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 회)

제 4 장

1

 

우아한 해안미와 수려한 산악미로 하여 일본의 명승지치고도 첫째가는 관광지로 꼽히고있는 이즈반도의 아지로산정에는 아담한 려관 한채가 자리잡고있었다. 그 려관집 창밖으로는 멀리 백설을 이고있는 삿갓모양의 후지산의 설경과 아따미해안에서 기여오르기 시작한 우불구불한 차길이 한눈에 빤히 내려다보이였다. 그 반대편인 태평양이 환히 펼쳐져있는 사가미만쪽에서는 크고작은 섬들이 푸른 바다우에 점점이 떠있어 려관방안에서 좌우량쪽을 바라보느라면 마치 황홀한 절경을 그린 한폭의 풍경화에 둘러싸여있는듯 한 기분이였다.

그러나 방안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 하나 그런 풍치에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두 방사이를 가로지른 미닫이를 터뜨려 옹근 누비돗자리 열여섯조의 널직한 방안에 근 열댓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둘러앉아있었지만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분위기가 팽팽한지 막 살벌한 기운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런 숨막히는 분위기로 하여 방안에 있는 당자들은 물론 방안을 기웃거리던 려관집 번대머리주인까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려관을 통채로 내준데다가 고객들도 모두가 풍채가 좋은 점잖은 사람들이여서 오늘은 한밑천 톡톡히 불구게 되였다고 속으로 쾌재를 올렸는데 웬걸 처음부터 실망에 잠기지 않을수 없었다.

손님들이 방을 차지하기 바쁘게 그중 곱게 생긴 녀급들을 골라 차잔과 오시보리(젖은 수건)를 날라가게 했는데도 누구 하나 녀급을 옆에 붙이지 않았거니와 지어는 술이나 료리를 청하지도 않고 서로 마주 노려보기만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그러니 무슨 담판을 하러 왔나? 바로 저사람이 오야붕(우두머리)인가? 두툼한 입술이며 고집스런 생김새가 꼭 오야붕같군그래! 아무튼 빨리 결판을 보고 주안상이나 청했으면 좋으련만…)

사실 방안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분노에 휩싸여 마주 쏘아보고있었고 그가 오야붕이라고 점찍은 사람은 바로 한덕수였다.

오늘모임은 며칠후부터 있게 되는 민전 2차전체대회를 앞두고 원철이가 조직한 민대파와 민전일군들의 련합모임이였다. 대회를 앞두고는 의례히 가지군 하는 모임이였으나 오늘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보기는 처음이였다. 민전결성후 처음 있게 되는 전체대회라는데도 있었지만 합의를 봐야 할 내용이 그만치 중요했던것이다. 합의내용이란 최근 일본공산당이 새롭게 제시한 강령에 따라 민전도 강령을 개정하자는것인데 구체적으로는 민전강령 1조를 삭제하자는것이였다.

원철은 이미 민대부에서 토론된 문제인데다가 몇몇 민전일군들과도 사전토의가 있었기때문에 합의여부에 대해서는 조금도 어렵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 모임을 계기로 민전을 일본공산당주위에 더욱 결속함으로써 재일조선인운동을 자기의 의도대로 이끌수 있다는 확신까지 가지고있었다. 그런 믿음으로 하여 그는 오늘 당재정까지 내여 아지로려관을 통채로 빌렸고 모임을 필하고는 화락한 피로연까지 열 계획이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한덕수가 뛰여들줄이야!

조련이 해산된 다음부터 특히는 자기들 민대부가 재일조선인운동을 주관하면서부터는 될수록 모임때에도 덕수를 청하지 않았다. 그래도 꼭꼭 참가하군 하는 그였지만 이번만은 모임의 성격으로 보아 그가 있으면 복잡해지리라 여겨 각별히 신경을 썼었다. 그런데도 온걸 보면 분명 누군가 그에게 알려준것이 틀림없었다.

원철은 곧 사람들속에 있는 김훈과 리심철, 윤덕곤을 뻣뻣한 눈길로 노려보았다. 방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민대파의 핵심들이 아니면 적극적인 지지자, 동정자들이였으나 유독 세사람만은 처음부터 한덕수와 같은 완고한 조국파였던것이다.

어지간히 불쾌했으나 그는 자기의 불만을 일소에 붙였다. 설사 덕수가 이제 와서 강령삭제를 반대한다 해도 그것은 이미 결정된것이나 다름없는 주지의 사실이기때문이였다. 그리고 이젠 재일조선인운동의 주도권을 확고히 자기가 틀어쥐고있다는 확신은 여기까지 수고로이 찾아온 덕수에게 그 엄연한 사실을 명백히 인식시켜줄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도 들게 했다.

(어디 모임에 참가해보라지! 그러면 아직도 현실을 제대로 리해하지 못하고 완강하게 고집하는 그 고루한 민족주의가 어떤것인가 하는것을 똑똑히 알게 될테니까. 만약 이번에도 제 주장을 고집한다면 그땐 자신의 고립을 더욱 촉구하는것은 물론 자기를 스스로 막다른 궁지에 몰아넣는 비참한 꼴이 되고말테니까.)

