올랐다. 그것이 김명화의 점심밥이였다. 투사들은 산에서 싸울 때 너무 고생해서인지 이런 강냉이 삶은것도 귀물로 여긴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저 백두광야에 묻고 온 전우들이 생각나실 때면 잡곡밥이나 통강냉이죽을 드신다고 한다.

그래서 투사들도 더더욱 검박한 생활을 하고있는것 같다.

정옥은 투사들집에 갈 때마다 느끼는것이지만 오늘도 가슴이 쩡해옴을 어찌할수가 없었다. 우리 집 막냉이는 이런 강냉이음식같은것은 맛도 보려 하지 않는다. 고급과자, 고급빵, 고급사탕… 떡도 골라가며 먹는다. 그것을 응당한것으로 여기고있는것 같다.

어떻게 하면 그 애에게도 이런 삶은 통강냉이의 진맛을 느끼게 할수 있을가. 맛으로가 아니라 시련에 찼던 그 나날의 투사들의 혁명정신을 배우는 심정으로 먹게 할수 있을가.

《그 녀자가 살아있다고 딱히는 말할수 없지만 꼭 살아있는것 같아 그럽니다. 저한테 어제 아침 실화가 한편 들어왔는데 모두 정선화라는 녀성이 보고 듣고 느낀것을 쓴것 같아요. 저의 어머니에 대한 실화인데 그 녀성이 저의 어머니나 저의 외할머니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같아요.》

김명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묵묵히 통강냉이를 숟가락으로 떠먹다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수도 있지, 임자 어머니와 가까왔댔다니깐. 내가 처창즈에 들어갔을 땐 그 녀자가 없었지만… 다들 말하더군. 그 녀자때문에 임자 아버지, 어머니가 큰 피해를 입었다고…》

《예?》

정옥은 통강냉이를 입에 문채 김명화를 쳐다보았다. 대충 씹어삼키고 성급히 물었다.

《그 녀자때문에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피해를 입다니요?》

《참 기막힌 일이지… 그 녀자두 억울한 일을 당했구…》

김명화는 더는 무엇을 먹을 생각도 없는듯 슬며시 숟가락을 놓았다.

김명화는 추연한 눈길로 눈내리는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다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임자두 알겠지만 그때 처창즈에서는 반〈민생단〉투쟁이라는 못된 바람이 불었댔네. 왜놈들의 간계에 속아넘어간 그 〈숙반〉것들이 우리 수령님께서 북만원정을 떠나시자 사람들을 마구 물어메치기 시작했는데 정선화의 애인도 걸려들었지.》

 

그것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였다.

지철민이가 《민생단》감옥에 갇히였다는 소식을 들은 정선화는 정신없이 뛰여다녔다.

《그이는 〈민생단〉이 아니예요. 그이는 정말 혁명밖에 모르는 순박한 사람이예요.》

근거지사람들은 선뜻 그를 보증해나설수가 없었다. 본인이 자백했다는데 그를 비호하다 자신도 《민생단》으로 몰릴수 있기때문이였다.

지철민이 《민생단》으로 몰린것은 식량공작을 나갔다가 부상을 당한채 빈손으로 돌아왔기때문이였다. 그때 유격근거지에서는 식량이 떨어져가고있어 풀뿌리나 나무껍질을 벗겨 낟알과 버무려먹군 하였었다. 자위대 소대장인 지철민은 식량공작조를 책임지고 적구로 가던 도중 황구령을 넘다가 뜻밖에도 왜놈 한개 소대와 맞다들게 되였다.

그들은 얼른 길옆 숲속에 몸을 피했는데 공교롭게도 지철민의 입에서 기침이 터져나왔다. 전날 밤에 앓아누운 대원의 입맛을 돋구게 하려고 고동하물속에 들어가 밤을 새우며 산천어 몇마리 잡았는데 그만 감기에 걸렸던것이다. 아무리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고 피나게 깨물었으나 터져나오는 기침을 막지 못했다.

그래서 놈들의 추격을 받게 되였고 지철민은 부상까지 당하게 되였다.

《숙반공작위원회》에서는 그가 식량공작을 고의적으로 파탄시키기 위해 우정 공작조를 로출시키고 그 죄행을 교묘하게 은페시키기 위해 다리에 부상을 당한것이라고 걸고들었다. 현실적으로 그는 부상을 당하다나니 식량을 구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던것이다.

어떻게 고의적으로 부상을 당할수가 있는가고 되물으니 그걸 바로 《민생단》인 네가 대답해야 한다고, 너는 그렇게 부상을 당함으로써 더 깊이 은페하려 한다는것을 우리는 다 알고있다면서 악착스럽게 고문을 들이대였다.

그 《우리》란것이 바로 룡정에서 그에게 《처녀인가 혁명인가 립장을 똑바로 하라.》고 강요하던 현당부장 리억만이였다.

그는 동만특위에 가있다가 얼마전에 현당부장으로 내려왔는데 그토록 자기를 믿으라면서 데리고다니던 지철민을 오히려 《민생단》으로 몰아붙인것이다. 훌륭한 혁명가로 키우겠다던 사람이…

후에 리억만이 자백한데 의하면 그가 지철민을 《민생단》으로 몬것은 순전히 자기의 추행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어느날 현당서기 조아범이가 급히 전하라는 말이 있어 리억만이가 거처하고있는 집에 달려간 지철민은 여느때처럼 스스럼없이 토방에 올라 서며 그를 찾았다. 안에서 대답하는것 같은 소리가 나 문을 열었던 지철민은 눈을 흡뜬채 그대로 굳어지고말았다. 상상외로 리억만이 어떤 녀자와 침대에 함께 누워 히히닥거리며 너 한모금, 나 한모금 엇바꾸어 약담배를 피우고있었다. 자기들끼리 놀아대는 소리를 대답소리로 착각했다는것을 느낀 철민은 슬그머니 문을 닫아주었다.

