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3 회)
제 5 장
10
김일성동지께서는 한덕수와 함께 내각사무국입구옆에 있는 가루개둔덕길을 걷고계시였다. 덕수와 꼭 나누어야 할, 그것도 지영이와 영신이 결혼식전에 아퀴를 지어야 할 문제가 있어 그를 부르시였다.
빽빽이 서있는 다박솔들사이로 나있는 오솔길이였으나 그 길마저 폭격에 파헤쳐져 제대로 걸음을 옮기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걸으니 5년전 모란봉을 거닐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장군님께서는 나무들이 우거진 모란봉쪽을 바라보시며 감회깊은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그땐 설을 앞둔 한겨울이였는데 지금은 추위가 풀린 초봄입니다. 어쩐지 난 그해 겨울에 걷던 길을 우리가 계속 걷고있는듯 한 느낌이 듭니다.》
장군님께서는 고개를 드시고 버드나무가지들에 눈길을 주시였다.
아직 추위에 얼어있으나 가느다란 아지끝에는 분명 연한 록색물이 올라있었다. 봄! 어느덧 봄빛이 완연했다.
《그때 우리가 한 말들이 기억납니까?》
《생각납니다.》
덕수는 그때 장군님께서 재일조선인운동의 방향이며 방도에 대해 하시던 말씀이 그대로 떠오른다고 대답올렸다.
《아니, 내가 하는 말은 그것이 아니라 그때 우리가 한 약속입니다.》
《…》
《그때 난 덕수동무에게 두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하나는 이젠 공화국이 창건되였기때문에 조국에서 재일동포들을 힘자라는껏 돕겠다는것이였습니다. 그런데 미국놈들이 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그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장군님께서는 말끝을 흐리시였다. 바로 그것으로 하여 덕수를 부르시였고 자신의 심중을 속시원히 털어놓자고 가루개에 오르시였으나 정작 말씀을 하자니 뒤를 이을수가 없으시였다.
열흘전 몰라보게 달라진 덕수의 초췌한 모습을 대하는 순간 장군님께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는 그를 일본으로 보내지 않으리라는 결심, 여태껏 고생한것만큼 행복하게 아니, 이미 한 고생의 열배, 백배가 되는 보상을 조국의 품에서 받게 하리라 결심하시였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그토록 고생한 덕수에게 너무 무정한것 같으시였다. 더우기 덕수의 모든 고생이 바로 자신께서 그를 일본에 되돌려보냈기때문이라는것으로 하여 더 마음이 아프시였다. 덕수에게 이제부터 무슨 일을 시키며 일본에 있는 가족들은 어떻게 데리고 올것인가에 대해 그리고 시간을 내여 그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계획까지도 세워보시였다.
그러나 그 계획은 앞으로의 재일조선인운동, 당장 그 실현을 위해 판가리싸움을 벌려야 할 로선관철이라는 무거운 혁명과업을 생각할 땐 점점 뒤전으로 밀려났다.
그 로선전환을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그에 대한 정당성을 확신하고 그 누구도 걸어보지 못한 새로운 길을 개척할 완강한 투지와 전개력이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발악적으로 나올 종파들과 맞서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종파들의 영향하에 있던 일군들과 동포들을 한덩어리로 묶어세우기 위해서도 처음부터 조국을 옹호하면서 놈들과 견결히 싸운 사람이여야 했다. 그런 사람은 두말할 여지없이 한덕수였다. 덕수이상 적임자는 없었고 있을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를 다시 일본으로 보내야 한단 말인가!
장군님께서는 가슴이 쓰리시였다.
어떻게 그를 다시 일본에 보낼수 있단 말인가! 추방령을 받은 후부터 밥 한끼 제대로 먹어보지 못하고 발편잠 한번 자보지 못한 그, 그런 시련속에서도 원쑤들과 싸우다가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지 않으면 안되였던 그가 아닌가! 그런 고통과 슬픔을 안고 조국에 온 그를 또다시 일본으로 가라고 하다니? 너무나도 의리도 인정도 없는 매정한 처사가 아닐수 없었다.
장군님께서는 이미부터 마음을 괴롭혀오던 한 인간에 대한 인간적인 감정과 혁명의 요구와의 불가분리의 모순에 다시금 휩싸이게 되시였다. 그래도 그전에는 곧 리성이 감정을 다잡군 했으나 이번에는 도저히 그 리성에 납득되지 않는 감정이였다. 아니, 납득될수가 없었다. 그래서 약속에 대한 말을 꺼내기는 했으나 뒤를 이을수가 없으시였다.
