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3 회)
제 3 장
5
종연은 군막안에 들어서자바람 우뚝 굳어지였다. 울기가 내뻗친 시선으로 한참이나 허공을 노려보던 종연은 으흠 신음소리같은것을 흘리고나서 으득으득 이를 갈았다.
무엇이든 찢어발기고싶도록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극심한 수치감이 가슴을 옥죄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것이 오늘 아침 담양의 어느 촌락에 왜구들이 기여들었다는 첩보를 받자 종연은 군사들을 이끌고 현지로 내려갔으나 한놈도 잡지 못하였다.
종연이 촌락에 당도하니 왜구들은 벌써 도망질을 친 뒤요, 재가루와 눈가루가 뒤범벅이 되여 흩날리는 페허우에서는 원성과 곡성만이 흐르고있었다.
종연은 요즘에 이르러 자주 이렇게 허탕을 쳤다.
근래에 들어 더욱 교활해진 왜구들은 꼭 미끼곁을 감도는 약은 잉어처럼 군영의 눈치와 대상물의 동태를 살살 살피다가는 벼락같이 재물을 털어가지고 내빼군 했다.
며칠전에는 남원과 령광이 재무지로 변하고 오늘은 담양이 털리였다.
래일은 과연 어느 고을이 또 화를 입을것인가?!…
온 도의 백성들은 매일, 매 시각 불안과 공포에 싸여 전전긍긍하고있는데 도의 안위를 책임진 나는 매양 이렇게 왜구들과 꼬리잡이놀이나 하고있으니 이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오래도록 돌상처럼 굳어져있던 종연은 누구도 보는 사람이 없건만 자기의 분을 이길수 없어 별안간 서탁의 모서리를 쾅 내리쳤다.
《괘씸한지고. 요 간특한 섬나라 도적개들을 어떻게 하면 모짝 잡아치울고?》
종연이 씹어뱉듯이 웅얼거리는데 서탁우에 놓여있던 종이두루마리가 두르르 굴러 그의 옷자락에 걸리였다.
종연은 무심결에 종이두루마리를 집어들었다. 분노로 하여 아직도 후들거리는 손으로 종이두루마리를 펼치였다.
어제 밤에도 두번이나 읽어본 개경의 형에게서 온 편지였다.
다시금 편지의 글발을 뜯어보던 종연은 마감대목에 이르러 눈못을 꾹 박았다.
편지의 글발이 김종기의 목소리로 변하여 귀를 울리고 가슴을 두드렸다.
《…나도 물론 박위가 반정모의를 할 사람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이란 비방중상이라는 흉탄에 맞아 죽을수도 있으며 헛소문이라는 올가미에 걸려 명이 잘릴수도 있다.
그러니 어찌 박위에게 묻어다니는 반정소문을 훌훌히 대할수 있겠느냐.
박위의 대마도원정이 비록 천추에 길이 빛날 큰일이라 할지라도 무작정 그를 따라섰다가는 필경 큰 해를 입을것이다.
절대로 그의 요청에 응해서는 아니될줄 안다.
만약 네가 그 어떤 옛적의 친분이나 무관의 자존심에 떠밀리워 박위의 요청에 응해나선다면 너자신은 물론 우리 가문모두가 멸문지화의 구렁텅이에 굴러내리게 된다는것을 절대로 잊지 말아라.…》
종연은 종이두루마리를 아무렇게나 움켜쥐고 교자에 들어앉았다.
장대한 웃몸을 비스듬히 뒤로 젖히고 스르시 눈을 감았다.
사색은 갈피없이 뒤번져지였다.
종연은 박위가 처음으로 편지를 보내왔을 때 벌써 그의 어벌이 큰 주장에 살이 뛰고 피가 끓었다.
박위의 인간됨됨에 다시금 크게 탄복하였다.
확실히 박위의 일은 선이 굵고 판이 큼직큼직했다. 하지만 자기가 하는 일은 어느것이나 다 자드락자드락해보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지금껏 별치 않은 공적을 세우고도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고싶어 몸이 달아하였다.
하지만 박위는 민족사적인 거사를 착안하고 내밀면서도 마치 일상적인 정사라도 보듯 조용하지 않는가.
