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1 회)
제 2 장
9
단 며칠사이에 자기 신상에 들이닥친 뜻밖의 일들로 하여 영신은 미처 정신을 가다듬을수 없었다. 그 엄청난 사실들을 일일이 되새겨보기는 고사하고 하나로 련결시키거나 집중시켜 생각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자기가 지금 마주하고있는 사람이 중총의장이라는것이 믿어지지도 않았거니와 자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 그것조차 리해되지 않았다. 마치 사나운 바람에 휘말린 가랑잎처럼 수도원이 있던 센다이교외의 산골짜기에서부터 도꾜 한복판으로 훌 날아온것 같이만 여겨지는것이였다.
《글쎄 수도원에 가있을줄이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수도원에는 대체로 신앙심때문에 있는 녀자들이지만 곡절이 있는 녀자들도 간혹 있으니까요. 그래서 가보자고 맘먹었지요.》
현우로부터 수도원에 있던 자기를 찾아내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의장의 얼굴에는 심중한 빛이 어려있었다.
사실 생면부지의 청년이 수도원에 불쑥 나타나 《영신씨지요?》하고 물을 때까지만 해도, 당장 도꾜로 가야 한다면서 짐을 싸라고할 때까지만 해도 영신은 가슴이 섬찍했다.
아버지가 보낸 사람이 틀림없다는 짐작이 들었기때문이였다. 서울에 있는 아버지가 《민단》사람들에게 부탁해서 자기를 강제로 그리로 끌고가려는거라고, 그렇지 않고야 도꾜에서 수백리나 떨어진 이 수도원에 숨어있는 자기를 어떻게 찾아내랴 하는 생각이 든 그는 처음부터 사소한 융통도 보이지 않을 잡도리로 야무지게 쏘아붙였다.
《누구지요, 당신은?》
그러자 상대방은 반죽좋게 씨물씨물 웃기만 하면서 《해방신문》사에서 일하는 기잔데 나쁜 사람은 아니니 마음을 놓으라는것이였다.
(《해방신문》? 그러니 조련사람으로 가장시킨 모양이지? 조련이라면 내가 말을 들을것 같으니까. 천만에! 그렇다고 내가 속을줄 알구?)
영신은 절대로 끌려가서는 안되며 이 사람 손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것, 그러자면 처음부터 뻗댈것이 아니라 따라가는척 하면서 기회를 보다가 도중역에서 내리든가 몰래 다른 기차를 타야겠다고 결심했다.
단단히 마음을 도사려먹고 기차에 오른 영신이였으나 자리를 잡자마자 대뜸 사진기와 취재수첩이 들어있는 가방을 자기한테 맡기고는 드렁드렁 코를 골기 시작하는 현우를 보고는 아연해지고말았다. 고개를 잔뜩 비틀고 입을 하 벌린채 누가 살점을 뜯어가도 모르게 곯아떨어진 모습을 보느라니 생각은 복잡해졌다. 도끼로 대충 다듬어놓은듯 한 큼직큼직한 생김새며 가식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소탈한 행동이 어느모로 보아도 자기를 유괴해가는 사람같지는 않았다.
《여보세요.》
얼마든지 도망칠수 있었지만 영신이는 도리여 현우를 흔들어깨웠다. 속이 한줌만 해서 앉아있는 자기와는 달리 셈평좋게 드러누워 쿨쿨 잠만 자는 그가 괘씸했던것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자다가 내가 도망을 치면 어쩌지요?》
《도망을 치다니요?》
무슨 소리냐는듯이 현우는 두눈을 슴뻑거렸다.
《글쎄 철없는 아이가 아니라면 누가 자기가 유괴된다는걸 알면서도 그냥 따라가겠나 말이예요.》
《유괴라는건 또 뭐요? 아하! 그러니 이젠 어디로 가며 무엇때문에 가느냐 하는걸 대라는겁니까?》
고개를 기웃해보인 현우는 자리를 고쳐앉으며 빙그레 웃었다.
