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 회)

제 3 장

4

 

헐벗은 산과 들, 우불구불하게 뻗어나간 행길, 그 행길가에 간간이 늘어붙어있는 쭈그렁박같은 초가마가리들의 지붕우로 호함진 함박눈송이들이 오뉴월 나비떼마냥 가볍게 날아내리고있었다.

원래 소설이후 대설이전에 내리는 첫눈은 길할 징조요 복할 조짐이라고 하여 그런 눈이 오는 날이면 대궐에서는 물론 지방관청들에서까지 첫눈맞이의식을 요란하게 벌리군 했다.

축하표문을 올리고 절을 하고 각종 짐승의 탈을 쓴 아이들과 악대를 앞세운 행렬이 잡귀신들을 내쫓는다는 세상에 있지도 않는 괴이한 짐승들의 이름을 소리쳐 불러대며 빙빙 돌아가고…

그런 날에는 일년내내 고생살이에 짓눌리워 하루한시 맘편히 허리펼새 없었던 민가의 상사람들도 희희락락하며 첫눈맞이를 하느라고 촌촌호호가 명절날처럼 북적거리였다.

하늘을 우러러 복을 빌고 자연에 비추어 길흉을 론단하는 이러한 의식을 훌륭한 풍속이라고 할수는 없겠지만 한때나마 겨울의 신선한 자연을 즐기며 심신을 수련하는 첫눈맞이를 노상 부질없는노릇이라고 볼수는 없었다.

아무튼 지금 이 시각 틀림없이 소설이후 대설이전의 첫눈이 내리건만 마을과 마을은 두툼한 눈이불을 뒤집어쓴채 무거운 정적에 잠겨있었다.

년년이 겹치는 재해와 흉작탓인지 아니면 모기다리에서도 피를 내려 들고 마른 나무에서도 즙을 짜려드는 량반, 서리들의 그악스러운 갈퀴질바람에 모두들 옛 풍속을 즐길 흥취와 기력을 죄다 잃어버렸는지?!…

아니, 결코 그때문이 아니였다.

이 땅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던 풍속의 파괴자도 다름아닌 왜구들이였다.

왜구들의 그칠새 없는 침략과 략탈로 하여 이 고장 백성들은 너나없이 가슴이 데고 마음이 졸아들어 이제 와서는 옛 풍속을 즐길 정신적인 경황이 없었다.…

맹렬한 기세로 달리는 황부루의 잔등에 올라앉아 스칠듯이 지나치는 마을과 마을들을 바라보던 박위는 앞쪽으로 시선을 돌리였다.

흩날려내리는 함박눈, 죽탕처럼 질쩍거리는 대지, 행길가에 움푹움푹 꺼져들어간 진흙구뎅이들…

날은 지체궂고 길은 험했으나 성실하면서도 성깔사나운 황부루는 투레질 한번 하지 않고 하나밖에 없는 짝귀를 곤두세운채 기운차게 네굽을 놓고있었다.

말이 달음을 놓는대로 엿덩이같은 진흙덩이들이 어질더분하게 튀여오르고 쌀가루같은 눈가루가 뽀얗게 흩날려 퍼지였다.

말궁뎅이와 말잔등에는 물론 사람의 어깨와 팔다리에도 진흙과 눈가루가 덮이여 인마가 다 볼썽사나왔으나 박위는 연해 말고삐를 세차게 당기였다.

《쩌, 쩌쩌!…》

박위는 지금 룡호군시절의 상관이였던 전라도원수 김종연을 찾아가는 길이였다.

요즘 경상도군영의 원정준비는 그런대로 마감고비에서 다그쳐지고있었다.

기세를 늦추지 않고 계속 밀고나간다면 멀지 않아 원정준비를 끝낼것 같았다.

허나 박위는 한시라도 원정날자를 앞당기기 위해 전라도군영의 힘을 빌기로 하였다.

전라도군영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준다면 대마도원정은 당장이라도 단행할수 있었다. 하여 박위는 칠석이가 다녀간 뒤 두차례에 걸쳐 김종연에게 대마도원정에 호응해줄것을 요망하는 사찰(개인적인 편지)을 보냈었다.

종연은 두번 다 차차 결심을 알릴테니 기다리라는 답전갈을 보내고는 지금껏 소식이 없었다.

간에 불이 달려가지고 종연의 소식을 기다리던 박위는 더이상 인내력을 발휘할수가 없어 군영의 바쁜 일감을 잠시 윤통에게 떠맡기고 순천부에 위치한 전라도군영을 찾아 떠난것이였다.

