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회)

제 2 장

8

 

온 운동장이 비좁도록 빼곡하게 들어앉은 사람들이 이번에는 서로마다 자기네 지부나 분회의 자랑을 터놓기 시작했다. 여러군데 설치해놓은 마이크앞에는 벌써 숱한 사람들이 자기들이 이룩한 성과들을 말하기 위해 꼬리잡이를 하고있었다.

운동회를 끝내기에 앞서 덕수가 이미 계획했던대로 오래간만에 많은 동포들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이 기회에 그동안 자기들이 이룩한 사업성과에 대해 한마디씩 하는것이 어떠냐고 하자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던것처럼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나섰던것이다. 처음엔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마이크앞에 나서서 말하는 바람에 무슨 소린지 가려들을수 없을 정도였다.

어떤 지부에서는 아이들의 교육비를 거주단위의 구역소에서 받아낼데 대한 중총의 지시에 따라 이미 구역소와 여러차례 담판한 결과 적지 않은 돈을 받기로 했다고 하는가 하면 다른데서는 근 스무명의 동포들이 뜨내기생활을 청산하고 직장을 구했다는것이였다.

그중에는 이런것도 성과로 될수 있느냐며 《민단》동포 10여세대가 자기네 지부에 가입했는데 그것이 자기들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스스로가 자진해온것이라는데 대해 어줍은 기색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왜 그게 지부의 성과가 아니겠습니까. 지부관하 동포들이 단합해서 애국과업들을 보란듯이 잘 수행했기때문에 그들도 감동이 돼서 우리한테로 넘어온것이 아니겠습니까. 자랑중에서도 아주 큰 자랑이지요.》

덕수의 말에 모두들 박수를 치며 그들의 성과를 축하했다.

자랑은 끝이 없었다. 밀주단속이라는 구실밑에 부락에 달려든 경찰들을 단합된 힘으로 막아낸 사실이며 공안조례반대투쟁에 참가하여 용감하게 싸운 일 그리고 학교건설기부금을 벌써 얼마나 장만했다는 등…

이어 40대쯤 돼보이는 반바지차림의 중년사나이가 마이크앞으로 나섰다. 바투 깎은 머리에 해빛에 타서 번들거리는 목덜미로 보아 분명 토목일을 하거나 막로동청부업으로 살아가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그는 왜서인지 말은 하지 않고 밤송이같은 머리칼을 슬슬 쓸어대기만 했다.

《무슨 자랑인지 들어봅시다.》

덕수옆에 앉아있던 덕곤이가 재촉해서야 그는 입을 열었다.

《까놓고 말해서 난 뭘 자랑하자는게 아니예유. 자랑은 고사하고 되레 한가지 골치거리가 있는거라유. 그걸 말하자고 나왔는데 그래도 괜찮겠어유?》

《골치거리?》

이쪽 마이크앞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있던 한 아낙네가 야무진 소리로 되받았다.

《골치거리라면 빚을 걸머졌다는 소리가 아니믄 부부싸움이라는건데 그걸 여기서 말하자는긴가? 아이고, 남살스러버라!》

와- 하고 웃음이 터졌다.

《그런기 아니라유. 내 아무리 일자무식에 무일푼신세라 해도 이런데서 그런 말 하겠어유? 그쯤한건 나도 알지유. 하긴 빚도 걸머지고 녀편네가 바가지를 긁을 땐 한대 주어박을 때가 있긴 하지만서두, 히-》

그는 갑자기 황소처럼 소리없이 히죽 웃어보였다.

