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 회)

제 3 장

12

 

저벅저벅…

여러 사람이 전옥앞마당의 눈을 밟으며 성급히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위는 비몽사몽간에 스르시 눈을 떴다. 습관적으로 살창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였다.

살창앞에 다가선 사람들의 륜곽은 어룽어룽하게 알리였으나 그들의 얼굴모상은 뚜렷하게 가려지지 않았다.

의식이 흐릿한데다 살창밖의 사람들은 전부 밝은빛을 등에 지고있는탓이였다.

(헌부의 라졸들이 또 나를 내가려고 왔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드러누워 추한 꼴을 보여서야 안되지.

어서 일어나서 내 발로 나가자.

헌데 저놈들이 오늘은 어인 일로 창앞에 늘어붙어서 들어올념을 않는고.

이제는 저것들까지 나를 조롱할셈인가?!

그건 어찌 됐든 오늘은 완강하게 리성계나 전하의 국문을 요청하자.

대사헌과 아무리 골싸움을 해봐야 소득이 있을리 없다. 리성계나 전하앞에서 나의 청백과 원정의지를 밝혀야 한다.)

박위는 쇠덩이처럼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켜세웠다.

전신이 들쑤시고 눈앞이 핑핑 돌아갔으나 강잉히 한발두발 걸음을 내짚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걸음은 옥문쪽이 아니라 살창앞으로 옮겨지였다.

불현듯 살창밖에서 너무도 귀에 익은 음성이 울음소리와 엇섞이여 날아왔다.

《…어쩌다 장군께서 이 지경이 되였소이까. 어쩌다.… 어흐흑.》

박위는 흠칫 몸을 떨며 굳어지였다.

이게 누구의 소리인가?

여삼의 목소리가 아니였다. 아침저녁으로 때식을 날라들이는 여삼이가 새삼스럽게 울고불고할 까닭도 없었다.

그렇다면 오천의 목소리인가.

아니, 오천은 지금 김해에 남아 새로 무은 전함들과 화약창고를 지키는 한편 왜구의 세작을 잡기 위해 뛰여다니고있을것이다. 헌데 웅글진 음성은 아무래도 오천의 목소리와 비슷하지 않는가?!

으흑, 이번에는 어떤 녀자의 짓눌린듯 한 흐느낌소리가 간헐적으로 날아들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인고?

무슨 연유로 계집사람이 옥에 왔으며 어이하여 오자바람 울음부터 터치는것인가?!

살창앞에 다가선 박위는 궁금증이 가득한 시선으로 밖을 내다보며 다급히 물었다.

《그대들은 대체 누구들인가?》

어떤 젊은 녀자가 나부시 수그렸던 고개를 오연히 들어올리였다.

눈물매닥질이 되기는 했으나 유순한 색조와 청순하면서도 도담한 기운이 어울려도는 젊은 녀자의 백옥같이 흰 얼굴이 눈부시게 안겨왔다.

그는 분명 자기의 안해 최씨였다.

10여년전 왜구의 란을 만나 죽은 최씨가 환생하여 옥앞에 나타난것이였다. 이 어찌된 일인가.

꿈인가, 생시인가?!…

들뛰는 가슴을 안고 녀인의 낯익은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던 박위는 녀자의 목언저리에 박혀있는 까만 기미를 찾아보는 순간 소스라치듯 놀라며 창밖으로 손을 내뻗치였다.

반가움과 놀라움이 극에 달했을 때만이 울릴수 있는 거의나 기괴한 음성이 터져나갔다.

《이게 리옥이 아닌가, 엉?!》

할끔하게 살이 깎이여 다소 생소해보이기는 했으나 처녀는 분명 살아있는 리옥이였다.

대마도에 잡혀간 리옥이, 이제는 필시 저세상 사람이 된줄로 알고있던 리옥이가 어떻게 되여 여기 개경의 옥문앞에 나타났단 말인가?

벅찬 환희로 하여 심장은 금시 흉곽을 터뜨리고 튀여나올듯이 세차게 높뛰였다.

그런중에도 도저히 풀릴것 같지 않은 의문이 그냥 샘처럼 솟구쳐올랐다.

