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 회)

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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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정안에서는 요즘 가혹한 박해와 피비린내나는 탄압으로 얼룩진 전대미문의 정치사변들이 속출하고있었다.

이미 지난 7월 리성계는 지금까지 부덕쥐처럼 뛰여다니며 자기를 협력해온 좌시중 조민수를 탐욕죄에 걸어 정계밖으로 추방했다.

11월에는 최영의 조카벌되는 김저가 왕위에서 밀려난 우왕과 공모하여 리성계를 죽이고 우왕을 다시 왕으로 삼으려 했다는 음모를 꾸며내여 김저는 물론 왕년에 외적과의 싸움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변안렬을 비롯한 27명의 관헌들을 한꺼번에 축출, 처형하였다.

벌어지는 사변들은 몸서리치는데 돌아가는 소문들은 여간만 흉흉하지 않았다.

리성계는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엇서거나 반발하는 기미가 보이는 사람들은 누구도 몰래 흑산도 앞바다에 끌고나가 바다에 처넣어 죽이거나 배밑창에 구멍을 뚫어 배를 침몰시켜 죽인다는 소리가 어디서나 쉬쉬 떠돌았다.

리성계일당은 무자비하고 파렴치한 탄압과 음모로 정계에서 우세를 차지하던 종전의 지위에서 껑충 도약하여 나라의 정치적실권을 완전히 틀어쥔 제1의 세력으로 군림하였다.

시국이 소연할 때면 의례 그러하듯 흉흉한 소문과 함께 괴이한 소문도 수없이 나돌았다.

허다한 괴설과 잡설중에서도 제일로 기괴한것은 이제 나무아들이 나라를 얻게 된다는 소리였다.

나무 목자(木)에 아들 자자(子)를 쓰면 곧 오얏 리자(李)가 되니 결국 리씨가 임금이 된다는 뜻이였다.

이것은 결코 소갈머리없는 촌아낙네들이나 철딱서니없는 시골의 초동들이 제멋대로 지어서 내돌리는 속설이 아니였다.

그것은 리성계와 그의 아들 리방원, 그밖에 리성계의 사타구니에 들어붙어 대궁밥을 얻어먹는 졸개들이 목적의식적으로 조작류포시킨 정치적인 광대놀음중의 한 변설이였다.

임금은 국정의 출발점으로 되는 현실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였다.

밤낮없이 충성과 효성을 떠들며 《지당하외다》라는 말마디만을 외우던 지당대감들은 간곳없이 사라지고 바른 말을 하던 신하들은 없어졌다.

언제인가 임금이 어느 재상을 불러놓고 탄식끝에 했다는 말도 궁성의 높은 담을 넘어 새나왔다.

《죽자니 죽음이 괴롭도다. 살자니 그 삶이 또한 괴롭도다.》

이쯤 되고보면 왕권이 장차 누구에게 넘어가리라는것은 불을 보듯 명백한 일이였다.

하지만 고지식하고 단순한 정몽주와 리색이네들은 요즘도 리성계세력을 구축하고 왕권을 고수하기 위해 제나름껏 필사적으로 뛰여다니고있었다.

사실상 정몽주와 리색이네들이 리성계패당과 맞서싸운다는것은 연약한 사슴떼와 사나운 승냥이무리와의 접전이나 비슷한것이여서 결말은 너무도 뻔드름했다. 리성계가 지금까지 정몽주와 리색이네들에게 칼을 내대지 않은것은 그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고작해야 입방아, 붓방아나 찧어대는 그네들이 그다지 위험하게 생각되지 않았기때문이였다.

또한 자국내는 물론이요 외국에까지 널리 이름이 퍼진 대학자들인 정몽주와 리색을 폭력으로 마구 제거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최대한 자기들의 파에 흡수해보려는 내밀적인 목적도 있었다.

정국이 이쯤 되고보니 조정안에서는 쌀과 뉘를 확연히 가릴수 없고 옥돌과 푸석돌을 명확히 판별할수 없는데 사헌부의 일이라고 유독 잘 될리는 만무했다.

