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 회)

제 4 장

3

 

덕수는 안타까운 눈길로 재호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말 좀 하자구.》

태길이 어머니가 방에서 나가기 바쁘게 덕수는 재호앞으로 다가앉았다.

《정신이 나가도 분수가 있지 민대파들하고 같이 춤을 추더니 이젠 뼈다귀도 없는 허수아비가 되고말았다는걸 알기나 해? 그게 부끄럽지도 않나 말이야!》

오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재호를 설복하여 다시는 민대파들하고 같이 돌아치지 못하게 하자고 잡도리를 한 덕수였다. 그래서 장소도 언제나 한두사람을 비밀리에 만나군 할 때마다 쓰는 태길이네 집을 택했던것이다.

환갑나이에 가까운 태길이 어머니였으나 덕수를 위해서라면 온갖 성의를 다했다. 덕수가 자기 집에 들리기만 하면 어떻게 해서든 별식을 만들어 대접했고 옷가지들도 깨끗이 빨아 손질해주군 했다. 태길이 역시 덕수가 추방된 다음부터는 아직 누구도 모르는 소식들이며 비밀에 속하는 사실들을 어디서 알아오는지 용케 알아가지고 와서는 덕수에게 대주군 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덕수를 위로하기 위해 동네사람들을 집안에 가득 불러들이고는 바가지장단에 곱새춤을 추면서 《날 좀 보소》를 멋들어지게 부르기까지 했다.

이들 모자의 그런 태도는 마치 자기들에게는 덕수를 위하는것 이상 더 중요하고 기쁜 일은 없는상싶었다.

오늘도 덕수가 무슨 일로 재호를 불렀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태길이 어머니는 무작정 재호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욕마이 봅니더. 어서 올라오이소, 어서요. 우리끼리야 뭘 엔료(사양)할기 있다꼬.》

누구든 덕수와 함께 온 사람은 다 《욕마이 보는》 사람이고 《엔료》해서는 안될 사람이라고 하는 그였다.

《오늘은 제발 좀 육꾸리(천천히)하고 가이소, 예? 내 오늘은 뜨끈뜨끈한 보신탕을 대접할랍니더. 쇠주도 한잔 받치지요.》

《고맙습니다, 어머니!》

덕수가 어째서 자기를 따로 불렀는지 짐작되는바가 없지 않았으나 재호는 히죽이 웃으며 대꾸했다. 오히려 그런 불안을 느끼는것이여서 더 너스레를 떨게 되는지 몰랐다.

《그런데 어머니! 〈천천히〉라는 우리 말이 있는데 왜 하필 〈육꾸리〉라고 하십니까. 〈엔료〉라 하지 말고 〈사양말고〉하면 얼마나 듣기 좋습니까.》

《아이고 우짜꼬.》

어머니는 입을 싸쥐였다.

《그렇잖아도 내 우리 태길이한테 욕마이 먹습니더. 〈벤또〉라 카지 말고 〈점심밥〉이라케라, 〈오까네〉라 카지 말고 〈돈〉이라케라. 그런데 그놈의 〈구세〉(버릇)가 어디 없어집니껴. 하여간 내 또 〈마께루〉(졌다)했니더!》

그 말에 재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동네사람들로 든든히 망을 보게 했으니 안심하고 이야기하라면서 전등불의 스위치까지 돌려주고야 밖으로 나간 어머니였다.

《그래 말해보게. 아직도 민대파들이 무슨짓을 하는지 모른다는건가? 그게 얼마나 엄중한가를 모른다는거야?》

여느때없이 절절한 덕수의 눈빛이며 억양으로 하여 재호는 자못 긴장해있었다. 이런 때일수록 바싹 정신을 차려야지 그렇지 않다간 어떤 졸경을 치게 될지 모른다는것을 잘 아는 그였다.

《말해두지만 그자들은 지금 우리 동포들을 조국이 아니라 일본을 위해 싸우게 하자는거야. 일본혁명의 돌격대로 내세우자는거란 말이네. 그런데 바로 그 망동의 맨 앞장에 누가 서있나? 누가 춤을 추는가 말이야!》

재호는 무슨 말을 하려고 머리를 들었으나 덕수의 시선을 대하고는 얼른 고개를 비틀었다.

