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 회)

제 3 장

6

 

박위는 간신히 눈시울을 밀어올리였다. 네활개를 뿌리고 편안히 누워있는 박위의 눈앞으로 올챙이무리같은것이 은빛꼬리를 까불거리며 밀려들었다.

현훈증이 일고 구토감이 치밀어올랐다. 박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방안은 땀이 흐를 지경으로 훈훈한데 어디선가 씁쓸한 냄새가 풍겨왔다.

나직한 말소리도 들려왔다.

내가 지금 어디 와서 이렇게 편히 누워있을가. 할일은 산처럼 쌓였는데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고?!…

박위는 애써 뇌리를 긴장시켜가지고 생각을 굴려보았으나 딱히 짚여지는것이 없었다.

그 대신 곁에서 울리는 나직한 말소리는 차츰 선명하게 가려들을수 있었다.

《…이제 인차 피여나실테니 너무 걱정마시오이다. 경상원수께서는 이미전에 심히 기를 상하시고 혈을 상하신데다 려로가 겹쌓였으나 신체가 건장하시니 이제 약 한대접만 더 드시면 씻은듯, 부신듯 나을것이오이다.

시생의 의술이 널리 알려지지는 못했으나 실속이 바이 없지 않은데 다 진맥에 들어서는 누구에게도 짝지지 않으니 영낙없이…》

얼추 듣건대 매우 겸손한듯 하나 실은 제 자랑이 가득 섞인 어떤 의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불만기가 력연한 종연의 음성이 울리였다.

《…그렇게 실속있는 의술이라면 고뿔이든 신뿔이든 어서 뽑아야 할게 아니요?》

박위는 다시 눈을 떴다.

정신은 그냥 몽롱한데 자기가 어떻게 되여 자리에 누워있는지 또 어떻게 되여 이 방에서 종연의 목소리가 울리고있는지 도시 깨도가 되지 않았다.

(내가 전라도에 왔는가 아니면 전라도원수가 우리 군영에 왔는가?

헌데 저 의생같은 사람은 무엇때문에 여기 와서 저리도 장장한 소리를 늘어놓고있는가?)

한동안 꿈같은 현실, 현실같은 꿈속에서 오락가락하던 박위는 마침내 자기가 종연을 만나기 위해 눈발을 가르며 달려오던 일과 전라군영앞에서 허궁 나넘어지던 일을 아득한 옛일처럼 어렴풋하게 되살려내였다.

그러자 그 어떤 조바심과 궁금증이 발작적으로 머리를 들었다.

절로 상반신이 쳐들리였다.

또다시 눈앞이 휭 돌아갔다.

《아, 이제야 정신이 드셨소그려.》

종연이 저력있는 소리를 터치며 뚜벅뚜벅 다가왔다. 박위의 침상곁에서 이글거리는 청동화로앞에 이른 종연은 웃음기인지 울음기인지 알수 없는 괴이한 표정을 띄우며 말문을 열었다.

《장군, 이게 몇해만이요? 헌데 어쩌자구 그렇게 불편한 몸으로 먼길을 오시였소?》

박위는 희멀끔하게 잘생긴 종연의 너부죽한 얼굴을 정차게 바라보며 애써 웃음을 그리였다.

《그닥지 않은 병으로 알고 떠났더니… 헛허… 동관에게 창피한 모양꼴을 보였소그려.》

종연은 박위의 이마에 손을 얹어보더니 끌끌 혀를 찼다.

《아직도 열기가 채 빠지지 않았소그려. 왕년에 병을 이긴 장수가 없다는데 아무리 일이 중하고 급하다 한들 이렇게 무리해서야 쓰겠소.

사람이 있고야 일도 있는게 아니겠소?!》

《헛허허, 난 검을 잡은 무장에게는 목숨보다 더 중한것이 군사일이라고 생각하오.

그렇다는 의미에서 이제는 병이야기를 하지 맙시다, 헛허.》

박위는 종연의 만류를 뿌리치고 부등부등 침상에서 일어섰다.

아직도 축축한감이 있는 갖신을 찾아신은 다음 허리띠를 두르고 칼을 비껴찼다. 차림새를 끝내자 박위는 뒤늦은 인사말을 깍듯이 뇌이였다.

《그지간 장군께선 귀체만강하시고 가내일동은 모두 평안하시오?》

종연이 맞인사를 차리자 두사람은 곧 자리를 정하고 앉았다.