《말하지요, 사실 이건 비밀에 속하지만 특별봉사하는셈치고 말하겠습니다. 흔히 남자들이란 미모의 녀성에게는 정도이상의 친절을 베풀고싶어지는 법이니까요. 에- 우리가 가는데가 어딘가 하면…》
현우는 자기 말 한마디한마디에 특별한 의의를 부여하려고 애쓰며 말했다.
《바로 조련중앙총본부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중총의장동지한테 가지요.》
(중총의장?)
영신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조련의장이 무엇때문에 자기를 찾는단 말인가! 지영이와 헤여진 이후부터는 자연히 련계가 끊어졌고 아버지가 《민단》단장을 하면서부터는 건느지 못할 아득한 심연너머로 멀어진 조련이였다. 그래서 세상밖으로 던져진 자기를 조련의장이 찾다니?
《어째서 그 의장님이 절 찾는거예요?》
《글쎄요. 그건 나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온 일본땅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영신씨를 찾아내라고 한걸 보면 보통일이 아닌것만은 사실이지요. 혹시 알겠습니까. 귀가 번쩍 트일 소식을 듣게 될는지 말입니다. 아, 됐습니다. 이젠 그쯤 알고 더는 묻지 마십시오. 묻는다 해도 그 이상 대답할수 없으니까요.》
다시 등받이에 기대앉은 현우는 그 이상의 친절은 베풀수 없다는듯이 두눈을 꾹 감았다.…
영신은 정체모를 사나이한테 끌려온 이 미지의 길이 어떻게 끝날지 몰라 겁에 질린 눈길로 자기앞에 앉아있는 의장을 쳐다보았다.
《그렇소. 내가 동물 찾았소.》
《?!》
영신은 온몸이 굳어졌다. 어쩐지 무뚝뚝하게 생긴 이 사람이 하는 말에 따라 자기 운명이 결정될것만 같은 불안이 심장을 옥죄였다.
《동무를 왜 찾았는가? 그건 우선 동무에게 지영동무의 소식을 알려주기 위해서요. 동무와 2년전에 헤여진 지영동무가 지금 조국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아오? 외무성에서 간부로 사업하고있소. 몸건강히 말이요. 게다가 일을 잘해서 사람들속에서 평판이 좋다는거요. 그리고 더 중요한건 그가 아직 총각으로 있으며 지금도 동무를 잊지 못해한다는거요.》
《?!》
영신이는 소스라쳤다.
(그가 외무성 간부로? 아직도 나를?)
온몸의 피가 일시에 얼어붙는것 같았다. 혹시 자기가 의장의 말을 잘못 듣지 않았나싶기만 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고 믿을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믿어야 할지 어쩔지 분별할새도 없이 가슴속에서는 뜨거운것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대뜸 눈앞이 흐려지면서 지영이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군 하는 괴로운 추억이 가슴을 허비였다.
서울에 있는 지영이가 자기의 편지를 받고 일본에 돌아왔을 때였다. 기쁘고 반가왔다. 가슴속 구석에 그늘은 있어도 서로의 사랑은 식을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만난 기쁨은 순간에 깨지고말았다. 자기들앞에 성이 독같이 난 아버지가 나타난것이였다. 아버지는 지영이에게 자기를 모욕했고 자기의 과거까지 부정한 빨갱이들이 이젠 왜놈들보다 더 미운 원쑤가 됐다면서 다시 내 딸과 상종했다간 그땐 가만두지 않겠다고 을러멨다. 그러면서 자기의 뜻을 어기는자는 죽기마련이라고 무시무시한 소리까지 했다. 그 말이 위협이 아니라 확고한 결심이라는것을 알자 영신이는 불안에 휩싸였다.
그날 밤 그는 지영이가 거처하는 숙소로 달려갔다. 아버지한테 진정을 유린당한 지영이를 위로해주고싶었다. 아니, 그에게 자기의 진정을 털어놓지 않고는 견딜수가 없었다.