그의 뒤생활을 두고 사람들이 수군거릴 때에도 설마… 하면서 도리머리를 했던 철민이였다.

철민은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것을 느끼며 획 돌아섰다. 그에 대한 환멸이 굴뚝처럼 뻗쳐일어났다. 그처럼 믿고 따르던 사람이여서 환멸이 더욱 큰것 같았다. 저 사람이 과연 저렇게도 더럽고 추한 인간이였던가. 침이라도 뱉고싶었다.

지철민이가 자기 추행을 알고있고 그래서 자기를 멀리하기 시작했다는것을 느낀 리억만은 이를 갈며 기회를 노리다가 마침내 좋은 구실을 찾은것이다.

리억만은 래일 지철민을 총살한다고 선포했다.

정선화는 억이 막혀 《숙반》을 책임진 리억만을 찾아갔다.

《그이는 〈민생단〉이 될수가 없어요. 그야 부장동지도 잘 알지 않나요. 아버지, 어머니와 형님까지 왜놈들에게 잃은 그가 어떻게 왜놈의 개가 될수 있어요.》

《그게 바로 문제란 말이요. 그래서는 안될 사람이 왜놈의 개가 된것이… 보시오. 자기 근본을 잊으면 어떻게 변질되는가. 내 원래 룡정에 있을 때부터 경고했댔지. 계급적원쑤와 동침을 하려 한다고… 그러니 그때부터 저 지철민은 계급적으로 탈선을 했단 말이요.》

정선화는 아연해졌다. 멍하니 리억만의 유들유들한 상판을 쳐다보았다.

리억만은 획 하고 고개짓으로 그 긴머리를 뒤로 넘겼다.

정선화는 자기가 지철민에게 어떤 큰 피해를 주었는지 이제야 똑똑히 알게 되였다. 그러니 이 리억만은 자기들의 사랑을 《계급적탈선》으로, 《사상적변질》의 시초로 본것이다.

정선화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니, 그래선 안된다. 그는 변질된것이 아니다. 그는 오직 혁명만을 생각해왔다. 그 순박하고 고지식하고… 그는 절대로 변질될 사람이 아니다. 나때문이라면… 내가 물러서면 되지 않는가.

정선화는 몸서리를 쳤다. 언제인가 꿈에서 이 비슷한 일을 체험했던 일이 생각났다.

아, 역시 나와 그이는 만나서는 안될 사람들이구나.

《난 아동단학교 선생도 좋게 보지 않았댔소. 누구의 소개를 받고 어떻게 여기에 들어오게 되였는지… 모호했단 말이요. 하지만 부녀부장의 보증을 받았다기에 더 캐보려다가 그만두었소. 부녀부장의 오빠는 지금 현당서기인 조아범동지의 길림사범학교 동창이니까… 금곡지구 공청책임자였고…

그러나 저 지철민은 다르단 말이요. 사실 그의 부모들이 왜놈들에게 희생되였다는것도 믿어지지 않소. 우리를 속여넘기기 위한 수작이 아닌지 의심스럽단 말이요.》

선화는 기가 막혔다. 울면서 하소했다.

《일가친척들이 다 희생된건 사실이예요. 그때 그의 아버지, 어머니장례를 부장동지가 치르어주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게 지철민의 부모들인지 어떻게 안단 말이요. 자기 정체를 숨기기 위해 교묘하게 꾸민것이 아닌지 누구도 장담할수가 없지 않소.》

선화는 안타까이 도리머리질을 했다.

《그건 내가 장담해요. 난 그의 고향에도 가보았어요. 그의 아버지, 어머니는 한생을 소작살이를 하면서 순박하게 살아왔어요. 그의 형님은 그이를 공부시키기 위해 지주집에서 머슴살이까지 했어요. 이런 그들을  왜놈들이 총으로 쏘아죽이였어요. 그건 그 마을 사람들도 다 말했어요. 그이는 절대로 〈민생단〉이 될수 없어요.》

《그렇다?》

리억만은 눈을 치뜨고 정선화를 건너다보았다.

《동무가 직접 그의 고향에 가봤단 말이지?》

《그래요. 제발 그이를 살려주세요. 그이는 제가 보증하겠어요.》

정선화는 애타게 간청했다. 지철민과 함께 그의 고향에 갔던 일을 사실그대로 자초지종 말했다.

리억만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선화의 말을 듣다가는 애매한것이 있는듯 다시 처음부터 해보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선화는 자기의 간청을 들어줄것 같아 또다시 그가 아버지, 어머니를 잃고 어떻게 혁명의 길에 들어섰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리억만은 고개를 기웃하더니 불시에 도리머리를 했다.

《아니, 믿어지지 않아. 이번에 식량공작 나가서 공작조를 고의적으로 로출시켰는데 그건…》

《고의적이 아니예요. 그는 그전날 밤에 앓는 대원의 입맛을 돋구어주겠다고 고동하의 찬물속에 들어가 산천어를 잡았어요. 그러다나니 감기에 걸린거예요. 저도 같이 나갔댔어요. 그래서 잘 알아요.》

《동무도 같이 나갔댔다구?》

《그래요.》

정선화는 안타까이 그날 밤 일을 또 자세히 이야기했다.