박위는 오래전부터 김종연에 대해 잘 알고있었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는 문벌좋은 가문에서 나서자란 김종연은 인물도 잘나고 체격도 좋은데다 병서에도 밝고 무술에도 능한 매력있는 장수였다.

성격은 침착하면서도 과묵할사 한데 그것으로 하여 종연의 인격은 더욱 무게있게 안겨왔다.

헌데 지나치리만큼 자존심이 강한 종연은 누구든지 눈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우습게 여기는것이 큰 흠절이였다.

그로 하여 박위가 룡호군의 중랑장으로 있을 때 종연은 상장군으로서 그의 아득히 높은 상관이였는데 두사람은 자주 의견이 상치되여 서로 곱지 않은 눈으로 마주볼 때가 많았다.

그때 종연은 《재하자 함구무언》(아래사람은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을 입버릇처럼 뇌이면서 수하무관들의 견해를 무턱대고 묵살하려 했고 박위는 누구앞에서도 자기의 정당한 주장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개개로 보면 두사람 다 훌륭하고 매력있는 무관이였으나 함께 있으면 서로가 다 상대를 불편해하고 못마땅해했다.

주위의 무관들은 그들을 두고 《두사람 다 동뜨게 뛰여난 무관이지만 영원히 의기투합(마음이 합쳐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지낼 사이》라고 수군거리였다.

그러던중 종연은 왜구의 침입으로 노상 소란스러운 김해부에 무관출신의 부사를 특별히 선발하여 보낸다는 조정의 소식을 알게 되였다.

종연은 지체없이 박위를 천거하였다.

박위만 한 적임자가 없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이모저모로 불편한 그를 자기밑에서 치워버리기 위해서였다.

박위는 종연의 곱지 않은 속심을 뻔히 짐작하였으나 무관인 자기가 전역에 나가는것을 너무나 응당한 일로 여긴터여서 아무런 내색도 없이 웃으면서 룡호군의 대문을 나섰다.

이것으로 두사람은 영영 헤여지는듯싶었다. 허나 운명의 장난이란 얄궂은것이였다.

몇해전 박위가 경상도원수로 승탁된지 얼마 안되여 어떤 과실로 내직에서 밀려난 김종연이 박위밑의 부원수로 내려왔다. 두사람 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뜻밖의 상봉이였다.

종연은 박위의 수하로 굴러내린것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박위를 늘 시끄럽게 여기던 끝에 멀리로 떠밀어보냈던 옛적의 온당치 못한 처사가 송구스러워 노상 어색해하였다.

허나 박위는 아무런 내색도 없이 종연을 무간하게, 지어 살틀하게까지 대해주었으며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의 군사적재능과 공적을 높이 평가해주었다.

박위는 임금에게 장계를 올리고 병부에 전투보고를 보낼 때면 매번 김종연의 전투공적과 군사적자질을 상세히 언급한 다음 고려군의 강화발전을 위해 그를 크게 써주는것이 합당할것이라는 자기의 견해를 덧붙이군 했다.

이것은 그 어떤 위선이거나 누구에게 생색을 내려는것이 아니라 박위의 진심이였다.

당시(지금도 그러하지만) 김종연의 당형인 김종기는 중서 문하성의 좌우간의 대부(임금의 잘못을 충고하는 정4품의 벼슬아치)로 한창 위세를 떨치고있었다.

좌우간의 대부라는것은 그리 높은 벼슬은 아니나 조정백관들중에서 가장 발언권이 있는 관리로서 문벌이 좋고 인물이 청수하며 두뇌가 총명한 전도양양한 사람에게만 차례지는 특정한 지위였다. 그러한 형을 통해 종연은 매번 박위의 보고내용과 그속에 비낀 박위의 진정을 알수 있었다.

종연은 박위가 고맙기 전에 너무도 대바르고 공정한 인간을 턱없이 하대하고 랭대한 자기가 부끄럽고 죄스러웠다.

날이 갈수록 박위에게 머리가 숙어지였다.

종연은 경상부원수로 내려온지 1년도 못되여 전라도원수로 승진되였다.

좌천되였던 량반이 1년도 채우지 않고 승탁된것은 전고에 없는 일이였다.

무관으로서의 자질을 원만히 갖춘 장수 한사람이 천금처럼 귀중한 때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박위의 적극적인 추천이 은을 낸것이였다.