자정이 가까운 깊은 밤이였지만 지영이는 두팔을 깍지낀채 멍하니 천정만 쳐다보고있었다. 영신이는 지영이앞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지영씨! 무슨 고민이예요. 아버지가 우리 일에 무슨 상관이예요. 제가 있으면 되지 않아요. 제가 변함없이 지영씨를 사랑하면 되지 않나 말이예요.》
영신이의 결심은 확고했다. 아버지가 뭐라고 하든 또 남들이 어떻게 보든 자기가 그를 사랑하고 그가 자기를 믿어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고 이번 기회에 될수록이면 지영이가 자기를 책임져주는 결심을 내리기만 바랐다.
이제 와서 돌이켜볼 때 어쩌면 자기가 그런 생각까지 했는지 놀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는 자기의 감정이 결코 청춘의 초기에 체험하는 들뜬 련정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자기는 지영이의 안해가 되지 않고는 도저히 마음의 안정을 얻을수 없다는것 그리고 자기의 이런 결심은 남들에게 핀잔을 받거나 시비거리로 될 아무런 근거가 없을뿐더러 지극히 순결한 감정의 결과라고 굳게 믿었다.
《전… 결심했어요. 모든걸 결심하고 이렇게 지영씰 찾아왔어요. 그러니 절 더는 가만놔두지 마세요. 전 이제부터, 오늘부터… 네? 아시겠어요?》
그리고는 와락 지영이의 품에 뛰여들어 목놓아울었다. 못내 두렵긴 하면서도 바라던 소원이 이룩되리라는 행복감으로 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지켜온 순정이기는 하지만 이젠 그것을 바쳐야 한다는 당혹감에서 그리고 그런 말까지 한것이 처녀로서의 자존심을 허물어버린것 같은 수치스러움으로 하여 그의 량볼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였다.
자기를 바라보는 지영이의 두눈에는 모진 진통을 참는 사람의 번민이 력연했다.
《영신이!》
한참만에야 자기의 어깨를 잡은 그는 평소의 목소리답지 않는 갈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자기의 운명을 그렇게 쉽사리 결정지어야 할가? 만약 영신이나 내가 이 순간의 괴로움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할수 있겠어. 그리고 중요한건 우리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스스로 더 심사숙고해야 한다는거야. 난 오늘 영신의 아버지를 만나고나서야 나자신을 더 잘 알게 됐어. 특히 우리의 관계가 더는 지속될수도 없고 지속되여서도 안된다는걸 말이야. 때문에 우린…》
《아니! 아니예요. 그럴수 없어요. 우린 절대로…》
지영이의 목을 더욱 힘주어 그러안은 영신이는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그러나 어떤 유혹에서 벗어나려는듯 자기의 팔을 내리우며 자리에서 일어난 지영이는 창문을 활짝 열어제꼈다. 습기를 머금은 축축한 바람이 방안으로 불어들어왔다.
결국 지영이는 다음날 다시 서울로 떠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전과는 달리 간다는 말 한마디 남기지 않았었다.
이때부터 영신이는 모든것을 포기했다. 자기의 이루어질수 없는 꿈이나 희망에 대해 다시는 상기하지 않으려 했고 될수 있으면 자기라는 존재조차 잊으려고 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바로 수도원이였던것이다.
끝없는 절망과 고통이 마음을 휩쓸 때마다 그는 그 고통속에 영원히 잠겨있고싶은 욕망을 억누를수가 없었다. 사제가 가르치는대로 가장 열광적인 신도가 되여 자기에게 더 큰 고통이 오기를 바랐다. 어떤 때는 눈처럼 흰 단장으로 지상의것이 아닌 아름다움을 지니고 역시 눈처럼 흰 천사들에게 떠받들려 어디론가 창공높이 훨훨 날아가는 순교자로서의 자기의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아- 하느님이시여!)
그는 아침기도시간이나 참회시간 지어는 일요미사가 끝난 밤늦게까지도 휑뎅그렁한 교회당에 홀로 앉아 어슴푸레한 초불에 비쳐지는 성상을 바라보며 마음속 고뇌를 털어놓았다. 그때마다 동포들을 배반하고 반역의 길을 걷는 아버지를 저주했고 그런 아버지를 사랑한탓으로 하여 자기같은 불쌍한 씨앗을 세상에 남겨놓은 어머니를 원망하기도 했다. 어떤 때는 조선사람인지 일본사람인지 국적조차 분명치 않은 자신의 기막힌 처지를 비관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조선사람, 어머니는 일본사람, 그런가 하면 아버지는 서울로 건너갔고 그토록 사랑해마지않던 사람은 또 평양에 가있는것이였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뻗어있는 복잡한 갈래판에서 과연 자기가 서야 할 위치는 어디며 가야 할 길은 어디란 말인가!