아니, 관헌들중에서도 제일로 성정이 혹독한자들로 꾸려진 사헌부량반들은 리성계의 환심을 사는 일이라면 생사람의 간이라도 뽑아낼 잡도리로 동이랴 서랴 마구 날뛰고있었다.

이런 판세에 리성계의 은밀한 추동으로 잡아들인 역모죄인이요 왜구와 내통했다는 증거까지 뚜렷한 중범인 박위의 사건심의가 과연 결바르게 흘러갈수 있겠는가?…

…박위는 개경에 도착한 그날로 국문장에 끌려나갔다.

워낙 국문장이라면 임금이 직접 나오거나 어명을 받은 최고관리가 나와 주관하는 최대규모의 심문장이였다.

허나 그날의 국문장에는 임금은 물론 요직의 인물들도 보이지 않았다.

마루우에는 사헌부의 대사헌(사헌부의 장관. 종2품, 대부, 헌장 또는 도헌이라고도 함.)이 숯불이 이글거리는 청동화로를 끼고 나와있었다.

그곁의 서탁에는 사헌부의 록사(지금의 서기격)가 지필묵을 앞에 놓고 앉아있었다.

사헌부앞뜰에 들어선 박위는 국문장의 초라한 광경이 불만스러워 사위를 둘러보는데 퇴마루우에서 대사헌의 새된 목청이 눈가루처럼 쏟아져내리였다.

《얘들아, 저놈을 당장 계하에 꿇려라.》

박위의 량옆에 장승목신처럼 뻗치고서있던 우악스럽게 생긴 라졸들이 우르르 덤벼들었다.

박위의 눈에 대뜸 퍼런 불이 달리였다.

《모두들 가만있거라. 너희들은 내가 누군지 모르느냐? 나는 계하에 꿇어앉을 죄인이 아니라 나라의 당당한 장수요, 경상도원수다. 저리 물러들가라―》

호령 한마디로 일거에 라졸들을 얼어붙게 한 박위는 칼을 쓴채로 퇴마루앞에 다가섰다.

입술을 삐주름히 빼물고앉아 잡아먹을것처럼 박위를 노려보는 대사헌의 해말쑥한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청청한 목청을 터치였다.

《도헌령감, 내게 무슨 말을 물으려거든 먼저 계하수(섬돌아래 꿇어앉히는 죄인)로 대접하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천마디만마디를 물어도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을테요.》

대사헌의 올롱한 눈은 당장에 깨질듯이 뒤집혀지였다.

《무엇이 어쩌고 어째?! 대역죄를 진 네놈이 사헌부의 일을 제멋대로 지휘할셈이냐?! 천하에 이런 괴변이 또 어디 있을고?!…》

박위에게 도리깨를 휘두르고난 대사헌은 재차 말뚝처럼 굳어져있는 라졸들에게 우뢰질을 했다.

《이 밥병신같은 놈들아, 저 역적놈을 당장 꺼엎지 못할테냐?!》

라졸들은 다시 용기를 내여 박위에게 달려들었다. 라졸들은 저마끔 지랄발광을 다했으나 박위의 불같은 호령과 드세찬 몸부림을 누르지 못했다.

종시 박위를 꿇어앉히지 못한 라졸들은 모주먹은 돼지떼마냥 씩씩거리며 하나, 둘 뒤로 물러섰다.

제가 바로 힘내기를 하듯 씨근거리며 기와골이 울리도록 고래고래 소래기를 지르던 대사헌도 세상에 소문난 박위의 배짱은 어쩔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잠시후 그를 세워둔채 심문을 시작했다.

《네놈이 간특하고 흉악한 왜구들과 내통해가지고 역적모의를 했다는게 사실이냐?》

박위는 쑥바구니처럼 헝클어진 머리를 결연히 흔들었다.

《나는 꿈에도 역적모의를 해본적이 없소. 여직껏 수많은 왜구들을 쳐죽인 내가, 지금도 애오라지 왜구격멸만을 원하는 내가 어떻게 왜구와 내통할수 있단 말이요?》

대사헌은 얼추보건대 하얀 얼굴에 올롱한 두눈이 반들거리는것이 무척 영민해보였으나 기실 그는 앞뒤가 꼭꼭 막힌 안타깨비로서 그 어떤 현상도 상하좌우로 깊이 따져볼줄 모르는 사람이였다.

