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 회)

제 3 장

7

 

경상도원수 박위를 잡아올리라는 나라님의 지엄한 교지를 몸에 받은 사헌부(관리들의 행동을 감찰하며 그들의 죄과를 론박하고 따지는 임무를 수행하는 중앙관청)의 감찰어사가 한무리의 라졸을 뒤에 달고 풍우마냥 김해로 내려오고있을 때 며칠동안 자리보전을 하고 심하게 앓던 박위는 가까스레 침상에서 일어나앉았다.

때는 아침나절 사위는 무던히도 고요한데 어디선가 방금 잠에서 깨여난 이름모를 새들이 겨울의 청쾌한 대기를 들찢으며 명랑하게 우짖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아직도 이따금 뒤머리가 들쑤시고 맥없이 늘어진 두팔이 간헐적으로 떨리였다. 그러나 기분은 전에없이 개운했다.

몸을 일으키면 능히 행보를 할것 같았다.

《허, 요즘같은 때 내가 자리보전을 하고 며칠씩이나 누워있다니?!… 음음.》

박위는 개탄조로 웅얼거리며 느릿느릿 침상에서 일어섰다.

하고는 떨리는 손으로 꼼꼼히 옷갓을 차리였다.

박위는 전라도군영을 다녀온 그날부터 심한 고열에 싸이여 헛소리까지 쳐가며 앓았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 의식을 회복하자 즉시 윤통을 불러들이여 자기와 김종연이 약조한 내용을 대충 알려주고 그지간의 정형을 꼼꼼히 캐물었다.

일은 그새 많이 추진된듯 했으나 그렇다고 하여 마음을 놓을수는 없었다.

박위는 불덩이처럼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몸을 일으켜세워 바다가로 나갔으나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쓰러지고말았다. 재차 병석에 누워 며칠동안 다시금 앓음치레를 하였다.

지금도 자리에서 일어서기는 했으나 전신이 나른한것이 도저히 맥을 출것 같지 못했다.

허나 병세는 완구히 회복기에 들어선것이 틀림없었다.

뭐니뭐니해도 시시로 치밀어오르던 구토감과 현훈증이 씻은듯이 사라진것이 기뻤다. 아니, 자나깨나 원정에 떨쳐나서려는 불타는 열망이 자신의 육체를 그렇게 납득시켰는지도 몰랐다.

병고에 시달리던 나날 박위는 원정에 바치는 사람들의 비상한 노력에도 재삼 감동되였지만 자기를 위해 기울인 군사들과 백성들의 뜨거운 정성에도 깊이 감동되였다.

여삼은 매일과 같이 산지사방으로 뛰여다니며 제노라 하는 의원들을 수없이 불러들이였다. 김해부중에서 손꼽히는 의원들은 물론 어느 구석에 골박혀있는지 알지도 못했던 돌팔이의생들까지 침통이며 부항단지를 꿍져안고 줄레줄레 모여들었다.

오천은 진종일 염초냄새, 염초연기에 쏘이여 뻘겋게 눈이 부어가지고도 틈만 생기면 황산강에 나가 잉어나 메기 같은 민물고기를 잡아가지고 찾아왔다.

바다고기보다 민물고기로 만든 지지개를 더 좋아하는 박위의 입맛을 돋구어주기 위해서였다.

옥보와 구서방은 자기 집 고방에 깊숙이 건사했던 해묵은 산꿀과 산저담 같은 약재들을 내오고 고들이와 《만사태평》같은 군사들은 밀양과 창원의 친척집에 나가 말린 노루피와 곰열을 구해가지고 왔다.

실로 수많은 사람들의 뜨겁고도 각근한 인정이 물결처럼 박위의 처소로 밀려들고 쓸어들었다.…

《인간이란 참… 겉모양만 보고 판단해서도 안되는 법이요. 량반상놈을 따져서 평해서도 안되는 법이라―》

멀거니 굳어진채 사색을 펴나가던 박위는 혼자소리를 뇌이며 곁에 있는 자리끼를 집어들었다.

물 한그릇을 다 비우고서야 박위는 씁쓸하면서도 달큰한 맛이 도는 물이 보통 숭늉이 아니라 구기자차라는것을 느끼였다.