리옥은 눈물자욱이 번들거리는 흰 얼굴을 다시금 나부시 숙이며 더 한층 세찬 오열을 터뜨렸다.

《으흐흑… 리옥이옵니다. 죄많은 소녀 리옥이 장군께 문안드리옵니다.》

《과연 리옥이로군. 헌데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가? 어떻게 살아서 예까지 올수 있었나 말이야.》

모든것이 꿈아닌 현실임을 저저이 느낄수록 기쁨과 환희는 가슴버겹게 몰밀려들었다.

문득 만난고초를 헤치고 오늘에 이르렀을 리옥의 지난 생활이 막연하게나마 짐작되자 가슴은 오리오리 터갈라지는듯싶었다.

더운침을 삼키며 사무치게 그립던 리옥의 청순한 모습을 뜯어보던 박위는 그가 미처 대답말을 하기도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왜구의 소굴을 박차고 예까지 오자니 속인들 얼마나 썩이고 고생인들 얼마나 했을텐고…

사내대장부도 쉬이 헤치지 못할 험난한 길을 아녀자의 몸으로 뚫고왔으니 정녕 갸륵하도다.》

리옥은 리옥이대로 박위와의 꿈같은 상봉이 기쁘기 그지없었다. 자기가 헤쳐온 아슬아슬한 위험의 고비들이 더없이 자랑스럽고 긍지로왔다.

그러면서도 예전의 미쁜 모색이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박위의 처절한 모습이 볼수록 가슴이 찢어지였다.

하여 리옥은 박위의 물음에 한마디도 변변히 응대할수 없었다.

온순한 소녀애마냥 무턱대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처 흐느끼기만 했다.

한옆에 물러서있던 오천은 이제야말로 자기가 나설 때라고 생각한듯 성큼 박위앞으로 다가서더니 때늦은 인사를 정히 차리고나서 그쯘한 이를 하얗게 드러냈다.

《기뻐하시오이다. 이제는 모든 일이 대낮처럼 쨋쨋하게 밝혀졌소이다.》

박위에게는 너무도 비약이 심한 오천의 말 역시 리옥의 돌연한 출현과 마찬가지로 선뜻 리해되지 않았다.

그러거나말거나 어느 정도 자기의 들뜬 기분에 사로잡힌 오천은 연방 손세까지 써가며 말을 이어나갔다.

사연은 대략 이러했다.

…그날도 오천은 날이 저물자 새로 무은 전함들과 화약광을 돌아보고나서 팔팔한 군사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길순시에 올랐다.

오천의 견해에 의하면 지난 추석날 기생년의 집에서 나와 바다로 내뺀 놈은 틀림없는 왜구의 세작이였다.

지금이라도 무작정 요망해사한 기생년을 잡아다 족치고싶었으나 그렇게 하는 경우 그년과 짬짜미를 하던 세작놈은 바싹 꼬리를 사릴것이요, 개경에 잡혀간 박위에게는 더 큰 루가 미칠것 같았다.

이제는 바다에 나가 목을 지키고있다가 기여드는 세작놈을 산채로 모짝 그물질해 올리는것이 제일로 현책이였다.

하여 그는 박위가 잡혀간 뒤 거의 매일 밤 전함정박장을 감돌거나 바다에 나가 대마도쪽의 바다길을 살피군 했다.

윤통은 물론 오천의 일을 각방으로 떠밀어주었다.…

오천이가 이끄는 세척의 전함은 느긋하게 불어내리는 북동풍을 타고 비교적 빠른 속도로 신도를 지나 가덕도쪽으로 나갔다.

세척의 전함이 각기 자기가 맡은 길목으로 흩어져가려고 돛폭을 펄럭이며 선수를 돌릴 때였다.

매일과 같이 소연한 파도소리만이 떠돌던 가덕도쪽에서 낯선 퉁궁이 한척이 자그마한 몸통을 들까불며 불쑥 떠올랐다.

불어내리는 바람탓에 퉁궁이는 거부기처럼 속도가 느린데 그뒤로 역시 속도가 변변치 않은 두척의 다락배가 기를 쓰고 다가들고있었다.

