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 회)

제 3 장

9

 

…사다께와 그의 졸개들이 모두 술에 휘감겨 곤죽이 되였을 때 리옥은 기척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연한 거동으로 관사를 나와 짙은 어둠이 엉켜있는 행길에 들어서자 자기로서도 알수 없는 초조감과 조급증에 떠밀리여 반달음을 놓기 시작했다.

한낮때는 귀가 멍멍할 지경으로 소란했으나 지금은 쥐죽은듯 고요한 장거리를 에돌아나온 리옥은 어질더분한 판자집, 돌집들이 빼곡이 박혀있는 민가로 들어섰다.

아직까지도 귀리 삶는 냄새가 퀴퀴하게 떠도는 골목길(이 고장의 천민들은 하루 삼시 귀리죽만 먹었다.)을 이리저리 에돌아나온 리옥은 그 걸음으로 후박나무가 몇그루 널려박힌 나지막한 등성이우로 치달아올랐다.

허청간같이 허술한 집 한채가 뿌옇게 안겨왔다.

죽촌사람들을 가두어넣은 집이였다.

걸음을 멈춘 리옥은 잠시 숨을 돌리며 이제 해야 할 일을 다시금 꼼꼼히 따져보았다.

마음이 안정되고 할바가 뚜렷이 정해지자 리옥은 독립가옥을 향해 자신있게 걸음을 내짚었다.

이때였다. 등뒤에서 누군가가 헐헐 숨을 톺아쉬며 다급히 뛰여오는 기척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외통눈이가 정신없이 뛰여오는 모양이 희미하게 가려지였다.

불안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수상쩍은 기미를 보인적이 없다는 확신이 생기자 마음은 다소 안정되였다.

리옥은 외통눈이를 마주쳐나가며 되알지게 말을 붙이였다.

《거기서 마침 맞게 오는구먼.》

《엉?! 헤헤헤, 여기 있었구만.》

리옥이 어둠속에서 불쑥 나타나자 제쪽에서 깜짝 놀란 외통눈은 말뚝처럼 우뚝 굳어지며 헤식어빠진 웃음을 날리였다.

리옥은 자신만만한 어조로 이미 생각해두었던 말마디를 거침없이 뇌이였다.

《난 빈대나 벼룩이 같은것이 묻을가봐 저 집에 들어가기 싫은데 하도소도(외통눈의 이름)가 가서 파수군에게 말 좀 해주어, 장서방을 내보내달라구.》

뜻밖의 요청에 어안이 벙벙해진 하도소도는 잠시 외통눈을 끔뻑이며 무슨 생각인가를 굴리더니 의아쩍은 어조로 되물었다.

《이밤에 장서방은 찾아서 무얼 하려구?…》

《령주도노께서 급히 시원한 사까나사시미(물고기회의 일종)를 만들어오라시는데 오늘 새로 잡아온 물고기가 어디 있는지 알수가 있어야지?! 그래 장서방을 찾는거여.》

《오, 그렇군. 하기사 술안주야 사까나사시미가 제일이지.》

군침까지 삼키며 웅얼거리는 꼴이 리옥이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관사의 돌담밑에 쭈그리고앉아 개떨듯 했던 이 못난이는 술생각이 간절한 모양이였다.

리옥은 옷자락밑에서 깜찍하게 생긴 자그마한 술방구리를 꺼내들었다.

벌써 이 비슷한 정황을 예견하고 연회장에서 건사해두었던 술이였다.

《하도소도가 나를 지켜주느라고 늘 고생이 많은데 이거 한잔 마셔, 제백술이야.》

《어엉, 이렇게 희귀한 술을 내가…》

외통눈은 너무도 황감하여 술방구리를 두손으로 싸안은채 공경어린 시선으로 리옥을 쳐다보더니 소리없이 대문안으로 스며들었다. 찌그러진 대문너머에서 하도소도와 파수군이 나누는 말소리가 쑤얼쑤얼 들려왔다.

얼마 안있어 못생긴 대문짝이 찌그덩 젖혀지더니 여느때나 다름없이 후줄근한 장서방이 어정어정 걸어나왔다.

그는 대문앞에서 서성거리는 리옥을 알아보자 뿌잇하게 정기없는 눈을 흡뜨며 말뚝처럼 굳어졌다.

