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2 회)
제 2 장
10
온 일본땅이 벌컥 뒤집혔다.
《키찌》라는 괴상한 이름으로 불리우는 무시무시한 태풍에 휘말린 일본렬도는 말그대로 일대 수라장으로 변하고말았다. 100년래의 태풍이라고 했다.
단 며칠사이에 수백명의 사상자가 났는가 하면 수천명이 생사여부조차 알길없는 행방불명이 되였고 무려 10여만가옥이 침수되거나 홍수에 흔적도 없이 밀려나버렸다. 이와떼, 미야기현들을 비롯한 벽지의 산간지방은 산사태로 하여 마을이 통채로 매몰되기도 했는데 여태껏 그 피해자가 얼마나 되는지 추산도 못하는 형편이였다. 말그대로 세기 최대의 살인태풍이였다.
어느 지방, 어느 도시 할것없이 다 피해를 받았지만 태풍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휩쓸려든 도꾜는 그야말로 직격탄을 맞은 페허처럼되고말았다. 범람하는 강물우에 나무로 지은 집들이 둥둥 떠다니는가 하면 뿌리채 뽑힌 가로수들이 도로우에 어지러이 나딩굴고있었다. 어떤 지역은 전기의 합선으로 하여 온통 불바다가 되기도 했다.
어느 못된 계집의 이름을 달아 《키찌》라고 한다는 이 태풍을 일본사람들은 한결같이 《기찌가이》(미치광이)라고 불렀다. 보통 녀자도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는데 이런 살인적인 태풍을 몰아온것을 보면 그 《키찌》라는 계집이 필경 악녀라도 보통 악녀가 아니라 입에 칼을 물고 발광하는 미친년이 틀림없다는 뜻이였다.
그러나 태풍계는 자연계만 휩쓴것이 아니였다. 키찌 못지 않는 태풍 아니, 그보다 몇배 더 악착하고 폭압적인 탄압의 선풍이 사회계에도 들이닥친것이다. 그것은 바로 일본반동당국이 아무런 사전통고도 없이 불시에 내린 조련과 민청에 대한 강제해산령과 핵심일군들에 대한 공직추방령이였다.
공화국창건 1돐기념일을 하루 앞둔 바로 오늘 9월 8일 아침 일본당국은 돌연히 법무총재 우에다를 통해 《단체등규정령》위반이라는 명목으로 조련과 산하단체인 민청을 강제로 해산한다는것과 그 단체의 재산까지 몰수한다는것을 공식발포했다. 동시에 조련 및 민청간부 28명을 공직에서 추방한다는것을 밝혔는데 거기에는 한덕수를 비롯한 핵심일군들과 조련고문으로 있는 김운해도 포함되여있었다.
놈들이 이렇게까지 불시에 강도적으로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여서 처음엔 모두 우두망찰 굳어져있기만 했다. 아무리 막 돼먹은 세상이기로서니 이런 변이 어디 있단 말인가! 지난 4월 일본당국이 《단체등규정령》이라는 악법을 만들 때부터 심상찮은 기미를 느끼고 경각성을 높이기는 했으나 이처럼 제1탄을 자기네 단체도 아닌 해외공민단체인 조련을 향해 터뜨릴줄이야! 그러고보면 당초부터 그 법을 만든것이 조련을 해산하기 위한것이 틀림없었다.
《키찌》라는 미친년이 태풍을 몰아왔다면 강제해산령과 공직추방령은 흉악한 미제와 교활한 일제가 암암리에 준비했다가 일시에 휘몰아온것이였다.
일본신문이라는 신문은 하나같이 자연계의 태풍으로부터 사회계의 돌풍, 조련해산령에 대한 기사로 바뀌여졌다.
《극좌익에 대한 첫 포성!- 법무부특별조사국발표》
《조련, 민청에 대한 해산명령- 점령군에 대한 반항에 기인!》
《반민주폭력단체의 해체는 일본평화의 담보!》
이런 특호활자의 제목과 함께 법무부총재의 담화를 그대로 전재한 어용신문들은 1면들에 조련이 《위험》한 단체이며 《폭력》단체라는 내용의 특별기사를 게재하면서 중총청사와 조련조직기구도를 싣는가 하면 덕수를 비롯한 추방령을 내린 사람들의 사진을 받치기도 했다.