그날 저녁 정선화는 저녁밥도 드는둥마는둥하고 지철민을 찾아떠났다.

그를 만나 낮에 있었던 가슴벅찬 일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잠을 자낼것 같지 못했던것이다.

정선화가 총총히 자위대병실쪽으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옆에서 《어딜 가오?》하는 귀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돌아보니 뜻밖에도 달수네 집 모퉁이로 반두를 든 지철민이가 돌아나오고있었다.

선화는 반색을 했다.

《아이, 마침 만났네. 지금 막 찾아가는 길이였어요. 그런데 그 반두는 뭘하려고 그래요?》

《좀 쓸데가 있어서…》지철민이 어줍게 웃으며 되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소?》

그 말에 선화는 투정질하듯 눈을 곱게 할깃하며 입을 쏙 내밀었다.

《철민동지는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찾아와요? 내가 보고싶어 우정 올생각은 없나부지요?》

철민은 어이없는듯 씩― 웃기만 했다.

선화는 어쩌나 보려고 또 토라진 소리를 했다.

《철민동지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요?》

《오늘?》

철민은 눈을 껌벅껌벅하다가 고개를 기웃했다.

《글쎄…》

선화는 뻔하다는듯 호― 한숨까지 내쉬였다.

《하긴 그걸 알면 철민동지가 아니지. 오늘 저녁엔 날 위해 시간을 좀 낼수 있겠지요?》

철민은 난처한듯 반두를 들어보더니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좀…》

섭섭했다. 모처럼 찾아와 날 위해 시간을 내달라는데 무엇이 그리 바쁘담…

선화는 피뜩 떠오르는것이 있어 따져물었다.

《왜 그래요? 솔직히 말해요. 무엇을 하려고 그래요?》

철민은 할수 없다는듯 씩― 황소숨을 내쉬였다.

《사실은 우리 소대 오동무가 입맛을 잃었길래… 산천어를 몇마리 건져볼가 해서…》

선화는 동지를 생각하는 그의 진정에 코허리가 시큰해지는것을 어찌할수가 없었다.

《그랬댔군요. 그런 좋은 일을 혼자만 하겠어요? 함께 가자요.》

선화는 철민이 만류했지만 초롱불까지 만들어들고 그를 따라나섰다. 달빛이 푸름푸름 깔린 마을길을 따라 고동하쪽으로 내려가느라니 고콜불빛이 희미하게 얼른거리는 집들에서는 웃음소리, 노래소리, 글읽는 소리들이 흘러나온다. 왜놈도 지주도 없는 세상이라 마음놓고 터치는 소리들이다.

선화는 미소를 지으며 그 소리들에 귀를 기울였다. 얼마나 좋은가. 근거지의 이 저녁은…

《산산 백두산, 강강 두만강…》하고 목청껏 읽는 애는 무산집 손자 삼돌이다. 장난꾸러기…

《혁명군은 왔고나 우리 마을에 왔고나…》하고 노래부르는 애는 분녀이다. 나이는 여덟살밖에 안되지만 엉뚱한 생각을 곧잘하는 애이다. 삼돌이도 분녀도 다 선화네 아동단학교에 다닌다.

《그래, 오늘이 무슨 날이라는거요?》

깔따구가 쏘는지 뒤덜미를 철썩 때리고 벅벅 긁으며 지철민이 궁금해서 묻는 말이다.

선화는 방긋 웃으며 철민을 돌아보았다. 대답을 하자니 벌써부터 목이 메여오른다. 선화는 길복판에 뿌죽 내민 돌부리에 발을 걸채이자 그것을 뽑아 길옆에 쌓아놓고 일어서는 철민을 기다렸다가 감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그건 나도 전혀 생각 못했댔어요. 그런데 오늘 오전에 공부를 마치자 삼돌이가 날 보고 다짜고짜로 〈선생님, 나하구 우리 집에 가자요.〉하는게 아니겠어요?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니 자기 할아버지가 공부를 끝내자마자 급한 일이 있으니 선생님을 모시고 오라고 했다는거예요. 무슨 일일가 해서 찾아가니 글쎄 저의 생일상을 차려놓은게 아니겠어요.》

《생일? 가만, 오늘이 무슨 날이던가?》

지철민이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주먹으로 이마를 툭 쳤다.

《아차, 내가 그걸 잊었댔구만.》

선화는 그러는 철민에게 곱게 눈을 흘기고는 들으란듯이 뻐기며 말을 이었다.