(한겨울에 어디서 이런게 생겼을고?

리옥이도 없는 때에…)

리옥이 생각이 떠오르자 대뜸 가슴이 쩌릿하게 저려들었다.

한송이의 호함진 정향꽃처럼 그윽하고 청순한 처녀의 자태가 눈앞을 가득 메우며 육박하듯 다가왔다.

이제는 필시 저세상에 갔을 사람, 그래서 생각날 때마다 지워버리려고 애를 쓰나 그럴수록 더욱 생생하게 가슴속에 파고들며 아리고 쓰린 추억, 달고 뜨거운 정회를 불러일으키는 처녀…

이런것이 바로 운우의 정인가?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것인가.

그건 어찌 됐든 예전에는 어느 정도 정신상의 부담이라고 여겼던 그와의 관계가 지금에는 어이하여 정신상의 소중한 보배로 느껴지는것인가.

다시는 그 모든것을 회복할수 없는 이 마당에 이르러서야…

서두를 까닭도 없건만 급급히 벽상에 걸린 칼을 벗겨든 박위는 밖으로 나왔다.

앓아누웠던 사이에 자기의 용력과 칼솜씨가 조금이라도 줄지 않았는지 스스로 가늠해보고싶었다.

다쫓기듯 다급히 후원에 들어선 박위는 칼잡은 손을 번쩍 추켜들었다.

예리한 칼날이 차거운 아침공기를 베며 곧추 일어섰다.

홱홱― 박위의 장검은 증오와 복수의 노래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눈부시게 번쩍이며 꽃무늬같은것을 그리던 칼은 불식간 앞쪽으로 힘차게 내리박히였다.

황홀한 검무앞에서 얼이 빠진 적수가 뒤로 한발 물러서는 순간 벼락같이 달려들어 정수리를 내리까는 법수였다.

홱홱― 다시 칼을 끌어들인 박위는 돌개바람에 태우기라도 한듯 잉그르르 맴돌이를 하며 가로세로 마구 칼날을 휘날리였다.

사면팔방에서 한꺼번에 달려드는 적들을 일격에 쳐물리치는 법수였다.

순간의 정지도 없이 길길이 날고뛰며 본국검총도의 34가지 칼쓰기동작을 미끈하게 수행한 박위는 내처 등패총도의 11가지 동작과 월도총도의 33가지 동작까지 수행했다.

《맹호장과!》

월도총도의 마지막동작을 끝내며 큰소리로 동작의 제명을 웨치고난 박위는 서서히 칼을 내리웠다.

앓기 전보다 호흡은 조금 가빴으나 근력이나 칼솜씨는 결코 줄어든것 같지 않았다.

한결 거뿐해진 기분으로 후원을 나서던 박위는 무심결에 처마밑에 줄줄이 드리워있는 빨간 열매무더기를 띄여보자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은 초들초들하게 마른 구기자열매였다.

(어디서 저런게 생겼을가?

옳거니, 현중이녀석이 벌써 초가을때 죽촌에 나가서 따온게 틀림없으렷다.…)

언제부터인지 현중은 이따금 구기자차를 들여오군 했다.

그때는 일에 다몰리고 병고에 시달리던 때라 별생각없이 마셔버렸었다.

헌데 지금 생각해보니 현중은 단지 아버지의 원기를 돋구어주기 위해 구기자차를 들여온것이 아니였다.

현중은 리옥이가 못견디게 보고싶고 그의 정이 사무치게 그리워 처녀의 넋과 체취가 슴배여있는 열매를 따온것이였다.

엉큼한 녀석이 아버지에게 리옥의 정을 상기시켜주느라고 그랬는지도 몰랐다.

박위는 한참후에야 구기자열매타래앞에서 물러섰다.…

오래간만에 조반상을 말끔히 비운 박위는 아침밥이 자위 돌새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다가로 갔다.

오늘은 전라도원수 김종연이 20여척의 전함을 끌고 군영앞바다에 들어서겠다고 약속한 날이였다.

안동원수 최단도 오늘 백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륙로로 도착하겠다고 이미 전갈을 보내왔었다.

