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회)

제 2 장

5

 

《형수님 계시우?》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부엌문이 드르륵 열리는 순간 수임의 두눈은 대번에 기쁨으로 빛났다.

《아니, 이게 누굽니껴?》

오래간만에 나타난 로재호였다. 일제때부터 남편과 형제처럼 지내면서 일도 같이하고 운동도 같이한데다가 감옥살이까지 함께 한 그를 수임은 남달리 여기는터였다. 더우기 늘 남편의 눈치를 보면서 구속스레 지내는 수임으로서는 성격이 시원시원한데다가 푸접이 좋아 아무때나 허물없이 대할수 있는 그가 마치 갈증에 시달리던 사람이 시원한 샘물을 마주한듯 한 기분에 잠기게 했던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오래간만에 오셨어요?》

《그새 좀 바빴지요. 중총에 볼일이 있어 왔댔는데 형수님 보지 않고야 어디 발길이 떨어져야지요.》

조련 가나가와현본부위원장으로 일하는 재호는 무슨 일이 제기되기만 하면 곧잘 덕수를 찾아 도꾜에 올라오군 했는데 그때마다 수임이한테도 꼭꼭 들려 정말 형수 대하듯 그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전해주기도 하고 우스개소리도 한마디씩 하는걸 잊지 않았다.

《그럼 아직 일이 아부질 만나지 못했나요?》

《왜요, 만났지요. 그렇지만 거기서야 어디 말할 재미 있습니껴. 그래 집에서 기다리겠다케 놨심더.》

방에 들어와 벽에 기대앉은 재호는 여느때의 버릇대로 모두어세운 무릎을 슬슬 쓸어만지면서 방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벽 절반을 차지하고있는 책들이며 앉은뱅이책상 그리고 사과궤짝으로 만든 뒤주우에 댕그러니 얹혀있는 이불을 일별하고나서 그는 쩝 하고 입맛부터 다시였다. 언제 봐야 그저 그 꼴이라는것이였다.

《커피나 오차를 내라케야 이 집에 그런건 없을끼고 대신 따신물이나 있으면 한그릇 주소.》

대장이 좋지 않아 오뉴월에도 찬물을 마시지 못하는 그였다. 대신 음식들은 아무것이나 가리지 않았지만 유독 멸치만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언젠가 왜 멸치를 들지 않느냐고 수임이가 묻자 그는 대뜸 눈알을 부라리며 말했다.

《왜놈들이 좋아하라고 그걸 먹는단 말입니껴?》

《멸치가 왜놈들하고 무슨 상관이게요?》

《〈멸치도 물고기냐, 조선사람도 사람이냐.〉하고 떠드는 왜놈들인데 그걸 먹는다면 우리가 멸치처럼 축에도 들지 못하는 사람이라는걸 인정하는기 아입니껴. 내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물론 본부관하 동포들한테도 멸치만은 입에 대지 말라카지요.》

그는 마치 멸치를 먹지 않는것이 왜놈들에 대한 앙갚음으로 되기라도 하는듯이 말했다.

《호일이는 왜 보이지 않습니껴?》

《일이요? 무슨 애가 글쎄 요즘은 매일처럼 새로 짓는 우리 학교공사장에 나가 살지 않나요. 지가 언제 학생이 된다고…》

《학교라…》

수임이가 내미는 물사발을 받아들고 후후 입김을 불어대던 재호는 갑자기 이마살을 찌프렸다.

《나도 요새 그 학교때문에 골이 터질 지경입니다. 학생은 자꾸 늘어나는데 어디 교실이 있어야지요. 그래 첨엔 학교안에 있는 교원들사택을 교실로 쓰게 했는데 그래놓으니 이번엔 또 교원들이 문제란 말입니다. 매일처럼 나한테 밀려와 집을 내라는데 내라고 무슨 재주가 있습니껴. 할수없이 교원들을 본부일군들집에 동거시키는수밖에요. 그래 우리 집에도 지금 두 가족의 열한식구가 백포를 방가운데 쳐놓고 사는데 새벽에 보면 별 희한한 일이 다 생깁니다그려, 흐흐!》

웃을 때면 늘 입을 한껏 벌리면서 소리는 내지 않는, 그러면서도 두눈을 꾹 감군 하는 그의 버릇에 수임은 소리내여 웃었다. 재호에게는 이렇게 웃는것과 함께 다른 하나의 버릇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리에 앉기만 하면 무릎을 세워가지고는 량손으로 바지가랭이를 말아올리는것이였다. 처음엔 손바닥으로 바지끝을 슬슬 반죽밀듯 하다가 기분이 내킬 때면 바지가랭이를 무릎은 물론 신다리까지 마구 말아올리는것이였다. 그러나 오늘은 어째선지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잠간만 기다려요, 내 얼른 나갔다올테니.》

수임은 오래간만에 온 재호를 위해 막걸리라도 한되 받아올 심산으로 부엌으로 내려섰으나 벌써 그 눈치를 알아차린 재호는 손을 홰홰 내저었다.