《그런데 무슨 놈의 녀편네가 한대 맞기만 하믄 온 동네가 떠나가게 소리치는가 말이예유. 생지랄이지유. 그게 괘씸해서 또 한대 멕이는데 녀편네들이란 그저 봄꿩이 제 울음에 죽는것처럼 괜히 소갈머리없이 지가 화를 만들어내지유. 그렇지만 저녁땐 풀어주어유. 그게 남자 아니겠어유. 그때에야 콜짝거리면서 제 잘못을 뉘우치는데…》

《됐습니다, 그 얘긴 그쯤하고 이쪽얘기나 하십시오.》

그대로 두었다가는 그가 무슨 소리까지 하겠는지 걱정이 된 덕곤이가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일단 말을 시작하면 그게 어떤 말이든 장소나 분위기에 상관없이 말짱 털어놓아야 시원해하는 사람 같았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목을 뽑아들고 호기심이 어린 눈길로 그를 지켜보았다.

한동안 주밋거리던 그는 이제껏 슬슬 쓸어만지던 머리를 갑자기 빨리, 그것도 비누칠한 머리를 감을 때처럼 맹렬한 동작으로 긁어댔다. 보매 그런 동작은 면구스러운 사실을 털어놓을 때마다 취하군 하는 버릇같았다. 아니나다를가 그는 드디여 그 골치거리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 중학교에 댕기는 아들눔이 하나 있지유. 어느 학교나 다 비슷하지만 다찌가와에 있는 우리 학교랑기 아직은 일본학교와 같이 있으믄서 교실 몇칸을 빌려쓰지유. 아- 그란데 이 자슥이 학교에 갔다오기만 하믄 신소를 달고오는거라유.》

《신소라니요?》

《일본아들 자꾸 때린다는거지유. 어디 때리기만 합니까? 공책을 뺏들지 않나 벤또를 뺏아묵지 않나. 하긴 집에서 공책도 몬 사주고 벤또도 몬 싸주는건 사실이지만… 글씨 이걸 우야모 좋아유?》

《아따!》

옆에 앉아있던 사람이 그의 종아리를 철썩 때리면서 볼부은 소리를 했다.

《왜정때 밤낮 매맞든거 잊어뿌맀나? 그때 감독이나 십장한테 맞은것에 비하믄사 그기 무엇이여? 그까짓 벤또나 뺏아묵는기 뭣이락꼬!》

또다시 폭소가 일었다.

《우리 아이도 쌈할 때가 있는디…》

이번에는 저쪽마이크앞에 서있던 몸집이 우람한 장년이 억양이 센 전라도말씨로 받았다.

《그때마다 내 아이한테 뭐라는지 아슈? 이기라칸당께. 너 애비, 에미 수모받던걸 생각해서라도 기어이 이겨야 한다칸당께로.》

한수 더 뜨는 그의 말에 덕곤은 물론 덕수까지도 웃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데 이걸 보슈.》

처음 말한 숫밤송이머리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채 말을 이었다.

《매일처럼 매맞은 자기 아들을 데리고와 이 꼴을 보라고 들이대는 사람은 다 코를 맞대고 사는 이웃들이란 말이예유. 어디 그냥 코를 맞대고 살기만 합니까? 돈이 없으면 돈을 꿔주고 쌀이 없으면 쌀도 퍼주는 인정많은 사람들이지유. 애비는 늘 그 집 신세를 지고사는데 아들눔은 그 집 아들 때리기만 하니. 내 오죽 그들보기가 딱했으믄 다른데로 이사갈 생각까지 했겠나유.

그래 녀편네보고 이살 가자고 했더니 아- 이놈의 녀편네 한다는 소리가 여태까지 이웃들에 진 빚은 어떻게 하고 이사를 가느냐며 마치 날 돈떼먹고 달아나는 사기군이나 구이니게(공짜로 먹고 도망치는것)하는 협잡군처럼 여긴단 말이예유. 세상에 지 남편 협잡군으로 몰아대는 녀편네가 어딨어유? 그게 괘씸해서 그 나불나불하는 주둥아리를 한대 탁 멕였더니 아, 또 동네가 떠나가게 소리치는데…》

《됐습니다, 알겠습니다.》

얘기가 또 다른데로 뻗으려 하자 덕수는 곧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으며 덕곤을 바라보았다. 그가 덕곤을 바라본것은 학부형협회 회장으로서 응당 이런 문제를 맡아나서야 한다는데도 있었으나 그 역시 한때 아들문제로 하여 골머리를 앓은적이 있었기때문이였다.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삼형제가 매일처럼 일본아이들을 두들겨패군 해서 하루도 마음놓고 지낸 날이 없었던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들이 얼마나 착실해졌는지 동포들은 물론 일본사람들까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는것이였다.