《〈선생님, 생일을 축하합니다.〉하고 삼돌이 할아버지가 인사를 하는데 난데없이 아동단학교 학생들이 앞에 나란히 서서 손을 번쩍 쳐들어 아동단경례를 하면서 〈선생님, 축하합니다.〉하고 합창하는것이였어요. 난 그만 눈물이 쑥 나왔어요. 내가 〈아니, 생일은 어떻게 알구…〉 하고 의아해하자 삼돌이 할아버지가 하는 말이 삼돌이생일이 스무날전인데 그때 생일상을 받은 삼돌이가 그랬대요. 우리 선생님한테도 생일상을 차려주자구… 삼돌이에게 생일상은 생일날에만 차려준다고 하니 선생님생일은 언제인가구 묻더래요. 그래서 구정부에 가서 생일을 알아냈다나요. 아동단원들과 그들의 부모들이 어떻게나 짜고들었는지 난 전혀 몰랐댔다니까요. 저저마다 꽃다발을 안겨주구 〈우리 선생님이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드리자.〉하면서 노래도 부르구 〈우리 선생님을 기쁘게 해드리자.〉하면서 어떤 애는 〈곱새춤〉까지 추며 돌아가는데 정말 허리가 끊어질번 했어요. 〈우리 선생님의 말씀을 더 잘 듣구〉, 〈우리 선생님 말씀대로 공부도 더 잘하구〉, 〈우리 선생님 바라는대로 훌륭한 혁명가가 되자〉고 하면서 그저 〈우리 선생님〉, 〈우리 선생님〉하는데… 난 정말 난생처음 그런 기쁘고 행복스러운 일을 겪어보았어요. 인간다운 사랑, 인간다운 존경… 정말 이 하루를 위해선 일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겠구나, 이 애들, 이 애 부모들, 이 근거지를 위해서라면 돌을 갈아먹으면서라두 힘껏 일해야겠구나 하는 각오가 더욱 커지더군요.》

《결국은 이 애인도 생각 못했던 생일을 근거지사람들이 차려주었구만. 얼마나 좋소. 이 고마운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이번 식량공작을 잘해야겠는데…》

《식량공작 나가요?》

철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앓는 대원을 위해 나섰군요. 힘들지 않겠어요?》

《일없소. 이것도 다 내가 할 일인데… 이젠 다 왔구만. 여기서부터 시작하기요.》

지철민은 반두를 들고 찬물속에 들어섰다. 얼마나 찬지 자기도 모르게 헉― 하고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일없겠어요? 감기들지 않겠어요?》

선화는 초롱불을 들고 기슭을 따라가며 걱정을 했다. 그 걱정을 철민은 줄곧 웃음으로 받았다.

《걱정말라는데… 난 오동무만 병을 털고일어난다면 몇밤이라도 찬물속에서 새우겠소.》

그러다 종내 감기를 만난것이다.…

《철민동무는 이렇게 늘 동지들을 생각했구 근거지를 사랑했어요. 절대로 〈민생단〉이 될수 없어요.》

정선화는 리억만이가 잘 리해할수 있게 그날 밤의 일들을 빠짐없이 그대로 이야기해주면서 애타게 간청했다.

리억만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난 아직도 리해가 안되오. 〈민생단〉도 그런 정도는 얼마든지 할수 있으니까.》

《아니예요. 그건 진심이예요. 절대로 꾸며내서는 그렇게 못해요.》

《〈민생단〉이란 교활한자들이요. 믿을수 없어.》

하여 정선화는 지철민이가 《민생단》이 될수 없는 근거에 대하여 구체적인 생활세부까지 또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야말로 필사적이였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저녁이 되고 밤이 깊어졌다. 리억만은 밤이 이슥해지자 오히려 자기의 음욕을 로골적으로 드러내놓기 시작했다. 선화의 요구를 들어줄듯말듯 하면서 거닐다가는 슬쩍슬쩍 어깨를 다치기도 했다. 선화는 그의 숨소리가 높아지고 눈길이 이상하게 번뜩이는것을 보자 온몸에 닭살이 돋는것을 어찌할수가 없었다. 뇌리를 치는 예감에 정신이 번쩍 들어 얼른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오고말았다. 누구를 붙잡고 하소연을 해야 될지 알수가 없었다. 선화는 정신없이 마을을 방황했다.

아, 이를 어쩌면 좋은가. 그토록 정이 가는 근거지인데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 우린 그토록 근거지를 사랑하는데 이게 과연 무슨 일이란 말인가.

다음날아침 지철민이 사형장에 끌려나갔다. 부상당한 다리는 치료를 받지 못해 험상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부상당했을 때 대충 붕대를 동여 맨 그대로였는데 온통 시꺼멓게 피덕지가 말라붙어있었다. 리억만이 그를 황철나무밑에 세워놓고 《판결문》을 읽었다.

지철민이 몸부림을 치며 황소처럼 울부짖었다.

《나는 〈민생단〉이 아니요. 〈민생단〉이 아니란 말이요.》

그러자 리억만이 소리쳤다.

《저걸 보라. 저게 바로 〈민생단〉이다. 어제까지는 자기가 〈민생단〉이라고 자백하더니 사람들앞에서는 〈민생단〉이 아니라고 마지막까지 소리쳐서 우리가 마치 〈민생단〉이 아닌 죄없는 사람을 죽이는것처럼 뒤집어서 〈민생단〉투쟁을 못하게 하자는것이다.》

《아니요. 나는 한번도 내가 〈민생단〉이라고 자백한적이 없소.》

《저걸 보라. 저자는 죽는 순간까지 〈민생단〉을 하고있다. 보라, 〈민생단〉이 얼마나 교활하고 악질들인가 똑똑히 보라.》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리억만은 게거품을 물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사격준비!》

《가만!》

뒤에서 녀자의 새된 웨침소리가 났다. 모두의 눈길이 뒤로 쏠렸다.

그는 정선화였다. 정선화가 만사람의 눈길을 받으며 걸어나왔다. 사람들이 그에게 말없이 길을 비켜주었다.

