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8 회)
제 3 장
4
박룡의 입북동기는 함께 북으로 들어온 여러 남조선정객들과는 전혀 다르다고 할수 있었다.
김규식, 조소앙, 엄항섭, 안재홍 등 수십여명의 남조선인사들은 4월남북련석회의를 계기로 남북협상파로부터 련공애국세력, 나아가서는 평화통일세력으로서의 일관한 정치적지조로 하여 북으로 가는 길을 단행했지만 박룡의 경우에는 그래서라기보다 남조선현실에 대한 울분과 함께 일신상에 들이닥친 자가당착의 혼란이 어마지두 북으로 가도록 결심케 했던것이다.
다른 사람들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자기의 과거지사로 하여 북에 가면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될가 하는 우려가 없은것은 아니였다. 하지만 치떨리게 가증스러운 남조선현실에 대한 참을수 없는 분노는 그 우려를 압도해버렸다. 오죽하면 발목을 잡고 매달리는 처와 네살난 아들까지 뿌리치고 미아리고개를 넘었겠는가!
그는 안해에게 말했다.
《당신이 정 못 가겠다면 할수 없지. 그래도 난 가야겠소. 당신이 말하는것처럼 내 북에 가서 효수를 당한다 해도 이 더러운 시궁창에 더는 배겨있을수 없단 말이요. 여기서 코를 박고 사느니 차라리 단두대에 매달리는편이 낫지!》
그가 이렇게까지 남조선현실에 환멸을 느끼게 된 동기는 무엇보다도 자기가 기둥으로 의지하여 살자고 했던 김구에 대한 리승만역도의 비렬한 암살행위였다.
사실 김구의 존재는 그에게 있어서 온갖 불안과 동요의 바다우에서 자기를 지켜주는 의지의 섬이였고 믿음의 보금자리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보금자리에 깃을 펴고 뒤늦게나마 갱생해보려던 자기의 간절한 꿈을 놈들은 산산이 짓이겨버렸던것이다.
김구가 리승만이 파견한 자객의 총탄에 맞아 절명하는 날 박룡이도 바로 그 경교장에 있었다.
아래층에서 구비서와 함께 북에서 결성되고있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있는데 군복을 입은 한 소위가 백범을 만나러 왔다고 했다. 작달막한 키에 몸은 체소했으나 얼핏 보기에도 몹시 표표하게 생긴 젊은이였다.
《무엇때문에 선생을 만나자는거요?》
《군대내에 있는 한독당원들의 동향에 대해 보고드리자고 합니다.》
그의 당원증을 가지고 백범에게 올라갔다가 내려온 구비서가 면회가 수락되였다는것을 알리자 그는 자기의 군모를 맡기면서 한가지 청이 있다고 했다.
《이 꽃을 백범선생께 선물로 드리고싶은데요.》
자기가 가지고온 다리아꽃묶음을 내미는 그의 얼굴에는 긴장한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어줍은 미소가 어려있었다.
《그건 안되오.》
구비서는 단마디로 잘라맸다.
《선생은 꽃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더 좋아하지 않는건 선물을 들고다니는 사람자체요. 그러니 이건 여기에 보관해두었다가 갈 때 가지고가시오.》
《그래도 이건 좀 다른겁니다. 이 꽃병을 보십시오.》
꽃병에 눈길이 간 박룡은 어리둥절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은 흔히 있는 유리나 사기로 된것이 아니라 누런 황동색포탄깍지를 품들여 가공한것이였다.
《일선당원장병들이 올리는 충정으로 여기고 받아주셨으면 해서 그럽니다.》
《안된다지 않소!》
원래 장교출신인데다 유도교관의 경력까지 있는 구자풍은 한번 한 말은 다시 되풀이하지 않는 사람이였다.
할수없이 꽃병을 비서실에 맡겨놓은 안두희가 3층으로 올라간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다. 갑자기 웃층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뒤이어 육중한 물체가 부딪치는 둔중한 소리도 들려왔다.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구비서와 함께 3층으로 올라간 박룡은 그만 소스라치고말았다. 누비돗자리방바닥에 한팔을 짚은 백범이 비스듬히 벽에 기대여있었다. 두눈을 감고 입은 꾹 다문채였다.