《아니, 관두슈. 형수님한테 무슨 돈이 있다고 매번…》

언제나 겉으로는 사양하는체 하지만 정작 술을 받아오기만 하면 내 언제 그랬더냐싶게 사발들이를 하는 재호라는것을 모르지 않는 수임은 곧 되병을 찾아들고 밖으로 나섰다.

(그럼 차라리 한잔 걸치고 얼근한김에 들이대봐?)

방안에 혼자 남은 재호는 벽에 기대앉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오늘도 수임이한테는 배심좋은 말들을 했지만 속은 실상 그다지 개여있지 못한 그였다. 저로서는 이미 몇차례나 따져보고 내린 결심이였으나 이제 막상 덕수를 만나 해야 할 말들을 따져보느라니 어쩐지 은근히 긴장되면서 처음 느끼던 그런 자신을 가질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아직까지 오늘과 같은 용무로 덕수를 찾은적은 없었다.

언제나 무슨 일이 제기되여 방조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면 당장 해결해야 할 급한 문제가 있어 덕수를 찾군 했는데 오늘은 그와는 반대로 자기가 덕수에게 조언을 주자고 찾아온것이였다.

며칠전에 있은 당원활동가들의 모임때였다.

그날 모임의 취지는 4. 24교육투쟁 한돐을 맞이하면서 1년동안에 확대된 민족교육의 성과를 총화하고 앞으로의 과업에 대해 토론하는것이였는데 그 마당에서 덕수와 원철이가 의견상차이로 하여 충돌을 일으켰다.

늘 모임을 주관하던 김운해가 당정치국회의로 하여 빠지고 대신 당의 취지를 대변하여 발언한 원철이가 앞으로 조련이 민족교육을 강화한다고 하면서 민족적편향을 범해서는 안된다는것을 강조하자 대뜸 덕수가 그에 반박해나섰다.

《도대체 어떤것이 민족적편향이라는거요?》

《그거야 명백하지 않소.》

거대한 체구에 다혈질의 불깃한 얼굴이여서 얼핏 보면 과격한 성격처럼 느껴지지만 도리여 상대가 누구든 지어는 아래사람들에게까지도 례절있게 대하는 원철이였다. 그의 이런 여유작작한 태도는 누가 뭐라고 하든 자기의 주장이나 신념에는 사소한 변함이 없으며 또 있을래야 있을수도 없다는것을 보여주는것 같았다.

《좁은 민족리익의 견지에만 포로되여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원칙을 외면하는것이 바로 민족적편향이 아니겠소.》

《그럼 하나 물어보겠는데 우리 아이들한테 우리 교육을 하는것이 민족적편향이라면 일본아이들이 일본교육을 받는건 어떻게 봐야 하오?》

덕수가 지릅뜬 눈으로 마주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문제와 민족문제는 별개의 문제요. 재일동포들은 어디까지나 일본이라는 환경속에서 살기때문에 모든 문제들이 특수하게 제기된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하오. 어떻게 제기되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일본혁명수행여부와는 정비례관계에 있는 반면에 반동들의 억압정책과는 반비례한다는거요. 말하자면 일본혁명의 수행여부에 따라 재일조선인들문제도 해결되기때문에 재일조선인운동자체가 일본혁명을 추진시키는것으로 되여야지 오히려 적들의 탄압을 가증시키는것으로 되여서는 안된다는거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민족교육의 장려가 어떤 후과를 초래하겠소 ? 우리는 지난 4. 24때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때 당본부에서도 그런 조치를 취했던거요.》

그가 말하는 당본부의 조치란 4. 24투쟁직후 도꾸다서기장이 이 투쟁이 우선 당과 아무런 사전협의도 없이 벌어졌다는것으로 하여 또 한창 혁명력량이 강화되는 때에 미군정으로 하여금 비상계엄령까지 내리게 함으로써 력량장성에 저해를 주었다는것으로 하여 추궁한 사실이였다.

《때문에 지금 단계에 있어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것은 무엇보다도 세상을 보다 넓은 안목으로 보고 보다 큰 리익을 위해 투쟁해야할 때라는 그것이요.》

(보다 넓은 안목과 큰 리익이라…)

원철의 말을 되새기느라니 재호도 뭔가 느껴지는바가 없지 않았다. 자기만 아니라 모임에 참가한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눈치였다.

재호의 견해에 의하면 원철은 다소 도고한데가 있기는 하지만 지식이 풍부하고 엄격한 원칙을 지닌 일군으로서 필요할 땐 정력을 무섭게 발휘하는 사람이였다. 그러나 그가 사람들속에서 상반되는 두가지 평가를 받고있다는것도 모르지 않았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를 자기처럼 일반 사람들과 구별되는 존재로 여기고 그의 앞날에 대한 성공을 내다보면서 그를 찬양하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였지만 일부 사람들은 이와 반대로 그를 싫어했는데 그 리유가 그가 겉으로는 점잖은체 하지만 실지로는 아주 거만하며 중요하게는 모든 문제를 조선사람의 립장, 재일동포들의 립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는데 있었다.

그중에도 누구보다 그를 싫어하는것은 덕수였다.

