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 회)

제 3 장

3

 

바다가로 나가려던 박위는 다시 군막안으로 들어섰다.

어수선한 생각이 뒤머리를 쿡쿡 쑤시였다.

(노상 조정에 들어앉아 문서놀음을 해야 하는 밀직사의 관리인 백운이 무슨 일로 여기까지 내려오는가.

나한테 어디 뜨지 말고있으라는 전갈까지 하면서… 그 사람이 이제는 나에게까지 조정관리의 위신을 차리자는건가.

아니면 진실로 무슨 일이 급하고 중해서일가. 아무튼 이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 아닌가?)

조정에서도 노란자위라고 할수 있는 밀직사의 중진관료인 최칠석이가 한개 도의 군영에 내려온다는것은 공적인 용무든 사적인 일이든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였다.

게다가 최칠석으로 말하면 박위쪽에서 먼저 절교를 선언한 옛적의 벗으로서 그사이 어떻게 변했는지 가량할수 없는 사람이였다.

과연 칠석은 이제 무엇을 안고오겠는가?!…

박위는 저으기 불안하면서도 은근히 궁금하였다.

이윽하여 박위는 심상한 낯빛, 침착한 거동으로 군막을 나섰다. 피덩이처럼 빨간 단풍잎들이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앞뜰을 지나 대문쪽으로 걸어나갔다.

고려조정의 법규에 의하면 정3품관인 동시에 전서(당우에 올라갈수 있는 량반, 후날의 당상관을 이르는 말이나 고려 말기까지는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급에 해당한 중앙관리가 지방에 내려올 때 그를 맞아들이는 의식은 여간만 번잡스럽지 않았다.

지방관은 중앙관리가 당도하기 전에 대문앞에 서있다가 그가 말에서 내리면 먼저 재배를 한다.

다음 중앙관리가 제 먼저 마루에 올라 자리에 앉은 후 지방관은 서편 층계로부터 마루에 올라와 방안쪽으로 물러선다.

지방관이 다시 절을 올린 후 중앙관리는 북쪽에, 지방관은 동쪽에 자리를 정하고 앉는다.

시작부터 마감까지 조정관리의 위세를 돋구기 위한 허식적인 례법이였다.

박위는 자기자신이 누구보다 경멸하는 그 번다한 허례허식을 차리기 위해 대문가로 가고있었다.

이제 와서 최칠석은 허물없이 맞아들일 절친한 벗이 아니라 허식적인 례의로 깍듯이 모셔들여야 할 조정의 지엄한 관리였다.

박위는 허례허식인줄 번연히 알면서도 그 페습에 말려들어야 하는 자기의 처지가 새삼스레 구슬퍼났다.

하지만 제 의사대로 휘거나 제칠수도 없고 무시하거나 도피할수도 없는것이 바로 세속의 풍습이요 조정의 법규였다.

대문안쪽에 이른 박위는 덤덤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미구하여 육중한 참나무대문이 아츠러운 소리를 내며 제껴지였다.

그러자 그리 멀지 않은 앞쪽에서 건장해보이는 말 한필이 갈비뼈를 불끈거리며 기운차게 달려오는 모양이 한눈에 안겨왔다. 대문앞에 이른 말은 앞발을 껑충 들었다놓더니 요란스럽게 투레질소리를 내며 멎어섰다.

말우에 올라앉았던 중키의 관리가 뻘건 관복자락을 날리며 훌쩍 뛰여내리였다. 두말할것도 없이 그가 바로 최칠석이였다.

예전의 감정은 어찌됐든 오래간만에 옛적의 벗을 보니 우선 반가운 정이 사무쳐올랐다.

허나 박위는 칠석이가 대문안으로 들어서자 반가운 마음을 애써 누르고 깊숙이 허리를 꺾었다.

《원로에 얼마나 수고가 막중하셨겠소?!》

칠석은 벼락같이 박위에게 다가들더니 숙어진 그의 어깨를 버쩍 들어올리며 노기에 차서 부르짖었다.