《네가 정말 어떻게 죽고싶어 시작부터 외로 트는게냐?

그래, 네놈의 대마도원정이라는것이 실상은 왜구를 치러나간다고 배를 띄웠다가 일제히 돌따서서 개경을 치자는 수작이 아니란 말이냐?》

《그런 억측의 소리는 대체 어느 놈이 꾸며냈소? 청천백주에 그런 터무니없는 수작을 누가 만들어냈는가 말이요?》

《이놈― 네놈과 배가 맞아돌아가는 대마도령주놈의 편지가 이렇게 두장, 석장씩 내앞에 와있는데도 그냥 생파리잡아떼듯 할테냐?》

대사헌은 록사가 넘겨준 종이장을 세차게 흔들어보이며 경망스럽게 발까지 탕탕 굴렀다.

박위의 정연한 론리와 완강한 부정을 교활한 적수의 기만적인 술책으로 굳게 확신하고있는 대사헌은 자기대로 분이 치밀어오른것이였다.

박위는 왜구들의 간교한 수작을 한사코 그대로 믿으려드는 암매한 대사헌이 가증스럽기 전에 안타깝고 답답했다.

인간의 진정을 기만으로 인식하는것은 그 어떤 무지나 암둔이기 전에 신성모독으로서 일종의 도덕적범죄행위다.

그러한 범죄행위가 평민들사이에 생활사말사를 놓고 벌어진대도 후과가 작지 않을텐데 관헌들 호상간에 국사를 놓고 감행된다면 얼마나 많은 피해가 생기겠는가.

자고로 암둔한 관리들의 이러한 보이지 않는 범죄로 하여 나라와 백성들은 겪지 않아도 될 고통과 슬픔을 얼마나 많이 당해왔던가?!…

잠시 괴로운 사색을 이어나가던 박위는 지금이야말로 자기의 정신력을 최대로 발동해야 할 시각임을 새삼스레 절감하였다.

무지와 암둔의 횡포한 도전앞에서 잠시라도 정신력을 잃는다면 지금껏 고수해온 정의와 순결은 역적의 외피를 쓰고 매장될것이였다.

박위는 순시도 리성을 잃지 않기 위해 정신을 도사리며 준절한 어조로 또박또박 그루를 박아 말했다.

《…그런 미심쩍은 편지들이 어디서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수 없소만 령감은 정녕 제 나라 장수의 말보다 좁쌀여우처럼 잔꾀가 말짱한 왜구들의 거짓수작을 더 믿소?

그렇다면 내 한마디만 물읍시다.

오늘은 경상도원수를 모함하는 왜구들의 편지가 나돌아서 무작정 나를 잡아왔는데 만약 래일에는 도헌령감을 모해하는 편지가 들어온다면 그땐 어찌하겠소. 그때도 왜구들의 수작만을 진실로 믿고 본인의 진술은 알은체도 없이 령감을 포박하고 문초하고 핍박한다면 령감의 심정은 어떨것 같소?!

내 진심으로 충고하는데 조정의 관리들이 정의와 진실에 립각할 대신 상관의 비위를 맞추고 그 어떤 낯을 내기 위해 왜구들의 롱간질에 놀아난다면 나라일도 크게 망칠것이며 자신의 앞길도 심히 그르치게 될게요.》

대사헌은 입맛을 쩝쩝 다시며 얼추 말을 꺼내지 못하는데 그것은 필시 대답말이 궁할 때마다 드러내군 하는 그의 점잖지 못한 버릇인듯싶었다.

허나 아래사람의 정당한 견해와 요구앞에서 권력배일반이 그러하듯 대사헌도 곧 당치도 않은 분을 터치며 생억지를 쓰기 시작했다.

《무엇이 어째?! 네가 죄인의 몸으로 헌부의 장관을 희롱하는거냐?

워낙 네놈은 말로 곱게 일러서는 안되겠구나.》

박위는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평생에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단 한사람도 희롱해본 일이 없소.

나는 지금 정의와 진실에 립각해서 사건의 진상을 옳게 밝히자는게요.》

박위는 말끝마다 자신을 《나》라고 자칭했다.