놈들이 들고나온 해산리유란것은 작년 4월에 있은 4. 24교육투쟁이 점령군정책을 반대한 《폭력사건》이라는데 있었고 작년 12월에 있은 《민단》일군에 대한 사살사건을 억지로 조련과 결부시킨것이였다. 사살사건으로 말하면 그것은 조련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순전히 《민단》내부의 알륵으로 빚어진것이였고 4. 24교육투쟁 역시 저들조차 그때 조련의 요구를 받아들여 민족교육의 자주성을 인정하는 대신 일본법도 존중한다는 각서를 채택함으로써 쌍방이 합의까지 본것이였다. 더우기 두 사건 다 《단체등규정령》법안이 나오기 훨씬 전에 있은 일이였다.
어느모로 보아도 놈들의 폭거는 조련과 민청을 강제로 해산함으로써 나날이 확대강화되여가는 재일조선인운동을 일거에 압살해치우자는 목적에서 감행된것이였다.
해산통고를 받은 즉시 덕수는 비상회의를 열고 이런 때일수록 당황하거나 용기를 잃어서는 안된다는것을 강조하면서 일군들에게 당장 수행해야 할 과업들을 주었다.
윤덕곤과 림광철에게는 전국에 있는 우리 학교들에서 학생들과 학부형들의 항의집회를 조직하도록 하는 한편 선전국장 윤봉구와 리진규에게는 《해방신문》을 비롯한 일체 출판물들에 놈들의 만행을 단죄하는 기사를 쓰도록 했다. 조련해산을 반대하는 련대운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의장들을 일본의 여러 민주단체들에 파견했고 조직국장 김훈과 서민에게는 국제민청을 비롯한 대외기관들의 항의와 여론을 불러일으킬데 대한 임무를 주었다. 그리고 자기는 그길로 김운해와 함께 히비야에 있는 법무성으로 가기 위해 중총청사를 나섰다.
정문을 나서기 바쁘게 그들은 접수구앞에 운집해있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이고말았다. 해산령에 대한 통고를 듣고 그길로 중총으로 달려온 동포들이였다.
《의장! 이기 무슨 변인기요? 예?》
한 할머니가 우들우들 떠는 손으로 덕수의 팔을 붙잡았다. 태길이 어머니인 박할머니였다. 관동대진재때 남편을 잃고 태길이 하나를 믿고 살아오면서도 조직의 일이라면 누구보다 앞장서군 했다. 특히 덕수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간혹 색다른 음식이 생기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그것을 들고 수임이한테까지 찾아오군 했다.
《해산이라는기 무슨기요? 우릴 다시 일제때처럼 부려먹자는기요, 아이모 그저 입다물고 가마이 살라는기요. 그래 우린 이제부턴 우뚜키 살아야 하는기요, 예? 말 좀 하이소.》
할머니의 주름많은 눈귀에 맺힌 눈물을 보느라니 덕수는 숨이 막혔다.
《개놈의 새끼들!》
뒤에 있던 청년이 주먹을 흔들며 웨쳤다.
《뭐 〈폭력단체〉? 〈위험한 단체〉? 우리가 어째서 그따위 리유로 해산당해야 합니까? 안됩니다. 절대로 그럴수 없습니다. 당장 국회로 가든가 법무성으로 쳐들어갑시다. 아니, 지시만 주십시오. 이제라도 그놈의 법무성을 콱 폭파해치울테니…》
《당장 전국적인 항의투쟁을 벌립시다. 벌려야 합니다!》
윽윽 별러대는 동포들의 기세는 당장이라도 무슨 일을 칠것만 같았다.
《동무들!》
덕수는 될수록 침착하려고 애쓰며 말했다.
《놈들이 내린 해산령을 우린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또 받아들일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우리가 내세운 구호를 더 높이 추켜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놈들을 이기는것으로 됩니다. 알겠습니까? 할머니, 우리도 지금 그때문에 법무성으로 가는 길이니 동포들에게 전해주십시오. 절대로 동요하거나 락심해서는 안된다고 말입니다. 더우기 무모한 행동을 해서 놈들에게 유리한 구실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말입니다.》
덕수는 같이 가겠다는 그들을 겨우 설복하여 떼놓고 법무성으로 향했다.