《하는짓들만 보라구. 피땀으로 세운 우리 학교를 팔아먹지 않나, 상공인들을 일본의 상공회에 망라시키지 않나, 거기다가 이번엔 일본공산당이 새 과업을 내놓으니 덩달아서 민전강령까지 고치려구 해? 또 뭐 무장투쟁? 이거야말로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는게 아니구 뭔가!》

《그러니까 형님은…》

재호는 아무래도 저로서는 리해가 되지 않는다는듯 의혹이 어린 어조로 물었다.

《우리가 미국놈이나 왜놈들하고 싸워서는 안된다는겁니껴? 미국놈들이 우리 나라를 먹으려 하고 일본당국이 우리를 못살게 구는데도 가만히 팔짱을 끼고있어야 하나말입니더.》

성미가 급한 사람이 그런것처럼 재호도 일단 말을 시작하자 어느새 그 말들이 나타내는 내용에 따라 감정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두눈이 꼿꼿해진 그는 이마살을 찌프린채 덕수를 면바로 주시했다.

《난 교육권이나 생활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더. 그러나 조방대활동,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우리의 투쟁에서는 잘못이 없다는겁니다. 도대체 뭐가 잘못이라는겁니껴?》

《뭐가 잘못이냐구?》

덕수는 어처구니없는 눈길로 재호를 바라보았다. 그 잘못에 대해 말하자니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가 하는 궁리에 앞서 그처럼 명백한것을 일일이 납득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 사실자체로 하여 더 부아가 치밀었다. 그러나 그는 애써 그런 감정을 누르지 않을수 없었다.

인간적으로는 누구보다도 가까운 재호가 일본공산당의 허수아비로 되여가는것도 안타까운 일이였지만 보다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재호처럼 점점 더 민대파의 영향을 받는다는 엄연한 사실이 더욱 가슴을 타게 했다. 민대파의 지시를 맹목적으로 받아물고 일본공산당로선에 추종하는 사람들을 돌려세우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재호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더우기는 재호만은 자기가 책임지고 돌려세우겠다고 동지들앞에서 했던 약속이 창황중에도 리성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자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한마디한마디에 힘을 주어가며 말했다.

《처음 조방대가 조직되였을 때는 그래도 일을 제대로 했지. 남조선으로의 무기수송을 저지시키기 위한 투쟁이나 군수물자공급을 반대하는 투쟁 그리고 평화서명운동 등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조방대가 무엇을 하나? 조국을 위한 투쟁을 하나, 동포들을 위한 일을 하는가 말이야! 천만에! 바로 일본공산당이 들고나온 무장투쟁에 나서려는거지. 일본의 권력타도에 앞장서려는거란 말이네. 그래 이게 조국을 위한 일이고 동포들을 위한 일인가? 아-니, 그건 조금도 조국이나 동포들을 위한 일이 아닐뿐더러 일본내정에 대한 간섭이고 그것으로 해서 결국은 동포들이 탄압받게 하는것외에 아무것도 아니야. 바로 그래서 얼마전 조국에서 보내온 조국전선호소문에도 동포들은 오직 공화국을 위해서만 투쟁해야 한다고 강조돼있는거야!》

덕수는 심중한 눈빛으로 재호를 지켜보았다.

《그런데도 뭐? 때에 따라 강령을 삭제할수도 있다구? 그게 뭔지 아나? 그게 바로 조국을 배반하는거야. 정세가 좋을 때는 조국만세를 부르다가도 정세가 나빠지면 조국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배신행위란 말이야! 다시한번 말하지만 우리한텐 오직 조국의 뜻을 받들고 나가는 길뿐이야. 그게 바로 우리의 유일한 목적이고 우리자신을 위한 일이란 말이야!》

《…》

재호는 침묵에 잠겼다. 덕수와 마주할 때면 일어나군 하는 현상이 나타났던것이다. 그것은 열을 올려 떠들다가도 덕수의 말을 듣느라면 은연중 거기에 빠져들게 되는것이였다. 마치 물밖에서 마음껏 활개짓을 하던 사람이 강물에 들어갔을 때와 같이 몸이 자유롭지 못하다가 점점 드센 물살에 밀리우게 되는 현상이랄가, 어쨌든 덕수와 마주하면 그처럼 확고하던 자기의 주장도 무력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곧 그런 자신을 다잡았다. 아니, 마음을 다잡게 하는 목소리가 뇌리를 쳤던것이다.