세상에 과연 이처럼 희귀한 인물이 몇이나 있으련고?…
부러움이 엇섞인 탄복은 얼마 안 가서 야릇한 위구심으로 변하였다.
박위의 원정요청에 즉시 응하고싶었으나 정작 몸을 일으키자니 무엇인가 껄끄럼했다.
그렇다고 단념을 하자니 자존심이 상하는것은 물론 박위와의 의리를 저버리는것 같아 저으기 괴로왔다.
종연의 위구는 공연한것이 아니였다.
고려의 군법에 임금의 교지나 병부의 령이 없이 군사를 움직이는것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다.
헌데 박위는 대마도원정에 참가해달라는것을 개인적인 청탁처럼 전해온것이였다. 오래도록 망설이던 종연은 자기의 번민을 적은 편지를 개경의 형에게 보내였다.
얼마 안있어 형의 회신이 왔는데 내용인즉 이렇게 박위의 대마도원정에 절대로 참가하지 말라는것이였다.
종연의 번민은 더욱 커지였다.
박위의 인간됨됨을 오래전부터 잘 알고있는 종연은 물론 반정음모라는 소문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그것은 필경 박위의 인생길에 늘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던 시기심 많은 소인배들이 꾸며낸 헛소문일것이였다.
그렇다 할지라도 역모의 소문이 달린 대마도원정에 무모하게 뛰여들수는 없었다.
후날의 그 어떤 책임추궁이나 벌이 두려운것이 아니라 가정의 멸문지화가 두려웠다.
종연은 박위의 요청을 거절하기로 결심했다. 헌데 그 결심을 박위에게 알리자니 그것 역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 선뜻 붓을 들수가 없었다.…
음울한 표정을 짓고 앉아 한참이나 방안구석쪽을 노려보던 종연은 별안간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이때에야 비로소 부원수가 아까부터 방안에 들어와있음을 느낀것이였다.
《무슨 일이요?》
종연은 짜증이라도 내듯 물었다.
키는 작으나 몸집은 박달나무처럼 단단한 부원수는 격렬한 전투장에 뛰여들기를 무척 좋아하는 타고난 싸움군이였다.
하지만 요즘에 와서 한번도 시원스럽게 왜구들을 잡지 못하자 눈에 띄게 풀이 죽어가지고 다니였다.
그런 부원수를 볼 때면 종연도 덩달아 심한 죄책감과 우울증이 떠올랐다.
잠시 덤덤한 기색으로 종연의 낯빛을 살피던 부원수는 조심스럽게 말꼭지를 뗐다.
《우리 도에 전고에 없던 변이 또 하나 생겼소이다. 바다길순시를 나갔다 돌아오던 우리 군사들이 독소고개어방에서 화적패당을 잡았는데…》
《화적패당을 잡았다고?! 지금같은 난시에 화적패까지 횡행한단 말이요?》
가뜩이나 기분이 어수선하여 지글지글 끓어번지는 속을 간신히 제어하고있던 종연은 금시 울화증이 치밀어올라 버럭 청을 높이였다.
《예, 도적패당도 례사 도적무리가 아니라 마수레까지 끌고다니는 아주 큰 무리인데 패중에는 계집사람도 있사옵고 륙십나이가 넘어보이는 놈도 있습니다.》
《그래 그놈들을 잡아다가 어디에 두었소?》
《비여있는 광속에 처넣었소이다. 장군께 엿쭈고나서 한놈한놈 차례로 꺼내다가 다듬어볼가 하나이다.》
《왜구의 겁략만 겪자 해도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닐텐데 화적들의 성화까지 당하자니 백성들의 고생이 얼마나 막심하겠소.
부원수, 도적무리의 행적이 들춰진 다음에야 다듬고 솎고 할 필요가 어디 있겠소.
불문곡직하고 늙은 놈부터 마지막계집졸개까지 모두 내다가 목을 치오. 아니, 내가 직접 나가서 형을 집행하겠소.》
그러지 않아도 무슨 분풀이든 하고싶어 속이 들썽거리던 종연은 기품있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서는참 옆구리의 칼을 뽑아들고 부원수의 뒤를 따랐다.