죄인이 죄과를 따지는 조정의 관리앞에서 자기를 나라고 칭하는것 또한 엄중한 죄로 되건만 박위의 련속적인 공세에 위압도 되고 얼떨떨해지기도 한 대사헌은 한번도 《나》라는 소리에 왼심을 쓰지 못했다.

박위는 숨돌릴틈없이 계속 강세를 보이였다.

《나는 먼저 왜구의 편지가 어떻게 되여 내 손에는 한번도 닿지 않고 (사다께의 편지는 내게 보내는것이라고 하는데) 련속 조정에만 날아드는지 그 연유부터 캐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오.

내가 만일 정말로 왜구와 내통한 사람이라면 왜구들도 상당히 조심해서 련계를 취했을텐데 어째서 내 손에는 단 한번도 그런 편지가 와닿지 않았는가.

혹시 도헌령감에게 편지를 날라온 사람이 왜구와 내통이 있는게 아니요?!

그놈이 나를 모함하려는 대마도령주와 짝자꿍을 하는 나쁜 놈이 아닌가 말이요?》

대사헌에게 있어서 박위의 맵짠 질문은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수 없었다.

왜구의 편지라는것은 사실 김해부사가 보내온것으로서 리성계가 은밀히 자기에게 넘겨주었었다.

그런 사정으로 하여 대사헌은 편지가 어디서 어떻게 생겼는지 자초지종 따져볼수 없었다.

그것을 캐보면 진상규명에는 매우 유리하겠지만 그자체가 벌써 리성계에 대한 불신과 불만으로 되는것이라 극력 삼가해야 했다.

하여 대사헌은 거북한 구석은 다 밀어던지고 자복하라는 소리만을 곱씹어뇌이며 강짜를 부리는데 박위는 바로 그 미타한 고리를 들춰가지고 돌입하는것이였다.

대사헌은 어느 정도 속이 찔리기도 하고 가위가 눌리기도 했으나 그것으로 하여 더욱 노기가 동해올랐다.

그는 뜰아래 벌려선 라졸들을 사납게 훑어보며 또다시 아츠러운 고함을 질러댔다.

《저놈이 아직도 올곧게 자복을 할 대신 제쪽에서 도리여 관장을 우롱하고 타매하는것은 나라법을 우습게 아는 까닭이다.

되게 다듬어가지고 다시 말을 물어야겠다. 이봐라, 저놈에게 사정두지 말고 된매를 안겨라.》

대사헌의 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물에 적신 몽둥이를 꼬나들고 서있던 집장라졸들이 우르르 박위에게 달려들었다.

뜰앞에 깔려있던 하얀 눈가루가 후루루 날아올랐다.…

…그날로부터 이러구러 보름 남짓한 기일이 흘러갔다.

그사이 박위는 무려 십여차나 모욕적인 심문과 무지막지한 폭행을 당했으나 매번 변함없이 자기의 죄상을 전면부정하고 진상규명을 완강히 요구했다.

그럴수록 대사헌은 억지와 기광의 도수를 더욱 높이였다.

대사헌은 반드시 박위의 자복을 받아내야만 리성계의 눈에 긴한 존재로 어여삐 보일수 있었다.

만약 자기가 박위의 기개와 론리앞에 쭈그러든다면 그때부터 파멸은 시작될것이였다.

하여 두사람은 각각 자기나름의 목적과 지향을 품고 필사적으로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정의는 량심과 진실을 가지고, 부정의는 권력과 억지를 가지고…

박위가 개경전옥에 갇힌 때로부터 꼭 스무날이 되는 날 아침.

대사헌은 또다시 박위를 심문장으로 끌어내였다.

《네 이놈, 오늘도 이실직고를 하지 않고 삐뚜루 나올테냐?》

대사헌은 첫시작부터 을러대며 여느때없이 사나운 기세를 보이였다.

박위는 태연하게 얼굴을 들었다.

이제는 대답말을 꺼내기도 지겨웠다.

하지만 말을 해야 했다. 해도 더 크게, 더 많이 불을 토하듯 해야 했다.