다락배갑판우에서 왜구들이 벅작 떠들어대는 소리가 오천이네들의 귀에까지 그대로 들려왔다.

《하야꾸(빨리) 하야꾸…》

선수에 나서서 눈앞의 정황을 예리하게 살펴보던 오천은 쾌재를 올리였다.

(이게 웬 떡이냐? 매일 밤 빈 그물만 당기던 이 오천이가 오늘 밤엔 한꺼번에 두세두름의 왜구를 떠올리게 되지 않았는가.

아무렴 이 오천의 궁냥이 빗나갈리 없지. 이놈들― 오늘은 내 손에서 한놈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오천은 신속히 령을 내리였다.

《모두들 퉁궁이쪽으로 배를 달려라! 우선 앞에 선 퉁궁이부터 먹어야겠다!》

전함들은 일제히 퉁궁이를 향해 달리였다.

불현듯 오천의 뇌리속으로 이상한 예감이 비껴들었다.

오천은 다시금 눈앞의 정황을 세세히 살피였다.

퉁궁이 역시 왜구들의 배건만 고려의 전함들이 다가오는것을 뻔히 보면서도 그냥 마주 달려오고있었다.

헌데 퉁궁이를 따르던 다락배들은 차츰 뒤걸음을 치면서 고려의 전함이 아니라 퉁궁이에 대고 기수없이 화살을 퍼붓고있었다.

(이게 무슨 쪼간이 붙어있는 판이로구나. 다락배나 퉁궁이는 다 왜구들쪽에서 나왔는데 퉁궁이는 꼭 승냥이에게 쫓기는 애기사슴꼴이니 이게 무슨 일인가?)

오천은 여념없이 뒤로 물러나는 다락배들과 내처 이쪽으로 다가오는 퉁궁이를 갈마보며 착잡한 생각을 굴리였다.

실상 다락배들은 퉁궁이를 추격하고있었다.

리옥이가 대마도를 탈출하기 위해 장서방을 이끌고 바다가로 나왔던 그날 밤.

리옥은 자기가 하도소도의 교활한 수에 걸려들었다는것을 깨닫게 되자 잠시 절망과 공포에 휘감기여 할바를 찾지 못했다.

바로 그때 품속깊이 간수한 박위의 단검이 리옥의 심장에 대고 말을 시작했다.

(정의와 도의를 리해한다고 하여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말할수 없다.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그것을 지킬 때 그는 정녕 아름다운 사람이다. 실행하라. 실행이 없다면 아름다운 인간도 없다.)

갑자기 불가사의한 힘과 용기가 뻗쳐올랐다.

발소리를 죽여가며 하도소도의 뒤로 돌아간 리옥은 혼신의 힘을 다 내여 놈의 잔등에 단검을 들이박았다.

하고는 얼혼이 다 빠져버린 장서방을 질질 끌다싶이 하여 바다우에 배를 띄웠다.

다음날 정오때가 되여서야 술에서 깨여난 사다께는 밤새 벌어진 천만뜻밖의 사건을 알게 되자 관사가 떠나갈듯이 고아대며 길길이 날뛰였다.

파수군 세놈이 사다께의 칼에 《오멘》, 《도》, 《후꾸》를 얻어맞고 피범벅이 되여 나동그라지였다.

이어 사다께는 두척의 날랜 다락배를 따로 뽑아 퉁궁이를 뒤쫓아가게 하였다.…

오천은 물론 멀리 왜땅에서 벌어진 이러한 사연을 전혀 알수 없었다.

단지 직감적으로 매에게 쫓기우는 장꿩이나 다름없는 퉁궁이는 잠시 내버려두고 다락배들부터 소멸하는것이 옳을듯싶었다.

오천은 고쳐 령을 내리였다.

《퉁궁이는 내버려두고 다락배들부터 태워버려라.》

세척의 고려전함은 물갈기를 날리며 다락배들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면서 불꼬리가 달린 화전들을 련속 날리였다.