부임지로 떠나던 날 종연은 성의를 다해 음식상을 차려놓고 박위에게 진심으로 되는 사죄와 감사의 말을 꺼내놓았다. 여적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여본적 없는 종연으로서는 생전 처음되는 일이였다.

종연의 말을 다 듣고난 박위는 빙그레 웃으며 채머리를 흔들었다.

《아니할 말씀이요. 사실상 동관이 나에게 고마울것이란 아무것도 없소.

나는 그저 벌어진 사실을 그대로 보고해야 할 자기의 의무와 본분을 실행했을뿐이요. 지난날의 감정이 어떻든 사람의 됨됨과 공적을 옳게 평가하고 보고하는것은 그 어떤 선행이 아니라 인간의 량심이고 도리가 아니겠소.

공의 이번 발탁은 전적으로 전하의 하해같은 은덕과 그대의 남다른 군사적재능으로 하여 이루어진것이니 나에게는 고맙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소.

어련하겠소만 나는 그저 그대가 나라의 준엄한 한 전구인 전라도를 잘 지켜주기만을 바랄뿐이요.》

전라도 군영으로 넘어간 종연은 얼마후 자기의 성의와 존경이 담긴 장검 한자루와 고급해산물 한바리를 박위에게 보내왔다.

박위는 장검만을 받고 해산물은 종연에게 되돌려보내였다.…

박위는 대마도원정을 준비하는 나날 이따금 종연이 생각났으나 그를 원정에 끌어들이고싶지는 않았다.

남에게 굽어들기 싫어하는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고싶지도 않았지만 그보다는 종연의 창창한 앞길에 혹여 어떤 그늘이라도 던져주지 않겠는가 하는 위구심이 떠올랐기때문이였다.

하지만 칠석이가 왔다간 뒤 박위는 생각을 달리하였다.

당길수 있는 일은 모두 당기고 나설수 있는 사람들은 죄다 들어일구어야 했다.

그것은 원정을 가급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도 필요했지만 김종연과 같은 뛰여난 장수들의 재능과 애국심을 최대로 꽃피워주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였다.

하여 박위는 두번에 걸쳐 피가 뚝뚝 내돋도록 절절한 어휘로 원정참여를 요망하는 편지를 보냈건만 종연에게서는 확답이 없었다.

박위의 심정은 착잡했다.

종연은 원정에 나서기가 두려운가, 아니면 그의 유별스러운 자존심이 또 코를 쳐들었는가?!

종연의 심중은 딱히 가려지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하여 어느 세월 그의 회신을 기다리고있을수 없었다.

찾아가서라도 명백한 대답을 들어야 했다. 가능한껏 그의 손목을 끌어당겨야 했다.…

박위가 경상도군영을 나선것은 어제 중낮때였다.

그때 벌써 박위는 자기의 몸이 별스럽게 무겁고 비둔해진듯싶었다.

오늘 아침 창원고을의 어느 한 역(역마가 머무르는 역참과 주막집 등이 있는 일정한 규모의 거리가 형성되여있는 곳.)을 나설 때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골속이 들쑤시여 수월히 걸음을 옮길수 없었다.

몇달째 지속되여온 과중한 정신육체적부담이 뼈속깊이에 배여있는데다 려로가 겹치고 찬바람이 스며들어 극심한 병세를 형성한것이였다.

고통은 시간이 갈수록 가증되였다.

이제 와서는 온몸이 학질에라도 걸린듯 걷잡을수없이 덜덜 떨리였다.

눈뿌리가 확확 달아오르고 귀속이 웅웅 울어댔다.

여느때같으면 질주의 쾌감을 자아냈을 군마의 기운찬 발굽소리와 귀전을 감도는 세찬 바람소리는 소란스러운 굉음마냥 귀찮고 시끄럽게 감각되였다.

박위는 사실상 말을 타고가는것이 아니라 말에 실려가고있었다.

불현듯 여삼의 챙챙한 목소리가 꿈속에서처럼 아렴풋하게 들려왔다.

《…장군의 신색이 좋지 않소이다. 병세가 더 심해진게 아니오니까?》

박위는 근심이 가득 어린 여삼의 얄팍한 얼굴을 돌아보며 애써 웃음을 피웠다.

《이놈아, 고뿔도 병이라더냐? 그러다 말겠지. 아무 걱정말구 내뒤를 바투 따라서기나 해라.》

박위의 시원스러운 대답을 그대로 믿어버린 여삼은 즉시 근심기를 확 날려버리였다.

여삼의 얄팍한 입에서는 아까부터 사물거리던 말마디들이 들물처럼 쏟아져나왔다.