정선화는 서슴없이 지철민에게로 곧장 다가갔다. 이 세상 모든것을 다 체념한듯 한 표정이다. 그는 지철민에게 다가가 이윽토록 그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스르르 무릎을 꿇었다.

지철민은 자기의 이런 꼴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이는것이 괴롭고 창피한지 고개를 외로 돌렸다.

《선화, 내 선화만은 정말… 행복하게 해주자고 했는데…》

선화는 천천히 도리머리를 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것인지 자신도 몰랐다.

그의 손에는 흰 천이 들려있었다. 사형장에 나선 사랑하는 사람이 부상당한 자리에 피덕지가 앉은 붕대를 그대로 감고있는것을 보고 속옷을 찢은것이다.

선화는 천천히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지철민의 부상당한 자리에 흰 천을 감기 시작했다. 두눈에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려 손등에, 그 하얀 천에 떨어져내린다.

하얀 천을 다 감은 선화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몸을 더듬으며 올라오다가 마침내 와락 그 넓은 가슴팍에 온몸을 던졌다. 몸부림을 치며 오열을 터뜨렸다.

《못 가요, 못 가요. 갈테면 나하고 함께 가자요.》

군중들속에서 또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리억만의 하얗고 가는 손가락이 지시봉처럼 곧추 선화를 가리켰다.

《저 녀자를 빨리 끌어내라. 〈민생단〉을 동정하는자도 〈민생단〉이다.》

지철민이 목갈린 소리로 불같이 말했다.

《선화, 어서 물러나오. 저 비렬한자들에게 절대로 빌붙지 마오. 어두운 밤이 새면 해가 뜨는 법이요. 래일을 믿고 사오. 내대신 밝은 세상을 꼭 보시오. 내 이제 마지막싸움은 어떻게 떳떳하게 죽는가 하는것이요. 그걸 똑똑히 보아주시오.》

《안돼요, 그건 안돼요. 죽어선 안돼요.》

선화는 몸부림을 쳤지만 리억만의 패들에게 끌려가지 않을수가 없었다.

선화는 지철민을 총살하는 총소리도 듣지 못했다. 《사격준비!》하는 소리를 듣자 그만 기절을 했던것이다.

실패한 지철민이네 식량공작조대신 자진하여 식량공작나갔다가 돌아온 리계순은 그 소식을 듣자 억이 막혀 허탈상태에 빠진듯 한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더구나 선화가 다시 리억만에게 불리워갔다는것을 안 리계순은 결연히 리억만이 거처하는 귀틀집으로 찾아갔다. 선화까지도 《민생단》으로 몰려는것 같았기때문이였다.

귀틀집앞에는 키가 꺽두룩한 보초가 서있었다.

《들어가지 못하오. 그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소.》

《난 식량공작조로 나갔던 사람이예요. 그 결과를 빨리 알려주지 않으면 〈민생단〉이 돼요. 그걸 알리지 못하게 하면 동무도 〈민생단〉이 돼요. 그래 〈민생단〉이 되고싶어요?》

계순이 맵짜게 들이대자 꺽다리보초는 눈이 둥그래졌다. 앞을 막을 생각도 못했다.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눅잦히며 문앞에 다가서서 문을 두드리려던 계순은 뜻밖에도 안에서 정선화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주춤 굳어졌다. 그 울음은 심장을 비틀어짜내는것 같은, 무딘 칼로 뼈짬을 에여내는것 같은 그런것이였다. 그 슬픔을 동정하는듯 한 리억만의 코멘 소리가 침중히 들려왔다.

《실컷 울라구. 다른데선 몰라두 내앞에선 마음놓구 울어두 돼. 그처럼 믿고 의지하던 기둥이 없어졌는데… 그처럼 귀중한 사랑을 잃었는데 그 심정이 오죽하겠소? 후유― 세상이란 참… 하지만 너무 상심하지는 말라구. 난 선화의 그 심정을 다 리해해.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것 같구 눈앞이 캄캄하구… 막 죽고싶을게야. 그러나 그래선 안돼. 간 사람은 간 사람이구… 산 사람은 살아야 할게 아니야. 눈물은 내리고 밥술은 올라간다구… 이겨내야 해. 난 선화가 지금껏 밥 한술 입에 넣지 않았다는 말을 듣구 어제 밤 한잠도 못 잤어. 너무도 가슴아파서…》

계순은 저으기 놀라지 않을수가 없었다. 리억만이 하는 말이 너무도 뜻밖이였던것이다. 슬픔이 극도에 이르러 몸부림치던 사람은 자기를 위로하고 동정하는 말 몇마디에도 쉽게 꼬꾸라지는 법이다.

정선화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계순은 온몸의 신경이 팽팽히 긴장해지는것을 느꼈다. 저 리억만은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것인가.

《선화, 난 솔직히 말해서 선화를 마음에 둔지 오랬어. 선화의 사랑에 방해될가봐 내색을 안했을따름이지. 용서하오. 지금껏 내 선화를 좋지 않게 대한것은 선화에게 쏠리는 내 마음을 다잡느라고… 우정… 그랬던거요.》

계순은 몸서리를 쳤다. 저게 무슨 말인가, 저게?…

《선화, 나도 정말 괴로왔소. 솔직히 말해서 내 지금껏 살아오면서 진정한 사랑의 감정을 느낀건 이 세상에 오직 정선화라는 한 녀성밖에 없었소. 지금껏 오로지 혁명사업에 헌신분투하느라 언제 한번 애틋한 감정에 잠겨있을새가 없어 그랬지 이 가슴속엔 언제나 선화가 들어있었소.》

문득 울음소리가 그쳤다. 무엇인가 뿌리치며 일어서는듯 했다.