《덕수동무!》
한자리에 멈춰서신 장군님께서는 폭격에 재더미로 변한 서평양일대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시였다.
《그전에도 그랬지만 난 요즘에 와서 더욱 이런 생각을 합니다.
어째서 혁명하는 사람에게는 개인의 생활적인 요구와 혁명임무가 언제나 서로 대치되는것일가 하고말입니다. 물론 혁명을 하자니까 어려움이야 있겠지요. 그러나 혁명이 결코 인정을 무시한 가혹하고 무자비한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가장 뜨거운 인간애를 요구하고 그 요구를 충족시켜야 하지 않는가 말입니다. 그런데도 매번 그것을 무시해야 할 립장에 서게만 하니…》
《…》
덕수는 뒤짐을 지고계시는 장군님모습을 경건히 우러렀다. 무언가 쿵 하고 심장을 때리는 충격과 함께 어째선지 오늘따라 장군님의 모습이 이전과는 전혀 달리 느껴지는것이였다.
장군님께서 자기를 데리고 가루개둔덕을 오르실 때부터 무슨 긴한 말씀이 있으리라는것을 직감하고 은근히 긴장돼있던 덕수였다.
그러나 5년전에 자기와 한 약속에 대해 상기하시다가 문득 인정에 대한 말씀으로 넘어가는 순간, 특히 말없이 먼 하늘가를 바라보시는 심려어린 표정을 대하는 순간 장군님께서 무엇때문에 자기를 찾았으며 또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신다는것을 깨달을수 있었다.
(장군님께서는 지금 괴로와하신다. 바로 나때문에 상심하고계신다. 로선전환을 하자니 부득불 나를 일본에 다시 보내야겠는데 이미 조국에서 함께 일하자고 한 그 약속으로 하여 괴로와하신다.)
그렇다는것을 깨닫게 되자 대뜸 명치끝을 칼로 허비는듯 한 아픔을 느끼였다. 그것은 한 전사에 대한 사랑이 귀중하여 마땅히 해야 할 명령에 대해서까지 주저하시는 장군님의 인품, 그런 사랑을 천품으로 지니신 장군님에 대한 새삼스런 느낌이였다. 그러면 그럴수록 한가지 의혹이 떠올랐다.
(도대체 내가 무엇이길래… 과업이 무엇이라고 명령하시기만 하면 응당 알았습니다 하고 집행할 의무밖에 없는 전사앞에서 이미 한 약속때문에 선뜻 입에 담기 저어하시다니? 과연 우리 장군님께서 이렇게도 인정에 무르실줄이야.)
이미부터 자기는 누구보다도 장군님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해온 덕수였으나 이 시각에는 저로선 전혀 알지 못했던 장군님의 새로운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질뿐이였다. 100만 관동군을 삼대베듯 쓸어눕히고 오늘은 세계《최강》을 떠드는 미제를 서산락일의 운명에 몰아넣은 전설적령장이신 장군님께서 이다지도 마음이 여리실줄이야! 그 인정에 목이 메였다. 눈굽이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것을 어떻게 인정이라고 하랴! 그것이야말로 나같은 평범한 인간을 아니, 우리 3천만겨레모두를 강철로, 불사신으로 만드는 숭고한 사랑이 아니고 뭐랴! 우리 조국을 온 세상이 다 우러러보는 그런 조국으로 만드는 위대한 힘, 오직 장군님께서만이 지니신 위대한 천품이 아니고 뭐랴!)
덕수는 부지중 탄성을 터뜨렸다. 이런 장군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을 아끼고 주저하랴 하는 불같은 용기와 함께 장군님께서 바라신다면 일본을 두번이 아니라 스무번이라도 가야 한다는 의지와 각오가 불같이 용솟음쳤다. 또 그렇게 한다 한들 어떻게 장군님의 사랑에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는것으로 되랴 하는 생각에 안타깝기도 했다.
《장군님!》
성큼 장군님께로 다가서며 덕수는 힘있는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5년전 장군님께 조국에 떨어지겠다고 하던 때의 일이 떠오르면서 이번에는 자기가 먼저 장군님의 아픈 마음을 다소나마 풀어드려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장군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 제 압니다. 무엇때문에 상심하시는지도 압니다. 저때문에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군님의 심중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또 그 뜻대로 행동하지 못한다면 제어찌 장군님의 전사라고 하겠습니까?》
《…》
장군님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이 덕수를 바라보시였다. 그이의 뜨거운 시선에는 덕수에 대한 다함없는 사랑과 함께 믿음이 어려있었다. 그러면서도 어떤 량해를 바라시는 간절한 기대도 력연했다.