화전들은 밤하늘을 빨갛게 째며 비발처럼 무수히 날아갔다.

얼마 안있어 다락배들의 돛폭에 불이 달리였다.

불달린 새앙쥐꼴이 된 다락배들은 검푸른 바다에 불그레한 화광을 던지며 황망히 뺑소니를 쳤다.

그들의 파멸은 정해진것이라 더이상 따라갈 필요가 없었다.

오천은 곧 배머리를 돌려 가랑잎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는 퉁궁이에 다가갔다.

전함의 선수가 퉁궁이에 다가붙자 홰를 쳐들고 빈배처럼 괴괴한 퉁궁이갑판에 뛰여내리였다.

천만뜻밖에도 배안에는 고려복색을 한 젊은 사내와 젊은 녀인이 쓰러져있었다.

홰불을 바투 가져다대고 남녀의 얼굴을 번갈아 살펴보던 오천은 녀자의 얼굴에서 리옥의 모색을 찾아내는 순간 너무도 놀라 그만 홰불을 바다물에 떨구었다.

어느 옛 문헌의 갈피에 《대마도를 탈출한 고려인부부…》라고 잘못 기록된 대목의 실상은 대개 이러했다.

그날 밤도 윤통은 홀로 처소에 들어앉아 도저히 해결할 가망이 없어보이는 박위의 일이 통분하여 연방 술대접을 기울이고있었다.

이럴 때 오천이가 범잡은 포수의 얼굴을 하고 윤통의 처소로 뛰여들었다.

오천을 통해 리옥의 탈출소식과 역모사건의 대략적인 진상을 알게 된 윤통은 그 당장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술대접을 내동댕이친 윤통은 분분히 칼을 비껴차며 사려문 이발새로 부르짖었다.

《내 벌써 조호백의 밑구멍에서 구린내가 난다는것을 감촉한지는 이미 오랬다. 박장군은 호백이 네놈이 개심하기를 그리도 원하고 믿었는데 네놈은 종시 덕을 악으로 갚았구나.

하기사 검둥개 열번 목욕시킨다고 하얀 개가 될가부냐.

조호백이 네 이놈― 쥐새끼같은 네가 호랑이같은 박장군을 모함하고도 무탈할줄 알았느냐?》

한참이나 분을 토하던 윤통은 곧 문을 차고 밖으로 뛰여나갔다.

그당장 말을 몰아 읍내까지 치달아오른 윤통은 앞을 막는 관가의 문지기들을 허깨비처럼 차넘기고 곧장 동헌으로 돌입했다.

동헌앞뜰은 물속처럼 고요한데 환하게 불을 밝힌 동헌방에서는 음탕한 년놈이 마음놓고 진수작을 하는 소리가 두세두세 흘러나왔다.

그들은 두말할것도 없이 조호백과 매화였다.

《이 애 매화야, 박위라는 놈이 잡혀가니 요즘은 먹지 않아도 살이 오를것 같구나.

네가 아니였더면 박위는 지금도 김해땅을 타고앉아 우리 관가와 고을백성들을 못 견디게 지지고 볶고 할게다.

참말이지 너의 령롱한 수단덕에 만가지 시름이 다 사라졌구나.》

호백은 매화가 그지없이 고맙고 기특한듯 계집의 통통한 어깨를 정차게 쓸어만지였다.

허나 호백의 심사는 사실 박위가 이곳에 있을 때보다 훨씬 무겁고 착잡했다.

귀넓은 동자보살처럼 시골소식, 개경소식을 죄다 휑하게 꿰뚫고있는 호백은 조정의 요즘소식을 낱낱이 알고있었다.

처음 얼마간은 일이 유리하게 번져가는 바람에 박위의 처형은 먹어놓은 떡이라고 생각했는데 얼마 안있어 예견치도 않았던 최칠석과 김종연들이 울뚝불뚝 솟구쳐올랐다.

백성놈들까지 와와 밀려다니며 박위의 무죄를 떠들어댔다.

차차 리성계파의 량반들까지 《분명치도 않은 증거를 가지고 박위와 같은 견실한 장수를 처형하는것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제 손으로 죽이는것과 같은 미련한 행위》라고 수군거리였다.