박위는 여느때없이 조급한 어조로 직팡 기본화제를 꺼내였다.

《동관도 아시다싶이 본관은 그닥 성급한 사람이 아닌데 20여년간 왜구들과 싸우는 사이 절로 조급한 사람이 돼버린것 같소그려. 하기사 우리사이에 무슨 겉치레의 말을 따로 할 필요가 있겠소.

용건부터 말합시다.

본관이 이미 편지로 알리기도 했지만 그 편지가 아니더라도 동관은 누구보다 왜구격멸의 필요성과 절박성을 잘 아실게요.

또 누구보다 왜구를 박살낼 의지로 가슴 불태우리라 믿어의심치 않소.

바로 그래서 경상, 전라가 힘을 합쳐가지고 대마도를 공격하자고 청을 낸건데 어떠하시오. 솔직하게 말씀해주오.

동관은 원정에 참여할 용의가 있으시오?》

박위는 아무런 수식도 없이 따져묻듯 물었다. 늘어지게 말을 펴놓고있을 경황이 없었다.

필시 심리적인 방황에 잠긴듯 한 종연을 숨돌릴틈이 없이 다몰아대고싶기도 했다.

종연은 가슴노리까지 드리운 다발좋은 채수염을 쓸어만지며 이따금 헛기침만을 톺아올릴뿐 철문처럼 닫겨진 입을 쉬이 열려 하지 않았다.

종연의 거동과 표정에서 박위는 그의 속내를 거지반 짐작할수 있었다.

박위가 보건대 종연은 원정참여를 단념하였거나 망설이고있었다.

그가 진정으로 단념하였다면 애써 끌어당길 필요가 없겠지만 망설이고있다면 그냥 내버려둘수 없었다.

원정참여는 단순히 군사작전에 나서는가 안 나서는가 하는 군사실무적인 문제이기 전에 민족의 존엄을 떨치려 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민족적자존심에 관한 문제였다.

헌데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김종연이 과연 그 어떤 불안과 위구때문에 자기의 자존심을 꺾어서야 되겠는가?…

박위는 종연의 침묵이 괴로왔다.

시시각각 가쁘게 가슴을 조이였다.

박위는 종시 더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동관, 내 지금 그대의 심정을 아주 짐작 못하는것은 아니나 진정으로 그대의 진심을 알고싶소.

오래전부터 병기를 잡고 나라를 지켜온 우리들사이에 꺼릴 말이 무엇이겠소. 터놓고 말해주시오. 동관은 원정에 나설 의향이 정녕 없으시오?》

박위의 절절하면서도 직설적인 말마디들은 종연의 량심과 자존심을 비수처럼 찌르고 쑤시였다.

문득 오늘 아침녘에 만났던 죽촌마을 행수로인의 너부죽한 얼굴이 떠올랐다.

농사보다 군사가 훨씬 중하노라고 하던 그의 말도 상기되였다.

도대체 기운이라고는 있어보이지 않는 백동 에미라는 젊은 녀인의 람루한 행색과 그의 고집스러운 표정도 떠올랐다.

보잘것없는 촌백성들까지 원정을 위해 필사의 각오를 안고 떨쳐나섰는데 자기는 아직 그에 참여할 용단조차 내리지 못하고있다고 생각하니 누구에게라없이 부끄러웠다.

어쨌든 더이상 침묵을 지킬수 없었다.

종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본관이 어찌 사소하게나마 박장군을 원망하겠소. 사실 본관은 그처럼 방대한 규모의 원정을 조정의 령이 없이 단행한다는것이 여러가지로 불길하게 생각되여 지금껏 주저하는중이요.》

말을 마친 종연은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입귀를 꾹 짓물며 시선을 조금 내리떨구었다.

박위는 종연의 처지와 심정이 십분 리해되였다.

인간의 자존심을 짓누르는 세상의 중압감은 미워도 그 세월에 눌리워 모대기는 인간은 밉지 않았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박위는 아까와는 전혀 다르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하였다.

《솔직하게 대답해주어 고맙소. 터놓고말한다면 대마도원정에 대해서는 전하께서도 이미 아시고 리성계대감도 개별적으로는 응낙을 하였소.

그렇다고 하여 그것을 곧 전하의 윤허나 조정의 령이라고 볼수는 물론 없소.

이런 상태에서 두 군영이 자의로 군사를 일으킨다면 후날 복잡한 문제가 야기될것은 불을 보듯 명백하오.