《다치지 말아요. 그럼… 당신이 혹시… 그래서 철민동무를…》

《아―아― 오해하지 마오. 그건 혁명의 원칙이였소. 절대로 달리 생각지는 마오. 내가 정선화를 그렇게 마음에 두고있는데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을 찢는 무례한 일을 어떻게 감히… 하지만 혁명의 원칙은 어쩔수가 없는것이요. 사랑하는 처녀의 애인을 처형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 심정은 오죽했겠소? 앉소. 선화, 날 리해해주오. 그리고 한생 혁명에 시달리고 포연에 거칠어진 이 사나이의 마음을 좀 위로해주오. 응, 선화. 이젠 나만 믿소. 난 선화를 그 누구도 못다치게 할테요.》

《다치지 말아요. 싫어요, 놓으라요. 소리치겠어요.》

《소리쳐야 들을 사람도 없어. 선화, 선화는 이젠 내 사람이야. 가만있으라는데… 내 사람이 되면 우리 둘은 영원히…》

《무서워요. 당신같은 사람이 어떻게 간부를…》

《간부도 사람이야. 남자이고… 그 사람은 진짜 〈민생단〉이야. 그래 선화도 〈민생단〉으로 죽고싶어? 내 말을 들으면 당당한 혁명가가 될텐데 뭘 그래. 자, 어서 한번만…》

계순은 눈을 감았다. 아, 저런 사람이 어떻게 한개 현의 부장까지 할수 있는가.

더러웠다.

이때에야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라던 리억만의 지시가 생각났던지 계순을 막아서려 급히 다가왔던 보초도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들었어요? 동무가 저런짓을 하라고 보초를 서주어요?》

계순은 문을 두드리려고 했다. 어쨌든 둘다 《죄》를 범하지 않게 해야 하는것이다.

그 순간 안에서 와지끈 퉁탕 무엇인가 넘어지는듯 한 소리가 나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머리를 풀어헤친, 저고리고름까지 풀린 정선화가 정신없이 달려나가고 그뒤를 따라 리억만이 달려나왔다.

《저 녀자를 붙잡으라!》

리억만은 문앞에 서있는 계순이와 보초를 보고 우뚝 멈춰섰다. 천연스럽게 둘을 번갈아보았다.

《뭐요?》 목소리도 천연스럽다.

《식량공작조가 돌아왔어요. 그걸 보고하려구…》

《아, 그렇소? 그래 어떻게 됐소?》

《강냉이 120키로와 수수 50키로 구해왔어요.》

《됐소. 그것만 해도 성과요. 보란 말이요. 〈민생단〉놈들은 식량공작을 나가 죽을 쑤어놓았지만 동무넨 해냈거던. 허허허.》

리억만은 자기가 모순되는 말을 한다는것도 느끼지 못하고 보초에게 눈을 찔 흘겼다.

리계순을 저리 막지 못하고 정선화를 붙잡지 못한데 대한 추궁일것이다.

《그럼 전 가보겠어요.》

《좀 들어가 앉았다 가지 않겠소?》

《전 그만… 너무 피곤해서…》

계순은 고개를 약간 숙여보이고 돌아섰다. 순간 속에선 참을수 없는 분노가 화산처럼 솟구쳐올랐다. 녀성들은 이성관계문제에서는 남다른 감각을 가지고있다. 계순은 부녀부장이였다.

리억만이가 직권을 리용해서 일부 녀성들과 치정관계를 맺고 약담배까지 피우면서 부화방탕한 생활을 하고있다는것을 눈치채고있었다.

(모든게 사실이였구나. 저게 무슨 사람이고 현당부장인가. 어쩌면 엊그제 애인을 잃은 녀성까지 저렇게…)

계순이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선화가 따라들어왔다. 계순의 무릎에 쓰러져 오열을 터뜨렸다.

《언니, 난 이젠 어떻게 살아요. 어떻게 살아요.》

선화는 리억만에게 갔던 소리를 하지도 못했다. 치욕스러워 입밖에 내기조차 수치스러운 모양이였다. 계순이 역시 같은 심정이였다. 그저 마구 떨며 우는 그가 속에 쌓이고쌓인 억울하고도 원통한 모든것을 한껏 다 쏟아놓으라고 말없이 머리며 잔등을 쓰다듬고있을뿐이였다.

리억만의 이날의 추행에 대한 소문은 이들 계순이나 선화가 아니라 그 꺽다리보초를 통해서 퍼지게 되였다. 그 보초는 리억만이가 계순이 들어오는것을 막지 못하고 선화가 도망치는것을 잡을 생각도 못한데 대해 욕설을 퍼붓자 화가 나서 그날 밤 일을 사람들앞에 공개해버리고 마을에서 도망을 쳤던것이다.

자기가 그런 추행을 하는 리억만의 보초를 서준다는것을 리계순이 보았으니 생각이 복잡했을것이다. 리계순의 남편이 아직도 사람들의 신망을 받고있는, 현당서기로 일하던 원칙이 강한 사람이라는것을 그리고 리계순이도 현정부 부녀부장이라는것을 알고있는 그는 자기가 결코 머저리가 아니였다는것을 증명하고싶었을것이다. 자기는 리억만의 방에서 그런 추행이 일어나군 하는것을 몰랐다가 그제야 알았다는것을 보여주고싶었을것이다. 선화는 마을에서 그런 소문까지 돌자 더 견디기 어려워했다.