그들은 모두 중낮때나 당도할것이니 지금부터 바다가에 나가 서성거릴 까닭은 없었으나 박위는 다시금 원정준비상태를 제눈으로 깐깐히 확인하고싶었다.

하얀 모래불이 끝간데 없이 펼쳐진 바다가에는 오늘도 숱한 사람들이 하얗게 쓸어나와 설렁거리고있었다.

겨울의 아침공기는 쌀쌀하건만 거의 모두가 한여름때처럼 맨 등거리만 입고 나서서 시뻘건 팔뚝을 울뚝불뚝 뽐내고있었다. 앞바다를 메우다싶이 빽빽이 늘어선 전함들의 아래쪽에서는 숱한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선체에 석회를 바르거나 동백기름을 칠하고있었다.

시꺼먼 연기타래가 트레트레 오르는 불망치로 배널을 지지며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선체가 썩지 않게 하기 위해 미리 방비를 하는것이였다.

사다리나 널판자를 타고 분주하게 전함우로 오르는 사람들도 보이였다.

벌써 포알이며 화약 같은것을 적재하는것이였다.

바다가 모래불우의 광경도 장관이였다.

처마에 처마를 잇대고 즐비하게 늘어서있는 대장간들과 염초장들에서는 망치질소리, 풀무질소리, 웃고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썩들썩 울리는데 누렇게 마른 띠풀이영의 틈새로는 건회색 또는 등황색의 뜬김과 염초연기가 꾸역꾸역 퍼져오르고있었다. 눈처럼 하얀 염초가 담긴 함지나 멍구럭 같은것을 들고나오는 사람, 새로 벼린 칼이나 창을 장작단처럼 안고나오는 사람, 숯가마니나 먼지, 혹은 재가 든 가마니를 메고 들어가는 사람… 들고나는 사람들은 많기도 했다.

그뒤로 길게 뻗어나간 돌성의 성가퀴들에서는 물고 뽑은듯이 칠칠한 군사들이 초롱같은 눈을 빛내이며 멀리 바다길을 살피고있었다.

성을 지키면서 적정을 살피는 파수군들이였다.

박위가 앓아누운새 싸움준비는 한층 더 완비되고 군사들과 백성들의 전투의욕은 훨씬 비등된것이 헨둥 알리였다.

쌍까풀이 선명하게 그어진 눈에 그윽한 정을 담고 곳곳을 모박아 살펴보던 박위는 대장간뒤쪽에서 숱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와자자 터져나오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였다.

웃음소리가 잦아들기 바쁘게 어디서나 입심으로 한몫 보는 염초장옥보의 쨍쨍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오천대장이 과연 난사람은 난사람이로군. 또 이렇게 영절스러운 궁냥을 해낼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나나 구서방 같은 사람들로서야 어림반푼어치나 있는 일인가?!》

언제든지 구서방을 꺼들어가지고 악의 없는 약을 올리는것을 하나의 재미로 여기는 옥보는 이번에도 오천을 치사하는 말틈에 구서방을 끌어넣었다.

《암, 그 다 이를말인가. 나같은 사람은 일년내내 골을 썩인다 해도 땅띔도 못할 궁냥일세.

자고로 슬기단지란 따로 있는 법이야.》

옥보에 대한 승벽심과 사위감을 쳐들어올리는 뜻이 로골적으로 풍기는 구서방의 말소리가 잇달리였다.

《아니, 그게 무슨 요란한 궁냥이라고 모두들 이러시나요?!

날더러 난사람을 꼽으라면 난 선참으로 옥보아저씨를 꼽겠어요.

곰배질, 풀무질도 일등으로 잘하는데다 지금나이에 재가마니를 두개씩이나 포개메고 뛰여다니니 그게 보통 힘인가요.

상장군, 대장군들도 그 모양을 보면 기함을 할거예요, 헛허허.》

칭찬보따리를 슬그머니 옥보에게 넘겨씌우는 오천의 시원스러운 목소리.

그 바람에 더욱 기세가 오른 옥보는 다시 이야기판의 채를 잡았다.

《그 말 참 귀맛 좋으이. 그러니 오천대정이 도통사벼슬쯤 하면 이 옥보도 랑장이나 중랑장벼슬은 헐후히 얻어걸치겠네그려.