눈은 어느새 내리기를 그쳤는데 싸늘한 바람에 불린 눈가루들이 방향없이 흩날리고있었다.
눈가루를 헤가르며 걸음을 재우쳐 광앞에 이른 종연은 칼을 비껴잡은채 우뚝 굳어지였다.
부원수는 공연히 눈에 독이 올라가지고 광을 지켜선 두 군사를 흘겨보더니 을러메기라도 하듯 청을 높이였다.
《화적놈들을 전부 꺼내오너라.》
두 군사는 익달된 동작으로 광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꽥꽥 고함을 쳐가며 《화적패》를 밖으로 끌어내였다.
도적이라면 상판에 기름기도 돌고 흉악스러운 기색과 뻔뻔스러운 표정도 엿보이련만 끌려나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순박하고 어져보이였다.
게다가 사흘에 피죽 한그릇도 먹지 못한 사람들처럼 피골이 상접한것이 다치면 금시 무너질것처럼 기운들이 없어보이였다.
그런대로 괴수라는 늙은이만은 풍신도 좋고 거동이나 표정도 그닥 어둡지 않았으나 그에게도 흉악스러운 도적패두의 흔적같은것은 엿보이지 않았다.
종연은 다소 어정쩡해났다.
다짜고짜로 칼을 휘두르려던 충동적인 분노는 서서히 사그러들었다.
두툼한 입술을 짓씹으며 한사람한사람의 초췌한 모양을 뜯어보던 종연은 위엄기있는 눈초리를 늙은이에게 돌리였다.
《너희들은 어디서 사는 화적들이냐?》
늙은이는 너부죽한 얼굴에 어딘가 반가와하는듯 한 기색을 띄우며 또박또박 그루를 박아 대답했다.
《소인네들은 화적이 아니오라 경상도 김해에 사는 알쭌한 량민들이올시다.》
《경상도 김해에 사는 량민들?!》
김해라는 소리에 아무 까닭없이 박위가 상기되면서 은근히 속이 조여들었다.
《김해에 살면 그곳에서 살길을 찾을것이지 무엇때문에 남부녀대해서 마수레까지 끌고 함부로 넘나드는거냐. 네가 누구를 속이려는게냐?》
《뉘앞이라고 감히 거짓소리를 하오리까. 좀더 자상히 말씀드린다면 이 사람들은 김해 죽촌의 염초장일군들이고 소인은 경상군영의 박장군께서 내리신 염초장행수의 벼슬을 지내는 늙은이올시다.》
《염초장행수?! 그러니 박장군께서 너에게 그런 벼슬을 주었단 말이냐?》
종연의 말투는 어느새 조금 부드러워졌다. 로인은 그것이 매우 흡족하듯 히뭇이 웃음기를 띄우더니 제법 손세까지 써가며 말을 계속했다.
《그렇소이다. 장군께서도 이미 잘 알고계시겠지만 몇달전 우리 죽촌은 왜구의 란을 당하여 말짱 빈터만 남았소이다.
소인들은 그제서야 비로소 농사보다 훨씬 더 중한것이 군사요, 이나라사람들은 그가 누구든 농기보다 병기를 더 사랑해야 한다는 세상의 리치에 눈을 떴소이다. 하지만 그 어떤 세상리치에 눈 떴다한들 어리석은 우리 촌백성들이 무슨 일을 똑똑히 하겠소이까.
그저 죽기로써 군사일을 돕자고 마음다지고 배무이와 염초뽑는 일을 시작했는데 일이 그렇게 되자 우리 군영 박장군께서는 과분하게도 소인에게 행수의 벼슬까지 안겨주시고…》
종연은 비로소 도적패당으로 몰린 죽촌사람들의 내막이 어느 정도 짐작되였다.
불시에 심장이 훈훈하게 더워나면서 생각이 깊어지였다.
종연은 여직껏 백성이라 하면 먹고사는 일외 다른 아무것도 관심하지 않는 무지렁이들로 여겨왔었다.
헌데 박위로부터 행수벼슬을 받았다고 하는 이 풍신좋은 로인은 방금 뭐라고 했는가.