거리는 태풍의 잔해로 하여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전차마저 다니지 않았지만 그들은 법무성이 자리잡은 마루노우찌빌딩까지 단숨에 들이닿았다.
두툼한 창가림으로 하여 대낮인데도 어둑시그레한 2층 총재비서실에 들어서기 바쁘게 덕수는 해산령을 직접 통고한 법무총재 우에다를 찾았다. 그러나 그들을 맞이한 사람은 작달막한 키에 이마가 반질반질한데다가 눈동자가 쉼없이 재빠르게 움직이는 해말쑥한 부총재였다. 얼마나 머리를 정성들여 손질했는지 단 한오리도 흩어진것이 없이 옆으로 착 달라붙어있는 꼴이 보기만 해도 얄밉기 짝이 없는 상통이였다.
《우린 총재를 찾아왔소.》
《미안하지만 총재님은 부재중입니다.》
《그럼 당신이 책임적인 답변을 할수 있소?》
《직권이 허용하는 한계내의 대답은 드릴수 있겠지요.》
벌써 조련대표들이 들이닥치리라는것을 예견하고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있는듯 한 태도였다.
《좋소! 그럼 우선 우리의 립장을 밝히겠소. 난 조련의장으로서 당신들이 아니, 당신네 총재가 내린 해산령과 추방령을 절대로 받아들일수 없다는것을 알리는바요.》
어떤 경우에도 침착할뿐더러 격분할 때일수록 더 랭정해지는 덕수였으나 분노가 너무나도 지나친 나머지 제대로 말을 이을수가 없었다.
《왜 받아들일수 없는가? 그것은 첫째로 당신들이 적용한 그 법에 우리 조련이 조금도 저촉되지 않기때문이요. 내가 알건대 당신네가 내놓은 〈단체등규정령〉이라는 법은 철저히 군국주의추방과 민주주의발전을 위한 원칙에 따라 제정된것이요. 그렇소, 그렇지 않소?》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얼씬거리기만 하면 활 태워버리기라도 할것 같은 덕수의 눈길에 기가 질린 부총재는 엉겁결에 허리를 굽석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 법을 민주주의적이며 평화애호적인 단체인 우리 조련에 적용시키는거요? 당신네들이 들고나온 해산리유라는것은 어느것 하나도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며 이미 당신네와 합의까지 본것이요. 이것이 해산령을 접수할수 없는 첫째 근거요. 둘째로는…》
부총재는 손에 쥔 수첩에 덕수가 하는 말을 받아쓰면서도 촉기빠른 눈동자로 덕수의 표정이며 옆에 있는 김운해의 기색을 놓치지 않고 살피였다.
《당신들은 우리 일군들에게 공직추방령까지 내렸는데 우리가 도대체 언제 당신네 공직에 있었기에 그런 령을 내리는거요. 우린 자체로 조직을 무었고 자체로 분담을 맡아 일하고있소. 당신네들이 준 공직에서 일해본적도 없거니와 일하지도 않았단 말이요! 그런데도 공직추방을 해? 어불성설도 유만부동이지. 그래, 이게 법을 다루는 법무부에서 하는짓이고 법을 안다는 총재가 하는짓이요?》
정통을 찌르고드는 덕수의 말에 아니, 그보다 더 예리하게 파고드는 덕수의 시선에 아무 대꾸도 못하고있던 부총재는 마주서있기가 어려웠던지 창문쪽으로 돌아서서 창가림을 여는척 했다. 그 어떤 복잡한 정황도 제때에 판단하고 역바르게 처신할 위인같았으나 너무나도 급소를 찔리운 바람에 미처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는듯싶었다.
이번에는 김운해가 나섰다.
그가 먼저 자기 이름을 일본말로 소개하자 대뜸 눈이 둥그래진 부총재는 깍듯이 고개부터 숙이였다.
《아, 소오데스까? 나마에와 마에까라 죤지아게데…》(아- 그렇습니까? 이름은 이미전부터 들었습니다만…)
그의 태도는 자기가 법을 쥐고흔드는 법무부의 부총재이기는 하지만 온 일본이 다 아는 유명한 공산주의자에 대해서는 이렇게 존경을 표시할줄도 아는 신사라는것을 보여주려는것 같았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로 하여 다소나마 마음의 여유를 얻게 된것을 다행스러워하는듯 했다.