만일 이 지긋지긋한 대결전에서 한걸음이라도 맥을 놓고 물러선다면 자신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피땀으로 쌓아올린 원정준비라는 거대한 애국의 탑은 졸지에 봄날의 얼음산처럼 무너질것이였다.

목숨은 버린다 해도 그것만은 잃을수 없었다.

박위는 거밋거밋한 피딱지가 엉켜붙은 험상한 입술을 가까스레 터치였다.

《나는 어제도 이실직고를 했고 오늘도 있는 그대로 바른말을 하는거요.

거듭 말하지만 나는 일구월심 왜구를 깡그리 격멸하여 나라의 수치를 씻고 민족의 존엄을 만세에 떨치려 했소.

그런데 령감은 수상쩍기 그지없는 왜구의 편지만을 부작처럼 휘두르며 그예 나를 잡으려 하고있소.

생각해보오. 흉모를 꾸미는데 이골이 난 왜구들이 그래 그 정도의 거짓편지도 만들어내지 못할것 같소?!》

박위의 피타는 웨침소리는 휑뎅그렁한 앞마당을 즈렁즈렁 울리였다.

무엇인가 호기있게 짓뭉개는 형국을 해보이려던 대사헌은 하얗고 매끈한 주먹을 허공에 매단채 독 쐬운 개구리처럼 찔금 움츠러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야 박위의 주장이 별로 이상해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하여 리성계의 지시를 거역할수도 없었고 자기의 체면을 버릴수도 없었다.

좋기는 무슨 실오리만 한것이라도 새로운 끄트머리를 잡아내는것인데 그런것은 도무지 찾아낼수 없었다.

대사헌은 올롱한 눈을 깜빡거리며 주저주저하는데 박위는 청청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계속 뒤를 조이였다.

《령감도 잘 알겠지만 나라는 큰 산이요. 이내 몸은 한점의 티끌이요.

나는 이미 나라에 내 한몸을 티끌처럼 바칠것을 맹세하고 손에 검을 잡은 사람이요. 한고로 나는 언제나 죽음을 두려워한적이 없소.

내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것은 나라의 존엄과 위명을 천하에 떨치려는 나의 초지, 우리 군사들과 백성들의 애국의지가 허랑하게 꺾이는것이요.

령감은 지금 왜구와 소인배들의 롱간질에 넘어가 기어코 나를 죽이려 하는데 그래 이처럼 무지몰각하고 후안무치한 행위를 오늘 세상과 후세사람들앞에 책임질수 있소?》

박위의 호령에 가까운 질책을 또 하나의 커다란 모욕으로 감수한 대사헌은 너무도 분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뒤일은 어찌 되든 모욕받은 설분을 속시원히 하고싶은 저급한 욕망이 설설 끓어번지였다.

대사헌은 성난 문지기개마냥 희끗희끗한 코수염을 빳빳하게 곤두세우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저놈이 줄창 해괴한 변명만 늘어놓을 때는 아직 매가 무른탓이다.

밥을 토할 때까지 대곤, 중곤 가리지 말고 사그려조겨라!》

원래 형구의 하나인 곤에는 대곤, 중곤, 소곤, 치도곤이 있는데 대곤은 2품이상의 고위관리에게, 중곤은 고을원이상의 관헌에게 그리고 소곤은 첨사, 만호, 별장 등에게 적용하게 되여있었다.

하지만 요즘세월은 일일이 조항을 따져가며 법을 시행할만큼 정연하지도 못한데다 발끈하기 잘하는 도헌령감께서 잔뜩 골딱지가 난 때라 중곤이고 대곤이고 가릴게 무엇이랴.

철썩철썩… 넉가래같은 방망이들이 언거번거로 솟아오르고 언거번거로 내리박히였다.

피방울이 튀여오르고 살점이 뿌려져나갔다.

박위는 금시 어깨가 으깨지고 정갱이가 바사지는듯 했으나 이를 악문채 신음소리 한마디 흘리지 않았다.

허나 보름여의 나날 내처 식음을 전페하다싶이 한채 모진 악형만을 당해온 몸이라 오래 견디지 못하고 눈판우에 나동그라지였다.