《황송하오나 장군께 긴히 사뢰일 말씀이 있소이다.》

《황송이고 누런 송이고 어서 말을 해라.》

박위는 심한 고통으로 하여 아무런 호기심도 동하지 않았으나 묵묵히 앞쪽을 바라보며 여삼의 뒤말을 재촉했다.

여삼은 벌써 기운이 빠지기 시작한 자기의 구랑말을 다몰아 박위의 황부루곁에 세우고나서 말을 이었다.

《저번날에도 대략 말씀올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난 추석날 밤에 기생년의 집 뒤담을 뛰쳐나온 놈이 례사 난봉군같지 않소이다. 그놈이 바다를 건너와 거북놀이행렬에 끼워들어가지고 기생의 집에 스며들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오천의 짐작이였으나 여삼에게도 그렇게 생각되였다.) 더욱 그러하옵니다.

더구나 그 기생년이라는게 김해부사의 애기인데다 이 고장 태생도 아니고 타지에서 굴러들어온 얼쑹덜쑹한 잡년이라는데 아무래도…》

여삼은 아직까지 이렇다할 단서는 잡지 못했으나 거의 확정적으로 추석날 밤 바다로 내뺀 놈과 기생년 그리고 기생의 장단에 놀아난다는 김해부사가 한줄에 꿰여있는듯이 생각되였다.

하여 그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박위의 의향을 자아내기 위해 조심스럽게 변죽을 울려보군 했다.

박위는 진작 여삼의 심중을 짐작하고있었다. 하지만 여삼이네들과 견해를 같이하고싶지 않았다.

(…바다로 내뺀 놈을 꼭 기생의 집에서 나온 놈이라고 단정할수도 없고 기생의 집을 나드는 놈을 무작정 세작이라고 보는것도 무리하다.

호백이까지 거기에 련루시켜본다는것은 지나치기 짝이 없는 억측이다.

나라의 록을 타먹는 관헌인 호백이가 어찌 역신노릇을 할수 있겠는가.

나 역시 호백이가 깨끗하고 진실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하지만…

자기가 곤경에 빠졌다 하여 아무 사람이나 함부로 의심한다는것은 사내답지 못한 소위다.

물론 추석날 밤 바다로 내뺐다는 수상한 놈과 기생년에 대해 그리고 조호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자상히 알아보기는 해야 할것이다.

이제는 윤통이만이 아니라 이 애들까지 호백을 의심하고있는데 이게 그저 일은 아닐것이다.)

박위는 생각이 난김에 그 모든 일에 대해 깊이 따져보고싶었다.

허나 눈앞이 휘휘 돌아가고 머리속이 지끈지끈 들쑤시여 도저히 사색을 지속할수 없었다.

한참만에야 박위는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며 간신히 말을 꺼냈다.

《이 애 여삼아, 각성은 높이로되 함부로 사람을 의심해서는 못쓰느니… 확실한 단서를 얻기 전에는 다시 그런 말을 꺼내지 말아라.…》

다음날 저녁무렵에야 박위네들은 전라도군영앞에 당도하였다.

원래 전라도군영은 순천부중심에 있었는데 얼마전에 김종연이 주장하여 바다가로 옮기였다.

종연은 바다가에 바투 나앉아 왜구의 동태를 살피다가 나타나는 놈들을 벼락같이 덮치군 하는 경상군영의 본을 따서 군영의 위치를 옮긴것이였다.

금시 자리를 잡은 뒤여서 군영의 건물들은 그리 미끈하지 못했으나 오가는 군사들은 제법 칠칠해보이였다.

박위는 엉금엉금 기여내리다싶이 말에서 내리였다.

땅에 발을 놓으니 물레에 태우기라도 한듯 눈앞이 빙그르르 돌아갔다.

잠시 눈에 힘을 주고 앞쪽을 주시하던 박위는 안깐힘을 짜내여 걸음을 떼놓았다. 그 순간 허공이라도 짚은듯 온몸이 위태롭게 휘청거리였다.

곁에 서있는 소소리높은 나무기둥에 몸을 의지하려고 손을 내뻗치던 박위는 그만에야 몸의 중심을 잃고 눈판우에 모재비로 나떨어지였다.

육신은 구름우에 올라선듯 더없이 편안한데 의식은 가물가물 흐려들었다.

자기를 부르는 여삼의 울음섞인 소리와 황부루의 투레질소리가 아득히 먼곳에서 들려오는듯 하더니 곧 사라져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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