《해암, 이게 무슨 짓이요, 망녕이 나셨소?》

《그럴리가 있겠소. 나는 망녕이 나서가 아니라 례법을 지키자는게요.》

《례법? 해암이 내게다 조정의 례법을 지킨단 말이요? 그것 참, 고마운 생각을 했소그려.》

박위의 딱딱하면서도 정중한 인사가 진정으로 서운해난 칠석은 악의없는 조롱으로 박위를 꾸짖고나서 그의 팔소매를 세차게 잡아끌었다.

결국 박위는 예나 다름없이 소탈하고 대활한 칠석의 태도로 하여 조정관리를 맞이하는 지방관의 번페스러운 의식을 한 조항도 실행할수 없었다.

그럴수록 의문은 더욱 짙어갔다.

(이 사람이 정녕 어쩌자고 이러는것인가?)

얼마후 박위와 칠석은 조촐한 주안상을 앞에 놓고 조용히 마주앉았다.

이것 역시 벗을 맞이한 기쁨에서가 아니라 중앙관리를 모시는 지방관의 례식에서 시작된것이였다.

수하의 군사들이 성의있게 상을 차리느라고 한참이나 분주탕을 피워댔으나 정작 상을 차려놓고보니 그 분주탕에 비해 반찬의 가지수는 많지 못했다.

그나마도 동자질에 서툰 남정들이 거칠기 짝이 없는 손으로 복닥소동을 피워서 만든것이라 어느것 하나 먹음직스러워보이지 않았다.

다만 쌉쌀한 냄새를 풍기는 도라지무침만은 칠석에게 그런대로 이채로운 안주가 된것 같았다.

《찬은 변변치 않으나 로독도 풀겸 한잔 드소그려.》

박위는 커다란 놋주발과 두둑이 솟아있는 도라지무침을 번갈아 가리켜보이며 뚝한 어조로 말꼭지를 떼였다.

잠시 무슨 생각엔가 골똘히 잠기였던 칠석은 술상같은것은 본체도 않고 전혀 왕청같은 화제를 꺼내놓았다.

《해암, 이제 와서 내가 이렇게 말한다면 구차스러운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겠소만…

지난 여름 해암이 상경하여 우리 집에 들렸을 때 내 못난 꼴을 보여주어 지금껏 부끄럽고 죄스럽소.》

《그건 대체 어떻게 하는 소리요?》

뜻밖의 말이라 박위는 어안이 벙벙해지였다.

칠석은 진중한 표정으로 아무런 특징도 없는 방안을 휘둘러보고나서 계속하였다.

《해암이 내려간 뒤 내 며칠밤을 궁싯거리며 자신의 됨됨과 지나온 나날들을 심심히 돌이켜보았소.

돌이켜보니 나라는 사람은 확실히 젊은 시절의 순결과 이 나라 사내의 기개를 상실한 놈이요, 말로만 애국을 떠드는 관리가 분명하데그려.

사실 개경에서 십수년 좋이 벼슬살이를 하는 사이 정의와 진실에는 눈이 어두워지고 사치와 허욕에는 눈이 밝아진 위선자가 됐더군.

개경의 벼슬살이속에서 때벗이를 한게 아니라 때투성이가 됐드란 말이요.》

《새삼스럽게 무슨 그런 소리를 하우?

어서 술이나 들지그래.》

칠석의 갑작스럽고도 심각한 자기 타매에 립장이 다소 난처해진 박위는 얼추 할말이 떠오르지 않아 연해 술을 권했다.

칠석이 무엇때문에 찾아온 사연을 말하기 전에 이렇듯 장황한 자기반성부터 터놓는지 까닭을 알수 없었다.

나를 중떠보자는건가, 아니면 진심인가. 칠석은 진정 무슨 리유로 예까지 왔는가.

박위의 내심은 착잡했다.

칠석은 박위가 무엇을 생각하든 아랑곳 없다는듯 단정하게 포개잡은 두손을 가늘게 떨며 뒤말을 심어나갔다.

《…그건 새삼스러운 소리가 아니라 나의 진정이요.

아까의 계속이오만 해암이 군영에 내려간 뒤에도 그처럼 어렵고 복잡한 정황에서 계속 원정준비를 드세게 밀고나간다는 소식을 자주 들었소.

