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 회)

제 3 장

8

 

희벗하게 색이 바랜 겨울의 창백한 해가 구름너머로 사라지자 대지에는 곧 침침한 저녁어스름이 깃을 펴기 시작했다.

관사의 대돌아래 제법 무게있게 솟아있는 두개의 돌탑속에서 색스러운 등롱불들이 펑끗펑끗 눈을 떴다.

조잡하게 층층으로 덧놓인 관사지붕들의 추녀끝에서도 각색모양의 앙증스러운 등롱들이 빠금빠금 눈을 떴다.

삽시에 관사 앞마당은 대낮처럼 밝아지였다.

얼마 안있어 앞마당으로는 하나같이 어깨가 되바라지고 몸집이 똥똥한 십수명의 왜구가 불구경가는 게사니무리마냥 띠뚝띠뚝 들어섰다.

주변 남해안과 고려의 서해안고을들을 급습하여 적지 않은 재물을 략취해가지고 엊그제 돌아온 여러 도적패의 두령들이였다.

이들은 지금 사다께가 저들의 전공을 축하하여 손수 배설한 연회에 참가하기 위해 관사로 밀려오는것이였다.

노상 근검소박을 입버릇처럼 떠드는 사다께로서는 매우 드물게 차리는 이런 연회에 참가한다는것은 크나큰 자랑인 동시에 무상의 영광이였다.

하여 두목들은 섬돌우에 발을 올려놓으면서부터 저마끔 자기의 처지와 직분에 어울리는 표정을 짓느라고 상판들을 실룩거렸으나 모두가 섬세한 인간감정과는 인연이 먼 무지막지한 강도배들이라 얼굴들에는 과분한 은혜를 받아안은 아래사람의 황공감사한 기색이라기보다는 우는지 웃는지 알수 없는 기괴한 표정이 그려져있었다.

잠시후 관사의 너렁청한 도회청에서는 이 집이 생겨 일찌기 있어본적 없는 성대한 연회가 시작되였다.

울타리짬을 비집고 나온 호박처럼 막생긴 대가리우에 물소뿔같은 죤마게(왜상투)를 치솟군 왜구들이 음식상둘레에 갈가마귀떼처럼 모여앉자 지또와 리옥을 대동한 사다께가 비단옷자락을 너풀거리며 위엄있게 나타났다.

졸개들은 일제히 대가리를 조아려박으며 왜가리청을 뽑아올리였다.

《황공하오이다―》

자못 틀스러운 거동으로 상좌에 틀고앉은 사다께는 등뒤의 바람벽에 아무런 장식도 없이 그려진 새빨간 해를 얼핏 살펴보고나서 고개를 돌리였다.

《모두들 고개를 들어라.》

사다께의 위엄있는 령이 내리자 졸개들은 무슨 큰 혜택이라도 입은듯 공경어린 시선으로 상관의 얼굴을 쳐다보며 우줄우줄 허리를 폈다.

사다께가 오늘 이 좌석에 리옥을 데리고 나온것은 요즘에 들어 더더욱 마음이 끌리는 리옥에게 자기의 막강한 권력과 권위, 비상한 군사적지략과 원대한 포부를 유감없이 과시하고싶어서였다.

리옥은 또 자기대로의 비밀한 속내가 있어 사다께의 청을 흔연히 받아들여 이곳에 나온것이였다.

기다랗게 잇대놓은 앉은뱅이식탁우에는 왜국의 음식은 물론 고려의 이름난 료리들이 울긋불긋하게 차려져있었다.

모두가 여러 나라를 무시로 나들며 순수 도적질을 해먹고사는 강도배들이라 같지 않게도 음식취미까지 다양한것이였다.

잠시 졸개들의 상통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사다께는 드디여 껄껄한 청으로 말문을 열었다.

《에또― 풍랑사나운 바다길을 헤치고 나가 전고에 없는 대공을 세우고 돌아온 너희들을 축하한다.

내가 이미 여러차례 강조했지만 한 인간의 성쇠도 재물의 유무에 좌우되고 한 나라의 흥망도 재력의 다소에 따라 결정된다.

그렇게 놓고볼 때 너희들의 이번 전공은 애국지심과 무사도정신의 거대한 발동으로서 우리 대마도의 급속한 번영과 래일의 령토확장에 크게 기여하게 될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그지간의 피로도 풀고 전승도 축하하는 의미에서 밸이 푹 젖도록 실컷 마셔라.