장서방은 왜구들의 이목을 외딴데로 돌리려는것인지 아니면 자기의 심정이 정녕 그러한지 볼멘 소리로 웅얼거리였다.

《이런 제기… 잠도 변변히 못 자겠네.… 내 관비들에게 물고기멍구럭은 대나무시렁우에 올려놓았다구 떡먹듯이 일러주었는데 모두들 귀구멍을 틀어막고있었나?!》

리옥은 맵짠 어조로 장서방의 어정쩡한 뒤를 바싹 조이였다.

《장서방은 어찌했든 관비들은 모두 오늘 복새판에 새로 잡은 고기멍구럭이 어디 갔는지 알수 없다고 야단이니 가서 찾아주어야지 별수 있소?!

령주도노께서 노여움이 나시기 전에 어서 가야겠소.》

…리옥은 오늘 이 시각을 마련하기 위해 그지간 장서방을 여러번 따로 만나 설복도 하고 항변도 했었다.

장서방은 매번 첫날과 마찬가지로 사시나무 떨듯 하며 도리머리를 저었다.

며칠전 저녁 바다가에서 장서방을 만난 리옥은 너무도 분하고 안타까운김에 저도 모르게 단검을 꺼내들었다.

번쩍이는 단검을 장서방의 턱밑에 들이대고 부르짖었다.

《장서방! 사내로 나서 그렇게 등신바보노릇이나 하면서 살아서는 무얼해.

차라리 내 손에 죽는게 깨끗하지.

백동이 엄마도 그러길 원할거야!》

장서방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여 와들와들 떨던 끝에 간신히 고개를 주억거리였다.

마지못해 응낙한셈이나 리옥의 절절한 호소에 공감하였는지 아니면 처녀의 예상밖의 협박에 기가 질려 응했는지 장서방의 진속은 지금도 석연히 알수 없었다.

장서방을 뒤에 달고 등성이를 내려선 리옥은 하도소도와 파수군이 시시덕거리며 술을 나누어 마시는 모양을 띄워보자 즉시 길을 꺾어 바다쪽으로 향했다.

갑자기 호흡이 빨라지면서 전신이 호들호들 떨리였다. 하지만 사소한 소음이라도 놓칠세라 귀를 강구고 도담하게 앞으로 발을 내짚었다.

아직도 밑질긴 술주정뱅이들이 오글벅작거리는 오덴야(선술집)를 에돌아나오니 스산한 파도소리와 함께 차거운 바다바람이 덮치듯 다가들었다.

밤바다의 검은 형체가 뚜렷하게 가려지였다.

문득 장서방이 신음소리같은것을 섞어가며 나직이 웅얼거리였다.

《별장댁아씨, 이제는 어찌할 작정이시우?》

리옥이 자신도 적지 않게 속이 황황해났으나 애써 태연한 태를 내며 속삭이였다.

《아무 걱정 마오. 일은 벌써 다 된셈이요. 이제는 바다가에 나가 노대를 파내고 용층줄을 풀어낸 다음 배를 띄우면 그만이요. 이쪽길은 파수군이 없으니 장서방은 어서 가서 노대부터 찾아내오.》

리옥의 침착한 언행에서 한결 힘을 얻었는지 장서방은 더이상 군말을 하지 않고 허청비청 모래터로 내려섰다.

사위를 살펴보며 장서방의 뒤를 따르던 리옥은 부지불식간 아뿔싸하고 혀를 깨물었다.

자기가 지나치게 긴장하고 흥분한탓에 가장 중요한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것을 비로소 깨달은것이였다.

고려에 돌아가 박위의 반역음모라는것이 왜구들이 꾸며낸 거짓수작이라는것을 까밝히고 김해관가에 박혀있다는 세작년을 잡아내자면 확실하고 유력한 증거가 있어야 했다.

고려조정의 현재형편을 놓고볼 때 그것이 없이는 도저히 박위도 구출할수 없고 세작년도 잡을수 없었다.

그렇게도 눈독을 들이였던 가장 유력한 증거인 사다께의 편지에 대해서는 망각하고 예까지 나왔으니 실로 후회막급이였다.

(어떻게 할가? 이제 다시 관가로 들어간다는것은 천만번 위태로운 일이다.