그때마다 나는 해암의 높은 뜻과 완강한 의지에 탄복하는 한편 속심지가 다 빠지여 허울만 남은 자신이 창피하고 저주스러워 홀로 가슴을 들때리며 통탄해마지 않았소.…》

여기서 칠석은 윤통의 회답편지를 받은 뒤 다시한번 자기의 저조한 인생관과 박위의 강건한 기상을 대비해보며 며칠밤을 자책과 번뇌로 지새웠다는 말도 하고싶었으나 애써 눌러참았다.

그렇게 되면 자기의 마음은 더욱 후련할것이나 윤통의 립장은 난처해질것이였다.

잠시 숨을 몰아쉬던 칠석은 불시에 주먹을 불끈 틀어쥐며 고개를 떨구었다.

《…하고보면 나는 〈호유장군〉의 지기가 될 자격이 없는 용렬한 인간임에 틀림없소.

그대가 우리 집 사랑방에서 화약처럼 터쳐놓은 절교선언은 너무도 응당한 타격이였소.

아니, 고마운 매질인지도 모르오.》

박위는 그제서야 칠석이가 언제한번 타인의 마음을 중떠보는따위의 유치한노릇을 해본적이 없는 깨끗한 인간이였음을 상기할수 있었다.

칠석은 필경 자기의 진심을 토파하고있었다.

사실 칠석은 박위가 대마도원정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처음으로 들었을 때 벌써 내부적인 갈등에 직면하였다.

그후 박위가 반정음모를 꾸민다는 소리가 나돌자 칠석은 그것이 전혀 무근거한 랑설임을 뻔히 알면서도 바싹 긴장해지였다. 어차피 마음속의 갈등을 종결짓고 생활의 새 방향을 선정해야 했다.

박위의 편을 들것인가, 리성계를 추종할것인가?

리성계일파에 가담한다는것은 마음에도 내키지 않았지만 현세의 량심적인 인간들에게는 물론 후세사람들한테도 권력에 아부하여 정의를 외면한 비렬한으로 규탄을 받을것이였다.

그렇다고 하여 박위를 지지한다면 필수불가결적으로 리성계와 대립될것이며 그 대립은 장차 인생파멸로 이어질것이였다.

누구에게도 미움을 받지 않는 길, 그 어떤 위험도 없는 길을 택하는것이 현책이였다.

하여 칠석은 박위에게 조심스레 원정을 뒤로 미루거나 포기할것을 권고하였다. 그러자 박위는 절교선언으로 대답하였다. 천성적으로 결곡한 칠석은 그때부터 심각한 내부모순에 빠지였다.

그 모순은 박위의 원정준비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더욱 격화되였다.

요즘에 와서야 칠석은 어떤 위험이 닥쳐온다 해도 정의와 량심에 살려는 결심을 다지고 오늘의 어려운 길을 떠나온것이였다.

박위는 칠석이가 겪어온 그 모든 정신적인 굴절과 성장을 희미하게 나마 짐작할수 있었다. 마음속의 자기와 힘겨운 싸움을 벌리던 끝에 오늘의 높이에 오른 칠석이가 고맙기도 하고 쳐다보이기도 하였다.

허나 무엇이라고 딱히 할말이 생각나지 않아 슬며시 칠석의 말허리를 꺾었다.

《백운, 이제는 그만하지그래.》

칠석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며 축축하게 젖은 소리로 계속하였다.

《아니, 하려고 마음먹은 말을 죄다 해야겠소. 해암도 아다싶이 나는 여직껏 누구에게도 허리를 굽혀본적이 없소.

하지만 내 오늘 그대에게만은 허리를 굽혀 사죄를 하리다.

진심으로 당부컨대 이 못난 사람을 용서해주오.》

박위는 눈굽이 쩌릿해났다.

역시 칠석은 바탕도 좋고 본태도 깨끗한 사람이였다. 자기의 결함도 주저없이 터놓고 용서를 빌줄 아는 솔직하고 대범한 인간이였다.

세상을 둘러보면 졸장부들은 대개 자기의 결함이 들춰지는 경우 어떻게 하나 그것을 미화분식하거나 정당화하려고 열을 올린다.