그때마다 재호는 여간만 안타깝지 않았다. 조련의장일뿐더러 조련내 당원활동가들의 책임자이기도 한 덕수와 당에서 김운해와 함께 민족문제전반을 맡아보는 원철이와는 누구보다도 가까이 지내면서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일치를 보아야겠으나 매번 서로 엇서기만 하니…

재호도 덕수와 함께 생활해오는 과정에 그에게 다른 사람한테서는 도저히 찾아볼수 없는 의지의 힘이라고 하는것이 최고도로 구비돼있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덕수는 자기의 주장이나 결심을 굽히지 않았고 그 결심을 기어이 실현시키고야마는 무서운 투지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흔히 그런것처럼 일단 결심한 문제에 대해서는 그것이 어떻든 누가 뭐라든 좀처럼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고 어떤 땐 벌컥 성을 내기까지 했다. 그런 점이 재호에게는 제일 속상했다.

그날도 그는 그런 복잡하고도 불편한 심정으로 덕수와 원철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생각했다.

(두사람사이의 감정이 어떻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소한것에 지나지 않는다. 원칙적인 문제, 혁명의 요구앞에서는 개인적인 감정이 작용해서도 안되거니와 작용할수도 없다. 더우기 지금 정세는 해방직후와도 다르지 않는가! 일본공산당과 민주력량이 날을 따라 승승장구하고있다. 이럴 때야말로 원철이 말대로 모든것을 혁명의 요구에 복종시켜야 하지 않는가! 그러자면 우선 우리의 활동이 민족적인 테두리안에서 벗어나 대담하게 일본혁명, 세계혁명의 폭풍속에 뛰여들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두사람의 충돌은 원철이가 앞으로는 학교를 더 늘이지 말고 교육내용도 민족적인 색채가 짙지 않는 방향으로 해나갈 필요가 있다고했을 때 더 격렬해졌다.

《무슨 소릴 하는거요!》

덕수는 마치 선언이라도 하듯이 한마디한마디를 힘을 주어 쪼아박았다.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 교육을 시키는 원칙은 절대로 허물수도, 약화시킬수도 없소. 그리고 앞으로 학교를 더 늘이는것은 물론 교육내용도 조국과 민족에 대한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보충되여야 하오.》

《?…》

삽시에 분위기가 긴장해졌다. 그러나 원철이만은 시무룩이 미소를 머금었는데 그의 태도는 대꾸할 말은 가득하나 그것을 표현한댔자 덕수가 리해하지 못하리라 여겨 단념해버리는것 같았다. 다만 모임이 끝났을 때 방안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을 따름이였다.

《원래 주관이란 함정과 같아서 거기에 빠지면 헤여나기 어려운 법인데 걱정스러운건 덕수동무가 앞으로도 계속 그런 편견에 사로잡혀있다면 투쟁을 옳게 지도하지 못하게 된다는거요. 그리고 대중들로부터 고립될수도 있소. 더우기 문제는 그가 아직도 해방직후 조련이 공산당을 뒤받침해주던 때의 관점에 젖어 조련을 당우에 올려놓는가 하면 조련과 당을 따로 생각하군 하는 옳지 않은 관점이요.

조련내 당원활동가들의 책임자인 그가 계속 그런 견해를 고집한다는건…》

그 말은 재호에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사업상으로 보나 인간적으로 보아 누구보다도 가까운 처지에 있는 자기가 덕수의 그런점을 깨우쳐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하여 마음이 조급해났다.

그러나 덕수가 과연 자기 말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겠는가 하는 걱정이 앞서는것이였다. 무슨 벼락같은 소리를 지르지 않으려나 하는 위구도 없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은 고집을 세워야지. 그렇게 하는게 그자신을 위하고 재일조선인운동을 위한 일인데야…)

어느새 다시 돌아온 수임은 방안에 들어서기 바쁘게 구럭에 든 술병을 꺼내놓았다.

《막걸리는 받아왔지만 안주가 없어 어쩝니껴?》

《안주는 무슨 안주요, 다꾸앙 한쪽이면 되겠는걸.》

술 안 먹겠다고 손을 내저은게 언제냐싶게 재호는 엉치밀이로 방복판에 나앉았다. 여느때같으면 싱글벙글 입가에 웃음까지 피여났을테지만 오늘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마음에 가득찬 이러저러한 걱정들이 머리속에서 맴돌이쳤던것이다. 그러나 되병에 꼴깍 차있는 막걸리를 보느라니 저절로 손이 병모가지를 향해 뻗쳐졌다.

(우선 한잔 하고부터 볼판이지.)

그는 사발에 막걸리를 부은 다음 입에 가져다대고 마시기 시작했다. 꿀꺽꿀꺽하는 소리가 날 때마다 쑥 빠진 목에서 복숭아씨만 한 울대뼈가 덜컥덜컥하고 방아를 찧었다.

그때 문밖에서 발자욱소리가 났다. 귀에 익은 덕수의 기척이였다.

반갑기는 하면서도 어쩐지 전에없이 불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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