덕수의 시선을 통해 그가 무엇을 바란다는것을 알아차린 덕곤은 탁우에 있는 마이크를 당겨놓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럼 내 한마디 하지요. PTA(학부형회)를 책임진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같은 학부형의 립장에서 말하니 그리 알고 들어주십시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자식들때문에 어지간히 골머리를 앓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 머리가 이렇게까지 벗어졌단 말입니다. 보시구려, 100와트는 못돼도 80와트는 잘되지요. 하하!》

덕곤은 그 80와트짜리의 대머리를 쓸어보이면서 제먼저 큰소리로 웃어제꼈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첫째도 둘째도 아이들이 싸움을 하지 않게 하는데 있습니다. 난 아이들한테 이렇게 말합니다. 쌈을 해서도 안되고 남을 때려서는 더욱 안된다고 말입니다. 그럼 아들녀석이 묻지요. 상대방이 때리자고 달려드는데 가만히 있어야 하나 하고 말입니다. 맞아도 안된다고 하지요.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가고 다시 묻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손자병법〉을 대줍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숨을 죽이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였다.

《〈손자병법〉 6계는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을 치는 〈동성서격〉이요, 23계는 길목을 닫아매고 우리안에 가두어넣는 〈페문촉전〉전술이다. 그리고 싸움에 걸려들어도 상대를 때리지 않을뿐아니라 자기가 맞지도 않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 병법의 마지막수를 쓰면 된다는것을 말해주지요. 그 수가 뭔가 하면 여러분들도 꼭 알고계십시오. 〈주도상〉이라는 전법인데 제36계로서 줄행랑입니다.》

《하하!》

《허허!》

《호호!》

사람들은 땅을 치며 웃어댔다. 그러나 덕곤은 얼른 손을 저어보이며 심각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절대로 웃을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이 결코 비겁하거나 지는것이 아닙니다. 더우기 이것이 아이들싸움에만 적용되는게 아니라는데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들도 아시다싶이 지금 미일반동들이 날을 따라 승승장구하는 우리 조련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면서 탄압의 구실을 찾기 위해 얼마나 피눈이 돼있습니까. 지난 4월에 있은 니이가다의 다까다사건이나 얼마전 도찌기동포들에 대한 습격사건이 그를 잘 보여주고있습니다. 놈들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한테서 자그마한 트집이라도 잡아 불집을 일으키려 하고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놈들의 이런 도발에 걸려들수 있습니까? 절대 그럴수 없으며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린 놈들의 부당한 탄압에 대해서는 정면으로 완강하게 투쟁하면서도 무모한 도발에는 절대로 걸려들지 말아야 합니다. 놈들이 제일 두려워하는것은 바로 우리가 조국의 두리에 하나같이 뭉치는것이고 그다음은 우리와 일본인민들사이의 친선입니다. 때문에 일본아이들과 쌈을 하는것은 조일친선을 파괴하는 행동일뿐아니라 우리를 탄압하려는 적들을 도와주는것으로 됩니다. 이것을 아이들한테 말하십시오. 그럼 아이들도 꼭 리해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옳은 말이라고 고개를 끄덕이였다. 과시 학부형회장이 다르긴 다르다고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덕수는 분위기를 통해 최근의 급변하는 정세, 미군정과 일본정부가 여느때없이 악착한 책동을 감행하고있는것과 놈들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까밝힐 필요를 느끼였다.