그러나 결곡한 사람들은 과감하게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주저없이 갱생의 힘겨운 길에 자기를 던진다.

물론 이끼오른 마음이 일조에 물행주를 친 청동거울처럼 알른알른하게 빛날수는 없겠지만 반성이 있고 회개의 결심이 있으며 그에 맞는 노력이 있다면 이 세상에 극복하지 못할 허점이나 과실이 있을수 있겠는가.

하고보면 완성된 인간은 물론 훌륭하지만 자기의 결함을 의식하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 역시 아름다운것이 아니겠는가?!…

박위는 이처럼 결바른 인간을 한순간의 충동에 사로잡혀 손쉽게 털어버리려 한 자기가 도리여 부끄러워 자꾸만 얼굴이 달아올랐다. 박위는 상우에 놓여있는 칠석의 커다란 손을 힘주어 부여잡았다.

《백운, 그대가 이렇게까지 적라라하게 속을 터쳐놓으니 내가 되려 괴롭소그려.

백운의 집을 찾아갔을 때 나 역시 처신을 옳게 하지 못했소. 그때로서는 앞날이 암담한데다 그대한테서까지 리해와 공감을 받지 못하고 보니 이래저래 심사가 나서 과하게 행동한듯 하오만 그것 역시 워낙 나라는 인간이 그릇이 작은탓에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다고 보는게 옳겠지.

내 맹세컨대 다시는 순간의 흥분에 사로잡혀 경거망동하는 일이 없도록 하리다.

자, 쾌하지 못했던 지난 일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보다 굳은 우의와 신의를 약속하는 의미에서 한대접씩 마시세그려.》

박위의 절절하고도 명쾌한 말에서 다시금 자기를 벗으로 받아준 그의 너그럽고 뜨거운 마음을 저저이 읽은 칠석은 연방 더운 침을 삼키였다.

조금후에야 칠석은 갑자기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듯 표정을 바꾸더니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지금은 한만하게 술이나 마시고있을 때가 아니요. 오죽하면 내가 일부러 안동대도호부에 일을 만들어가지고왔다가 동경(현재의 경주, 당시 경상도 도소재지 격이였음.)에도 들리지 않고 밀양을 거쳐 곧장 이리로 왔겠소?!》

《그래, 무슨 일이 또 생기였소?》

박위는 술대접을 내려놓으며 심상한 어조로 물었다.

칠석의 흰 얼굴은 불식간에 꺼멓게 흐려지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해암에 대한 조의(조정의 여론)가 이제는 남산만큼이나 불어나서 더이상 덮어둘수 없을 지경이 되였소.》

칠석은 조정의 관리인 자기가 국가의 중대기밀에 속하는 문제를 현지에 내려와 사건관계자 당자에게 루설하는것이 얼마나 엄중한 죄로 되는가에 대해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칠석에게는 조정의 엄중한 형벌보다 정의와 량심이 더 중하였다. 놀라움보다 그 어떤 감사의 정이 더 진하게 어려있는 박위의 얼굴을 피끗 살펴보고난 칠석은 급급히 뒤말을 심어나갔다.

《내가 지난 여름 해암이 상경했을 때도 얼핏 비친바있지만 그때 벌써 조정에서는 경상도원수가 반정준비를 차린다는 소문이 쉬쉬 나돌았소.

그런데 똑똑한 증거가 없는탓인지(애초에 그런것이 있을수도 없겠지만) 얼마 안 가서 그런 소리가 모래불에 물잦듯 하더군. 천만다행이로다 하구 안도의 숨을 쉬였는데 웬걸, 요즘에 와서 다시 흉흉한 소리들이 홍두깨처럼 불쑥불쑥 튀여나오는게 아니겠소.

헌데 근래의 소문은 저번때보다 훨씬 험악하더란 말이요.

가만, 얼마전에 여기 군영에서 굴암산 어디엔가 있다는 봉은사라는 절에 올라가 절간 여러채를 뒤진 일이 있소?》

말없이 채수염을 쓸어만지던 박위는 가볍게 고개를 끄떡이였다.

