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6 회)
제 2 장
4
《그건 그렇고…》
김이 몰몰 피여오르는 정종독구리와 생선회가 담긴 접시들을 식탁우에 조심스레 차려놓은 녀급이 두손을 모아쥐고 나부죽이 절을 하고 나가자 박룡은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눈길로 덕수를 마주보았다. 그 눈길은 마치 이때까지 한 《민단》의 내부사정에 대한 얘기는 껍질에 지나지 않고 이제부터야말로 속살이라는듯 했다.
《이런 나를 두고 자네가 비웃을줄 아네. 자네만 아니라 재일동포들모두가 비웃을테지. 일은 바로되기마련이구 죄는 지은대로 가게마련이라구 난 변명하지 않네. 모든것이 사실이니까.》
덕수는 내심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오만하고 도고하던 박룡이가 이토록 쉽사리 자기의 처지에 대해, 죄악에 찬 과거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하는것일가 하는 의혹때문이였다. 그런 의혹은 그의 말을 과연 어느 정도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을수 없게 했다. 그러나 박룡의 눈빛, 안정을 잃고 번뜩이는 눈빛만은 여느때와는 전혀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였다.
《모든게 사실이네. 난 자네가 같이 일하자고 손을 내밀었을 때 돌아선 사람이요. 돌아서서는 자네와는 반대의 길을 걸은 사람이네. 그러다가 오늘은 그 길에서마저 배척을 당한 사람일세. 결국 두 화살에 맞았다는게 바로 나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 왜놈들한테 붙잡혀 옥살이를 했는데 이제부터는 조선사람들한테서까지 배척을 당했으니, 허-》
말끝마다 《허-》하고 웃음도 아니고 탄식도 아니게 내뱉는 소리는 전에 없던 그의 버릇이였다. 무표정하고 침울하기는 하나 애써 태연하려고 하는 그의 태도로 보아 덕수는 그가 지금 자기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어떤 고뇌와 울분을 터뜨리고싶어한다는것을 짐작할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뭐 신세한탄하려는건 아닐세, 내 처지를 리해해달라는건 더욱 아니구. 내가 이 말을 하는건 단지 이제 와서야 내가 뭔가 깨달았기때문이네. 이제야 겨우 인생이 어떻다는걸 알았다고 할가…》
오래동안의 감옥살이로 인한 발음장애로 하여 떠듬떠듬하는 그의 말은 마치 미리 준비해두었던 대사를 외우는듯 했다.
《인생이란 인간의 행복을 위해 하늘로부터 받은 광명의 편조라는 공자의 말도 있고 끊임없이 더 큰 행복에로 도달하려는 령혼의 순례라는 파라문교도의 말도 있지. 또 인생이란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이웃들에 대한 사랑이라고 한 그리스도교의 말도 있네. 그러나 내가 지금 더 절실히 느끼는건 바로 인생이 뭔가 하는걸 알 때쯤엔 인생이 거의다 지나간 때라는 그 말일세.》
박룡이가 이런 말까지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덕수는 얼떠름해지고말았다. 언제나 놀라울 때일수록 그런것처럼 그는 더욱 마음을 다잡으며 무뚝뚝한 표정으로 박룡이를 지켜보았다.
《특히 난 자네들이 얼마전에 있은 회의에서 내놓은 구호와 그에 호응하는 동포들을 보면서 많은걸 느꼈네. 아니, 놀랐어. 여태껏 일본땅에서 사는 재일동포들이 언제 그렇게 마음을 하나로 합쳐보았나. 실로 경이할 일이 아닐수 없지. 마음을 합쳤으니 이젠 힘을 써도 한결같을게 아닌가. 오죽하면 〈민단〉동포들까지 자네들을 따라나설 기미를 보이겠나 말일세. 물론 이 바람사나운 일본땅에서 언제까지 그런 신심과 의지를 가지고 나갈수 있겠는지 그건 아직 의문이네만… 자-》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보인 박룡은 덕수가 잔을 들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제먼저 입에 갖다대고는 쪼-옥 소리가 나게 들이켰다.