《언니, 난 가요. 이제는 모든것이 다 신물이 나요. 사랑을 찾아서 왔다가 사랑을 잃고가는 나예요. 언니, 이게 진짜혁명인가요? 녀자도 네것내것이 없는게 공산당인가요? 물론 아니겠지요. 언니가 말하던 그 공산주의, 그 혁명… 난 그에 반했댔어요. 그 길에 들어서면 사랑을 되찾을수 있으리라 생각했댔어요. 믿었어요. 그이를 사랑하려면 그이가 가는길을 함께 걸어야 한다는걸… 그래서 그 길에 들어섰는데 그이는 다시는 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갔어요. 아니, 그 비렬한들이 강제로 쫓아버렸지요,영원히 오지 못할 그 길로… 난 이젠 어느 길로 가야 하는가요. 내 한생 믿고 사랑하며 함께 가려던 그이를 빼앗겼는데… 내 사랑은 영원히 빼앗겼어요. 난 이젠 허울만 남았어요. 사랑이 없는 인생이 무엇에 필요한가요.

그런데도 그 비렬한자는… 아이, 더 말도 못하겠어요. 너무두 가슴아프구 너무도 억이 막히구 너무두 치욕스러워서… 한때는 녀류시인이 돼보려 꿈까지 꾸던 내가 어떻게 그런…

난 더는 견디기가 어려워요. 더는 못 참겠어요.

날보구두 〈민생단〉이라는데… 마지막길을 가는 그이에게 붕대를 감아주고 그를 사랑했다구… 그리구 〈유산계급〉출신이 우연히 혁명대렬에 끼여들었으니 〈민생단〉이라고 해요. 〈민생단〉이 아니라는것을 인정받을수 있는 길은 단 한길뿐인데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할수 없는짓이니 어떻게 하겠어요. 당장 죽는다 해도 언니, 난 그런짓은 못해요. 그래서 떠나요. 더는 찾지 마세요. 역시 우리는 한길을 걸을수 없는 사람들이였어요. 그러나 난 한생 그이만을 사랑하며 살겠어요.》

아침에 밥을 지으러 나갔다가 문밖에 떨어져있는 그 편지를 발견한 계순은 그만 아연해졌다. 그냥 말로 하면 계순이가 붙잡을가봐 이렇게 글로 남기고 갔는지도 모른다.

그 편지를 본 김일환은 격분을 금치 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내 그 억만이를 만나야겠소.》

계순은 눈이 둥그래졌다.

《그를 만나선 어쩌려구요?》

《이야기를 좀 해주어야겠소. 그 사람이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영상을 다 흐려놓고있단 말이요. 종개 한마리가 온 강물을 다 흐린다더니…》

계순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였다.

《그 사람이 뭐 당신 말을 듣기나 하겠어요? 그 사람은 간부구 당신은 이젠…》

《서기에서 떨어졌다구 비판할 권리까지 빼앗긴건 아니요.》

계순은 남편이 불의에 참을줄 모르는 성미라는것을 잘 알고있지만 동의할수가 없었다.

《그 사람이 저 조아범이나 동만특위 간부들과 무척 가까운 사이라더군요. 가뜩이나 당신을 〈민생단〉으로 몰지 못해 몸살이 나하는 사람들인데 무슨 화를 입자구…》

김일환은 열이 올라 정선화의 편지를 쥔 손을 내흔들며 격해서 말했다.

《물론 피해를 입을수도 있지. 그러나 내 한사람 피해입어도 그 사람이 고칠수만 있다면 혁명에야 리로울게 아니겠소. 지금이 어느때인데 간부라는 사람이 약담배를 피우구 녀성들과 치정관계를 맺구 하는거요. 비판해주어야 하오.》

계순은 종시 남편의 그 걸음을 막을수가 없었다. 남편은 그야말로 어디서나 《공격수》였다.

김일환은 그길로 리억만을 찾아가 따끔히 충고했다.

《난 억만동무가 개인생활에서부터 뒤소리를 듣지 않았으면 하오. 동무에 대한 평가는 결국 간부일반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고 지휘성원들에 대한 비난으로 될수 있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보오. 녀성문제도 그렇고 약담배도 그렇고…》

리억만은 얼굴이 불카해서 씩씩거리며 듣기만 할뿐 한마디도 대꾸를 못했다. 책상앞에 앉은채 뙤창밖을 쏘아보며 손가락마디만 딱딱 소리나게 꺾었다. 다음날 리억만은 정선화가 근거지에서 떠난 문제를 두고 구정부 회의장에 나타나 침방울을 튕기며 기염을 토했다.

그년은 《민생단》이고 혁명의 우연분자다, 그년은 유격근거지비밀을 다 걷어가지고 적구로, 제 상전들의 품으로 찾아갔다, 유격근거지에는 바야흐로 더 엄혹한 시련이 닥쳐오게 되였다, 이를 누가 책임지겠는가, 이 유격근거지의 수천의 생명들을 범의 아가리앞에 내맡긴자가 그래 《민생단》이 아니란 말인가, 그를 추종한자, 그를 끼고돈자, 그를 보증한자, 그를 끌어들인자, 그를 놓아준자, 그 어떤자도 용서해서는 안된다.

리계순은 입술을 피나게 깨물고 그자를 쏘아보았다.