《그런 소문이 날만 한 일이 있었소.

조정에서는 인차 화약을 구해줄 잡도리가 아닌데 세월없이 조정의 도움만 기다리고있을수 없기에 내가 군사들에게 염초를 만들 절간마루밑의 먼지를 파오라고 했댔소.

화약이 없이야 원정도 할수 없지만 시시로 쳐들어오는 새앙쥐같은 왜구도 잡을수 없지 않소?!》

박위는 애당초 오천이나 염초장사람들은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무슨 변이 생기든 자기가 다 들쓰고나설 잡도리였다.

《그러니 그건 생판으로 꾸며낸 소리가 아니였구려. 그다음 또 한가지, 이곳 군영에서 지난달 어느땐가 팔소바다가에 나가 왜구들을 잡은 일이 있소?》

《있었소. 그때 일은 이미 장계로도 올리고 동경류수를 통해 조정에도 상세히 알렸소. 헌데 왜구를 잡은 일도 죄목에 걸렸단 말이요?》

《그렇소. 사헌부에서는 지금 해암이 자기의 역신음모를 가리우기 위해 왜구들과 짜고 그런 놀음을 꾸몄다고 떠들고있소.》

《아니, 그건 대체 무슨 소리요?》

바위처럼 듬직하게 틀고앉아 심상한 어투로 칠석이와 말을 나누던 박위는 짙은 눈섭을 치켜올리며 소리를 높여 되물었다. 박위는 이미 팔소전투를 전후한 때 왜구들의 화평회담이라는것이 사다께의 기만책이라는것을 분명히 짐작하였으나 그것이 이렇게 고려조정과 련결되여 자기의 목을 조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사다께라는 놈은 찢어발기고싶도록 가증스러웠지만 그놈의 서뿌른 작간에 놀아나는 조정관리들의 처사도 숨통이 꾹 막히도록 답답하고 안타까왔다.

왜구는 천생 타고난 강도배들이요, 승냥이와 여우를 접해붙인 악당들이니 그렇다치고 나라의 정사를 맡아본다는 기둥뿌리 관리들이 어쩌면 그렇게까지 우매할수 있는가.

박위의 넓은 가슴은 풀무질이라도 하듯 들썩거리였다.

칠석은 그리 덥지 않은 방이건만 몇번이나 목깃을 들척거리더니 허허 탄식조로 말을 이었다.

《기막힌 일이요. 나로서는 아직 어떤 놈이 어떻게 씹었는지 구체적으로 알수 없으나 사헌부에서는 해암이 대마도에 잡혀간 리별장의 딸을 뽑아오기 위해 여러 고을들에서 군품명색으로 징수한 재물을 왜구들에게 수없이 빼돌렸다는 소리도 돌리고있소.

대마도령주는 그에 대한 답례로 해암에게 반정에 쓸 병기와 리별장의 딸을 보내주기로 했다던가?!

허어― 이건 날조라 해도 너무나 빈틈없이 사개가 맞물려진 날조이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박위는 불식간에 혀가 굳어지여 한마디의 말도 꺼낼수 없었다.

커다란 주먹만이 찡찡 울리며 후둘후둘 떨리였다.

박위는 지금껏 자기에게 묻어돌아가는 반정음모라는 헛소문이 무척 불쾌했으나 무섭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뭐니뭐니해도 자기의 마음이 청백했기때문이였다. 허나 지금 생각해보니 일은 벌써 자기의 청백한 마음 하나만을 내대가지고 해결할 정도가 아니였다.

사다께라는 놈과 그놈이 파한 세작은 자기의 발밑에 보이지 않는 그물을 펴놓고 앉아 걸음을 옮기는대로 한치두치 그물의 아구리를 조이고있었다.

과연 우리 땅에서는 어느 놈이 사다께가 늘인 그물의 한귀를 잡고있는가?!…

박위의 굳어진 얼굴을 점도록 지켜보던 칠석은 조급증이 가득 어린 어조로 뒤를 조이였다.

《사헌부의 대계가 아직 밀직사에 접수되지는 않았으나 가부간 들이닥칠것은 명백하오.