온 세상의 술과 재부가 너희들의것이다.》

살인과 략탈로 일관된 천인공노할 만행을 애국심의 발동으로까지 추켜올린 사다께는 도적떼의 대두령답게 상스럽기 그지없는 어투로 연회의 개최를 선언했다. 하고는 햇비둘기처럼 배리배리한 왜계집들이 정히 올리는 커다란 주발을 받아들더니 제먼저 무슨 본보기라도 보이듯 단숨에 술을 찌워버리였다.

졸개들도 쭈룩쭈룩 소리를 내며 걸탐스럽게 술을 들이키였다.

왜구들은 독한 술을 한주발씩 퍼마시자 하나같이 구워놓은 가재처럼 상판들이 빨갛게 익어번지였다.

어느결에 꽛꽛하게 굳어졌던 표정들은 흐물흐물하게 풀어지고 그런대로 단정해보이던 몸가짐들은 거들거들하게 흐트러지였다.

질탕한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곳곳에서 소란스럽게 울리였다.

세상만사를 초탈한듯 심상한 기색이 떠돌던 리옥의 청초한 얼굴에 모멸적인 랭소가 비끼였다.

리옥은 할수만 있다면 천박하고 무지스러운 왜구들의 비게진 몸뚱이에 기름을 활활 들붓고 불을 달아서 쥐무리처럼 통쾌하게 태워버리고싶었다.

하지만 복수는 아직 멀리에 있고 할일은 당장 눈앞에 있었다.

리옥은 끓어오르는 분노와 복수의 열을 애써 누르며 일을 벌리기에 가장 맞춤한 시각을 마음속으로 골라보기 시작했다.

숱좋은 코수염을 가락지모양으로 슬슬 비틀어꼬며 리옥의 기색을 훔쳐보던 사다께는 문득 취기가 가득어린 거센 목소리로 웨치듯 말하였다.

《모두들 듣거라.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맹렬하게 전과를 확대해나가야 한다.

그러자면 그 어느 나라보다 고려를 가장 중시해야 하는바 그 리유는 너무나 명백하다.

고려는 대마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있으니 왕복기일이 짧은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고려의 곡물과 피륙, 어물을 비롯한 모든 물산들이 천하의 상등이기때문이다.》

소란스럽던 방안은 금시 쥐죽은듯 고요해졌다.

사다께의 껄껄한 음성은 즈렁즈렁 공명을 일으키며 계속되였다.

《에또― 우리가 예상한바와 같이 고려조정의 형세는 날이 갈수록 더욱 어수선해지고있다. 권력의 상좌에 들어앉은 리성계는 가급적으로 반대파전원을 숙청 또는 흡수하고 왕권을 획득하기 위해 혈안이 되여 날뛰고있다.

조정의 형세는 이처럼 파국상태인데 가소롭게도 단신으로 대마도를 치겠다고 덤벼치던 경상도원수 박위는 드디여 우리의 계략에 걸려 칼을 쓰고 전옥에 갇혔다.

병든 호랑이가 혼자 날뛰는것도 무서울것 없는데 그나마 함정에 빠지기까지 했으니 박위야말로 비루먹은 강아지보다 두려울것이 없지 않는가, 으핫하하.》

사다께의 선창에 이어 졸개들의 웃음소리가 왁자하게 터져올랐다.

볼퉁이에 험상한 칼자리가 패인 추접스럽게 생긴 왜구 하나가 술대접을 받쳐들고 사다께앞으로 썰썰 기여올라갔다.

놈은 자라목처럼 파묻힌 굵은 목을 한껏 빼올리며 아첨기가 가득한 어조로 허풍을 떨었다.

《참으로 항우이상의 용력과 제갈공명도 따르지 못할 출중한 지략을 지니신 령주도노는 우리 대마도는 물론이요 전 일본국의 가장 큰 자랑이올시다.》

사다께는 졸개의 낯간지러운 아첨이 무던히도 흡족하였으나 소대가리만큼이나 큰 머리를 두어번 끄떡거리는것으로 대강 답례를 하고나서 술대접을 받아들었다. 또다시 술대접을 자신만만하게 기울이였다.

사다께는 지금 리옥과 졸개들에게 자기의 거물스러운 인격을 각방으로 과시하고싶었으나 슬프게도 그의 주량은 욕망이나 허영에 비해 어방없이 딸리였다.