《백범!》
와락 그에게로 달려들어 어깨를 흔든 순간 백범의 입이 흠칫하는가싶더니 그안에서 검붉은 피가 왈칵 쏟아져나왔다. 가슴을 만져보니 벌써 심장은 고동을 멈추었고 체온도 식어가고있었다. 입과 가슴과 복부 세곳에 치명상을 입고있었다.
《개-놈의 새끼!》
벼락같은 소리를 지른 박룡이 눈에 불을 달고 포병소위를 찾았으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땐 벌써 구비서가 계단뒤에 숨어있던 놈을 찾아내여 도리깨 휘두르듯 땅바닥에 태질하고있었다.
결국 그놈이 가지고온 포탄깍지꽃병은 자기가 백범에게 쏘아댈 총탄세례의 전주곡이였던것이다.
(흉악한 놈!)
분노의 화살은 대번에 리승만에게로 겨누어졌다. 4월남북련석회의 이후 백범이 남조선인민들의 지지를 받게 되고 그가 주도하는 남북협상파세력들이 점점 련공으로 기울어지게 되자 백범을 살해할 흉계를 꾸민것이 그 늙다리악마라는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였다.
(어디 보자! 내 결코 네놈을 가만두지 않을테다!)
그러지 않아도 해방직후 자기를 《국무위원》으로 슬쩍 꼬여놓고 뒤에서는 정한경을 일본에 파견하여 《민단》을 가로타고앉게 했을 때부터 리승만에 대해서는 이를 갈던 박룡이였다. 그런 자기가 서울에 와 김구를 따라나서자 이번에는 거기에서 떼내기 위해 《보건사회부》의 고문자리로 회유하려들더니 이젠 백범까지 무참히 살해한것이였다.
(명심해라! 《천황》대신 이번엔 네놈이다! 일생을 테로로 살아왔지만 아직 원흉을 처단하지 못한 원한을 그대로 가슴에 품고있는 이 박룡이 이제부터는 그 필생의 유한을 네놈한테 쏟을테다!)
그날 저녁 효창공원을 찾아간 그는 공원중턱에 나란히 솟아있는 세개의 봉분앞으로 다가갔다. 먼저 간 동료들의 무덤이였다. 상해림정시기 김구의 지시를 받고 《천황》과 군국주의거두들을 처단하려다가 체포되여 일본에 끌려와 사형당한 순국렬사 윤봉길, 리봉창, 백정기의 묘였다. 바로 이들의 묘지 웃자리에 백범의 유해를 안치하려는것이였다.
해방직후 김구의 부탁을 받고 일본 각지에 널려있는 이들의 묘를 찾아 서울로 이관하던 일이 어제같은데 오늘은 그들옆에 백범을 또다시 묻게 될줄이야! 박룡은 가슴이 터지는것 같았다.
《백범!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라면 너무나도 허무하지 않소. 민족의 독립을 바란 윤봉길, 리봉창, 백정기렬사들이 왜놈에게 희생되고 나라의 통일을 념원한 백범이 리승만한테 잘못되였으니 과연 우리가 갈길은 어디란 말이요. 도대체 우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말이요. 말해주오, 백범!》
박룡은 가슴을 치며 오열을 터뜨렸다. 그러나 울음을 씹어삼킨 그는 곧 이발을 사려물었다.
《하지만 믿어주오. 백범을 의지하고 살아가던 이 박룡이 백범의 원쑤를 갚아 국민의 원한을 씻는것으로써 의리를 지키겠다는걸 믿어주오. 참에 살고 의에 죽으라는것이 진생의사의 철리이지만 비록 참에는 살지 못했다 해도 의에는 죽을 결심이라는걸 부디 믿어주오. 그리하여 어제는 렬사들이 갔고 오늘은 백범이 간 길을 래일은 나도 따르겠으니 우리 그때 서로 만나 생시의 상혼을 씻어보잔 말이요.》
장례때였다.
장례를 《국장》으로 할데 대한 《정부》의 제의를 단호히 뿌리치고 직접 김구의 국민장위원장이 된 남북협상파세력의 거두인 사회당 당수 조소앙이 두루마기자락을 여미며 장의위원들앞에 나섰다.
《내 여러분들께 한가지 소식을 알릴가 하오. 방금 평양에서 들어온 소식이요.》
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리고있었다.