처음엔 박룡이가 하는 말이 어느 정도 진정일가 하는 의심이 없지 않던 덕수였으나 이제 와서는 그가 진정으로 자기를 뉘우치고있다는것을 깨닫게 되자 그에 대해 품고있던 반감과 불만대신 어쩐지 불쌍한 생각이 들면서 련민의 정을 느끼게 되는것이였다. 확실히 박룡의 태도는 자기의 과거를 자책하면서 《자- 난 이렇게도 죄많은 놈이요. 그러니 맘대로 하구려.》하고 모든걸 포기한 사람같았다.
박룡의 그런 모습이 덕수에게는 상대방한테서 항복했다는 말을 듣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의 강타에 쓰러져 일어나지도 못하는 상대방을 내려다보는 심정이기도 했다. 그러자 마음 한구석으로는 그와는 상반되는 어떤 새로운 감정, 이를테면 박룡에 대한 련민은 금할수 없으면서도 그가 자기의 권고를 뿌리친탓으로 겪지 않으면 안되였던 오욕에 찬 과거에 비하면 자기가 걸어온 길은 얼마나 영광과 보람에 넘쳐있는가 하는 긍지와 자랑을 금할수가 없었다.
그런 기분으로 하여 그는 여느때는 입에 대지도 않던 술이였으나 한모금 꿀꺽 베여 마시였다.
《내가 오늘 자네한테 말하자는건 이것과 함께 다른 한가지가 더 있네.》
생선회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박룡이가 한손가락을 세워보이면서 말을 이었다.
《그건 내가 왜 그때 자네의 권고를 뿌리치고 달아났는가 하는걸세. 하긴 이제 와서 그런 얘길 해야 소용이 없다는건 나도 아네만 그래도 인생의 갈림길에 서있는 나로선 터놓고싶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한테만은 털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단 말일세.》
문득 장군님께서 박룡이가 왜 그처럼 돌변했는가고 물어보시던 일이 되살아나면서 박룡이가 오늘 자기를 만나자고 한것이 바로 이 말을 하자는데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건 내 피가 자네들처럼 붉지 않고 검은데 있었지. 바탕은 민족주의자라 해도 자네들은 공산주의자라면 난 무정부주의자니까. 그러나 보다 내가 자네의 권고를 뿌리치고 돌아선데는…》
이번에는 술잔을 입안에 훌 통채로 털어넣다싶이 한 박룡이 다시금 《허!》하고 허구픈 탄식을 터뜨렸다.
《그건 바로 원철이 그 작자때문일세!》
(원철이?)
원철이라는 말에 덕수는 흠칫했다. 박룡이자신이 그런 길을 걷게 된것이 원철이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네와 같은 길을 걷는 동지에 대해 욕한다고 탓할지 모르겠지만 난 이 말은 하지 않을수 없네. 아니, 꼭 해야겠단 말일세.