바로 그 순간 대사헌의 뇌리속으로는 불쑥 어제 밤 대궐에서 만났던 리성계의 흐린 얼굴이 떠올랐다.

어제 밤 궁중에서는 연회상을 물린 뒤 녀악(고려 중기이후 녀성예술가들에 의해 진행되던 궁중음악과 무용)이 펼쳐지였다.

무엄하게도 임금과 나란히 앉아 삿대질까지 해가며 왕에게 무슨 훈시같은것을 늘어놓던 리성계는 불쾌해진 얼굴로 만장을 휘둘러보았다.

이때를 놓칠세라 이쁘게 생긴 얼굴에 화사스러운 차림을 한 계집들은 은방울굴리듯 아름다운 목소리를 한껏 뽑아올리며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기도 하고 물새처럼 미끄러져 날기도 하며 온갖 자태를 다 펼쳐보이였다.

성계는 계집들쪽은 보지도 않고 대신들속에 끼워앉은 대사헌을 거드름스러운 손짓으로 불렀다.

연회때 조금 과하게 마신 술바람에 끄떡끄떡 졸고있던 대사헌은 성계의 손짓 한번에 정신이 번쩍 들어 게질게질 흘러내리는 느침을 홱 털어버리고 썰썰기여 당우에 올라섰다.

한 나라의 지엄한 임금이 바로 앞에 있건만 그를 코흘리개 동네애녀석 보듯 얼핏 살펴보고난 대사헌은 성계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리였다.

리성계 역시 임금 같은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사헌에게 말을 걸었다.

《령감! 박위에 대한 치죄는 어디까지나 사실을 정확히 규명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할게요. 듣자니 왜구의 편지라는것이 조정에 들어온 경로가 확연치 않다던데 너무 과하게 치죄를 하다가 혹여 말밥이 생기거나 무죄로 판명된다면 도리여 사헌부가 탄핵을 당할수 있소.

잘 알아서 과실이 없도록 하오.》…

그때는 술기운에 휘감기여 얼떨떨할 때라 그저 박위를 바싹 다불러대라는 소리쯤으로 여겼었다.

헌데 지금 곰곰히 생각해보니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되였다.

리성계의 말속에는 분명 역모죄의 증거라는것이 명확치 못하니 박위를 너무 심하게 다루지 말라는 충고가 진하게 섞여있었다.

삽시에 방향감각을 상실한 대사헌은 꼼짝없이 굳어진채 올롱한 두눈을 쉬임없이 깜박거리였다.

며칠전까지만도 박위의 자복을 얼른 받아내지 못한다고 기름을 짜던 리성계가 이 무슨 일인가.

이제와서는 제가 직접 넘겨준 증거물의 경로까지 명확치 않노라고 수염을 빡 내리씻고 아닌보살을 하니 나는 대체 어쩌라는건가?!…

사실 이때 리성계는 박위가 위험하고 불편한 존재이기는 하나 반대파세력에 가담한 인물은 아닌고로 시급히 처리해야 할 대상으로는 보지 않았다.

헌데 조호백이 하도 극성스럽게 뢰물을 섬겨바치며 들쑤시는 바람에 그럼직한 증거가 생겼을 때 박위를 제창 제껴버리는것도 나쁘지 않으리라고 생각을 고쳐먹게 되였다.

박위를 잡아올리자 예상밖으로 사방에서 항의가 일어났다.

조정안에서는 쟁쟁한 중진관료로 자타가 공인하는 최칠석과 김종기가, 조정밖의 지방에서는 전도유망한 장수로 이름난 김종연과 최단이 들고일어났다.

그들은 일치하게 사건의 전모를 밝히려면 박위를 모함한 왜구의 편지가 조정에 들어온 경로부터 세세히 빠개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그런데다 경상도에서 올라온 숱한 백성들은 이리저리 밀려다니며 박위의 무죄를 론증하는 등장(관료기관의 부당한 처사에 대하여 여러 사람의 이름으로 내는 신소장)을 내돌리고있었다.

최칠석이나 김종기, 김종연과 최단과 같은 만만치 않은 관리들의 의사도 무시할수 없었지만 백성들의 견해도 마구 쓸어덮어버릴수도 없었다.