아무렴 이 옥보도 주기만 한다면야 중랑장벼슬이야 능준히 감당하지. 안 그런가, 구서방?》

핫하하… 또다시 솟구쳐오르는 웃음소리…

박위는 성큼성큼 대장간뒤쪽으로 걸음을 옮기였다.

대장간과 염초장뒤쪽의 꽤 넓은 공지에 담을 두르고 서있던 사람들은 박위를 알아보자 저마끔 너푼너푼 허리를 꺾었다.

《장군께서 예까지 나오시다니요?!》

《찬바람을 맞으시면 몸에 해롭소이다.》

싱그레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는것으로 사람들의 인사에 모두거리답례를 하고난 박위는 오천에게 다가섰다.

어찌된 일인지 오천의 너부죽한 얼굴에는 시꺼먼 먹물자욱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우습기도 하고 의문스럽기도 했다.

《여기서는 무슨 좋은 일이 있기에 웃고떠드는게냐. 어디 말 좀 해보아라.》

오천은 자기의 얼굴꼴은 전혀 모르는듯 팔뚝같이 실한 붓으로 발치에 펼쳐진 돛천을 가리켜보이며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무슨 좋은 일이 생긴게 아니라 그럴듯한 궁냥이 떠올라 지금 막 펴보는중이올시다.

되지 못한 궁냥인지 모르겠사오나 모든 전함의 돛천에 룡이나 범같은 무서운 짐승들과 괴상한 무늬를 그려넣으면 원정군의 기세가 한층 장해보일듯 하옵니다.

또한 왜구들은 우리 함대의 돛천에 새겨진 그림들과 그림이 비쳐진 바다물을 보면 첫순간에 벌써 혼이 빠지고 기가 질릴줄 아옵니다.

그래서 지금 먹물에 아교를 타서 돛천에 그림을 그려넣고있소이다.》

박위는 부드러운 미소를 띄운채 말없이 고개를 끄떡거렸으나 마음은 못내 흡족하였다.

오천은 정녕 슬기단지였다.

허나 이번의 새로운 창안 역시 타고난 총명에 바탕을 둔것이 아니라 왜구에 대한 불타는 증오와 고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 뿌리를 둔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각방으로 동뜨게 잘난 녀석이니 최무선장군은 만날 때마다 그리도 각근히 당부를 한것이리라.

헌데 나는 이 녀석을 오해하고 미워하던 나머지 매까지 치게 했었지?!…

참으로 인생은 평면에서 살지만 평면으로 느끼고 받아들이고 리해해서는 안되는게라―)

박위는 어제날 자기의 경솔한 처사가 생각할수록 불만스러웠으나 오천의 기발한 궁냥이 비낀 그림은 볼수록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원정의 승리를 확증하는 또하나의 요인이 명백히 잡혀지는것 같기도 했다.

박위는 크게 고개를 끄떡이며 웨치듯이 말하였다.

《이는 필시 훌륭한 궁냥이로다.

이번 원정에서는 물론 앞으로의 바다싸움에서도 크게 써볼만 한 계책인줄 아노라.》

《황공하옵니다.》

박위의 과찬에 다시 쑥스러워진 오천은 먹물이 묻은 시꺼먼 손으로 공연히 자기의 볼편을 이리저리 문대였다.

그 바람에 오천의 얼굴은 아예 숯등걸처럼 새까매지고말았다.

심신이 더욱 개운해진 박위는 오천의 얼굴을 가리켜보이며 좀해서는 하지 않던 롱말을 꺼내놓았다.

《우선 나부터가 검덕귀신같은 네 얼굴만 봐도 더럭 겁이 나는데 이제 온갖 괴이한 그림들이 바다우와 바다물에 한벌 쭉 깔리면 왜구들이 어찌 혼비백산하지 않겠느냐.

덤벼들 생각도 못하고 홍찌를 내갈기며 줄행랑을 놓을게다, 으헛허허…》

핫하하… 모두들 박위를 따라 또 한바탕 유쾌하게 웃어제끼였다.

