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 회)

제 3 장

14

 

…정오가 지난지 얼마 안되여 날마다 한복판으로 예상치 않았던 돗굉이바람(회오리바람)이 밀려들었다.

배군들이 제일로 꺼리는 손돌바람보다 훨씬 더 사납다고 하는 돗굉이바람은 허연 물머리를 높이 쳐든 집채같은 파도가 껑충 뛰여오르게도 하고 허궁 내려꽂히게도 하면서 거대한 바다를 통채로 마구 휘저어댔다.

질서있게 렬을 지어 전진하던 전함들은 삽시에 휘뿌려던진 락엽무데기처럼 산산이 흩어지면서 곤두박질이라도 할듯이 위태롭게 기울거리였다.

팽팽하게 불어난 돛폭들은 금시 찢어져나갈듯 아츠러운 소리를 내며 펄럭거리였다.

다락안의 평상우에 단정히 앉아 대마도지형도를 보고있던 박위는 선체의 심상치 않은 요동을 감촉하자 돗굉이바람이 터졌다는것을 알아차리였다.

평상을 차고일어선 박위는 다락을 뛰쳐나왔다.

갑판우에 나서니 언제 어떻게 지휘선으로 넘어왔는지 여러 장수들이 배가 흔들리는대로 비칠거리며 박위쪽으로 다가오고있었다.

《엥이, 내 그만큼 첫날에 길을 잡아서는 안된다고 했는데 끝끝내 고집을 쓰더니… 변을 만날수밖에…》

연방 들씌워지는 물보라에 온몸이 촉촉히 젖은 박자안이 쥐꼬리같은 수염을 비틀어짜며 두덜거리였다.

《종작없는 소리 그만하오.》

박위는 박자안의 얼뜬 소리를 단호하게 무찔러버리고나서 광란하는 바다를 휘둘러보았다.

사처에서 연해연방 솟구쳐오르는 거방진 파도, 그속에서 방향없이 밀려다니는 전함들.

귀가 아플 지경으로 소란한 파도소리.

가슴이 서늘할 정도로 으스산한 바람소리.

다급한 비명소리, 짜증어린 고함소리…

(어떻게 할것인가?)

박위의 긴장된 뇌리는 난국을 타개할 출구를 찾아 총망히 모대기였다.

노상 쟁개비 끓듯 하는 성미인데다 책을 통해서나 전쟁을 알고있지 실지 싸움마당에는 별반 나서본적 없는 박자안이 또다시 동닿지 않는 소리를 꺼내놓았다.

《옛글에 모사재인이요 성사재천이라 했소. 일은 사람이 꾸미지만 성사는 하늘이 한다는 뜻이 아니겠소.

암만 봐야 오늘은 하늘이 노한듯 하니 일시 회군했다가 좋은 날을 잡아가지고 다시 나오는게 어떻소?》

김종연이 비양기어린 시선으로 자안을 흘겨보더니 위엄기있는 청으로 면박을 주었다.

《그런 창피한 소리를 할바에야 함께 오기는 왜 왔소? 방략이 없거든 차라리 입다물고 가만있는 편이 낫겠구려.》

박위는 더이상 자안을 그대로 내버려둘수 없었다.

장수 한사람의 동요는 전군에 비관과 실망을 부식시킬수 있거늘 애초에 그 동요를 짓뭉개버려야 했다.

박위는 자안이쪽으로 돌아섰다.

또 한차례 솟구쳐오른 물바래를 뒤집어쓴 박위의 얼굴은 기름이라도 바른것처럼 번들거리였다.

《그러니 박공은 풍랑이 무서워서 원정을 포기하자는거요? 도대체 공은 이번 원정이 어떻게 마련되였으며 이 원정에 어떤 뜻이 담겨져있는지 알기나 하오?

우리는 절대로 이 길에서 물러설수 없소.

기어이 풍랑을 헤치고 나가 왜구를 격멸하는 길밖에 다른 길은 없단 말이요.

풍랑이 무섭고 죽음이 두렵다면 박공은 혼자 조용히 돌아가오.