김운해는 먼저 법무부가 아무런 통고도 없이 불시에 해산령을 내린것은 이미부터 조련을 탄압하려고 계획하고있었다는것을 실증하는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것을 실례를 들어가며 까밝혔다.
덕수에 비해 키가 한뽐이나 큰데다가 몸집이 호리호리한 김운해는 선비같은 준수한 생김새처럼 목소리도 가늘었다. 감옥살이를 오래 한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그 역시 말이 류창하지 못했을뿐아니라 표정도 다양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몹시 흥분해있었다. 그것은 추방령을 받은 다른 사람들은 다 조련일군들이였으나 자기만은 일본공산당에 적을 두고있었기때문이였다. 해산령을 받은 조련과는 달리 일본공산당의 간부인 그에게 있어서 공직추방령은 곧 당직에서 물러나야 할뿐아니라 그 어떤 활동도 하지 못한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였다. 그래서 더 필사적이 아닐수 없었다.
《알아두오만 나에 대한 추방령은 곧 우리 당에 대한 압력이고 도전이 아닐수 없소. 때문에 우리는 해산명령을 내린 법무총재를 상대로 일본자유법조단 변호사 10명을 소송대리인으로 한 행정소송을 준비하고있소.》
부총재는 잠시 눈살을 쪼프리고있다가 고개를 기우뚱하고나서 입술을 뾰족하게 모아붙였다. 그 모습은 마치 당신들이 아무리 항의를 하고 행정소송을 한대야 이젠 승산이 없다는걸 자기는 알지만 그것을 그대로 내색하면 당신들의 위협에 넘어가지 않는다는것을 눈치채고 더 완력적으로 나올가보아 부러 과장된 기색을 지어보이는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조련측의 청원내용을 총재님께 그대로 전달하지요, 네.》
처음엔 그래도 부총재의 위치에서 체면을 세우고 상대방을 납득시켜보려고 하였으나 케를 보니 그럴 계제가 못되거니와 그럴수도 없다는것을 깨달았는지 그는 이젠 모든것을 총재한테 밀어붙이였다.
《청원? 여보시오! 우린 청원을 하러 온게 아니라 항의를 하고 우리의 립장을 밝히러 왔소!》
덕수의 말에 김운해가 덧붙였다.
《그렇소! 우린 자기의 정당한 립장을 밝히려고 왔소. 우리는 해산령이 취소될 때까지 당신네 부당성을 세계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공산당을 비롯한 민주세력과 련합하여 법무성을 대상으로 하는 전국적인 항의운동을 벌릴 결심이요!》
《취지는 리해됩니다. 그러나 이번 조치가 법무성자체의 결심만 아니라는것을 아셔야… 네, 그래서 총재님도 지금 미군정청에 가계시는데 어떻게 할가요? 미군정이나 총재님께 련락해드릴가요? 그렇지만 그게 당신들한테 어떨는지…》
이렇게 말하는 그의 어조에는 이번 해산조치가 법무부의 주관이 아니라 미군정청의 조치라는것을 암시하면서 총재를 부른다 어쩐다 하고 소란을 피우면 추방령을 받은 당신들에게는 결코 리로울게 없다는 일종의 위협이 깔려있었다.
《련락을 해라! 당장!》
그의 야살궂은 태도에 화가 치밀어오른 덕수는 주먹으로 책상을 꽝- 하고 내리쳤다. 그 바람에 책상우에 놓여있던 양철재털이가 펄쩍 뛰여오르면서 빙글빙글 돌아갔다.
《얼마나 교활한 놈들인가 보우!》
덕수는 부총재를 쏘아보며 말했다.
《워낙 왜놈들이란 앞에서는 헤헤거리며 갑삭거리지만 뒤에서는 여우처럼 앙큼한짓만 꾸미거던.》
덕수가 하는 말이 자기에 대한 욕설이라는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부총재는 그런것은 내가 알바 아니라는듯이 흔연한 표정 아니, 어떤 조소를 머금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할끔하고 덕수를 훔쳐보는 품이 신통히도 겁에 질려 꼬리는 샅에 끼고있으면서도 틈만 생기면 상대의 멱을 물어제낄 기회를 노리는 구미여우같았다.
그길로 두사람은 다시 미군정청이 자리잡고있는 다이이찌빌딩으로 갔다.
