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 회)

제 4 장

5

 

오끼해협의 검푸른 파도는 활등처럼 구붓하게 휘여든 사까이항의 백사장을 쉼없이 쓸어대고있었다. 얼마나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는지 이젠 파뿌리처럼 하얗게 바랜 모래불이였으나 그래도 아직 무슨 곡진한 사연이 남아있는지 무수한 갈기를 앞세운 파도는 계속 기슭으로 밀려드는것이였다.

서민이가 잡아놓은 집 뒤골방에서 두시간, 다시 바다가 백사장을 걸으며 두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덕수는 그새 지영이와 무슨 말을 했는지 통 기억할수가 없었다. 줄곧 깊은 생각에 잠겨 지영이 말을 듣다가도 저도 모르게 소스라쳐 고개를 쳐들군 했는데 그땐 자기가 무엇을 생각하고있었는지 그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나같이 놀랍고 희한한 소식들이여서 한가슴에 받아들여 소화하기에는 너무나도 아름찼다.

전쟁의 중하를 한몸에 지니시고 전선과 후방에 대한 현지지도를 매일처럼 이어가신다는 장군님, 당중앙위원회 제4차전원회의 결정을 받들고 전쟁의 최후승리를 위해 떨쳐일어난 조국인민들 그리고 귀국하자부터 당중앙위원회에서 일한다는 김운해며 끝내 평양으로 들어왔다는 박룡의 소식…

적어둔것 하나없이 머리속에 새겨두었다가 되뇌이는 지영이를 덕수는 줄곧 낯선 사람처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중에도 언제나 이역만리에 있는 재일동포들을 걱정하실 때마다 자기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안팎의 원쑤들이 책동하는 살벌한 적구에서 그것도 지하에서 홀로 싸우자니 얼마나 힘들겠는가고, 그런 자기에게 안부조차 전하지 못하는것이 여간만 안타깝지 않다고 하셨다는 장군님말씀은 가슴에 맺혀 내려가지 않았다.

그토록 안타까이 마음쓰시는 장군님을 옆에서 보고만 있을수 없어 박룡이와 김운해와 토론한 끝에 장군님의 안부라도 전해야겠다는 하나의 일념으로 바다를 건너왔다는 지영이의 말은 더더욱 장군님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치게 했다.

처음에는 그런 소식을 전해주는 지영이가 더없이 고맙기만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제 지영이를 통해 일본에서 벌어진 이러저러한 사실들을 아시게 될 장군님께서 얼마나 커다란 걱정에 잠기시랴 하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쓰려 견딜수 없었다. 장군님의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 일본에 온 지영이에게 기쁨은 고사하고 오히려 걱정을 덧쌓이게 할 무거운 걱정만 잔뜩 안겨보내게 될줄이야! 그렇지 않아도 전쟁으로 하여 얼마나 걱정이 많으실 장군님이시랴! 이제 와서는 바로 이런 일본에 나타난 지영이가 못내 야속스럽기만 했다.

무엇보다도 민대파들의 책동으로 강령이 삭제된 사실이며 그것으로 하여 초래될 위험이 각일각 커가는 속에서 일본의 권력타도를 위한 무장투쟁에 나서고있는 급박한 정황, 한마디로 말해 재일조선인운동이 자신께서 가리키신대로가 아니라 다른 길로 들어서고있는것을 아신다면…

덕수는 저도 모르게 신음이 새나왔다.

(이 모든 사실을 장군님께서 아신다면… 그리고 나에 대해선 또 얼마나 섭섭하게 여기시랴!)

아무리해도 덕수는 이 엄청난 후과를 달리 변명할 길이 없었다. 그것은 배은, 그토록 고귀한 은정을 베풀어주신 장군님에 대한 가장 수치스러운 배은으로밖에는 달리 변명할수가 없었다. 물론 이전에도 자기가 장군님뜻대로 일하지 못한다는것을 깨닫기는 했으나 그래도 오늘처럼 그것이 그렇게도 큰 과오일뿐더러 돌이킬수 없는 죄악이라고까지는 통감하지 못했던것이다.

그에게는 지영이의 출현이 마치 이미부터 곪아가는 상처로 하여 아픔을 느끼던 사람이 오늘은 무섭게 터진 그 창상을 직접 제 눈으로 들여다보는 심정이였다.