사람들의 웃음속에는 필경 박위의 치하를 고마와하는 뜻과 함께 엄엄하고 서슬푸른 장수로부터 정답고 친근한 인간이 되여 다시금 자기들속으로 돌아온 박위를 뜨겁게 반기는 의미도 깔려있었다.

살틀한 시선으로 사람들을 둘러보던 박위는 류달리 큰소리로 웃고있는 죽촌의 행수로인을 띄여보자 까닭없이 가슴이 서늘해났다.

그에게 무슨 말이든 해주고싶었으나 혀끝으로 그네들의 수고를 치사하는것은 어딘가 성의없는 소위처럼 생각되여 그저 고개만을 크게 끄떡거려보이였다.

박위의 고개짓을 제나름대로 짐작한 행수로인은 박위앞으로 다가오더니 사뭇 정중하게 읍을 하고나서 말하였다.

《어제 소인네들은 장군께서 병석에 누워서도 미거한 우리 촌백성들을 념려하여 보내주신 식량을 받았소이다.

백성으로 생겨 군사를 돕는것은 너무도 의당한 일이온데 넉넉치도 못한 군량까지 덜어 보내주시니 실로 황감하기 이를데 없소이다.》

언제나와 같이 청청하고 격식바른 행수로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박위는 손을 내저었다.

《나는 군량을 덜어서 보낸것이 아니라 응당 보낼데로 보낸게요.

지금 이 고장에는 군사와 백성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모두가 군사요.

군사가 군량을 받은셈이니 고마울것도 없고 마음상에 부담을 가질것도 없소.》

이어 박위는 오천과 행수로인에게 일을 더욱 재우칠것을 당부하고나서 신도가 어렴풋하게 바라보이는 바다쪽으로 걸음을 옮기였다.

이제는 김종연이네가 당도할 시각이 박두한듯싶었다. 차거운 모래불에 발을 묻고 선 박위는 전라도함대가 나타나게 될 신도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마음은 전에없이 초조하고 다급해났다.

(전라도원수와 안동원수가 오늘 중낮에 다같이 들어선다면 저녁중으로 작전토의를 초벌 끝낼수 있겠는데…

왜 이렇게 늦어질가. 혹시 그새 무슨 일이라도 생긴게 아닐가.

아니, 내가 지금 공연한 근심을 하고있다. 김종연이나 최단은 다 묵직한 인물들이요 쉽게 마음이 흔들릴 장수들이 아니니 이제 곧 이쪽저쪽에서 나타날게다.…)

등뒤에서 다급한 발자국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시꺼먼 얼굴을 보기싫게 찡그린 윤통이 전복자락을 날리며 드바삐 다가오고있었다.

박위앞에 온 윤통은 소금기가 허옇게 내번진 두툼한 입술을 실룩실룩거리더니 절망적인 음성을 끌어올리였다.

《장군! 전하의 어지를 몸에 받은 사헌부 감찰어사가 방금 군영에 도착했소이다.》

윤통은 감찰어사가 어떤 어지를 가져왔는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나 박위는 어지의 내용이 대번에 짐작되였다.

박위는 하얀 대문이로 아프게 입술귀를 짓물었다.

(드디여 일이 닥쳐왔고나.…)

하늘은 푸르청청한데 어디선가 우뢰소리같은것이 꾸릉꾸릉 울리는듯싶었다.

대기는 티 한점없이 투명한데 짙은 안개장막이 밀려오기라도 한듯 눈앞이 뿌잇해났다.

하건만 박위의 마음은 자기로서도 놀라우리만큼 평온했다.

천둥이 울 때 뉘라서 소나기가 쏟아질것을 예측하지 못하랴?! 오늘같은 일은 아니아니 하면서도 이미 충분히 예견하고있었다.

단지 그처럼 애타게 바라던 원정을 당장 벌리려는 대목에 이르러 터진것이 못 견디게 아쉬웠다.

아니, 자기 몸을 통채로 땅바닥에 태질이라도 치고싶도록 분하고 억울했다.

허나 나라님의 지엄한 교지는 이미 내린것이요, 일은 눈앞에 현실로 닥쳐온것이니 불행은 피할수 없었다.