하지만 동관, 지금껏 본관은 그대의 남다른 배짱과 자존심을 누구보다 귀중히 여겨왔고 또 높이 보아왔소.

본관이 여기에 온것도 경상도곁에 전라도가 붙어있기때문이 아니라 바로 동관의 배짱과 자존심에 기대를 걸었기때문이요. 동관이야말로 민족의 기개를 크게 떨치게 될 이번 원정에 백사를 제치고 나설줄 알았단 말이요.》

《…》

종연은 얼굴이 지지벌겋게 익어가지고 공연히 전복자락만 주물거리였다.

《동관도 잘 알고있지만 왜구가 지난 백수십년간 우리 고려국에 끼친 피해는 이루 헤아릴수없이 크오.

옛적의 일, 타고장의 일은 말 말고라도 이달에 여기 전라도에서만도 얼마나 막대한 해를 입었소. 남원과 령광, 광주와 담양의 여러 촌락들이 페허로 변하고 수백의 인명이 살해되지 않았소?

이게 과연 참을수 있는 일이요?》

종연은 다시금 날카로운 쇠끝에 찔리운듯 한 아픔을 느끼며 번쩍 시선을 들었다.

박위의 음성은 격해지였다.

《…얼마전 대마도령주라는 놈이 본관에게 편지를 보내왔댔소.

놈의 수작인즉 이제는 서로가 칼을 놓고 물물교역을 하면서 화평시대를 만들자는거요.

그러면 그 바다승냥이가 양으로 변했단 말인가?!

아니, 그놈은 화평이라는 달콤한 말로 우리의 칼을 무디게 해놓고는 벼락같이 달려들어 고려군의 살멱을 물어뜯자는거요. 이제는 이렇게 잰내비같은 왜구들이 공공연히 편지까지 띄우며 우리를 조소, 우롱하고 기만, 협박을 하는 판이요.

우리가 그래 이처럼 혹심한 모욕까지도 군말없이 곱게 감수해야 하겠소?》

박위는 저도 모르는새 왕소라같은 주먹으로 서탁을 쾅 내리치였다.

서탁우에 놓인 주전자와 차종이 지르릉 금속음을 내며 울었다.

박위의 주먹은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우리 무관들의 배짱과 자존심은 고리삭은 문관들이나 우습게 여기고 수하장졸들이나 턱짓으로 부리는데서 나타날것이 아니라 나라의 존엄을 떨치는 격전장에서 과시되여야 한다고 보오.

혹시 우리의 애국심과 자존심이 역신의 죄로 오명될수도 있소.

하지만 오명이 두렵고 죽음이 무서워서 너도나도 구구히 생이나 보존하는 행로를 택한다면 장차 나라와 백성의 안위는 어찌되고 민족의 존엄은 또 어찌 되겠소?》

종연은 급급히 박위의 말허리를 꺾었다.

《그러니 박장군은 원정준비에 역모소문이 붙어다니는줄 알면서도 그냥 일을 다그쳐왔단 말이요?》

박위는 흔연히 고개를 끄떡거리였다.

《애초부터 알고있었소. 이제는 단지 뛰뛰한 소문정도로 나도는것이 아니라 문서로 꾸며지여 조정의 층층을 오르내리고있다는것도 알고있소.》

종연은 그만 입을 딱 벌리였다.

가슴속 깊이에서 주먹같은 불덩이들이 우글우글 끓어올랐다.

무관의 고귀한 량심과 자존심이 두텁게 내리덮인 장막같은것을 깨치고 솟아오른것이 분명했다.

바로 이 순간 종연의 내심의 변화를 전혀 감촉하지 못한 박위는 구슬픈 심정에 싸이여 최후통첩을 했다.

《동관이 그예 원정에 나서지 못하겠다면 강박하지 않겠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를 한번 도와주오. 전라도지경을 범한 왜구를 잡으러 가는셈잡고 본관에게 20척의 전함과 3백의 군사, 2백근의 화약을 빌려달라는거요.

후날 사헌부에서 오늘의 일을 발기짚어내면 모든 책임을 나에게 떠밀어도 좋소. 박위가 전라도앞바다에 나간 전함들을 강다짐으로 경상수역으로 끌고갔다고 말이요.》

박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종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종연은 자기가 지금껏 목숨이상으로 귀중히 여겨온 인간적인 존엄과 자존심이라는 무형의 실체가 형체없이 갈가리 찢겨져나가는듯싶었다.