그것은 명백히 리계순 자기네 부부를 념두에 둔 악설이였다. 리억만은 자기를 충고해준 김일환에 대해 그리고 자기의 추행들을 잘 알고있는 계순이에 대해 무서운 독을 품고있었다.

(비렬한…)

부르쥔 두주먹이 푸들푸들 떨렸다. 가슴속 밑바닥에서부터 불안의 뭉게구름이 걷잡을새없이 떠올라왔다.

(저게 우리를 복수하려드는구나. 하지만… 설마…)

설마가 아니였다. 리억만은 조아범과 동만특위의 모모한 간부들과 짜고 김일환에게 《민생단》감투를 씌우는데 성공했다.

《김일환은 〈민생단〉이 분명하니 검열을 해봐야겠다. 구국군공작을 계속 시키다가는 그 총을 잡은 사람들을 다 〈민생단〉으로 만들수 있으니 당장 소환해서 탄광에 보내라. 탄부들과 같이 굴속에 들어가 탄을 캐면서 로동자공작을 하게 하라.》

리억만이 《숙반》지도부에서 지껄였다는 말이다. 계순은 기가 막혔다. 고개너머 개인자본가가 운영하는 탄광으로 갈 준비를 하느라 주섬주섬 배낭을 꾸리는 남편을 분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리억만에 대한 참을수 없는 분노가 가슴속에서 꾸역꾸역 밀려올라왔다. 얼마나 유치하고 비렬하고 야비한 멸시와 모욕인가, 무서운 야심가…

《너무 마음쓰지 마오. 로동자공작도 중요한거요. 로동계급이야말로 혁명의 령도계급이 아니요.》

김일환이 다 꾸린 배낭을 한옆에 놓고 담배를 말아피우며 헌헌하게 말했다.

《우린 공산당원이요. 그 어디에 가서 무슨 일을 하든 혁명에 리익을 주는 일을 하면 되는거요. 로동자들을 장군님의 사상과 뜻으로 일깨워주고 묶어세워 령도계급으로서의 자기 구실을 하게 한다는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요.》

계순은 갑자기 뜨거운것이 왈칵 치밀어올라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 어떤 시련이 가로막아도 혁명만을 먼저 생각하는 남편이였다. 절해고도에서도 일감을 찾을 남편이였다. 이런분을 그것들은 왜?… 어처구니가 없었다.

남편이 푸른 창공을 훨훨 나는 대붕이라면 그것들은 악취풍기는 오물장에서 구불떡거리는 버러지보다도 못한것들이라는 생각이 가슴을 꽉 메우며 밀려들었다.

계순은 자기의 심장도 부쩍 커지는듯 한감을 느꼈다. 커진 심장이 쿵쿵 흉벽을 두드리는듯 했다. 힘든 곳으로 떠나는 남편에게 힘을 줄 대신 오히려 힘을 받는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계순은 마음을 다잡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힘들거예요, 탄광일이…》

일환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걱정마오. 탄부들은 한생토록 그런 일을 하오.》

계순이 남편에 대한 긍지와 자부를 더욱 가슴뿌듯이 느낀것은 작업장갑들과 음식들을 싸가지고 탄광에 찾아갔을 때였다.

계순이를 만난 탄부들은 진심어린 어조로 말해주었다.

《일환형님은 우리와 꼭같이 질통을 지고 두더지굴같은 갱안을 무릎걸음으로 기여다니면서 하루종일 탄을 캐면서두 쉴 땐 우리들에게 사람답게 사는 법을 깨우쳐주러 다니느라 허리 한번 제대로 펴고 누워보는적이 없시요.》

《일환동생은 우리가 왜놈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차근차근 배워주군 하는데 나이는 젊었어두 모두 선생처럼 따른다우.》

《일환동지는 우리에게 장군님뜻대로 사는 법을 깨우쳐준 혁명동지이구 기쁜 일이건 슬픈 일이건 고락을 함께 할줄 아는 진짜배기친구이구 형이구 동생이랍니다.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던 우리들에게 래일을 알게 해주었지요, 래일을…》

계순은 가슴이 후더워올랐다. 개울가에 나가 빨래를 해주고 옷을 기워주기도 하고 돌아오려는데 김일환이 따라나왔다.

《찾아와주어 고맙소. 탄부들이 좋아하더구만. 집에 뭐 없겠는데 어데서 그렇게… 음식까지…》

계순은 방긋이 웃었다.

《그런건 남자들이 몰라도 되는거예요. 그저 앓지만 마세요.》

그들은 굽인돌이까지 함께 걸었다.

《이젠 그만 들어가세요.》

《알겠소. 어머니를 잘 모셔주오. 건강에 특별히 주의하고… 당신은 언제나 자기가 혼자몸이 아니라는걸 잊지 말아야 하오.》

《걱정마세요.》

계순은 길가에 서서 손을 저어주는 남편을 몇번이고 돌아보며 눈시울을 적시였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기였다.

(기다려주세요. 뭐가 좀 준비되면 인차 또 오겠어요.)

리계순은 총총히 처창즈로 걸음을 다그쳤다. 근거지엔 또 부녀부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있는것이다.

되돌이

우리민족끼리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E-mail) : urimanager@silibank.com 홈페지내용에 관한 문의(E-mail) : uriminzok@silibank.com
Copyright © 2003 - 2013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gotop
기사종합
 
도서, 잡지
 
영화, 음악
 
독자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