이제는 살점이 분분히 튀여나고 뼈가 산산이 바사진대도, 설사 형장의 대곤밑에서 목숨이 끊어진대도 끝까지 자신의 무죄와 결백을 표명하고 대마도원정의 촉급성과 필요성을 주장하는외 다른 출로가 없었다.

박위는 태연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거리였다.

《그렇다면 어서 군영으로 가야지.…》

《예?》

찢어져나가는듯 한 가슴을 안고 박위를 주시하던 윤통은 그만 입을 딱 벌리였다.

사람이 아무리 강건하고 담대하기로서니 어쩌면 자기를 옥쳐갈 지옥사자같은 감찰어사가 왔다는데도 눈섭 한오리 까딱하지 않고 어서 군영으로 가자고 할수 있는가.

윤통은 놀랍고 분하고 앞이 캄캄해나는중에도 박위의 인간됨됨에 탄복을 금할수 없었다.

불식간에 박위와 더불어 생사를 같이할 비장한 각오가 열탕처럼 세차게 끓어올랐다.

박위와 함께 만단고초를 당하고 죽음을 당하는것은 인간으로서의 의당하고 떳떳한 의리인 동시에 지난날에 대한 가장 속시원한 속죄로 될것이였다.

윤통은 두터운 입술을 푸들푸들 떨며 결연히 부르짖었다.

《장군! 하관도 장군과 같이 구격나래(중한 죄인의 손에 고랑을 채우고 목에 칼을 씌워서 잡아가는것)를 당하겠습니다.

장군이 한 일이자 하관이 한 일이고 하관이 한 일이자 장군이 한 일입니다.

피차 행한 일이 같은데야 당하는 벌에 어찌 등차가 있을수 있겠습니까.

어서 군영으로 갑시다, 어서!…》

당장 걸음을 내짚으려던 박위는 스르시 굳어지였다.

갈범처럼 길길이 날뛰는 이 언틀먼틀하게 생긴 사내의 가슴속에 샘물가의 조약돌처럼 정가롭게 깔려있는 고결한 인정이 낱낱이 헤아려지였다.

눈굽이 지지듯 따가워나고 속이 숯불처럼 이글이글 달아올랐다.

허나 이런 때일수록 사사로운 감정이나 즉시적인 충동에 빠져서는 안되였다.

서로가 격감을 누르고 리성적인 판단을 세워 앞날의 일을 도모해야 했다.

잠시 바위처럼 굳어져있던 박위는 마치 성이라도 난 사람처럼 눈섭을 치솟구며 와짝 언성을 높이였다.

《부원수는 지금 무슨 소릴 하는게요.

부원수에게는 아무 죄도 없거니와 설사 무슨 죄가 될 끄트머리가 있다손쳐도 절대로 그래서는 안되오.

만약 모든 일이 여의치 못하여 본관이 다시 이 땅에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 부원수는 여기서 기어이 원정을 성사시켜야 한단 말이요.》

노방 딱딱하고 표표하던 윤통의 피진 눈에서 뜻밖에도 굵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였다.

윤통으로서는 난생처음으로 흘려보는 눈물이였다.

잠시 동안을 두었던 박위는 좀전과는 달리 부드럽고 따뜻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부원수는 오늘중에 내 청을 하나 들어주오.

이렇게 급작스레 떠나게 되고보니 그새 내가 일만 일이라고 부원수와 장졸들을 들볶아댄것이 미안쩍기 그지없소.

그러니 모두들 오늘 하루만이라도 푹 쉬도록 하오.

나를 대신해서 부원수가 걸구도 여러마리 잡게 하고 술도 푼푼히 가져오게 하여 군사들과 백성들을 한밥 푸짐히 잘 먹여주오. 부원수도 오늘만은 시름을 놓고 푹 쉬면서 량껏 술을 마셔주오. 그러면 떠나는 내 마음도 한결 가벼울듯 하오.》

그러지 않아도 우걱우걱 괴여오르는 속을 주체하기 어려워 헉헉 숨을 갑시던 윤통은 그만에야 말울음소리같은 오열을 터치였다.

《어흑흑… 그게 무슨 소립니까?!