(박위는 역모소문을 달고다니면서도 민족의 큰일을 성취하기 위해 전신의 피를 깡그리 태우고있다.

먹고 살 길조차 막막한 경상도백성들까지 원정을 위해 필사의 노력을 경주하고있다.

헌데 나는 노상 큰일이라도 칠것처럼 나다니면서도 왜구 한놈 변변히 잡지 못할뿐더러 박위의 청병요청까지 두려워하고있다.

그러니 지금껏 내가 고수해온 자존심이라는것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범박한것이란 말인가.

박위는 지금 장수의 자존심이란 민족의 존엄을 떨치는 거폭의 전장에서 나래칠 때 진정으로 아름답고 매력있는것이라고 호소하고있다.

정녕코 옳은 말이다. 따를만 한 주장이다!)

종연은 저도 모르는새 옆구리의 칼자루를 힘껏 틀어잡으며 저력있는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박장군은 도대체 본관을 무얼로 아는게요. 군사와 전함을 빌려달라니? 그리구 거짓말까지 하라니?

박장군의 눈에는 내가 그렇게까지 용렬한 인간으로 보인단 말이요?

본관은 전함은 빌려줄수 없고 거짓발명도 할수 없소.

나는 단지 헛되게 죽는것을 두려워할뿐이요. 그래서 망설이면서 진정을 못했는데 터놓고 말한다면 본관은 참되게 싸우다 죽는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소.

아니, 나라와 민족을 위한 전장에서 싸우다 죽는것은 본관의 진정한 소원이요.

장수가 검을 들고 전장에 나가서 싸우다가 말가죽에 싸여 환향하는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인생총화가 아니겠소?!》

박위의 넓은 가슴속에서 커다란 새 한마리가 후두둑 깃을 쳤다.

박위는 튕겨나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다면 동관은 이제 어떻게 할셈이요?》

《어떻게 하다니? 박장군도 아다싶이 예로부터 불교에는 열가지 계명이 있고 속세에는 다섯가지 계명이 있소.

그 다섯가지 계명중에서 〈신의로써 벗을 사귀라.〉, 〈싸움터에서 물러서지 말라.〉는 두개의 계명이 가장 중하다 했거늘 명색 장수라는 사람이 어찌 나라를 떨치는 싸움앞에서 뒤를 사릴수 있으며 어찌 박장군과의 신의를 경홀히 저버릴수 있겠소?!》

박위는 불시에 가슴이 얼벌벌해났다.

자꾸만 따가와나는 눈시울을 슴벅이며 홀린듯이 종연을 쳐다보았다.

도래넓은 흰 얼굴에 시원스럽게 박혀있는 큼직한 두눈, 선이 뚜렷한 우뚝한 코와 널직하게 터를 잡은 두툼한 입술.

기름이라도 발라놓은듯 자르르하게 윤기가 도는 매력있는 코수염과 다발좋은 턱수염…

종연은 실로 생기기도 사내답게 잘생겼지만 속심지도 깨끗하고 실한 사람이였다.

《동관!》

박위는 거의 탄성에 가까운 소리를 터치고나서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옛적에 어떤 무관들은 우리 두사람을 두고 영원히 〈의기투합〉으로 지낼것이라고 수군거렸지만 나는 그 시절에 벌써 우리는 반드시 의기상합될것이라고 솔직히 믿었댔소.

역시 본관의 짐작이 빗나가지 않았소그려.》

《허허, 이제와서 옛적의 소리는 꺼내 무얼하겠소?!》

종연은 멋적은 생각이 들어 손사래질을 하였으나 박위는 열띤 어조로 계속했다.

《사실말이지 요즘세월에 오명과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다는것은 누구나 다할수 있는 일이 아니요.

동관과 같이 그릇이 크고 배짱이 있는 사람만이 실행할수 있는 일이요.

본관은 오늘 그대의 배짱과 자존심에 다시금 탄복하였소.

어떤 역경속에서도 신의를 지키려는 그대의 순결무구한 마음 또한 고맙기 이를데 없소.

내 이런저런 감사한 마음을 다 합하여 그대에게 절인사를 한번 하리다.》

박위는 정말로 큰절을 하려고 두팔을 벌려올리며 꿇어앉을 차비를 하였다.

깜짝 놀란 종연은 황황히 박위의 숙어지는 어깨를 잡아올리였다.