자칫 잘못하면 이 좋은 탈출의 기회를 놓쳐버리는것은 물론 허망한 죽음을 당할수도 있다.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냥 떠나는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녀자의 의무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는 법이 아니겠는가?!

가자, 우선 이 악마의 소굴을 벗어나고 보자.)

리옥은 기운을 내여 걸음을 옮기였다.

갑자기 발목에 쇠덩이라도 매달린듯 썩썩 몸이 나가지 않았다.

가슴은 바늘뭉치라도 삼킨것처럼 아프게 들쑤시였다.

세차게 높뛰는 심장속으로 어디론가 아득히 사라져버렸던 리성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있는가.

내가 과연 나 하나 목숨을 구하자고 이 길에 들어섰단 말인가.

나는 살고 장군은 잘못된다면, 그래서 고려군대의 대마도원정이 성사되지 못한다면 그보다 큰 죄악이 또 어디 있겠는가.

안된다, 그래서는 안된다. 사람이라면 그가 남자든 녀자든 살아있는 기간 단 한순간도 인생의 뜻과 인간의 도리를 망각하거나 배반해서는 안된다.…)

이를 사려문채 비장한 사색을 굴리던 리옥은 결심이 굳어지자 장서방에게 다가갔다.

노대를 찾아들고 어찌할바를 몰라하는 장서방에게 자기의 결심을 대충 알려주었다.

장서방은 그당장 모래불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다간… 다 죽게 되오이다. 댁아씨, 우선 여기를 빠져나가는게 상수외다.》

《안되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무난히 처리할테니 장서방은 여기서 기다려주오.》

생각같아서는 장서방이 다소라도 공포감을 잊도록 무슨 말이든 차근차근 해주고싶었으나 이러고저러고 할 경황이 없었다.

리옥은 이제 해야 할바를 급급히 따져보며 걸음을 재우쳤다.

관사앞에 이르니 연회는 이미 끝난지가 오랜듯 담장안팎이 괴괴한데 오지단지처럼 작달막한 파수군이 희뿌연 등롱불을 등지고 굴러오듯 다가왔다.

리옥이앞에 이른 파수군은 과일썩은내같은 술냄새를 풀풀 풍기며 이죽거리였다.

《어이구, 대부인마님이시구려. 이 밤중에 웬일로 이렇게?!》

리옥은 입에 올리기도 역겨운 거짓말을 힘겹게 번져놓았다.

《령주도노께서 연회를 파한 뒤에 다시 조용히 들어오라구 해서…》

사다께와 리옥이와의 관계를 제나름대로 짐작하고있는 파수군은 아무런 의문도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였다.

《그렇다면야 무슨 할말이 있겠소. 어서 들어가시우.》

종종걸음을 놓아 관사에 들어선 리옥은 협실을 지나 제일 구석에 있는 사다께의 침방앞에 다가섰다.

방안에서는 사다께가 코고는 소리가 파도소리만큼 요란하게 울리였다.

가슴은 또다시 숨가쁘게 조여들었다.

비로소 자기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모험을 하고있다는 현실감이 약간한 후회감과 함께 저저이 의식되였다.

허나 이제는 칼날이 날아들어도 앞으로 돌진하는수밖에 다른 출구가 없었다.

살며시 문을 밀어젖힌 리옥은 발을 저겨디디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뙤창을 넘어들어온 앞마당의 등롱불빛에 네활개를 펴고 누워있는 사다께의 모습이 뚜렷이 안겨왔다.

리옥은 조심조심 서탁앞으로 다가섰다.

서탁우에는 고려땅에서 자주 보아온 푸른 사기주전자와 역시 고려의것이 분명한 푸른 사기차종이 놓여있을뿐 편지같은것은 보이지 않았다.

도꼬노마 (바람벽 한부분을 장식벽함으로 만들고 꽃과 골동품 같은것을 놓는 곳)안을 여겨보았다.

역시 종이장 같은것은 띄우지 않았다.

리옥은 사다께의 침상곁으로 발볌발볌 다가갔다.

침상주변에도 그가 찾는 물건은 없었다. 망연자실하여 방안의 구석구석을 살피던 리옥은 마침내 침대우에 네활개를 뿌리고 자빠져있는 사다께의 상판에 눈못을 박았다.