《참! 집에서는 다들 무고하십니까? 아주머니랑 호일이 말입니다.》

사업상얘기를 떠난 지영이의 물음이 괴로와하는 자기를 위안해주려고 그런다는것을 덕수도 모르지 않았다.

《잘있네. 2전대회후로는 집에 가보지 못했지만 이웃에 사는 동포들이랑 일군들이 잘 돌봐주고있네. 요즘은 영신이까지 집에 와서… 참!》

영신이에 대한 생각이 미친 덕수는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춰섰다.

《영신이 얘긴 들었나?》

《서민동무한테서 대충 들었습니다. 이젠 어엿한 교원이 되였다고 하더군요.》

《아마 숙소에 돌아가면 영신이가 와있을거네. 낮차로 도착하게 돼있으니까. 만나보면 알겠지만 몰라보게 달라졌어. 학교일에 얼마나 극성인지 모두가 칭찬이지…》

다시 걸음을 옮기며 덕수는 생각깊은 어조로 말했다.

《이번에 조국에 갈 때 꼭 함께 가라구. 동무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린 영신인가! 동무와 함께 조국에 온 영신이를 보면 장군님께선 또 얼마나 기뻐하실텐가! 박룡이는 더 말할것도 없고.》

이미 그 일에 대해서는 자기도 생각이 있다는듯 지영은 어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영신이도 영신이지만 제가 의장동지 집식구들에 대해 물은건 말입니다.》

지영은 갑자기 심중한 기색을 지었다.

《장군님께서 의장동지 아주머니며 호일이에 대해서 걱정하셨기때문입니다. 늘 경찰들의 감시를 받고있을 의장동지때문에 아주머니가 얼마나 맘고생이 크겠는가고 하시면서 호일이도 이젠 학교에 갈 나이인데 공부는 어떻게 시키고있는지, 끼니나 제대로 에우는지 근심이 된다고 하시였습니다.》

덕수는 가슴속에 불뭉치같은것이 불쑥 치미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가끔씩 집에 들릴적마다 불안한 눈길로 자기를 쳐다보면서도 그 불안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수임의 모습이며 오래간만에 나타난 아버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방 한쪽구석에서 눈치만 흘끔흘끔 살피군 하는 호일이의 측은한 모습이 떠올랐다. 더우기 학교에 갈 땐 꼭 란도셀(멜가방)을 사주마고 약속했지만 아직도 천가방을 들고다니는 호일이를 볼 때면 은연중 코마루가 저려들군 했다.

《동무가 장군님을 뵈온게 언젠가? 제일 최근에 뵈온게 말일세!》

잠시 바다쪽을 바라보며 생각을 더듬던 지영이가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2월중순입니다. 세균무기를 사용하는 미제의 만행을 폭로하는 대외선전사업방향에 대한 과업을 받으러 당중앙에 갔을 때니까 꼭 한달전이지요.》

지영의 두눈은 어느새 류다른 광채로 빛나고있었다.

《그날 장군님께서는 당중앙청사 앞뜰에 있는 실개천둔덕에서 애기나무모를 심고계셨습니다. 퍼그나 따뜻한 날씨여서 군복을 벗으신채 겨울내의바람이시였습니다. 부관들이 떠오는 애기나무들을 이미 파놓은 구뎅이에 넣고 손수 흙으로 덮어주고계시였지요.》

덕수는 내의바람으로 한자리에 앉으시여 어린 모를 심고계시는 장군님의 모습을 상상해보려고 했으나 좀처럼 눈앞에 그려지지 않았다. 우선 전쟁이라는 엄혹한 정황과 나무를 심으시는 장군님의 모습을 일치시키기도 어려웠거니와 보다는 눈앞에 모란봉을 거니실 때의 그 자애로운 모습이 먼저 떠올랐기때문이였다. 어느덧 장군님을 그릴 때면 언제나 그날의 모습부터 새겨지군 하는 덕수였다.

《우리가 갔을 때 마침 총참모부에서 조직한 회의에 참가할 군부대지휘관들도 거기에 도착했는데 장군님께서는 그들속에서 한 지휘관을 찾으시고는 그를 각별히 반갑게 맞이하는것이였습니다. 그가 누군가 하면 바로 최현동지였지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걸음을 멈춘 지영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덕수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도 장군님께서는 덕수동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

덕수는 어리둥절해졌다. 국제정세나 해외교포운동에 대해 언급하실 때라면 몰라도 성격이 판이한 군사회의에 참가할 군부대지휘관들앞에서 자기 말씀을 하셨다는것은 뜻밖의 일이 아닐수 없어서였다.