농사일보다 군사일이 더 중하다고 했다. 농기보다 병기를 더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저들은 전함도 뭇고 염초도 뽑는다고 했다.
얼마나 훌륭하고 또 갸륵한 백성들인가!…
감동이 증대되는 속에서도 의혹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은 어찌하여 우리 도지경을 넘어섰으며 어떻게 되여 이들중에는 계집사람까지 끼워있는가?)
총기좋은 행수로인은 어느새 종연의 내심을 읽었는지 급급히 말을 이었다.
《장군께서는 통촉합시는 바이지만 우리 군사들이 왜구의 소굴을 깡그리 짓태워버리자면 뭐니뭐니해도 화약이 많아야 할게 아니오니까.
헌데 소인네들은 린근동네의 재먼지는 물론이요 창원과 밀양의것까지 거지반 긁어먹다싶이 했으니 이런 변이 어디 있소이까.
그래서 소인네들은 패패로 나누어가지고 좀더 멀리까지 나돌아다니던 끝에 그만 길을 헛들어서 이렇게 전라도지경을 넘어섰소이다.
헌데 독소고개에서 부닥친 이곳 군사들은 무엇때문인지 성이 독같이 올라가지고 무작정 소인네들을 화적패로 몰아붙이더니 이곳까지 끌고왔소이다.
…그리고 저 아낙네가 소인네들의 일에 끼우게 된 리유로 말한다면…》
로인은 언발을 강둥강둥 구르며 불안스러운 눈길로 종연을 살펴보는 체소하나 강단있게 생긴 녀인을 가리켜보이였다.
《…갓 낳은 애기를 왜구들에게 잃은데다 지아비마저 왜구들에게 잡혀갔사온데 군사들의 원정준비를 돕는 일인즉 자기의 원쑤를 갚는 길이라고 하면서 부등부등 따라나서기에 어쩔수없이 데리고다니옵니다.
여보게, 백동이 에미― 장군께 어서 인사를 올리지 않구 왜 그렇게 서있기만 하나?》
로인이 갑자기 자기를 찍어대는 바람에 까무잡잡한 얼굴을 어떻게 건사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던 녀인은 종연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꺾었다.
녀인의 진흙탕에 게발린 커다란 미투리와 뿌옇게 먼지가 오른 수건 쓴 머리가 종연의 가슴에 아프게 마쳐왔다.
(계집사람까지 군사일을 도우러 떨쳐나섰다?!
하기사 갓 낳은 애기를 잃고 지아비까지 빼앗겼다니 저 나인의 좁은 가슴에 한인들 얼마나 쌓여있고 분인들 또 얼마나 덩이져있겠는고.
아무튼 모두들 기특한지고…)
종연은 가슴이 달아올라 더이상 죽촌사람들과 마주 서있을수 없었다.
아무말없이 군막쪽으로 스적스적 걸음을 놓던 종연은 소리없이 뒤따르는 부원수에게 축축하게 젖은 음성으로 나직이 뇌이였다.
《부원수, 저 김해백성들이 며칠동안이나 길을 헛들어가지고 고생을 많이 한것 같은데 며칠간이라도 우리 군영에 두고 성의껏 대접해서 보내도록 하오.》
《알겠습니다.》
부원수는 무엇때문인지 갑자기 활기를 띄며 씩씩하게 대답하고나서 어디론가 급히 사라져버리였다.
군막으로 돌아온 종연은 어슬녘이 되도록 교자에 들어앉은채 움직일줄 몰랐다.
그렇게도 많아보이던 할일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마음은 하냥 무죽하고 번거로왔다.
이제는 불을 켜야겠다고 생각하고 막 초대앞으로 다가서는데 문밖에서 부원수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장군! 경상군영의 박원수가 우리 군영앞에 기절하여 쓰러졌습니다.》
《뭐라고?! 박원수가?!…》
깜짝 놀란 종연은 심장이 비틀리는듯 한 충격을 느끼며 우뚝 굳어지였다.
어떻게 손을 놀렸는지 탁자우의 초대가 딱 소리를 내며 넘어지였다.
이어 종연은 맨상투바람인지도 모르고 황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뛰여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