최근 미군정의 사촉을 받은 일본반동당국은 국철총재 시모야마를 레루우에서 자살한것처럼 만들어 여론을 오도시키고 무인전차를 고속으로 내몰아 수많은 사상자를 낳게 한 미다까사건을 조작함으로써 수천명의 철도로동자들을 행정정리라는 명목으로 강제로 해고한데 이어 로동조합과 민주정당을 본격적으로 탄압하는 길에 들어섰다. 이와 함께 경찰들을 재무장시키면서 군대화하는 길로 나가고있다. 또한 놈들은 남조선괴뢰와 체결한 통상협정을 계기로 이제부터는 동포들에게 일본국적을 강제로 강요할수 있는 법적제도까지 마련해놓았다.

이런 일본정세부터 언급한 덕수는 살벌해진 남조선정세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요즘 남조선정세도 심상치 않게 번져지고있습니다. 38˚선에서는 미제의 부추김을 받은 남조선괴뢰군이 수시로 공화국령토를 침범하는가 하면 리승만역도는 통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물론 <국회의원>들까지 체포투옥하고있습니다. 바로 며칠전에는 4월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여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뵙고 앞으로는 반공이 아니라 련공을 위해, 조국통일을 위해 몸바치겠다고 한 백범 김구를 백주에 살해했습니다.》

덕수의 눈앞에는 은연중 김구를 찾아간 박룡의 모습이 떠올랐다.

뒤늦게나마 그와 함께 나라의 통일성업에 나서겠노라고, 그것만이 여생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하던 그가 김구가 살해된것으로 하여 얼마나 타격이 클것인가! 정말 그의 운명은 그자신이 말한것처럼 절망과 좌절로만 엮어졌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모든 사실은 미제와 일본반동당국이 우리 공화국을 더욱 적대시하면서 그 해외공민들인 재일동포들을 로골적으로 탄압하려고 하고있다는것을 말해줍니다.

이런 조건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며 투쟁해나가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제가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잘 알것입니다. 정세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또 놈들의 탄압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우리는 오직 장군님을 받들어 조국의 두리에 더 굳게 뭉쳐야 합니다. 오직 그것만이 우리가 살길이고 우리가 승리하는 길입니다. 불길이 뜨거우면 생나무도 태웁니다. 불길이 뜨거우면 무쇠도 녹일수 있습니다. 방금 여러분들이 말한 모든 성과들이 그런것처럼 래일의 빛나는 승리도 바로 여기에 달려있다는것을 우리 언제나 명심합시다.》

덕수는 운동장에 꽉 차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여러분! 얼마전 조국에서는 북남로동당이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이 되였고 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이 새로 결성되였습니다. 저는 영광스럽게도 김일성장군님의 신임에 의해 조국전선중앙위원으로 임명되였습니다.

저는 이 중임을 언제나 동포들속에 들어가 동포여러분들과 함께 고락을 하며 동포여러분들과 함께 조국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라는 장군님의 분부로 받아들이고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모두 김일성장군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조국의 두리에 한사람같이 뭉쳐 더욱 힘차게 싸워나갑시다!》

《나갑시다.》

《옳-소!》

앉은자리에서 손나팔을 만들어 소리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리를 차고일어나며 힘차게 주먹을 휘둘러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김일성장군님 만세!-》

윤덕곤이 먼저 선창을 하자 온 운동장이 떠나갈듯 환호했다.

김일성장군님 만세!》

《조국의 두리에 더욱 철석같이 뭉치자!》

연방 구호가 터져오르는가 하면 그때마다 북소리, 꽹과리소리가 천지를 진감했다. 운동회가 어느덧 해산을 모르는 군중대회로 변한듯싶었다.

이날 저녁 오래간만에 집으로 돌아온 덕수는 또 하나의 기쁜 소식에 접했는데 그것은 출장차로 센다이에 가있는 현우로부터 보내온 전보였다. 전보문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센다이수도원에서 영신이를 찾았습니다. 래일 그를 데리고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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