이런 생각이 들자 원철은 오늘 삭제를 결정하려고 하는 민전강령의 작성자가 바로 덕수라는것이 상기되면서 그처럼 자존심이 강한 그가 자기가 만들어놓은 초석이 허물어지는것을 어떤 표정으로 바라볼가 하는 호기심이 동하기도 했다.

《그럼 모임을 시작합시다.》

원철은 태연한 기색을 지은채 입을 열었다.

《오늘 토론할 문제는 우리가 이미부터 론의해오던 민전강령을 정세발전의 요구에 맞게 개정하자는것입니다. 말하자면 민전2전대회에서 강령 1조에 대한 삭제를 심의결정하자는데 대해 합의보자는것입니다.》

조금도 꺼리낌없이 문제의 본질로 육박해들어간 원철은 어디 할말이 있으면 해보라는듯이 여유작작한 표정으로 덕수를 바라보았다.

《내 먼저 하나 물어보겠는데…》

덕수 역시 기다렸다는듯이 꼿꼿한 시선으로 원철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우선 여기 있는 사람들중 자기 조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닌 사람이 누구요? 명백히 말해두지만 강령 1조에는 민전이 자기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사수방위한다는것이 밝혀져있소. 재일조선인운동의 총적방향과 함께 재일동포들의 지위와 사명이 명시되여있단 말이요.》

필경 처음부터 완력적으로 나올줄 알았던 덕수가 의외에도 목소리를 낮추고 사리를 따지고드는 바람에 원철은 은근히 긴장되였다.

《그런데도 그 1조를 삭제하자는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 조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니라는것이며 따라서 자기는 조선사람이 아니라는것이요. 그래, 여기 있는 사람들은 이젠 다들 공화국공민이기를 그만두겠다는거요? 국적을 일본사람이나 제3국사람으로 바꾸었는가 말이요?》

《…》

방안은 갑자기 물을 뿌린듯 조용해졌다. 너도나도 정통을 찌르는 덕수의 말에 모두들 화석처럼 굳어져버렸다.

원철에게는 그런 분위기가 더없이 불만스러웠다. 그것은 자기의 급소를 노리고 용의주도하게 달려드는 덕수의 힘에 대한 위구로부터 오는 불만인 동시에 이젠 운동권에 더는 개입하지 못하리라고 여겨온 덕수에 대한 자기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해서 느끼게 되는 불만이였다. 그런 불만을 느끼면 느낄수록 이번에는 덕수가 한마디만 해도 소나기같은 공격을 퍼부을줄 알았던 자기의 측근, 자기가 그처럼 믿어마지않는 민대파성원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올라 견딜수 없었다.

그는 죽지를 처뜨리고 후줄근해있는 자기의 가소로운 동료들을 아니꼬운 눈길로 일별하고나서 입을 열었다.

《이것 보시오. 여기 있는 사람들중 누가 공화국공민이 아니란 말이요. 공화국공민이기때문에 더 조국을 위해 싸우자는거요. 오늘의 일본정세는 물론 엄혹한 조국의 정세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오? 그것은 무엇보다 혁명의 승리를 위해 포섭할수 있는 모든 력량을 다 민전에 망라할것을 요구하고있소. 민전은 말그대로 광범한 조직들의 통일전선체요. 조련과는 성격이 다르단 말이요. 그런데도 우리가 이 새로운 시대적인 요구를 무시하고 조련때와 같은 강령을 내세우고 일면적으로 나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조국앞에 죄를 짓는것이 아니고 뭐요? 오늘의 정세는 우선 우리들에게 진정한 애국이 무엇인가를 알것부터 요구하고있단 말이요.》

《애국!》

이렇게 되뇌이는 덕수의 눈에서는 퍼런 불꽃이 일었다.

《그래, 조국이 가장 준엄한 시련을 겪고있는 이때, 그 어느때보다도 공화국을 사수하기 위해 목숨바쳐 싸워야 할 이 시각에 공화국사수조항을 삭제하는것도 애국이요? 특히 얼마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서는 우리들이 조국의 두리에 뭉쳐 조국의 통일독립을 위해 한사람같이 떨쳐나설것을 호소하였소. 그것이 바로 조국이 우리에게 바라는것이요. 그런데 강령을 삭제해? 그것이야말로 매국이요, 매국노가 하는짓이란 말이요!》

《뭐요?》

원철의 거대한 체구가 부르르 떨렸다. 동시에 덕수를 노려보는 두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는데 당장 그 눈으로 체내에 몽켜있던 피가 일시에 뿜어져나오려는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곧 입귀를 실룩해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흔히 곤경에 처하게 될 때마다 나타내군 하는 버릇이였다. 그는 그 미소를 통해 덕수가 하는 말이 자기에게는 아무런 작용도 일으키지 않으며 따라서 다른 사람들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는것을 보여주려는것이였다. 또 실지 그럴만 한 근거가 없는것도 아니였다.