《저도 후에야 알았는데 그날 장군님께서는 오래간만에 최현동지를 만나셨던것입니다. 최현동지는 1211고지전투를 치른 후 얼마동안 후방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돌아온 참이였습니다. 그의 건강상태에 대해 일일이 알아보신 장군님께서는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한손으로 그의 어깨를 힘껏 두드리시였습니다. 그러시고는 지휘관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최현이를 보시오! 1211고지를 지켜낸 영웅이요! 놈들의 포격과 폭격에 고지가 몇m 낮아지기까지 했지만 조국의 고지를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진짜배기싸움군이고 영웅이 아니겠소!〉

그러시면서 장군님께서는 곧 한손가락을 세워보이시고는 이런 영웅이 또 한사람 있는데 어디 알아맞춰보라고 하시였습니다. 모두들 그가 누굴가 하고 얼굴을 마주보는데 장군님께서는 그 사람도 바로 이 최현이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장령들이 더욱 고개를 기웃거리자 그이께서는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씀하시였습니다. 〈그는 바로 일본에 있는 한덕수동무요. 그도 지금 적구나 다름없는 곳에서 조국을 위해, 동포들을 위해 억세게 싸우고있소. 미제와 일제, 거기다가 요즘은 종파들까지 못된짓을 하지만 그는 끄떡없이 동포들을 조국의 두리에 묶어세우고있소. 누가 감히 조국과 아무런 련계도 련락도 없는 상태에서 그렇게 싸울수 있겠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요. 나는 그를 동무들을 만나는것처럼 쉽게 만나지도 못하오. 그렇지만 믿소. 확고히 믿는단 말이요. 어째서 믿는가? 그것은 그가 조국의 의도와 요구를 자기의 심장으로 체득하고있기때문이요. 조국의 뜻을 심장으로 체득한 사람, 그런 사람은 아무리 어렵고 간고한 처지에 있다 해도 오직 조국이 바라는대로만 사고하고 행동하는 법이요. 그 어떤 절해고도에 있다 해도 조국이 바라는대로 사색할뿐아니라 행동까지 하는 그런 사람이 바로 진정한 애국자고 혁명가가 아니겠소!〉》

덕수는 저도 모르게 신음같기도 하고 비명같기도 한 소리를 터뜨리고말았다. 장군님께서 하신 그 한마디한마디의 말씀이 살점을 에이고 심장을 찢는듯 했기때문이였다. 입을 열기만 하면 당장 울음이 터져나올것 같아 얼른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조국이 바라는대로만 사색하고 행동하는 애국자, 혁명가!)

저절로 숨이 막히면서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새삼스레 자신이 죄스럽고 저주롭기만 했다. 차라리 장군님께서 자기한테 꾸지람을 하시였더라면 이다지 마음이 쓰리고 고통스럽지 않을것 같았다. 그 뜨거운 사랑과 믿음을 그대로 받아안을수 없는 자기의 처지때문에 가슴은 천갈래, 만갈래로 찢기고 또 찢기는것이였다.

(내가 어떻게 조국이 바라는대로 산 애국자고 혁명가란 말인가! 아니, 나야말로 도리여…)

덕수는 그만 털썩 그 자리에 무릎을 꺾고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세차게 머리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아닙니다, 장군님!》

그는 자기자신을 용서할수 없다는것을 느낄 때에만 터뜨리는 그런 처절한 자책과 비탄이 어린 어조로 부르짖었다.

《전 … 장군님께서 믿어주시는 그런 애국자가 못됩니다. 장군님께서 바라시는대로 행동한 혁명가도 아닙니다. 도리여 장군님께서 호소문을 통해 주신 과업대로 종파들이 강령을 삭제하는것도 막아내지 못했을뿐아니라 그놈들을 따라가서는 안된다는걸 동포들에게 똑똑히 알려주지도 못하고있습니다. 죽어도 지켜내야 할 조국의 고지를 놈들에게 빼앗긴 패배자입니다. 벌을 주십시오! 장군님의 뜻을 저버린 이 배은망덕한 놈에게 엄벌을 내리십시오.》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덕수의 두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있었다. 그 눈물은 슬플 때 나오는 눈물이 아니였다. 가슴속에 쌓인 울분을 풀어주는 눈물도, 말 못할 애수와 번민을 덜어주는 그런 눈물도 아니였다. 마음속 갈피갈피에서 한방울한방울씩 떨어지는 그야말로 심장을 비틀어짜서 나오는 피방울같은 눈물이였다. 덕수는 난생처음 그런 눈물을 흘리고있었다.