숙명으로 받아들일수밖에 없는 그 가혹한 고통도 날이 감에 따라 차츰 덜어지는듯싶었다. 하지만 심장에 찍힌 상처만은 더더욱 깊어지기만 했다. 그것은 바로 지영이에 대한 잊을수도 버릴수도 없는 사랑의 감정이였다. 이젠 그 어떤 기대도 희망도 가질수 없게 된 자기의 사랑이라는걸 모르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영영 사라진것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애써 맘속에서 지우려고 하면 할수록 그리운 정은 점점 더 강하게 살아나 온몸을 활활 태우는것이였다. 확실히 사랑이 주는 감정은 운명이 주는 고통보다 더 크고 강한듯싶다.
《어떻게 해야 하옵니까, 하느님!》
그는 괴로울 때마다 성상을 쳐다보며 안타까이 속삭이였다.
《저의 마음속에 있는 이 생각을 어떻게 극복하면 좋습니까? 이룰래야 이룰수 없고 바란다고 해서 실현될수 없다는것을 뻔히 알면서도 마냥 가실길 없는 이 괴로운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하옵니까. 모든것을 잊고 조용히 당신의 뜻만 따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옵니까. 하느님, 가르쳐주십시오!》
그러면 자비하신 하느님의 거룩한 목소리가 교회당의 높은 천정에서 장중하게 울려퍼지는것이였다.
《…주의 구원을 묵묵히 기다리는것이 좋느니라. 사람은 젊었을 때 고역을 치르는것이 좋느니라. 엎드려 땅을 포옹하여라. 그러면 다시 희망이 솟아나리니…》
《에레미야》 향가의 한 대목이였다.
그는 자기의 고통을 하느님께서 주신것으로 여기고 그보다 몇배 더한 고통이라도 받을 각오가 돼있다고 맘다지며 그 어떤 새로운 희망이 솟아나기를 그야말로 땅을 포옹한채 간절히 바라마지않았다. 한달, 두달… 그러나 아무리 빌어도 그 어떤 희망도 솟아나지 않았다. 그는 주의 구원이 있기를 묵묵히 기다려낼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의 심장이 너무도 뜨겁게 달아있었던것이다.
그렇게 온몸이 불탈 때면 그는 《에레미야》향가대신 루가복음 11장을 다시 외웠다.
《…바라거라, 그러면 하느님이 주시느니라. 찾거라, 그러면 어느땐가는 나타나느니라.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하느님이 열어주시느니라. 누구든 바라는 사람은 구하게 되고 찾는 사람은 얻게 되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기어이 문을 열게 되리니…》
이 대목을 외울 때면 그는 정말 자기의 심령을 다 바쳐 애타게 찾고 간절히 바라는 동시에 굳게 닫긴 운명의 문을 힘껏 두드리면서 부디 한줄기의 빛이라도 깃들기를 바라마지않았다.
사실 그는 지영이의 소식을 제일 고대하고있었지만 설사 그의 소식이 없을지라도 자기의 마음을 정직한 사람들의 마음과 접촉케 하고 순결한 사람들 이를테면 자기의 모든 생활, 모든 행동, 모든 사고, 모든 희망을 언제나 청렴하고 정당한 사람들과 나누고싶은 욕구에 시달리고있었다.
그런데 문득 현우가 나타나 도꾜로, 중총의장한테로 가자고 자기를 이끌었던것이다.