그제서야 종연은 홍시처럼 붉어진 박위의 얼굴에 눈물자욱이 번들거리고있는것을 알아볼수 있었다.

가슴이 뭉클 젖어들었다. 울음기같은것이 섞인 음성이 절로 미여져나왔다.

《이게 무슨 일이요? 망녕이 나셨소? 장군이 대체 뉘게다 절을 한단 말이요.

이 마당에서 진정 절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박장군 당신이요.

본관이 박장군께 절을 하리다.》

이번에는 김종연이 점잖게 절을 할 태세를 취하였다.

《동관! 무얼 이러시오?!》

박위는 울고 웃으며 종연의 어깨를 힘껏 그러잡았다.

종연은 박위에게 어깨를 잡힌채 자책에 젖은 어조로 말하였다.

《장군, 정녕 부끄럽소. 경상도에서는 군영군사들만이 아니라 명색없는 촌백성들도 길을 헛들어 전라도지경에 떨어지기까지 하면서 원정준비를 하고있는데 본관은 지금껏 바재이기만 했으니 이런 창피가 또 어디 있소?》

종연의 솔직한 자기 반성에 감동되여 고개를 주억거리던 박위는 조금후에야 그 어떤 의혹을 느끼였다.

《경상백성들이 길을 헛들어 전라도지경에 떨어졌다니 그건 대체 무슨 말씀이요?》

《그런 일이 있었소. 오늘 아침 우리 군사들이 화적패를 잡았다고해서 나가보니 그들인즉 화적무리가 아니라 염초감대기를 구하러다니는 김해고을 죽촌백성들이였소.

그들중에는 박장군에게서 직접 행수벼슬을 받았다는 로인도 있고 계집사람도 섞여있던데 모두들 피골은 상접하고 행색은 람루하지만…》

박위는 대뜸 그들이 누구들인지 짐작이 갔다. 새로운 감동과 충격이 따겁게 흉벽을 지지며 떠올랐다.

《그러니 죽촌백성들이 여기까지 왔다갔단 말이요?》

《왔다간게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소.

모두 지치고 굶주린것이 보기에 딱하여 며칠간이라도 쉬여서 보내려고 잡아두었소.》

《그 참 고마운 일이요, 동관! 그 사람들을 만나 말로라도 치사해주고싶구려.》

《어서 그러시우.》

박위와 종연은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대장군막을 에돌아 병졸들의 처소가 있는 나지막한 언덕우로 반달음치듯 하여 올라섰다.

사처에 화토불을 피워놓고 저녁밥을 짓던 군사들은 종연과 박위를 띄여보자 벌떡벌떡 몸을 일으키며 군례를 차리였다.

군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제일 유축진 군막앞에 이른 종연은 문앞에서 지금 한창 신바람이 나서 나무주걱을 휘젓고있는 군사에게 말을 붙이였다.

《이봐라! 여기 들어있는 경상도백성들을 모두 밖으로 불러내거라.》

수수밥알이 더덕더덕 붙어있는 밥주걱을 쳐든채로 영민하게 생긴 눈을 삼박거리던 애젊은 군사는 또릿또릿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 사람들은 지금 여기 없소이다. 점심밥을 먹은 뒤로 그냥 가겠다고 강떼를 쓰는것을 간신히 눌러앉히고 저녁찬거리를 구하려고 잠시 자리를 비웠댔는데 그사이 모두 사라져버렸소이다.》

《그렇게 지쳐가지고도 밥 한그릇씩 먹고는 또 일을 찾아 떠났단 말이냐?》

종연은 기가 떡 막히여 입을 하 벌리였다.

박위도 서운하기에 앞서 감격한 마음이 들먹하게 괴여올라 할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잠시후 박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순시도 허송할 때가 아니구려.

동관! 우리도 어서 들어가 미진된 문제들을 마저 상의합시다.》

《워낙 그게 옳겠소.》

그날 밤 박위와 김종연은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조정의 형세가 복잡한 이때 전격적으로 대마도를 공격하여 원정을 무조건 승리로 결속해야 한다는것, 대마도로 떠날 때 두 장수의 련명으로 원정의 필요성과 촉급성을 내용으로 한 장계를 올리자는것, 그밖에 현안군사문제들과 후날에 대비할 방책들을 진지하게 토의하고 합의하였다.

다음날 이른새벽 박위는 여전히 불편한 몸으로 전라도군영을 나섰다.

종연은 말을 타고 멀리까지 따라나와 박위를 바래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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