《여러분들도 아다싶이 지금 평양에서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가 성황리에 개최되고있소. 그런데 회의를 지도하시던 김일성장군님께서는 김구선생에 대한 비보를 받으시자 더없이 가슴아파하시면서 백범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남북협상정신을 귀감으로 삼아 온 겨레가 조국통일을 위해 더욱 힘차게 떨쳐나서자고, 그게 바로 백범선생의 생전의 뜻이 아니겠느냐고 호소하시였다오. 그러시고는 회의일정을 뒤로 미루더라도 김구선생에 대한 조의부터 표시하자고 하시였소.》
《…》
모두들 숭엄한 감정에 휩싸였다.
《내가 이 말을 하는건 지난해 남북련석회의때 김일성장군님을 직접 만나뵈온 사람이래서가 아니요. 또 백범의 국민장을 주관하는 사람이래서도 아니요. 다만 국민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것을 우리모두가 심심히 새겨보고 어느쪽이 진정한 애국이고 나라의 통일을 바라는가를 스스로 다시한번 확증해주기 바라서요. 그리고 보다 중요한것은 김일성장군님의 말씀대로 생전에 백범이 보여준 련공의 뜻을 귀감으로 삼아 우리모두 통일성업에 더욱 매진하자는것이요.》
《옳소!》
《통일은 련공에 있소!》
《백범의 원한을 통일로 갚읍시다!》
미제와 리승만역도에 대한 증오는 련공과 통일의 의지로 타번졌다.
박룡의 머리속에는 불현듯 련공에 대해서는 한사코 외면한 자기에게 하던 백범의 말이 되새겨졌다.
《자넨 공산주의라면 한사코 고개를 젓네만 이북은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공산주의와는 다르네. 이북의 정치가 달라서 그런지 아니면 공산주의에 대한 견해차이때문인지 그건 아직 나도 모르겠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나도 그걸 북에 가 직접 보고야 깨달았지. 암- 공산주의가 이북에서 실시되는 그런 정치라는걸 알았다면 내가 왜 반공을 했겠나. 이제부터 우린 반공이 아니라 련공의 길로 나가야 하네. 바로 그 길이 우리 조선이 통일되는 길이고 겨레가 복되는 길이란 말일세!》
그러나 그는 그 말을 새겨볼 여유가 없었다.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리승만에 대한 복수의 일념이 무엇을 따져볼 겨를을 주지 않았던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오로지 자기가 바라는 하나의 열망, 이때까지 그처럼 애타게 바랐으나 실현하지 못한것으로 하여 더더욱 유일무이한 숙망으로 된 그 복수를 위해 심신을 불태웠다.
하지만 그는 그 결심을 단행할수가 없었다. 준비가 부족해서나 기회가 없어서가 아니였다. 조소앙이 극구 만류해나섰기때문이다.
《내가 왜 자네의 마음을 모르겠나. 그렇지만 지금은 제발 마음을 달래여주게. 아니, 참아야 할 때란 말이네. 백범의 피살과 북에서 발표한 평화통일호소문을 계기로 지금 온 이남땅이 얼마나 끓어번지고있나. 이 놀라운 현실을 자네도 보고있겠지? 사실 이런 통일기운은 일찌기 한번도 있어본적이 없었네. 우리는 이 상승기류를 타고 이제 있게 될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단연 우세를 차지할 결심이네. 자신이 있단 말일세! 그래 이런 때 그 늙다리에 대한 복수가 무슨 도움이 되겠나? 그렇게 된다면 놈들은 오히려 그것을 기화로 그렇지 않아도 렬세에 몰린 저들의 처지를 모면하기 위해 〈선거〉고 뭐고 온 나라를 비상사태로 몰아갈거네. 결국 그자들을 도와주는것으로 된단 말일세. 그러니 〈선거〉가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참아야 하네.》
부득불 박룡은 자기의 결심을 뒤로 미루지 않을수 없었다. 그렇다고 조소앙의 말대로 통일파들이 《선거》에서 우세를 차지하리라는 믿음이 있은것은 아니였다. 여당이 쉽사리 눌리우지도 않겠거니와 통일파들에 대한 인민들의 지지가 어느 정도겠는지 하는것도 미타했다.