영신이는 자기의 이런 사연들을 비교적 상세히 말했다. 처음으로 대상하는 의장이였지만 그처럼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는 그에게 자기 마음을 털어보이고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어쩐지 죄를 짓는것으로 될것만 같았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의장은 그제야 짐작이 된다는듯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따져보면 결국 동무와 지영동무를 갈라놓는데는 나도 한몫 낀셈이구만. 지영동무한테 새 임무를 주어 서울로 보낸것도 그렇지만 그를 거기서 다시 평양으로 보냈으니 말이요. 참! 아버지소식은 들었소?》
아버지소식이라는 말에 영신은 얼른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도 이젠 많이 달라진것 같소. 김구의 장례식날 경교장에 모인 조객들앞에서 이제부터는 자기가 백범의 뒤를 잇겠다고 가슴을 치며 열변을 토했다는거요. 리승만이가 권고한 그 무슨 고문자리도 뿌리치고 말이요.》
지영이 소식에 이은 아버지에 대한 소식, 너무나도 놀랍고 희한한 일이여서 실감으로 느껴지기는커녕 망연자실해있기만 했다. 자기가 혹시 꿈을 꾸고있지 않나 하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영신동무!》
갑자기 심중한 낯빛이 된 의장이 준절한 어조로 말했다.
《내 말을 듣소. 이제부터 영신인 자기가 지난날의 불행한 처녀가 아니라 세상에 새로 태여난 사람이라는걸 명심해야 하오. 알겠소?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며 우리가 왜 영신이를 애써 찾았는가 하는건 세월이 흐르면 차차 알게 될거요. 다만 여태까지 있은 괴로운 일, 슬픈 일들을 다 잊어버리고 새 출발해야 한다는거요. 이제부터는 오직 조국을 위해 살며 동포들을 위해 일한다, 이것이 바로 영신이의 인생관이 되여야 한단 말이요. 이건 내가 바라는것일뿐아니라 지영동무가 바라는것이며 더 중요하게는 조국이 바라는것이요.》
(조국?)
영신이는 흠칫했다.
(조국이라니? 나에게도 조국이 있단 말인가?)
영신이는 의혹이 실린 눈길로 의장을 쳐다보았다. 따뜻한 정이 어린 눈길이 마주 비쳐왔다. 그 눈빛을 통해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후더운 인정이 가슴속에 흘러들었다. 난생처음으로 자기의 운명을 두고 마음쓰는 혈육의 정을 맛보는듯싶었다. 세상밖으로 비참하게 던져진 자기를 애써 찾은 사람들, 머나먼 산중에 숨어버린 자기를 다시금 세상에 데려내온 사람들, 이들이 과연 누구인가? 조선사람들이다. 아- 조선사람! 정녕 내가 조선사람이 될 자격이 있을가?
영신은 저절로 가슴이 떨리였다. 대번에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제부터 영신이는 아라까와에 있는 우리 초급학교에서 일하시오. 이미 교장한테는 말해놓았으니 그리 알고 무슨 일이 제기되면 현우동무와 련계를 맺든가 나를 직접 찾아오든가 하시오. 음? 그렇게 할수 있겠지?》
어딘가 엄엄하게 느껴지던 의장이였으나 이제 와서는 푸수한 인정과 함께 애초에 받은 호감이상의 감정을 품지 않을수 없었다. 어렵게 여겨지던만큼 더 친밀하고 다정하게 느껴지는것이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절실히 깨닫게 되는것은 이 의장이 자기의 마음속에 잠자고있는것을 깨워 눈을 뜨게 해주고 소중히 가꾸어주고있다는 그것이였다. 그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은연중 이제껏 버림받아 시달리던 자기에게도 그 어떤 힘이, 한줄기의 광망이 비치기 시작했다는것을 절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순간 그는 자기가 그처럼 애타게 찾고 바라던것이 정말 문을 열고 서서히 다가오고있는듯 한 황홀감에 휩싸이는것이였다.
(아- 이것이 과연 신의 도움이란 말인가! 나에게 안겨지는 이런 희망과 힘이 정녕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란 말인가!)
영신이는 자기에게 미치는 이 은정이 어디서 어떻게 오는것인지 아직은 분명히 알수 없었지만 그 고마움과 따사로움에는 그저 깊이깊이 머리숙여 감사드리고싶을뿐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