장군은 구격나래를 지고 떠나면서 하관더러는 술을 마시며 즐겁게 놀라고 하니… 그게야 상제보고 곱새춤을 추라는 소리나 무엇이 다릅니까.

어쩌면… 그렇게 말씀할수 있습니까.

못하겠습니다. 그 령만은 시행하지 못하겠습니다, 흑흑흑…》

얼마후 옷갓을 벗기우고 발병부 (군사를 동원할 때 쓰는 신임표의 하나, 두쪽으로 나누어져있는데 오른쪽은 지방군 장수에게, 왼쪽은 궁중에 보관되여있다.)와 임금의 어보가 찍혀있는 관교 (정부의 관리임명서)를 회수당한 박위는 칼을 차고 군영대문을 나섰다.

느티나무아래에 웅기중기 모여서서 웅성거리던 수십명의 군졸들과 백성들이 우르르 밀려왔다.

삽시에 박위의 주위를 담벽처럼 에워쌌다.

박위는 사실 그 누구의 배웅도 없이 조용히 군영을 떠나고싶었다.

그래서 윤통에게 일의 내막을 절대로 발설하지 말라고 엄하게 일렀건만 어찌된셈인지 그 뚝뚝한 사람이 제쪽에서 먼저 마른 울음을 끅끅 갑시며 소리소리 지르고 돌아가는 바람에 소문은 순식간에 짜하게 퍼지고말았다.

박위는 맨상투바람에 칼을 쓰고 사람들앞에 나서는것이 창피하고 거북하였다.

게다가 노상 육체의 한부분마냥 중히 여기던 장검과 발병부, 관교까지 떼우고보니 자기라는 인간이 속심지는 싹 빠져버리고 허울만 남은듯 하여 허전하고 공허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러거나말거나 사람들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바싹바싹 조여들었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고을의 자랑으로, 고을의 수호신으로 여기던 박위가 생사를 기약할수 없는 전옥으로 끌려가게 되자 그의 존재가 더욱 귀중해지고 그의 처지가 더욱 비통하게 생각되여 모두 제정신들이 아니였다.

사람들의 앞장에서 흑흑 울음을 삼키던 오천은 베개통같은 주먹으로 눈굽을 빗씻으며 박위앞으로 바투 다가섰다.

《장군께서 이렇게… 소인의 죄까지 들쓰고가시면 소인은 이 하늘아래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삽니까.

함께 가겠소이다. 소인의 죄는 소인이 당하겠소이다.》

박위는 축축하게 속이 젖어들었으나 짐짓 엄하게 꾸짖었다.

《당치 않은 소리 말아라.

왜구는 우리가 반드시 근멸해야 할 민족의 적이거늘 너는 여러 생각 말고 맡은 일에 더욱 착심해라.

소나기가 내린 연후에는 무지개가 비끼는 법이니라.…》

오천이 뒤에 서있던 구서방이 자기의 사위감을 전에없이 왁살스럽게 밀어젖히고 박위앞에 나섰다.

정중히 허리를 꺾어 하직인사를 올리고나서 지금의 정황에는 어딘가 맞지 않는듯 한 문자말을 꺼내놓았다.

《소인이 알건대 가장 어두운 때가 날이 밝기 전이올시다.

오늘의 일은 비길데없이 절통하오나 하늘은 반드시 창해속에 청룡이 누워있는줄 아실겝니다.

그러한즉 장군께서는 이제 하늘의 구원을 입어 채운을 허리에 감으시고 이내 다시 돌아오시리다.

이 애 취금아, 먼길을 떠나시는 장군께 어서 술 한잔 쳐올려라.》

구서방곁에서 실팍한 어깨를 떨고있던 취금은 두손으로 정히 술대접을 받쳐올리였다.

박위는 정찬 미소로 사의를 표하고나서 술대접을 기울이였다.

이때에야 어디선가 나타난 옥보는 급급히 사람들을 비집어헤치고 박위앞에 나섰다.

그렇게도 수다스럽던 옥보는 반나마 털을 뽑은 커다란 수닭을 부둥켜안은채 말 한마디없이 끅끅 느껴울기만 했다.