《그만하십시오.》

덕수를 부축하여 일으켜세운 지영이였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뼈저린 자책과 회오에 몸부림치는 덕수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알수 없었던것이다.

그럴수록 놀랍게 변한 일본현실, 자기가 있던 때와는 너무나도 달라진 재일조선인운동의 실태에 경악을 금할수가 없었다. 이젠 민대부가 공공연히 동포들을 일본혁명의 위력한 세력으로 여기면서 무장투쟁의 선봉에 나설것을 강요하고있었다. 그들은 그 리유로서 일본반동정부가 지금 아시아해방투쟁의 불길이 일본에 파급되는것을 막고 일본을 침략기지로 전환시키며 일본인민들에게 배타적인 민족감정을 고취시키기 위해 혈안이 돼있는 조건에서 그 책동을 누구보다도 소수민족들, 특히 재일조선인들이 앞장서 막아야 한다는것이였다. 최근에 발표한 《민대전국대표자회의》 결정서에는 이렇게 찍혀있었다.

《재일조선인들은 일본혁명의 확고한 동맹군으로서 앞으로 동맹관계를 더욱 긴밀히 해야 한다. 그를 위해 재일동포들에게 일본혁명이 수행되지 않으면 자신의 그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는것을 철저히 인식시킴으로써 모두가 일본의 민족해방민주통일전선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게 할것이다.》

한편 일본반동들은 내외 민주세력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달부터 남조선괴뢰들과 남조선일본회담을 벌려놓고 재일동포들을 탄압, 추방하기 위한 《출입국관리령》을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시키였다.

이 모든 사실들이 지영이에게는 말할수없이 복잡했을뿐아니라 재일동포들앞에 가로놓인 난관치고는 너무나도 크고 험한것들이여서 도무지 이렇다 할 견해가 서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덕수에게 위로의 말을 비칠수가 없는것이였다.

《그러니 앞으로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저도 모르게 새나온 물음이였다. 물음이라기보다 가슴속에 도사리고있는 가실길 없는 불안이였다.

《어떻게 하다니?》

이렇게 되뇌이며 입속으로 뭐라고 웅얼거리는 덕수의 목소리는 마치 먼곳에서 다가오는 천둥소리같았다.

《다시 강령을 채택하고 동포들을 조국의 두리에 뭉쳐세워야지!》

덕수의 대답이 어찌나도 확정적인지 지영은 그 말을 그대로 믿어야 할지 어쩔지 종잡을수 없었다.

《우린 5월에 있게 될 민전6차확대중앙위원회에서 기어이 강령을 다시 채택할 결심이네. 그걸 위해 곧 복간되는 〈해방신문〉을 철저히 우리가 장악하고 위력한 무기로 하자는거네. 신문을 장악해야 동포들을 쟁취할수 있으니까. 신문뿐아니라 통신사도 재건하고 조국의 방침을 해설하는 조선문제연구소도 새로 내올 결심이네. 어쨌든 당장은 공화국사수조항을 강령에 채택하는것, 이것이 최대의 과업이지. 나한테 이걸 하라고 가르치시였고 그걸 관철하라고 일본에 보내신 장군님이신데 그걸 못한다면 내 어떻게 장군님앞에, 조국앞에 머리를 들수 있겠나. 아니, 나한테 목숨이라는게 있어 무엇하겠나 말일세.》

결심이라기보다 어떤 절규를 토해놓는듯 한 덕수의 표정은 분노와 증오와 격정이 한데 합쳐져 무시무시한감을 자아냈다.

《쏴-》

훈훈한 봄바람이 갈기를 세운 파도를 몰고와 온 백사장을 하얗게 뒤덮었다. 지영이에게는 그 파도가 마치 지금 덕수의 가슴속에서 사품치는 격랑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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