《덕수동무! 동무가 그렇게 생각해주니 내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고마울뿐입니다.》
장군님의 목소리가 갈려있다는것을 느낀 덕수는 더욱 활달한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상심하지 마십시오, 장군님! 이미 장군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도 지척이고 마음이 천리면 지척도 천리라고 말입니다. 전 그 어디에 있어도 장군님품에 안겨있다는것으로 하여 조금도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이것만은 마음속 깊숙이 자리잡은 진정이라는듯 덕수는 가슴을 활짝 펴면서 밝은 표정을 지었다.
《난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한데 그런 말까지 하니… 그러나 내 심정도 리해해주시오. 앞으로의 재일조선인운동을 따져볼 때마다 나는 덕수동무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재일조선인운동에서는 덕수동무가 없어서는 안될 존재입니다. 이것은 단지 내 생각만이 아니라 조국의 요구이며 혁명의 요구라는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하고싶은 말은…》
장군님께서는 다시 걸음을 옮기시며 말씀을 이으시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조국이 아직은 재일동포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있습니다. 그렇지만 멀지 않아 그 빚을 갚을 날이 올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저렇게 페허로 되였지만…》
앙상한 전주대와 굴뚝들만 드문드문 서있는 서평양일대를 바라보신 장군님께서는 덕수에게로 돌아서시였다.
《이제 정전이 되고 복구가 시작되면 우리는 복구건설과 함께 재일동포들에 대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한두개의 공장이나 건물을 짓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우선 동포자녀들의 교육에 대해서부터 관심을 돌릴 작정입니다. 난 덕수동무가 동포들의 야학을 운영하기 위해 돈을 꾸러 다니던 일과 학교터전을 잡아놓고도 돈이 없어 천막을 치고 아이들을 공부시켰다는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초중급학교는 물론이고 앞으로는 대학까지 내올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돈이 없고 학교가 없어 공부를 제대로 못하던 동포자녀들이 대학이 생기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그리고 동포들을 조국에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도 하려고 합니다. 조국에 오겠다는 동포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일본정부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포들이 조국으로 귀국할 땐 그야말로 온 세상이 보란듯이 떳떳하고 당당하게 오게 해야 합니다.》
덕수에게는 장군님말씀이 앞으로의 계획이 아니라 어쩐지 당장 눈앞에서 펼쳐지고있는 현실처럼 느껴졌다. 조국의 따뜻한 사랑에 목이 메인 동포들모습이며 웅장한 대학청사에서 공부하는 름름한 대학생들, 그런가하면 동해의 푸른 물결을 가르는 귀국선에 올라 목청껏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의 모습…
《참! 부인한테도 나의 인사를 전해주기 바랍니다. 수임동무말입니다.》
장군님께서는 덕수의 팔을 잡으시며 다정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숱한 고생을 하면서도 덕수동무를 돕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우겠습니까. 그저 그가 기뻐서 웃을수 있는 그런 말을 해주었으면 합니다.》
《…》
덕수는 목이 메여올랐다. 궂은일, 마른일 가리지 않고 힘들다는 말조차 한번 해보지 못한 안해, 이젠 고생을 남편한테서조차 위로받을것을 잊고 살아오는 수임이, 온갖 고역들을 어느덧 자기에게 쏟아지는 숙명으로 받아들이는데 습관된 수임이가 장군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것을 안다면…
새삼스레 가슴이 후더워지면서 눈앞이 흐려졌다. 무슨 말씀을 올리고싶었으나 뭐라고 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이때 내각사무국입구앞으로 한대의 승용차가 와서 멈춰섰다. 차에서는 곧 두사람이 내렸는데 한사람은 신랑복차림의 리지영이였고 다른 사람은 언제나 입던 조선옷을 양복으로 갈아입은 박룡이였다.
결혼식준비를 끝내고 장군님을 모시러 온것이 분명했다.
《갑시다. 이젠 마음놓고 지영동무와 영신이의 결혼을 축하해줄수 있을것 같습니다.》
장군님께서는 그제서야 밝은 미소가 어린 눈길로 덕수를 바라보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