팔자수염밑에서 연방 게거품을 끓이며 푸푸 풀무질을 해대는 훌렁 뒤번져진 두툼한 입술.

뒤집어놓은 귤껍데기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스산하게 생긴 주먹코…

부지불식간 이 흉악한 도적떼의 왕초를 단칼에 찔러죽이고싶은 발작적인 충동이 치밀어올랐다.

걷잡을수없이 높뛰는 가슴을 애써누르며 사다께의 박통같은 대가리를 노려보던 리옥은 문득 그의 베개밑에 깔려있는 낯익은 종이봉투를 띄워보았다.

그러자 심장이 발을 구르는 소리가 북소리처럼 쿵쿵 방안을 진동하며 울리는듯싶었다.

허나 떨리는 손은 벌써 베개밑으로 서서히 내뻗치고있었다.

사르시 봉투의 귀마리를 당기니 봉투는 찢어질듯이 팽팽하게 켕길뿐 조금도 빠지지 않았다.

잠시 굳어졌던 리옥은 심호흡을 길게 하고나서 살며시 베개귀를 들어올리였다.

베개가 한켠으로 들리자 천천히 실그러지던 사다께의 소대가리같은 머리는 툴러덩 이불우에 떨어졌다.

코고는 소리가 뚝 멎더니 사다께의 눈시울이 닭새끼의 눈꺼풀처럼 스르르 벗겨지였다.

리옥의 심장은 뚝 멎어버리고 전신에 소름이 오싹 내끼치였다.

정기없는 시뻘건 눈으로 리옥의 얼굴을 멀거니 올려다보던 사다께는 언청이처럼 분명치 않은 소리로 쑤얼거리였다.

《또 한주발 가져와! 얼마든지 마실수 있다니까…》

아직도 잠에 취하고 술기운에 휘감기여 맥없이 헛손질을 하던 사다께는 다시 눈을 감았다.

흔들대던 손을 기운없이 떨구며 드렁드렁 다시금 코를 골았다.

리옥은 불시에 전신이 나른해났다.

자꾸만 무릎이 접혀질것처럼 장딴지가 후들후들 떨리였다.

그런중에도 이를데 없는 안도감이 벅찬 환희마냥 가슴그득히 몰밀려들었다.

(맙소사. 세상에 이런 행운도 있는가.

하늘이 도왔을가. 아니면 장군이 굽어살폈을가. 실로 천행이로구나.…)

얼마후 사다께의 편지를 품속 깊숙이 간수한 리옥은 등뒤에서 금시 칼날이 날아드는듯 한 짜릿한 공포감을 느끼며 황황히 관사를 빠져나왔다.

천방지축으로 바다가를 향해 달리였다.

바다가에 나오니 그사이 배를 띄워놓고 기다릴줄 알았던 장서방은 모래불에 무릎을 꿇고앉아 절망적인 소리를 곱씹어 뇌이고있었다.

《아니올시다, 아니라는데두요. 소인은 도망을 하려는게 아니라 고기가 든 멍구럭을 찾으러 나왔소이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눈에 힘을 주고 살펴보니 장서방앞에는 외통눈이가 칼을 추켜들고 서있었다.

하도소도는 금시 칼을 내리칠 태세를 취한채 회심의 웃음을 지으며 씨벌거리였다.

《으흐흐, 아름다운 꾀꼬리가 도마뱀을 잡아먹는다더니… 그렇게 곱다랗게 생긴 계집이 이런 흉측한 궁냥을 했단 말이지.

내 이미 그년이 네놈과 작당하여 도망질을 하려 한다는것을 짐작하고있었다.

어때?! 이쯤하면 이 보름보기 하도소도가 어떤 인물인지 알만 할테지.

이제 그 리옥이라는 년까지 홀치면 이 하도소도는 눈알이 세개있는 놈들도 부러워할 큼직한 상을 타게 될게다.

네 이놈! 이제는 그만 일어섯!》

리옥은 눈앞이 아뜩해났다.

리옥이가 하도소도를 어리숙한 못난이로 여긴것은 너무도 큰 실수였다.

리옥은 아프게 입술을 감쳐물며 내심깊이로 부르짖었다.

(아, 모든것이 이렇게 끝장나고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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