그렇게도 믿고있던 리성계는 수염을 빡 내리씻고나앉아 박위의 사건을 먼산의 불구경하듯 했다.

호백은 간에 불이 달리였다.

이러다가 만일 박위가 무죄로 판명된다면 출처가 분명치 않은 왜구의 편지를 련속 주어다섬긴 자기에게 죽음이상의 형벌이 차례질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였다.

허나 이제와서 모래불에 흘린 물을 어떻게 주어담는단 말인가.

호백은 사실 박위가 역적모의를 한다고 처음으로 고변할 때 그에게 왜구와 한동아리가 되였다는 험턱까지 씌울 생각을 미처 못했었다.

헌데 매화가 그럴듯한 편지와 소문을 들고와 배를 쓸고 등을 문지르는 바람에 한발두발 걸음을 내짚은것이 이제는 도저히 헤여나올수 없는 진구렁속에 깊숙이 빠지였다.

그때는 이왕지사 젖은 치마에 이슬을 가리랴, 박위만 제끼면 그만이다 하는 생각에 용기도 나고 배심도 생기였으며 실지 모든 일을 삶은개 눈알 뽑듯 손쉽게 해제낄 자신도 있었다.

모든 일이 마른 개다리 탈리듯 뒤탈리는 요즘에 와서야 호백은 비로소 지금까지 자기가 행한 일이 스스로도 엄청나게 생각되여 돌이켜 볼 때마다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그러고보면 매화는 왜구와 줄이 닿아있는 암개귀신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며칠동안을 내처 술상을 끼고앉아 골을 썩이던 호백은 마침내 매화를 조용히 없애치우리라고 작정했다.

벼락에는 삼태기라도 뒤집어쓴다고 죽을고에서 헤여나오자면 지금 당장 그를 죽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매화를 없애치우면 후날 자기가 심문을 당하는 경우 모든것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뒤번져놓아도 사헌부에서는 도저히 실상을 캐낼수 없을것이요, 따라서 죄상은 훨씬 가벼워질것이였다.

호백은 오늘 밤중으로 굴대장신같은 자객들의 손에 죽게 될 매화가 다소 측은했으나 원체 곱게 생긴 계집은 박명하다는 문자말이 떠오르자 자기의 행위가 전혀 잔인하게 느껴지지 않을뿐아니라 계집의 운명도 타고난 팔자로 의당하게 생각되였다.

《아유, 아퍼요. 좀 살랑살랑…》

호백은 음기가 바싹 동해올라 계집을 끄당기고 계집은 달아오른 사내놈을 골려먹는 재미가 달달하여 이리저리 몸을 뒤틀었다.

바로 이때 거칠기 짝이 없는 손길이 거침없이 방문을 밀어제끼였다.

눈에서 퍼런 불이 뚝뚝 떨어지는 윤통이 먼저 신발을 신은채로 들어서고 그뒤로 오천이와 여러 군사가 같은 본새로 우르르 밀려들었다.

금시 지붕이 꺼져내리기라도 한듯 깜짝 놀란 호백은 탐라말같은 계집을 간신히 밀어제끼고 후닥닥 뛰여일어났다.

불길한 예감이 쇠몽치처럼 뒤머리를 때렸으나 한껏 기를 돋구어가지고 소래기를 내질렀다.

《아닌 밤중에 이게 무슨짓이냐?

군영것들은 법도 없고 례절도 모르느냐?》

윤통은 가뜩이나 험하게 생긴 눈을 사납게 뒤굴리며 을러메듯 말하였다.

《부사는 좀 가만있소. 이제 저 세작년에게 말 몇마디 묻고나서 법이든 례절이든 따져봅시다.》

호백은 잔뜩 속이 궁글어가지고도 구멍뚫린 새납소리 같은것을 그냥 질러댔으나 윤통은 본체도 않고 매화앞에 다가섰다.

세차게 들먹이는 계집의 불룩한 가슴에 시퍼런 칼날을 들이대며 독수리울음소리같은것을 터치였다.