자네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그자가 나를 두고 뭐랬는지 아나? 그자야 기회만 있으면 동포들이나 일본사람들앞에서 연설하길 좋아하지. 연설할 때마다 그는 나에 대해 언급하면서 박룡이의 사꾸라다〈천황〉암살기도라는것도 왜놈들이 꾸며낸 모략이다, 조선사람들을 탄압하기 위해 꾸며낸 그 음모에 박룡이가 야합했다, 지어는 감옥에 갇혀있었다 해도 별채에서 불고기만 구워먹으며 지냈다고 했단 말일세. 난 아직까지도 그자가 어째서 그런 터무니 없는 악담을 퍼부었는지 리해되지 않네. 억하심정이란 말일세. 단지 제가 재일조선인운동을 한번 맘대로 주물러볼가 했는데 내가 방해되는 존재였다고 리해할따름이네. 그야 공산주의자니까 나같은 놈이 거치장스러울수밖에. 하지만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까지 모해할수 있단 말인가! 한데 더 참을수 없는건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자의 말을 그대로 믿고 나를 경원하고 질시하다못해 증오까지 했다는데 있지.》
덕수도 원철이가 박룡에 대해 하던 말을 기억하고있었다. 그는 조련조직내 공산당원들의 모임때마다 나타나 자기가 감옥에 있을 때 알게 된 사실이라면서 박룡이가 처음엔 일제의 음모에 리용당했지만 후에는 가담했다는것, 때문에 그런 박룡이를 애국자라도 되는듯이 여기는 바로 거기에 엄중성이 있다는것을 루루이 강조했던것이다. 그러면서 박룡이야말로 재일조선인운동에서는 암과 같은 존재라는것을 명심하고 그를 철저히 동포들로부터 고립시켜야 한다고 력설했다. 그러나 덕수는 물론 일부 사람들은 박룡이에 대한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것은 박룡이가 모략에 가담했다면 필경 그 어떤 부귀나 영화를 바라서일텐데 사형까지 선고받은, 설사 사형당하지 않는다 해도 종신형이 분명하다는걸 알고있는 그가 어떻게 음모에 가담했다고 볼수 있을것인가! 그러나 원철은 《건동》을 꾸민 박룡이가 다시 《민단》단장이 되여 조련을 정면에서 반대해나서자 대뜸 《봐라! 내 이미부터 그자가 어떤 놈이라는것을 말하지 않았느냐.》하고 더욱 기세등등했던것이다.
《사람이 제일 괴로운게 뭔가? 그건 바로 자기의 진심을 의심받고 유린당할 때지. 난 〈아마데라스 오오미까미〉라는 귀신딱지에다 고추장과 새우젓을 발라놓군 했네. 그렇게 하면 〈천황〉이 죽는다는 말을 듣고 말일세. 난 사실 어리석게도 〈천황〉만 죽이면 조선이 독립되리라고 믿었지. 그래 그런 내가, 더우기 나를 도우려다가 놈들에게 기만당한것이 분해서 감옥에서 목매죽은 후미꼬의 원한까지 가슴에 품고사는 내가 원철이 그자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왜놈의 개로 몰리우다니, 허-》
여느 사람 같으면 흥분에 못이겨 목청을 돋구며 주먹을 휘둘러댈것이였으나 그는 까딱 움직이지 않는 자셀뿐더러 억양도 감정에 따르는 고저장단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오랜 감옥생활이 그에게 일체 감정에 따르는 행동의 균형을 파괴해버렸던것이다. 단지 번뜩이는 두눈만이 밤하늘에 충천하는 불길처럼 이글거릴뿐이였다.
《난 그때 결심했네. 이제부터 내가 싸울 대상은 바로 원철이 저놈이다 하고 말일세. 난 사실 나를 옥에 가둔 왜놈들보다 그놈이 더 가증스러웠네. 한데 원철이 그놈인즉 일본공산당에 적을 두고있기는 하지만 자네들과 한패가 아닌가! 자네들이 그의 뒤를 봐주는가 하면 그자 역시 자네들을 믿고 일하거던. 그러니 나로서는 결국 조련을 반대하는수밖에!》
사람의 운명이 이렇듯 한순간에 그것도 모해를 당한 울분으로 하여 본의아닌 방향, 정반대방향으로 역전되였다는 사실이 덕수에게는 놀랍고도 불가사의하기만 했다. 그제야 장군님께서 하시던 말씀이 새삼스런 의미로 되새겨지면서 확실히 여기에는 박룡이 한사람만이 아닌 보다 심각한 문제, 인간의 운명에 관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룡에 대한 원철의 터무니없는 중상도 중상이려니와 그런 원철에 대한 증오로부터 곧은목으로 행동한 박룡이는 결국 자기 한생은 물론 력사에까지 씻을수 없는 오점을 남기고만것이다! 그렇게 무분별하게까지 나간 박룡의 성격이 리해되기도 했으나 그런 우직한 성격으로 하여 자기 운명을 망친 그를 보느라니 은연중 그 사람의 성격이 곧 그 사람의 운명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런 박룡에 대한 동정이 크면 클수록 원래부터 좋지 않게 보아오던 원철에 대한 불만은 더 가증되였다.