하지만 그냥 여기 남아서 군심을 소란하게 한다면 즉시 군률의 칼을 받게 될게요.》

박자안은 황급히 채머리를 흔들며 몰풍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랑패가 있을가보아 한 소리지 풍랑이 무섭다는 뜻은 아니요.》

박위는 더이상 자안과 가타부타할 정신적경황이 없었다.

둘러선 장수들을 빠르게 살펴보고난 박위는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제공, 천하에 제일로 간흉한 왜구를 소멸하기 위해 정의의 검을 들고 나선 우리가 이쯤한 풍랑에 기가 질려 배를 돌린다면 현세의 사람들과 래세의 후손들이 고려장수들을 두고 뭐라고 하겠소.

다들 아실테지만 사람의 몸은 오늘에 살고있지만 사람의 얼굴은 오늘과 래일앞에 다같이 떳떳하고 자랑스러워야 하오.

본관이 풍랑을 극복할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보았는데… 어떤고 하니 매 전함들을 바줄로 묶어서 하나로 쭉 잇자는거요. 그러면 배가 홀로 뒤집히는 일도 없을게고 전함마다 풍랑의 힘도 덜 받게 될거란 말이요.》

《그것 참 명안이요.》

《당장 시행해봅시다그려.》

최칠석과 김종연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선참으로 호응해나섰다.

박위는 지체없이 령을 내리였다.

령을 받은 장수들은 저마끔 소리를 지르고 기발을 휘둘러 주위에서 떠도는 자기의 배를 가까이 오게 했다.

배가 다가오자 훌쩍훌쩍 뛰여서 넘어가거나 바줄을 타고 미끄러져 넘어갔다.

제일 나중에야 박위의 지휘선을 떠나려던 칠석은 문득 고개를 돌리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웠다.

《새삼스러운 말 같소만 해암은 진정 우리 장수들의 거울이요 아니, 살아있는 기념비라고 해야 옳을게요.》

박위는 쑥스럽기도 하고 난처하기도 했으나 웃음의 소리로 응대했다.

《헛허허, 백운은 이런 마당에서까지 시조를 지어 읊는게요?

그대의 그 말은 나의 인생목표이지 나자체는 아니요.

자, 그런 말은 후날에 하기로 하고 어서 제 배에 넘어가 그대의 우군을 잘 통솔해주오.》

칠석은 박위의 손을 힘껏 잡아 흔들고나서 끼우뚱거리며 다가온 자기의 전함으로 훌쩍 몸을 날리였다.

미구하여 사방사처에서 장수들의 청청한 웨침소리가 으스산한 파도소리를 짓누르며 울려퍼지였다.

《바줄을 썩썩 당겨라!》

《그쪽에서 바줄을 걸었거든 어서 이쪽으로 넘겨라!》

《굼벵이 천장하느냐, 빨리 배를 이쪽으로 바싹 붙여라!》…

얼마후 백여척의 전함은 모두 바줄과 바줄로 이어지였다.

방향없이 오가던 배들은 안정된 자세를 유지하면서 일매지게 진격방향으로 미끄러져나갔다.

전함들마다에서 기세가 오른 군사들이 왁작 떠들어댔다.

《돛대를 조금 틀어라!》

《노를 좀 더 세게 저어라.》

《나가자!》, 《나간다.》…

고함소리, 웨침소리는 바람소리, 파도소리를 짓누르며 기세차게 울리였다.

군사들의 사기가 고조된탓인지 풍랑은 아까보다 훨씬 숙어든듯싶었다.

홈빡 젖은 몸으로 선수에 나서서 진격하는 전함들을 살펴보던 박위는 자그마한 입술을 곱게 피우며 고개방아를 찧었다.

(정녕 배짱이 있고 기개가 있는 장수라면 할수 없다는 말을 가장 큰 적으로 여겨야 한다.

우리의 검이 제일먼저 찔러눕혀야 할 적은 바로 그 〈할수 없다.〉는 말이다!)

뜻밖에 다닥친 돗굉이바람으로 하여 일시 소요스러웠던 원정의 첫장은 성과적으로 열리였다.

고려의 전함들은 아직도 거방진 몸통을 흉물스럽게 뒤트는 사나운 파도를 헤가르며 흐뭇하게 달음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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