《우린 한시도 자신이 새 력사를 창조하는 선봉투사라는것을 잊어서는 안되오. 그러자면 세상을 새로운 안목으로 봐야 하오. 자- 눈을 뜨고 똑똑히 보시오. 이 일본땅이 또 온 세계가 지금 어떤 혁명의 폭풍우속에 휩싸여있는가를!》

원철의 목소리였다.

재호는 고개를 숙인채 띠염띠염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난 그저 형님이 이젠 눈을 좀 더 크게 떴으면 하는겁니더. 그리고…》

자기를 흘끔 바라보는 재호의 태도에서 뭔가 하기 힘든 말을 하련다는것을 덕수는 직감했다.

《지금 사람들이 형님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압니껴?》

《사람들이 뭐라는지?》

덕수는 재호의 말을 곱씹었다. 그도 일부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편협한 주관주의자, 무서운 독선주의자…

그러나 그는 자기를 그렇게 보는 민대파들이야말로 도리여 한쪽눈으로 세상을 내다보는 청맹과니 아니, 절름발이가 아닐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어느 책에선가 절름발이에 대해 쓴 글을 본 기억이 났다. 두다리는 멀쩡하지만 정신이 절름발이가 돼버린 사람에 대한 글이였다. 진짜절름발이는 저는것은 자기라고 인정하지만 이 절름발이정신을 가진 사람은 온전한건 자기 하나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다 전다고 믿는다. 그 확신이 얼마나 철저한지 아무리 사실대로 말해준다고 해도 도리여 그 사실을 부정하기만 한다. 때문에 진짜절름발이한테는 동정이 가지만 절름발이정신을 가진 사람에게는 참을수없이 화가 나고 증오가 솟구친다는 이야기다.

정말 화가 났다. 무슨 말로 어떻게 납득시켜야 할지 알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자길 이젠 구원하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인간으로 치부하는데는 견딜수가 없었다.

《형님! 이걸 한번 생각해보시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재호는 손바닥을 펴보이며 말했다.

《만약 민대부가 하는 일이 옳지 않다면 어째서 동포들이 호응하겠습니껴. 이젠 동포들도 민대부의 지시를 다 지지해나서고있단 말입니더.》

《지지?》

덕수는 대뜸 재호를 흘겨보았다.

《그게 무슨 지지야! 그건 지지도 아니고 호응도 아니야! 동포들이 아직 민대파들 정체를 모르기때문에 속고있을따름이지. 아니, 너희들 민대파가 혁명적인 미사려구로 동포들을 속이고있단 말이야!》

《속이다니요? 형님도 참!》

어이가 없다는듯이 재호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제발 내 말 좀 들어주시우. 이젠 세상도 달라지고 사람도 달라졌단 말입니더. 우리가 하는 일이 원철이나 민대부의 지시가 아니라 중국에 있는 당수뇌부의 지시, 도꾸다의 지시라는걸 사람들은 다 안단 말이요. 그리고 도꾸다가 혼자 그런 결심을 한게 아니라 중국당이나 쏘련당과의 련계밑에 내린 결론이라는걸 알아요. 일본공산당의 새 강령은 물론 무장투쟁로선도 그렇게 작성되였다는걸 일본사람들은 말할것도 없고 우리 동포들도 다 안단 말입니더. 온 세상이 다 지지하는걸 글쎄 형님이 어떻게 막는단 말입니껴. 어림도 없습니더. 안됩니더, 안돼요. 그러니 괜히 그러지 말고…》

《뭐라구?》

덕수는 벼락같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자리를 차고일어났다. 무작정 재호의 멱살을 움켜쥔 그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또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수 없었다. 한쪽볼을 싸쥔 재호가 눈을 흡뜨고 쳐다볼 때에야 자기가 그의 뺨을 후려쳤다는것을 알았다.

《뭐가 어째? 어디 다시한번 말해라!》

이번에는 정갱이라도 부러뜨릴 기세로 재호를 쏘아본 덕수였으나 어쩐지 마음은 무거웠다. 어떤 일이 있어도 돌려세우려고 했던 재호에게 그런 행동을 했다는데서만이 아니였다. 자기의 그런 행동이 마치 자기 마음속에 도사리고있는 어떤 불안, 정체를 파악할수 없는것으로 하여 점점 더 커지기만 하는 불안에 대한 객기처럼 느껴져서였고 앞으로 닥쳐올 상서롭지 못한 일에 대한 불안처럼 여겨져 더욱 불쾌한 기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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