리성계는 진퇴량난에 빠지였다.

아무리 곱씹어 생각해보아야 이번에도 역시 조호백은 그 어떤 조급증에 사로잡히여 서툴게 일을 꾸민것이 틀림없었다.

조호백의 편을 들어 수많은 관리들과 백성들을 또다시 처형한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사실 시골의 개천에서 날뛰는 한마리의 송사리에 불과한 조호백은 리성계가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피해를 입으면서까지 두둔해주어야 할 재목일수는 없었다.

사헌부에서는 애초에 박위에게 역적모의죄와 함께 그 무슨 절간파괴죄라는것도 덧붙이였으나 리성계는 그것 역시 크게 꼬집어들수 없었다.

성리학파 관리들은 모두 불교를 배척하는 유교계 인물들이요, 리성계는 그들로부터 리론적인 옹호와 찬양을 받는 사람이였다.

따라서 리성계가 박위의 절간파괴죄를 들고나선다면 그것은 벌써 불교를 두둔하고 장려하는것으로 될것이며 결과적으로는 자기의 리론정신적진지를 스스로 차버리는 행위로 될것이였다.

리성계는 립장이 딱해질 때마다 매번 그러했듯이 이번에도 모든 책임을 사헌부에 전가시키고 자기는 슬그머니 박위의 사건에서 손을 떼기로 결심하였다.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자기에게 더 큰 악감을 품었을 박위는 후날 자신이 직접 고급한 술수를 써서 제껴버려야 했다.

그러면 장차 조호백은 어떻게 처리할것인가?

성계가 보건대 호백은 아첨기가 많고 눈치가 빨라서 그런대로 쓸만하였으나 사람이 잘고 경망스러워 큰일을 칠만 한 위인은 못되였다.

아니, 이런 위인을 자기의 일에 섞어넣었다가는 사사건건 실패하기나 쉬웠지 크게 덕을 볼것 같지 않았다.

호백은 매양 변함없이 리성계를 따르겠노라고 귀맛좋은 맹세를 다지군 했으나 조민수의 축출로 하여 자기에게 앙심을 먹고있을수도 있었다.

이리의 상판을 보고서야 그놈의 속마음이 흐렸는지 개였는지 뉘라서 알겠는가?!…

만약 박위의 역모사건이 허위로 판명된다면 성계는 호백에게도 큼직한 죄를 씌워 (사실 역모가 아닌것을 역모로 고변하는것은 최대의 범죄였다.) 정계에서 완전히 매몰해버릴 결심이였다.…

…대사헌의 빈약한 두뇌로써는 리성계의 능활하고 변화무쌍한 계교를 륜곽조차 짐작할수 없었다.

허나 민물고기치고 감탕내가 나지 않는 놈이 없듯이 대사헌도 조정의 모든 관리들과 마찬가지로 지모는 저급해도 벼슬살이리치에는 여간 밝지 않았다.

대사헌은 리성계의 속내는 똑똑히 알수 없었으나 박위가 잘못되는 경우 자기에게 운명적인 날벼락이 떨어지게 된다는것만은 분명히 예감할수 있었다.

그러고보면 리성계의 은유적인 충고를 그릇 판단하고 밸이 동하는대로 날뛰면서 박위를 때려눕힌것은 참으로 잘못된 계책이였다.

대사헌은 즉시 박위를 조기라고 한 자기의 죄는 덮어두고 매를 친 라졸들의 죄만을 남산만큼 불궈내리라 생각하였다.

갑자기 불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라졸들을 쏘아보던 대사헌은 미친놈처럼 왁작 고아댔다.

《천하에 불한당같은 놈들아, 누가 멀쩡한 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놓으라 했느냐?

만일 경상도원수가 병인이 되거나 숨이 진다면 네놈들을 모두 눈망울을 뽑아서 원악도로 귀양을 보낼테니 그리 알아라.

예봐라― 어느 한놈 얼른 뛰여가서 랭수 한그릇을 떠다가 경상도원수에게 먹여보아라.

아니다, 랭수가 아니라 따끈하게 덥힌 술을 한대접 가져다가 먹여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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