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9 회)
제 5 장
6
장군님께서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들어서는 영신이의 단정한 모습을 통해 첫눈에 벌써 이 처녀가 무엇 하나 꾸밈이 없이 소박하고 깨끗한 마음씨를 가진 처녀라는것을 알아보시였다.
은연중 옆에 서있는 박룡이에게로 시선이 갔으나 그의 우둥부둥한 얼굴과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섬세한 영신이의 용모는 도저히 두사람이 부녀지간이라는것을 믿기 어렵게 했다. 흔히 영신이처럼 아련하게 생긴 처녀는 마음이 섬약하기마련이라는 말이 떠올랐으나 장군님께서는 고개를 저으시였다. 영신이야말로 그 어떤 유혹이나 시련에도 휘말려들지 않고 자기의 아름다움을 꿋꿋이 지켜낸 처녀, 지향의 절개뿐아니라 사랑의 절개까지도 끝까지 지켜낸 안팎으로 아름다운 미인이 아닌가! 그런 영신이가 더없이 대견하고 기특하시였다.
《얼마나 반가운 일입니까!》
장군님께서는 앞에 서있는 덕수와 박룡이를 일별하시고는 밝은 표정을 지으시며 영신이에게로 시선을 옮기시였다.
《영신동무! 난 동무에 대한 말을 들을 때마다 동무가 과연 언제 조국에 있는 지영동무와 만나게 될가 하고 생각하군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이렇게 오고야말았습니다.》
웃음어린 눈길로 영신이를 바라보시던 장군님께서는 다시 박룡이에게로 돌아서시였다.
《그래 딸과 이렇게 만나니 마음이 어떻습니까?》
버릇처럼 두손을 모두어쥔 박룡은 입가에 어줍은 미소를 띠웠다.
《어떻다고 말씀드려야 할지… 아직은 그저 심봉사가 심청이를 만난것처럼 어리둥절할뿐입니다.》
《심봉사와 심청이라… 하긴 그렇게 말할수도 있지요. 앞 못보는 심봉사가 갈길을 찾지 못해 일본, 남조선을 오락가락한 박룡동무라면 그 아버지를 위해 임당수에 빠진 심청이는 바로 영신동무라 할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심봉사는 룡궁에서 딸과 만나 눈을 떴는데 그렇다면 그 룡궁은 결국 이 조국이란 말이 됩니다. 하하.》
롱담처럼 하시는 장군님말씀이였으나 박룡은 물론 영신이까지도 생각에 잠기였다. 그런 부녀를 보시며 그이께서는 더 밝은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부녀간의 상봉이 심봉사와 심청이의 상봉이라면 이제 있게 될 지영동무와 영신이의 상봉은 뭐라고 해야 합니까? 내 생각엔 두사람의 상봉은 견우와 직녀의 상봉이라고 해야 할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견우와 직녀를 위해서는 까마귀들이 은하수로 오작교를 놓아주었다면 지영동무와 영신이를 위해서는 바로 이 덕수동무가 다리를 놓아준셈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장군님!》
장군님앞으로 한걸음 나선 박룡이 생각깊은 어조로 말씀올렸다.
《저희들 부녀가 이렇게 장군님앞에 서있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꿈만 같습니다. 딸애하구 평양으로 오면서도 얘기가 있었습니다만 저와 이 애는 오로지 장군님의 사랑으로 재생한 몸입니다. 오욕에 찬 길을 걷던 저에게 참된 삶을 누리게 해주시고 이국의 광야에서 부평초처럼 떠다니던 딸애까지 이렇게… 과연 무슨 말로 그 은정을 다 아뢰일수 있겠습니까. 이 행복을 어찌 심봉사나 심청이에게 비길수 있겠습니까.》
장군님께서는 그것은 맞지 않는 말이라는듯 손을 저으시였다.
《박룡동무의 부녀가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된건 누구의 덕이 아니라 우리에게 조국이 있기때문입니다. 조국은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나는 조국의 운명이자 민족의 운명이고 민족의 운명이자 곧 개인의 운명이라고 주장합니다. 나는 박룡동무 부녀가 이렇게 조국에서 만난것을 보면서 앞으로는 재일동포모두가 조국의 품에 안기게 되리라는걸 새삼스레 확신하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덕수동무?》
《옳습니다. 저도 바로 그런 생각을 하고있었습니다.》
덕수는 장군님께서 그 물음이 계시리라는것을 기다리기라도 했던것처럼 힘차게 대답올렸다.
《이렇게 장군님앞에 서있다고 생각하니 한가지 사실이 떠오릅니다.》
무엇때문인지 박룡은 옆에 있는 덕수를 돌아보고나서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해방직후 이 덕수동무가 조련을 조직하고 동포들을 조국의 두리에 묶어세울 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재일동포들을 몽땅 이북으로 끌고가려고 하는데 고향이 남쪽인 동포들이 북으로 쏠릴것 같은가 하고 말입니다. 그때 덕수동무는 고향이 무슨 상관인가? 고향이 남이든 북이든 동포들이 갈길은 하나다, 그것은 바로 김일성장군님품이다, 왜냐하면 장군님이 계시여 조선이 있기때문에 조선사람의 고향은 누구나 다 장군님의 품이라는걸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전 그 말이 얼마나 옳았는가 하는것을 오늘에 와서야 절감하게 됩니다. 저와 딸애의 운명을 두고 다시금 절실하게 느끼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진정에 넘친 박룡의 말은 이미부터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하고있었고 어느땐가는 꼭 장군님께 말씀드리기로 작정하고있었던것이 틀림없었다.