두번째로 술대접을 비우는 사이 점잖게 눌러썼던 통버선모양의 관모는 어디론가 벗겨져 달아나고 바위처럼 끄떡없던 다부진 상체는 위태롭게 기울거리는데 혀는 잔뜩 꼬부라지여 말소리는 반나마 가려들을수 없었다. 그래도 허욕과 광기는 그냥 뻗쳐올랐다.

사다께는 굵고 탄탄한 팔을 앞으로 길게 내던지며 또다시 고아붙이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곧 경상도로 나가야 하겠는가. 아니다, 용맹은 항상 지모와 결합돼야 백전불패를 가져온다.

최대로 력량손실을 없애면서 최상의 리득을 얻자면 총진격에 앞서 우선 박위를 완전히 죽여버려야 한다.

그래서 나는 래일중에 우리 군사 몇명을 거제도에 보내려고 한다.

거제촌의 두령과 함께 두세척의 배에 병기를 가득 싣고 가서 무작정 경상군영바다가에 쏟아놓게 하겠단 말이다.

그다음은 요리꼬에게 그 모든 사연과 우리의 계책이 최종적으로 언급된 편지를 보내여 그것이 제창 고려조정에 들어가도록 할것이다.

그러면 박위는 옴치고 뛸데없이 목을 잘리게 될것이다.》

사다께는 음흉한 미소를 띠우며 두장의 편지 즉 요리꼬와 고려조정에 보낼 편지를 쳐들어보이였다.

리옥의 심장은 아까부터 세차게 높뛰고있었다.

사다께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가슴이 뻘겋게 달아오르는중에도 가지가지 짐작과 제나름대로 세운 타산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모든 일이 사다께의 계획대로 진척된다면 옥에 갇혀있는 현중 아버님은 십중팔구 생을 보존할수 없을것이다.

대마도원정계획도 수포로 돌아갈것이다.

그것을 위해 사다께와 왜구들은 미친개처럼 눈에 달이 떠서 뛰여다니는데 나는 이렇게 조롱에 갇힌 새처럼 꼼짝달싹 못하고있지 않는가.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사다께는 큼직큼직하게 손세를 써가며 계속 씨벌거리였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지체없이 대거출동하여 천백가지 보물을 바다가의 모래 푸듯 푹푹 퍼낼것이다.》

사다께는 별안간 바위같은 상체를 홱 비틀더니 바람벽에 그려놓은 피덩이처럼 시뻘건 해를 가리켜보이였다.

《모두다 〈력발산기개세〉(힘은 산을 뽑고 기세는 세상을 뒤엎는다)의 의지로 더한층 분발하여 이 나라 천자의 웅대한 포부를 기어이 실현해야 한다!》

사다께의 열띤 호소가 끝나기 바쁘게 졸개들은 남생이소리에 자라떼가 호응하듯 투덕투덕 손벽을 치며 야생적인 소리를 터치였다.

《반쟈이!》, 《반쟈이!》

멋스러운 손짓으로 졸개들의 환호에 답례를 보낸 사다께는 무슨 장한 일이라도 치른듯 헤벌쭉이 웃으며 리옥에게 고개를 돌리였다.

《리옥! 형세는 바야흐로 우리 대마도가 천하를 쥐게 될 성공의 전야에 이르렀는데 리옥이도 이제는 마음을 질정해야 하지 않을가?!

그렇다고 해서 당장 결단을 내리라는건 아니고…

이런 이야기는 조용한 기회에 다시 하기로 하자.》

사다께는 자기앞에 놓여있는 음식그릇을 리옥이앞에 가져다놓으며 은근한 어조로 수작을 계속하였다.

《이건 다른 나라 귀족들이 즐겨 먹는다는 닭고기료리와 돼지고기볶음인데 한번 먹어보라구.

처음 먹을 때는 진챠이(독특한 냄새를 풍기는 양념)냄새가 나서 상당히 역스럽지만 차츰 익숙되면 세상에 이보다 맛좋은 료리가 있는것같지 않아. 알고보면 인생사의 리치도 이와 비슷하거던.

그래서 〈인간도처 유청산〉(인간이 가는 곳마다 청산이 있다.)이라는 말도 생긴것이겠지.

이제는 내 말뜻을 알만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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