박위가 잡혀간다는 소문을 듣자 한번이나마 제손으로 기름진 안주를 마련해올리려고 급하게 닭을 튀기다가 랑자한 곡성이 울리는 바람에 그대로 진둥한둥 달려온 꼴이였다.

옥보는 한마디의 말도 여쭙지 못했는데 죽촌의 행수로인이 흰수염을 훨훨 날리며 옥보앞을 막아섰다.

행수로인은 자기의 의지와 결단으로 세상만사를 휘여내기라도 할듯 자신만만하게 두팔을 벌리고 박위의 앞길을 막았다.

《못 가시오이다. 소인네들을 두고, 원정을 앞에 두고 어딜 가신단 말이오니까?

정녕코 가서는 아니되오이다.》

박위는 목이 꽉 잠기여 아무런 말도 할수 없었다.

이 모든 사람들은 무엇때문에 이리도 눈물겨운 지성과 진정을 토로하는것인가.

내가 저들의 상전이기때문일가. 아니면 지난날 내게서 그 어떤 은혜라도 입었기때문일가.

물론 그런것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겠지만 그보다는 내가 자기들과 꼭같은 심정으로 왜구격멸을 주장하고 원정준비를 떠밀어왔기때문일것이다.

하다면 나는 이들의 기대와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어서빨리 전옥으로 가야 한다.

국문장에 나서서 나의 무죄를 밝히고 대마도원정을 촉구해야 한다.

박위는 둘러선 사람들을 다시한번 정차게 살펴보고나서 한옆에 나서있는 감찰어사에게 말하였다.

《더 늦기 전에 빨리 떠나는게 어떻소?!》

말안장우에 높직이 올라앉아 의아쩍은 시선으로 박위와 상사람들의 적극적인 교감을 갈마보던 감찰어사는 또한번 크게 놀란듯 흰자위가 가득한 눈을 뜨부럭거리며 선뜻 대답을 못했다.

여직껏 전옥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는 죄인은 단 한번도 본적이 없었던것이였다. 그러는새 박위는 사람들이 터놓은 길을 따라 제먼저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감찰어사가 탄 껑충한 피말과 장창을 비껴든 십수명의 라졸들이 줄레줄레 박위의 뒤를 따랐다.

소소리높은 느티나무의 우듬지에서 까치들의 명쾌한 울음소리가 울리였다.

그 소리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앞동네의 어느 한 집에서 쿵덕쿵덕 방아소리가 날아왔다.

그리 멀지 않게 보이는 행길가의 동뚝으로는 눈같이 흰 게사니들이 자못 거드름스럽게 걸어가고있었다.

사람들은 귀에 마쳐오고 눈에 안겨오는 목가적인 음향과 화폭이 공연히 못마땅하여 가뜩이나 어두운 얼굴을 저저마다 찡그리였으나 박위의 기색은 눈에 띄게 밝아지였다.

얼마나 선명하고 구수하고 아름다운 생활의 노래, 생활의 그림인가.

저렇듯 소중한 이 땅의 노래와 그림이 단 한순간도 사라져서는 안된다.

그러자면 우리 무관들이 큰집의 기둥을 받든 보이지 않는 주추돌처럼 온몸에 민족의 무게를 안고 자기를 불태워야 한다.

열렬하게 완강하게 그리고 묵묵히…

얼마후 박위를 앞세운 감찰어사일행은 석양의 잔광이 누렇게 게발려있는 밀양쪽의 헐벗은 등성이밑으로 사라져버리였다.

그때에야 군영대문앞에 당도한 김종연과 최단은 대번에 사태의 전말을 짐작하고 한판에 찍어내기라도 한듯 입술을 앙다물었다.

우수수―

박위네들이 에돌아들어간 어스름이 깃든 등성이쪽에서 조팝꽃같은 눈싸래기들이 아츠러운 비명을 지르며 뽀얗게 밀려오고있었다.

되돌이

Twitter로 보내기 Facebook으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네이버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Google+로 보내기 Evernote로 보내기 Reddit로 보내기
우리민족끼리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E-mail) : urimanager@silibank.com 홈페지내용에 관한 문의(E-mail) : uriminzok@silibank.com
Copyright © 2003 - 2013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gotop
기사종합
 
도서, 잡지
 
영화, 음악
 
독자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