《이제 와서 돌이켜볼 때 난 결국 모든것을 잃어버린 사람일세. 왜놈들한테 청춘을 빼앗긴데다 동포들한테서는 버림을 받았으니까. 거기다가 하나밖에 없던 딸까지…》
딸에 대한 말이 나오자 덕수는 다그쳐물었다.
《그래! 영신이한테서는 아직 소식이 없나?》
《소식?》
술잔을 내려다보는 박룡의 입귀가 한쪽으로 이그러졌다.
《이 애비를 저주해서 집을 뛰쳐나간 앤데 무슨 소식이 있겠나. 아마 어데선가 나를 원망하면서 눈물로 살아가겠지. 살아있기나 하겠는지… 혹시 독한 마음을 먹고 벌써 제 에미뒤를 따라갔는지도 모를 일이지.》
《무슨 소릴!》
덕수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걔가 자네 딸이긴 하지만 키우긴 우리가 키웠다는걸 알아두게. 결코 그럴 애가 아니야! 또 그렇게 되여서도 안되는거고.》
덕수는 영신이에 대해 장군님께서 걱정하시던 일이며 지영이에 대한 소식을 박룡이에게 털어놓지 못하는것이 여간만 안타깝지 않았다.
《딸애를 각별히 위해주던 지영이라는 사람이 평양으로 갔다는 말은 나도 들었네. 난 그 사람 가슴에도 아물길 없는 상처를 남겨놓았지. 딸을 통해 날 자기네쪽으로 끌어들이려는 조련의 밀사로 여기고 죽이려고까지 했댔으니까, 허-
여보게, 난 이렇게 모든걸 다 잃어버렸네. 동포들도 혈육도… 그렇지만 하나만은 잃지 않았어. 그게 뭔지 아나?》
담배대에 불을 붙인 박룡은 다소 활기띤 동작으로 말을 이었다.
《난 사실 이 말을 하자고 오늘 자네를 만나자고 했네. 그건 바로 앞으로의 희망일세. 난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을 때에도 희망만은 버리지 않았지. 무슨 희망? 왜놈들이 망할 날이 온다는 희망, 그러면 내가 살아난다는 희망이였지. 그런데 그 희망이 실현됐네. 그런것처럼 난 지금도…》
이때 미닫이문이 소리없이 열리면서 기모노를 입은 녀인이 샤미센(일본의 민족악기)을 안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무릎을 꿇고앉은 그는 두사람을 향해 방그레 눈으로만 웃는 애교에 넘친 미소를 쏟아부었다.
《오- 노래를 들려주겠다는거냐?》
박룡의 서툴기 짝이 없는 일본말발음에 약간 놀란듯 한 녀인은 다시금 방그레 하고 웃어보였다. 인사는 물론 일체의 언어가 자기에게는 오로지 미소라는듯 했고 또 그것 하나면 만사능통이라는 식이였다.
《그럼 어디 〈아리랑〉을 불러라.》
《아-리-란?》
동그랗게 뜬 녀인의 두눈이 대뜸 천정으로 향해졌다.
《어느 지방 노랜지요?》
《내 고향 노래다.》
《고향이 어디신지요?》
《문경이지.》
《무느견?》
그 동그란 눈이 이번엔 창문쪽으로 쏠리였다. 녀인의 그런 태도는 노래라면 어느 지방 노래나 다 자신이 있어 늘 손님들에게 환대를 받군 했는데 이런 일이 어디 있나 하고 면구스러워하는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의 난처한 처지를 재치있는 롱말로 살짝 넘겨보려는 창기다운 속심이 깔려있는것 같기도 했다.