그리되면 입이 열개, 백개라 해도 발명할 도리가 없을게요.

옛적부터 역모죄를 뒤집어쓴 사람은 세력이 빨래줄같은 재상재추라해도 빠져나오지를 못했는데 요즘같은 때야 더 말해 무엇하겠소.

해암, 내 생각에는 사건의 전모가 쨋쨋하게 밝혀질 때까지 당분간 몸을 피하는게 상책일듯 하오.》

《몸을 피하라고?!》

박위는 장걸한 몸집을 흠칫 떨며 눈을 지릅떴다.

몸을 피하는것은 눈앞에 닥쳐온 위험을 손쉽게 털어버릴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단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무런 죄도 없이 좀도적처럼 도망질을 한다는것은 너무도 비렬하고 너절한 행동이였다.

그렇게 하는 경우 지금까지 대마도원정을 위해 기울인 자기자신과 수많은 사람들의 막중한 수고는 하루아침새 물거품처럼 사라질것이였다.

원정은 영영 실현될수 없을것이였다.

또한 칠석은 국가비밀을 루설한 죄로 옥살이를 하거나 귀양살이를 하게 될것이였다.

인간이 뜻을 꺾고 신의와 의리를 저버리면서도 기어이 살아서는 무엇하리.

죽음이 떳떳하고 삶이 치욕이라면 죽음을 택하는것이 천백번 지당하다.

우러러 하늘에 죄스러움이 없고 굽어보아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없을진대 무엇때문에 한 나라의 당당한 장수가 구차스럽게 도망을 하겠는가?!

피할수 없는 불행이라면 과감히 맞이하자!

이렇게 마음을 다지자 박위의 가슴은 이상할 지경으로 평온해지였다.

박위는 녀성적인 매력이 풍기는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말하였다.

《백운, 나를 걱정해주는 그대의 진정은 정말 고맙소. 하지만 내 어찌 도망질을 할수 있겠소.

일의 옳고 그름을 밝힐수 있는껏 밝히고 대마도원정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주장할수 있는껏 주장하다가 종시 죽을 운수가 뻗친다면 떳떳하게 칼을 받는게 옳은 처신일게요.

그러니 나에게 더이상 도망같은것을 권하지 말아주오.》

칠석은 눈을 치켜뜨며 입을 하 벌리였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무엇때문에 있지도 않는 죄를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벌을 받는단 말이요?!》

《백운, 그러지 마오. 이제 와서 내게 필생의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 모든 변이 다 원정이 끝난 뒤에 왔으면 하는거요.

나는 물론 원정준비를 더욱 다그치겠지만 백운도 개경에 돌아가 할수 있는껏 내 뒤를 막아주오.

물론 나는 벌을 받는것이 겁나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 원정을 실현하자고 그러는거요. 원정을 끝낸 뒤에는 내 곤장이든 칼이든 웃으면서 받겠소.》

칠석은 치밀어오르는 격정을 주체하기가 어려운듯 한참이나 아래턱을 덜덜 떨었다.

조금후에야 오열이 섞인 청으로 무슨 분풀이라도 하듯 소리쳐 웨치였다.

《해암, 그대는 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기에 죽고사는 일이 눈앞에 닥쳐온 이 마당에서까지 온통 원정소리만 하는거요. 이 나라에 그대와 같이 뼈대가 실한 장수가 있는것은 실로 자랑스러우나 그 남다른 인격때문에 남에 없는 고초를 겪으며 운명의 랑끝으로 몰리니… 아아, 하늘이 무심하오.

깊이 든 주옥이니 그 광채를 뉘라서 알리오. 어허허…》

칠석은 마침내 어깨를 들썩거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박위는 칠석의 물결치는 어깨를 힘주어 잡으며 곡진한 청으로 뇌이였다.

《백운, 그만 자중하오. 나는 그대의 과분한 치사를 지우의 기대와 믿음으로 가슴속에 깊이 새기겠소.》

이윽하여 칠석은 불타는 두눈을 들어올리더니 아까와는 판다르게 힘찬 어조로 말하였다.

《해암의 심정이 그러할진대 내 어찌 뒤탈을 생각하면서 몸을 사리겠소.