《이년아! 너도 이 〈흑면장수〉의 선성을 아주 모르지는 않을테지?

한마디로 외로 댔다간 당장에 찔러죽일테다.

네년은 왜구의 세작 요리꼬! 대마도령주놈의 비밀한 령을 받고 이땅에 스며들어 군영원수를 모함하는 몹쓸짓을 꾸며냈지? 옳으냐?》

매화는 떨리는 손을 간신히 휘저으며 떠드박떠드박 분명치 않은 소리로 옹알거리였다.

《왜구의 세작이라니요?!… 쇤네는 저기 전라도에서 살다가…》

《무엇이 어째? 빌어먹을 암여우같으니… 당장 살멱을 찢어죽일테다!》

윤통은 번쩍 칼을 들어올리였다.

오천이 재빨리 윤통의 앞을 막아서며 계집의 기름기도는 머리끄뎅이를 휘감아잡았다. 하고는 다른 한손으로 사다께가 요리꼬앞으로 쓴 편지를 펼쳐보이였다.

《네가 거짓말이 난당인걸보니 세작이 분명하구나.

눈을 똑바로 뜨고 이 편지를 봐라.

대마도에 잡혀갔던 우리 사람이 대마도관사에서 꺼내온 이 편지는 네년에게 마지막으로 해야 할바를 일러주는 령주의 자필이다.

이래도 닭의 다리 뻗대기듯 할테냐? 이 더러운 년…》

흰자위가 가득한 눈으로 편지의 글발을 대충 훑어보고난 요리꼬는 더이상 빠져나갈 길이 없음을 깨달은듯 얄팍한 입술을 독스럽게 감쳐물더니 쑥바구니처럼 헝클어진 머리를 푹 떨구었다.

낚시에 물린 붕어새끼처럼 갈고리눈을 삼박거리며 달달 떨던 호백은 자기의 파멸을 확연히 예감한듯 모래자루처럼 풀썩 무너져내리였다.

다음날 아침 윤통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광속에 처박아두었던 왜년을 끌어내다 말잔등우에 짐짝처럼 동여싣게 했다.

아침밥을 먹는둥마는둥 하고난 윤통은 오천과 리옥을 비롯한 여러 군사들을 뒤에 달고 개경을 향해 풍우마냥 내달리였다.

밤낮으로 길을 재우쳐 개경에 당도한 윤통은 극심한 과로로 하여 눈앞이 어질거렸으나 즉시 리옥과 오천이 그리고 요리꼬를 앞세우고 승기가 나서 여러 관청을 들고날며 사건의 좌우전말을 고하였다.

최칠석과 김종기, 김종연과 최단도 더 한층 기세가 올라 뛰여다니였다.

사건인즉 전고에 보기 드문 중대사변이라 즉시에 관청들이 설설 끓고 왕궁까지 들썩거리였다.…

살창을 움켜잡은 박위의 터갈라진 손은 중풍이라도 만난듯 와들와들 떨리였다. 박위는 불같은 격정을 토하고싶었으나 목이 마르고 속이 젖어들어 도저히 말을 굴려낼수 없었다.

(얼마나 장한 사람들인가.

왜구의 세작을 잡으려고 매일 밤 바다길을 나돌다가 리옥을 구원한 오천이도 갸륵하지만 왜구의 비밀한 속내를 파가지고 대마도를 뛰쳐나온 리옥은 또 얼마나 기특한가.

아니, 모두가 비범한 인물들이요, 고마운 나의 은인들이다.)

저벅저벅… 앞마당 구석쪽에서 또다시 여러 사람의 무게있는 발자국소리가 울리였다.

눈길을 들어보니 앞마당으로 낯익은 무관 여러명이 전복자락을 날리며 헌걸차게 들어서고있었다.

그들의 뒤로 사팔뜨기 옥사장이 허겁지겁 따라서고있었다.

《어서 옥문을 따고 밖으로 모셔내여라!》

김종연의 위엄기있는 목소리가 앞마당을 쩡쩡 울리였다.

박위의 심장은 다시금 세차게 곤두뜀을 하였다.