한데 웬걸, 《선거》에서는 정말 통일세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국회의원》 210석중 과반수가 훨씬 넘는 126석이라는 압도적인 의석을 차지한것이였다. 근 3분의 2에 해당되는 의석이였다. 통일세력립후보자들은 거의다가 당선되는 반면에 리승만의 《대한국민당》이나 김성수의 《민주국민당》은 겨우 스무석도 되나마나했다. 당장 무슨 변화가 일어날것만 같았다. 아니, 일어나지 않을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 변화는 《국회》의 주도권을 장악한 통일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제와 리승만이가 먼저 일으켰다. 《선거》가 있은지 한달도 되지 않아 놈들은 《선거》에서의 참패와 앞으로의 암담한 출로를 바로 이미부터 준비해오던 전쟁을 도발하는것으로써 대답해나섰던것이다. 악착한 리승만이와 흉물스런 미제가 아니고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수 없는 천인공노할 평화에 대한 도전이였다.
전쟁! 사나운 전쟁의 소용돌이속에 휘말려든 박룡은 처음에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안해의 요구대로 당장 보따리를 싸들고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 할지 아니면 통일파들처럼 떳떳이 인민군대를 맞이해야 할지.
오만가지 생각이 밀물과 같이 밀려드는가 하면 썰물처럼 삽시에 사라지기도 했다. 어떤 때는 전에 없던 악몽에 시달릴 때도 있었다. 가슴을 지지누르는 큰 돌이 시시각각으로 무게를 더하는가 하면 캄캄한 굴속에 있는 자기가 출구의 빛이 환히 보이는데도 좀처럼 그리로 갈수 없는 그런 안타까운 꿈이였다.
남진했던 인민군대가 전략적인 일시적후퇴를 하게 되면서부터 그의 생각은 더욱 번거로와졌다. 많은 통일파세력들은 스스럼없이 북으로 들어갈 결심을 내리고 차비를 하는데 그런 모습이 그에게는 더없이 놀라운 한편 부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뭘 우물쭈물한단 말인가? 우리가 이 이남땅에서 살지 못한다는거야 자명한 일이 아닌가!》
조소앙의 권고였으나 박룡은 도리를 저었다.
(당신들은 북에 가면 살지 모르지만 난 북에 가서도 살지 못할 몸이 아니요? 반공일선에서 포악무도하게 날뛴게 언젠데 이제 와서…)
자기 역시 미제와 리승만이 둥지를 틀고있는 남조선에서는 순간도 살고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북으로 발을 들여놓는다는것도 주저되였다. 남에서는 죽어도 살기 싫은가 하면 북에 가서도 제대로 살기 어려운 자기의 처지, 조선사람이긴 하지만 남과 북 그 어디에도 발을 붙일수 없는 자신의 기막힌 처지가 그지없이 서글프고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어쨌든 결단을 내려야 하는 운명의 시각이 닥쳐왔음을 그는 통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어떻게 할것인가?)
바로 그때 그의 가슴을 세차게 후려치는것이 있었다. 그것은 김구가 평생 자기 삶의 좌우명으로 삼던 《득수반지 무족기 현애철수장부아》라는 시구절이였다.
나무가지를 붙잡고도 발붙일데가 없을 땐 절벽에서 손을 놓는것이 대장부라는 의미가 새롭게 안겨오면서 그런 백범이 평양을 다녀와서부터는 인생전환을 했던 사실이 상기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불현듯 자기가 김구를 찾아갈 결심을 했을 때 백범의 인생전환에 대해 알려주면서 웨치던 한덕수의 절규가 뇌리를쳤다.
《자, 보게! 백범의 인생전환이 우리한테 무엇을 가르쳐주나. 그것은 바로 백범은 물론 나나 자네 아니, 우리 모든 조선사람들의 희망이나 보람은 오로지 김일성장군님을 따르는 그 길에 있다는것이 아니겠나.》
(가자!)
박룡은 강잉히 부르짖었다.
(희망이나 보람을 위해서라기보다 이 오욕된 땅을 벗어나기 위해 가자! 백범처럼 인생전환은 못한다 해도 죄많은 한생을 총화짓기 위해서라도 북으로 가야 한다! 참에도 살지 못하고 의에도 죽지 못한 나의 비루한 한생을 거기서는 공정하게 심판할것이다. 그 심판이 아무리 준엄하고 가혹하다 해도 머리를 숙이고 공손히 받아들이자! 그것이 바로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니까.…)
이렇게 되여 그는 여러 통일파인사들과 함께 일시적으로 후퇴하는 인민군대를 따라 북으로 들어온것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