《이것 보시오.》

원철은 다시금 거드름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자꾸 조국, 조국하는데 자기만 조국을 위한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그러면서도 그는 속으로 이발을 부드득 갈았다.

(어디 보자! 내 다시는 네가 운동권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할테다!)

원철이가 덕수에 대해 이렇게 벼르고있었다면 덕수는 덕수대로 어떻게 해야 이자들의 배신적인 책동을 낱낱이 발가놓고 더는 강령문제를 들고나오지 못하게 할것인가를 따져보고있었다.

오늘모임에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민전서기장인 리계백을 통해 이자들이 강령삭제를 위한 모의를 한다는것을 알게 된 덕수는 곧 동료들과 마주앉았다. 그들은 조련해산후부터 시종일관 뜻을 같이해오는 민전의장들인 김훈, 윤덕곤과 리심철, 윤봉구, 리진규 그리고 학우서방 사장인 김상기, 도꾜중고 교장 림광철, 《해방신문》편집국장이였던 최은한이였다.

진지하게 토론한 결과 우선 어떤 일이 있어도 민대파들이 가지는 오늘모임부터 파탄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것을 막느냐, 막지 못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재일조선인운동이 제길로 가느냐, 못 가느냐 하는것이 결정되고 또 이것을 저지시키는것만이 동포들을 묶어세워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떨쳐나서라는 조국전선호소문을 관철하는것이였다. 아니, 그 호소문자체가 민대파들의 책동을 저지파탄시키라는 조국의 확고한 뜻이였다.

특히 강령 1조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직접 재일조선인운동이 나갈 길을 밝혀주신 근본지침일뿐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틀어쥐고나가야 할 생명선이였다. 그 1조에 60만동포들의 운명이 달려있고 희망과 미래가 달려있었다. 만약 이것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동포들이 조국을 잃게 될뿐아니라 앞으로 어떤 처지에 굴러떨어지게 될지 상상하기조차 어렵게 된다.

덕수는 강령을 삭제하려는 민대파들의 목적이 바로 동포들을 조국에서 떼내여 저들의 요구대로 끌고가려는데 있다는것을 밝히고나서 자기는 민전의장들과 함께 놈들의 오늘모임을 파탄시키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각 지방으로 나가 거기에 있는 중앙위원들을 해설설복할 과업을 주었다. 그렇게 해야 하는것은 강령문제가 최종적으로는 민전2차대회에서 중앙위원들의 가결에 따라 결정되기때문이였다.

(절대로 안된다! 그 강령이 어떤것이라고 너희들이 감히… 삭제는커녕 글 한자, 토 하나도 마음대로 다치지 못하게 할테다!)

마음을 도사린 덕수는 로골적인 질시가 어린 눈길로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 이젠 민족의 얼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수 없이 된 민대파의 주역들을 한사람한사람 겨누어보았다.

김충구- 민대부 도꾜지방책임자로서 일관하게 일본공산당로선에 추종해온 원철의 하수인. 해방후 한때 민청활동을 한다고 돌아치다가 감옥에 갇힌것이 계기가 되여 그때부터 그만 일본공산당의 허수아비가 된 사대주의자.

정동은- 워낙 조련시기부터 조직에 대한 불만을 품어오다가 조련이 해산되자 이제부터야말로 본격적인 재일조선인운동이 시작되였다고 떠들어대면서 학교페쇄령때에는 제일먼저 우리 학교를 팔아먹은 놈.

리종훈- 《건동》에서 《민단》으로, 《민단》에서 다시 《통일동지회》로 뻗어나갔다가 이번에 민전에 기여들어 의장자리까지 타고앉은 정치사기군.

리종훈에게서 덕수가 더 못마땅해한것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누구에게나 갑삭거리면서 비위를 맞추며 돌아가는 행동거지였다. 그가 이쪽저쪽을 돌아보며 헤헤거릴 땐 속에서 구역질이 나면서 그 갑삭거리는 이마때기를 한대 쥐여박아주고싶기까지 했다.

리종훈의 옆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시선이 미치자 덕수는 저절로 미간이 찌프러졌다. 그것은 그에 대한 불만과 함께 어떤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는 정신적인 고통때문이였다. 그는 바로 인간적으로는 자기와 그중 가까우면서도 사업에서는 어느덧 딴사람처럼 인연이 멀어진 조방대의 책임자 로재호였다.

덕수는 그가 민대파에 속해있지만 다른자들처럼 어떤 야심에서 공명을 바라거나 일시적인 충동에서가 아니라 제딴에는 진정으로 조국과 동포들을 위해 일한다고 믿어마지않고있다는것을 모르지 않았다.

(저 재호만은 어떻게든 돌려세워야겠는데…)

덕수는 못내 안타까운 눈길로 재호를 지켜보았다.

되돌이

우리민족끼리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E-mail) : urimanager@silibank.com 홈페지내용에 관한 문의(E-mail) : uriminzok@silibank.com
Copyright © 2003 - 2013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gotop
기사종합
 
도서, 잡지
 
영화, 음악
 
독자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