입만 벌리면 환성과 울음이 한꺼번에 터져나올것 같았다.

육중한 옥문이 열리자 박위는 제 먼저 허청비청 밖으로 걸어나갔다.

옥문곁에 바투 붙어서있던 최칠석이 울고웃으며 반달음으로 다가오더니 박위의 험한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입술을 실룩거리던 끝에 울음기가 가득 배인 청을 왈칵 쏟아놓았다.

《해암!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소?》

종연은 틀스러운 걸음새로 다가오다말고 부리부리한 두눈을 슴벅거리였다.

《고초가 심하셨소그려.》

윤통은 선자리에서 시꺼먼 얼굴을 찡그리며 웅얼거리였다.

《박장군을 뵈올 면목이 없습니다.》

정겨운 시선으로 미더운 무관들을 둘러보던 박위는 속깊이에서 뜨겁게 고패도는 격정을 그대로 드레질해 올리였다.

《공들의 념려덕분에 별다른 탈이 없이 지냈소.

정말로 고생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엉킨 실꾸레미처럼 헝클어진 일을 바로 잡느라고 백사를 젖혀놓고 뛰여다닌 그대들이요. 내 정녕 결초보은하리다.》

《과찬의 말씀이요.》

《해암의 뜻이 하 높으매 하늘이 굽어살핀게요.》

종연과 칠석은 한마디씩 답례를 하고나서 어제오늘 왕궁과 조정에서 새로 내린 결정을 번갈아가며 알려주었다.

조정에서는 박위를 무죄석방하여 본직으로 돌려보내고 매화는 참형에 처하며 조호백은 원악도로 귀양을 보내기로 하였다. 그와 함께 대마도원정을 위한 준비가 상당히 성숙된 현조건에서 더 미룰것없이 왜구의 소굴 대마도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원정군의 총지휘는 지금까지 왜구들과 수많은 싸움을 해보았을뿐아니라 충의와 량심을 다하여 원정준비를 떠밀어온 박위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조정에서는 또한 원정에 필요한 군수물자들과 장수들을 박위에게 보충해주기로 하였는데 병부에서 추천한 장수들의 명단에는 최칠석과 박자안이 올라있었다.

진정 나라의 수치를 씻고 민족의 존엄과 영예를 떨치게 될 첫 대마도원정은 이렇듯 깊은 사연속에서 자기의 서막을 열게 되였다.

박위는 하염없이 쏟아져내리는 눈물로 하여 눈앞의 광경을 뚜렷이 가려볼수 없었다.

허나 마음은 날아오를듯이 기뻤다. 무한히 행복하기까지 하였다.

지금껏 겪어온 가슴아픈 번뇌와 뼈저린 고초마저 허무하거나 억울하기는커녕 오늘의 성공과 행복을 빚어올린 보귀한 밑거름처럼 생각되였다.

박위는 미덥고 고마운 세 무관을 한아름에 껴안고 눈판우에 마구 딩굴고싶었다.

천지가 들썩 울리도록 만세를 부르고싶기도 하였다.

한참후에야 박위는 천천히 눈굽을 찍어내며 누런 물딱지가 더덕더덕 매달려있는 입술을 간신히 열어헤치였다.

《천은(임금의 은혜)이 망극(끝이 없다는 뜻)하오이다.》

뻘겋게 짓물린 눈으로 박위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제서야 그의 가슴팍에 씌여진 혈서를 띠여보고 하나같이 눈을 흡떴다.

《일심원정》.

그것은 정녕 박위의 필생의 초지요, 자나깨나 가슴을 짓태운 심장의 노래였다.

사람들의 가슴은 누구라없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자고로 세상에는 원대한 뜻을 지녔노라고 하는 인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그 뜻을 실행한 사람보다 빈소리만 요란하게 질러놓고 뒤를 꼬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하기에 사람들은 큰뜻을 품었노라고 자처하는 인물들에게 서둘러 감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력사는 시련과 난관속에서도 사생결단의 의지로 과감히 자기의 뜻을 실현해나가는 뼈대있는 인간만을 민족의 장한 아들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만세에 길이 자랑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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