장군님께서는 웃으시며 말씀하시였다.
《우리 지나간 이야기는 그만하고 앞으로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것부터 말해봅시다. 나는 무엇보다도 지영동무와 영신이를 위해 집을 한채 마련하는것이 급선무라고 봅니다. 지영동무가 곧 돌아올테니말입니다.》
《아닙니다, 장군님!…》
갑자기 영신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장군님께서 자기를 마주보고계신다는것을 알자 얼른 다시 머리를 숙이였다. 무슨 말을 장군님께 올리고싶지만 말보다도 먼저 솟구쳐오르는 격정으로 하여 입을 열수가 없는듯싶었다.
《저는…》
가슴밑창에서 울려나오는듯 한 그의 목소리는 벌써 울음에 젖어있었다.
《저는 이때까지 버림만 받아오던 몸이였습니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부모한테서 버림받고 또 사랑하는 사람한테서까지…》
떨리던 목소리마저 가늘어지다가 뚝 끊어지고말았다. 일시에 지나간 모든 추억들이 가슴을 허비는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전 저에게 쏟아지는 가혹한 운명의 세례앞에서 처음엔 그저… 죽을수밖에 없다고 여겼댔습니다. 하지만 차마… 그냥 죽을수는 없었습니다. 그냥 죽기에는 너무나도 원통하고 억울했습니다. 그래서 찾아들어간 곳이 바로 수도원이였습니다. 하느님밖에 저의 번뇌와 고통을 리해해주지 못하리라 믿었기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하느님께 빌었습니다. 제가 바라는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서 빌고 저의 앞길을 막는 문이 열리기를 바라서 빌었습니다.》
어느새 고개를 들고있는 영신이의 두눈에는 맑은 눈물이 한가득 고여있었다. 흥분과 열정이 어려있는 그의 표정은 마치 성상앞에 서있는 열광적인 신도의 모습 그대로였다.
《저는 성심을 다해 바랐고 있는 힘을 다해 찾았으며 기를 쓰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무엇 하나 이루어지지 않았고 찾을수도 없었으며 문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처럼 애타게 찾고 바라고 원하던 모든것을 바로… 바로 장군님께서…》
영신이의 두볼로는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목소리도 눈물에 잠겨 이어지질 못했다.
《그렇습니다.… 바로 장군님께서는 제가, 제가 그토록 찾고 바라던것을 다… 모조리 주시였으며 오늘은 이렇게… 이렇게 인생의 새 대문까지 활짝 열어주시였습니다. 고맙습니다, 장군님! 장군님이시야말로 저를 구원해주신 구세주이십니다. 저의 앞날을 환히 열어주신 하느님이십니다.》
그 자리에 무릎을 꿇은 영신이는 두손을 모두고 정중히 머리를 숙이였다. 어깨우로 흘러내린 머리칼이 세차게 물결쳤다.
자못 난감하신 눈길로 덕수며 박룡이를 바라보시던 장군님께서는 영신이를 자리에서 일으키시였다.
《자, 일어나시오. 난 오늘의 모든것이 영신동무 자신의 의지와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처럼 어려운 고생을 하면서도 억울한 운명에 순종할수 없다는 그 각오가 결국 영신동무를 조국에 오게 했고 이렇게 아버지나 지영동무와 만나게 한것이 아니겠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영신이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곧 옆에 놓여있는 바구니를 들고 다시 장군님앞으로 다가섰다. 그가 바구니우에 덮여있는 흰천을 들자 그안에는 놀랍게도 갖가지 색갈의 종이로 접은 작은 새가 셀수도 없으리만치 꽉 담겨져있었다.
《장군님! 우리 풍속은 아니지만 일본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일이나 기어이 실현되길 바라는 소망이 있을 때면 천마리의 학을 종이로 접는 풍습이 있습니다. 저는 저에게 돌려주시는 장군님의 사랑을 안 그날부터 장군님께서 건강하시기를 바라서 더우기 준엄한 전쟁의 나날속에서도 부디 옥체만강하시기를 축원하여 학을 접기 시작했습니다. 장군님의 은정으로 다시 태여난 이 소녀의 보잘것 없는 성의로 여겨주신다면 그 이상 영광이 없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바구니를 여겨보시는 장군님께서는 이름할수 없는 감정과 함께 그 어떤 새로운 결심에 넘치시였다. 어찌 이것이 영신이 하나의 심정이랴! 재일동포들모두가 지금 영신이가 겪은 그런 고통과 시련을 겪으면서 안타까이 조국을 바라보고있지 않는가! 하루빨리 그 위험한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길 바라고있지 않는가!
침묵이 깃든 집무실로 서기가 들어섰다. 모두의 시선이 일순 그에게로 집중되였다.
《장군님! 중국에 가있는 림춘호동무로부터 련락이 왔습니다.》
《그래?》
장군님의 물으심에 언제나처럼 송구한 표정을 지은 서기는 기여들어가는 소리로 대답을 올렸다.
《다른 말은 없이 그저 오늘 저녁차로 조국을 향해 떠난다고만 했습니다.》
《저녁차라…》
혼자소리처럼 하시는 말씀이였으나 그 어조에 색다른 긴장이 어려있다는것을 방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