《됐다! 가보아라. 노래는 들은것으로 치지.》
《안됩니다.》
녀인은 아양이 어린 어조로 말하며 제법 어깨까지 살레살레 저었다.
《노래를 부르자고 온 소인이 노래를 못 불렀으니 어떤 벌도 마다 못할 죄를 지은것입니다. 그 죄 어떻게 벌하시겠는지 소인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그래? 그럼 술이라도 한잔 치지그래!》
《알겠습니다. 그럼 눈물대신 노래, 노래대신 술이라는 류행가대로…》
쪼르르 상앞으로 다가앉아 한손으로 늘어진 기모노의 소매를 잡고 익숙한 동작으로 술을 따르던 녀인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다시 정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소인 술을 치는것으로는 벌로 여기지 않겠나이다. 개의치 마시고 더 엄한 벌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어떤 벌도 마다하지 않겠다 그 말인가?》
《그렇소이다. 가혹한 벌일수록 행복으로 여기겠나이다.》
녀인의 두눈에는 어디까지가 진정이고 롱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미소가 피여있었다.
《허, 이 사람 보게! 그럼 그건 어디 후에 보기로 할가?》
《그럼 소인 물러가 분부가 있기를 기다리겠나이다.》
방에 들어올 때와 똑같은 웃음을 두사람에게 던진 녀인은 역시 들어올 때와 똑같이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그래 그 희망이라는게 뭔데?》
녀인이 방에서 나가기 바쁘게 덕수는 불깃하게 달아오른 박룡의 얼굴을 마주보며 물었다.
《희망말인가?》
저가락을 손에 든 박룡은 안주를 집으려다 말고 굳어진 자세로 말했다.
《서울로 가려는거네!》
《서울에?》
서울이라는 말에 덕수의 눈길은 금시 꼿꼿해졌다.
《왜 그러나? 서울에 가서 백범과 함께 일해볼 생각일세. 그에게 여기 소식을 알리면서 서울에 갈 결심이라고 하니 당장 건너오라는게 아닌가!》
덕수도 해방전부터 박룡이가 김구와 련계가 있었으며 특히 그가 해방직후 《천황》과 군국주의거두들을 암살하려다가 일본에서 사형당한 윤봉길, 리봉창, 백정기렬사들의 유해를 김구의 요구대로 서울로 이관해준데 대해서도 알고있었다.
《실은 그 백범이 나한테 희망을 품게 해준걸세. 지난해 봄 평양에 갔다와서부터 인생전환을 한 백범이 아닌가! 나도 이제부턴 여생이나마 그와 함께 보내려는거네. 어떤가?》
좀전까지만 해도 생명의 불꽃이 꺼진듯이 보이던 그의 눈이 지금은 어딘가 미타해하는 기색이 없진 않았으나 한껏 밝게 타오르고있었다.
《그러니까 이젠 자네가…》
덕수는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이제 와서야 그는 박룡이가 자기의 과거를 진심으로 뉘우치고있을뿐아니라 새로운 결심으로 인생을 출발하려는 결심이라는것을 똑똑히 알수 있었다. 그러자 그의 앞날을 축복해주고 고무해주고싶은 충동이 맹렬하게 솟구치였다.
《좋은 일일세. 훌륭한 결심이라구 보네. 난 그 길에서는 자네가 꼭 보람을 찾게 되리라구 믿네.》
덕수는 저도 모르게 앞에 놓인 잔을 들어보였다. 그가 먼저 잔을 들고 상대방에게 술을 권해본적이라고는 드문 일이였다.
《백범을 찾아간다… 좋네! 그런데 그가 평양에 가서 어떻게 인생전환하게 됐는지 아나?》
박룡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내 그걸 얘기해주지!》
이제부터는 자기 차례라는듯 식탁앞으로 다가앉은 덕수는 비로소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