짧은 팔로 먼곳의 돌을 집을수 있겠는지 모르겠소만 내 죽을 기를 쓰고 나서서 해암의 일을 바로잡아보겠소.

만약 모든 일이 옳게 밝혀지고 바로 펴지여 원정이 실현된다면 그땐 나도 해암과 함께 대마도원정에 참가하겠소.》

박위는 물론 밀직사의 중급관리에 불과한 칠석이가 나라의 중대결정을 자기 의사대로 손쉽게 조종할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의 심정을 깊이 헤아려주고 죽기로써 자기의 일을 도우려 하는 칠석이가 여느때없이 고맙고 미더웠다.

솔의 푸름은 겨울에 알고 벗의 진정은 역경에서 헤아리게 된다는 옛 문장의 진의가 새삼스레 가슴에 마쳐왔다.

《백운, 별스러운 말 같소만 그대와 같은 지기를 가진것은 나의 제일 큰 자랑이고 행복이요.

나에게 있어서 백운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지난 나날은 가장 쓸쓸하고 서글픈 시기였소. 고맙소, 정녕 고맙소.》

박위의 상기된 얼굴에서 벗의 뜨거운 진심을 여실히 헤아려본 칠석은 벅찬 감격과 환희로 하여 가슴이 훅훅 달아올랐다.

《해암, 나야말로 그대를 벗으로 가진것을 인생의 제일 큰 복으로 알고있소.

그대로 하여 나는 문생과 좌주간의 사사로운 도의보다 나라와 민족앞에 지닌 본분을 더 귀중히 여겨야 한다는 인생의 참된 지주도 되찾을수 있었소.

그러니 내 어찌 그대와 더불어 생과 사를 같이하지 않으리오.

따져보면 실상 생이란 그리 요란한것이 아니고 죽음이라는것도 별로 무서운것이 아니요.

옛시에 이런 구절이 있지 않소.

 

살고 죽음이 괴롭다 하되

원래가 괴로움이 아니렷다

드러나고 숨고 살고 죽고

세계는 넓으리라

 

헛허허, 인생이란 충의로 살다가 충의로 마치면 족한것이요, 깨끗하게 지내다가 깨끗하게 끝내면 여한이 없는게요.

해암, 우리 새로이 정립한 인생리치와 오늘의 맹약을 더욱 굳게 다지는 의미에서 한대접씩 내세그려.》

어느결에 본래의 소탈하고 쾌활한 성격이 되살아난 칠석은 방금전까지 술을 마실 계제가 못된다고 손사래질을 하던 사람같지 않게 껄껄 웃으며 거의 대접만 한 주발을 들어올리였다.

벗과 화해를 하고 인생사의 리치를 새로 수립한것으로 하여 한껏 가슴이 넓어진 칠석은 지금 불행이나 죽음 같은것이 눈아래로 아득히 내려다보이였다.

어느결에 칠석의 기분에 감염된 박위는 자기도 마음이 쇄락해지여 껄껄 웃으며 주발을 추켜들었다.

술이 철철 넘쳐나는 주발을 단숨에 비워버린 두사람은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상대의 손을 억세게 틀어잡으며 또다시 속이 후련하게 웃어제끼였다.

여러가지 의미가 담겨진 대장부들의 뜻깊은 웃음이였다.

얼마후 칠석은 오늘중에 기어이 돌아서야 한다며 만류하는 박위의 손을 뿌리치고 부등부등 밖으로 나왔다.

저녁어스름이 깔린 괴자누룩한 행길로 홰군도 없이 홀로 말을 몰아가는 칠석의 모습을 바라보는 박위의 가슴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못 견디게 아프고 쓰리기도 했다.

되돌이

Twitter로 보내기 Facebook으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네이버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Google+로 보내기 Evernote로 보내기 Reddit로 보내기
우리민족끼리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E-mail) : urimanager@silibank.com 홈페지내용에 관한 문의(E-mail) : uriminzok@silibank.com
Copyright © 2003 - 2013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gotop
기사종합
 
도서, 잡지
 
영화, 음악
 
독자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