참모부차장 보크켈바크라고 자기를 소개한 키다리대좌는 긴팔을 쩍 벌려보이며 참말로 유감천만이라는듯이, 그런 자기의 심정을 진정으로 믿어주기 바라마지않는다는듯이 자못 애석한 표정까지 지었다. 간교한 일본법무부 부총재와는 달리 얼마나 음흉하고 내숭스런 놈인지 시종 상대방을 위로하고 보호하는듯 한 태도에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이였다. 흡사 상주를 대하는 조객의 태도였다.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우리로서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방금 그 문제때문에 우에다총재와도 토론이 있었습니다만 지금단계에서는 일단 발포된 정령인것만큼…》
통역이 말을 끝내기 바쁘게 그자는 배속에서 우러나오는듯 한 웅근 소리로 다시 떠벌이였다.
《법을 법으로 다스리는것이 바로 민주주의원칙이고 또 일본평화를 위한 우리 미군정의 기본임무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법이라는것도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뜻이니만큼 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두손을 합장한채 주겠다는 소린지 달라는 소린지 알수 없는 아리숭한 말만 주어섬기는 그의 입가에는 노상 엷은 미소가 어려있었다. 그것은 부총재가 조심스레 비쳐보이던 그런것이 아니라 로골적인 비양이 섞여있는 조소였다. 그는 자기 얼굴에 떠있는 웃음이 조소라는것을 알지만 숨기고싶지 않으며 또 숨길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는 속내를 흔연스레 내비쳤다.
(흉물스럽기란! 왜놈이 여우라면 양놈은 구렝이가 틀림없지!)
향수내가 풍기는 그놈의 번들거리는 이마를 쏘아보면서 덕수는 왜놈이나 양놈이나 다 촌보도 타협할수 없는 철천지원쑤라는것을 새삼스레 통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면서도 서로 시치미를 떼는 놈들의 파렴치하고도 간특한 처사에 저절로 부드득 이가 갈리였다.
왜놈과 미제놈, 두놈이 량쪽에서 서로 밀고 당기며 톱질을 하고있는데 그가운데 서있는 나무는 바야흐로 새싹을 움틔우며 무럭무럭 자라는 조련이였다. 악착한 놈들은 한창 기운차게 뻗친 가지들에 알찬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리기 시작하는 때에 그 나무의 밑둥을 뭉청 자르려는것이였다. 아니, 뿌리채 들어내려는것이였다.
(안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넘어져서는 안된다. 설사 놈들이 조직을 해산하고 우리를 공직에서 추방한다 해도 동포들만은 기어이 조국의 두리에 묶어세워야 한다.)
순간 덕수는 이 기막힌 사실을 장군님께서 아신다면 얼마나 절통해하시랴 하는 생각에 가슴이 미여지는듯 했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시면서 이젠 동무들과 같은 믿음직한 일군들이 일본에 있기에 마음을 놓겠다고 하시던 그 자애로운 모습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목이 메여올랐다. 그런 크낙한 믿음을 받아안은 자기가 이젠 더는 아무 일도 못하게 된것은 물론 조직까지 해산당한 이 시련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갈피조차 못 잡고있는것이 아닌가!
덕수는 온몸을 휩쓰는 전률이 심장을 비틀어대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잡았다.
김운해와 함께 중총으로 돌아온 덕수는 그새 벌어진 새로운 사태에 또다시 아연해졌다.
떠날 때까지만 해도 없었던 경찰들 수백명이 완전무장을 갖추고 두겹세겹 청사정문을 지키고있었다. 뒤늦게 달려온 몸집이 우람찬 김훈이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글쎄 저놈들이 이젠 재산몰수라는 명목으로 책상 하나, 문건 하나 다치지 못하게 하면서 청사에 들어가지조차 못하게 하지 않습니까. 빌어먹을! 그래서 모두들 교동사무실에 가있지요.》
덕수는 완전무장한 경찰들의 포위속에 있는 중총청사를 바라보느라니 저절로 숨이 막히였다. 그처럼 자랑과 기쁨과 신심에 넘쳐 드나들던 저 청사가 놈들에게 점거당하다니… 가슴이 터질것만 같았다.
발길을 돌린 그는 교동이 있는 산별회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련산하단체로서 교동과 녀동은 다행히도 아직 해산령을 받지 않았던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