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 회)

제 3 장

1

 

리옥은 아까부터 밋밋한 모래불우에 미츨한 두다리를 곧게 내뻗치고 앉아 수평선 저 멀리에 낮추 드리워있는 고국의 푸른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있었다.

대마도는 기온이 비교적 온화한 일본땅에서도 제일로 따스한 고장이다.

한겨울에도 내리는 눈이 땅에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녹아내리는 바람에 땅에 덮인 눈은 거의나 찾아볼 길이 없다.

숲도 들도 사시절 푸른빛을 띠고있었다.

사람들은 노방 홑것을 입고 다니면서도 전혀 추운줄을 모른다.

지금은 겨울을 눈앞에 둔 마가을.

아무리 더운 지방이라 해도 철은 역시 철이여서 홑것차림으로 한지에 오래 앉아있으면 으시시 몸이 떨려난다.

하지만 착잡한 번뇌에 싸여있는 리옥은 지금 지궂게 옷섶을 파고드는 랭기를 거의나 의식하지 못하고있었다.

리옥의 마음은 오늘도 하냥 조국으로 달리고있었다.

청동거울마냥 티 한점없이 맑고 푸른 고국의 하늘, 꽃송이처럼 점점이 떠있는 흰구름장사이로 죽촌의 정갈한 자기 집과 앞뜰에 무성한 구기자덤불이 그림처럼 생동하게 떠올랐다.

지금은 가을철이라 앞뜰의 구기자열매들은 죄다 떨어졌으련만 하늘가에 그려진 환상적인 구기자덤불에는 피방울같이 빨간 열매들이 주렁주렁 많이도 달려있었다.

문득 그 열매더미우로 맛스럽게 구기자차를 마시는 박위의 흰 얼굴이 생동하게 그려지였다.

아버지의 흉내라도 내듯 단숨에 차종을 비우고 무슨 장한 일이라도 치른듯 보조개를 파며 방그레 웃는 현중의 귀인성스러운 얼굴도 비껴들었다.

리옥은 찌르는듯 한 아픔을 느끼며 앵두알같은 입술을 암팡지게 감쳐물었다.

(아, 현중 아버님, 언제인가 당신께서는 인생의 쓴맛은 단맛을 빚어내는 원천이라고 하셨지요.

하지만 생활의 하루하루가 시종 쓴맛으로 이어진다면 사람이 무슨수로 그 장구한 괴로움을 이겨낼수 있을가요?

소녀는 그만 지쳤습니다. 지겹고 역스러운 이국살이 반년에 몸도 마음도 심령까지도…

따져놓고보면 소녀가 본의아닌 실수로 현중 아버님을 파멸적인 위기에 몰아넣게 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소녀는 만사를 체념했습니다.

정말이지 왜구들도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일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무 각성없이 그들에게 당신께 보내는 문안편지를 쥐여준것은 참으로 잘못된 실책이였습니다.…)

리옥의 절망적인 사색은 이 대목에 이르러 돌연히 사다께쪽으로 돌아갔다.

…그날 리옥을 자기의 관사에 불러들인 사다께는 징그러운 웃음을 띄운채 기고만장하여 말하였다.

《에또― 일전에 네가 쓴 문안편지는 그대로 박위에게 전해주었어야 옳았을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네 필적을 취하여 만든 거짓편지(물론 네가 박위에게 전하고저 하는 내용은 거의 그대로 넣었다.)를 그에게 보내였다.

본의가 아닌고로 미안스럽기는 하다만 너로서는 과히 나쁘게 생각할것이 없으리라고 본다.

궁극적으로는 우리와 고려가 화평을 맺자는 목적에서 그렇게 한것이니까.

헌데 내 명의로 된 편지와 네 이름으로 쓴 편지를 받아본 박위는 팔소앞에서 화평사절로 파견된 우리 군사들에게 화평을 뜻하는 례물이 아니라 전쟁을 원하는 불화살을 퍼부었다.

하여 우리의 아까운 군사들이 수십명이나 억울하게 죽었다.

결국 우리는 더이상 화평책을 견지할수 없게 되였다.

박위가 존재하는 한 량국간의 화평이 도저히 실현될수 없음을 피로써 절감한 우리는 부득불 새로운 방안을 선택하였다. 터놓고 말한다면 그것은 화평의 파괴자이며 우리의 극악한 원쑤인 박위를 역신으로 몰아 처형하자는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벌써 여러차례 내 이름과 너의 명의로 된 편지를 박위에게 보냈다.

편지의 내용들을 볼것 같으면 대략 이러하다.

〈…박원수, 당신은 팔소에서 우리 군사들을 적지 않게 죽였으니 고려조정은 앞으로도 당신을 계속 신임할것이다.

래일의 거사를 위해 그러한 제물이 또 필요하다면 우리는 비록 가슴아픈 손실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다시 제공할것이다.〉

〈박원수, 우리에게 고려비단과 곡물, 피륙과 어물을 비롯한 희귀한 물산들을 또다시 다량으로 보내주어 매우 감사하다. 우리는 당신의 성의에 대한 답례로 적절한 기회를 리용하여 리별장의 딸과 반정에 쓸 병기를 보내줄테니 믿고 기다리라.〉…

리옥의 생각은 어떤가?

이러루한 내용의 편지들이 김해관가에 기적을 둔 기생과 김해부사의 손을 거쳐 고려조정에 들어간다면 어떤 결과가 생길것 같은가 말이다, 핫하하…

그러지 않아도 조정대신들의 미움을 받고있는 박위는 이제 머지않아 역신의 올가미를 들쓰게 될것이며 종내는 참형을 당하게 될것이다.

이쯤 말했으면 너도 자기의 처지에 대해 대체적으로 짐작이 갈게고 장차 어느쪽으로 살길을 택해야겠는가 하는 결심도 내릴수 있을것 같은데…》

사다께는 자기의 구미와 용도에 맞게 거짓말을 얼럭덜럭하게 섞어넣으며 저들의 음모의 내막을 거지반 다 털어놓았다. 사다께는 자기의 능활한 계략을 유감없이 시위하는 동시에 리옥에게 오도가도 할수 없는 절망적인 처지를 뚜렷이 인식시킴으로써 처녀의 마음을 될수록이면 조속히 저들쪽으로 돌려세우려는것이였다.

리옥은 대바람 자기가 사다께의 음흉한 술책에 걸려들었다는것, 그로 하여 박위에게 뜻밖의 위험이 조성되였다는것을 직감적으로 느끼였다.

자기를 롱락한 사다께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기름불처럼 가슴을 태웠다.

세차게 어깨를 들먹이며 사다께를 노려보던 리옥은 별안간 탁자우에 놓여있는 둔하게 생긴 청자기를 후리쳐잡았다.

《너절한 놈!》

리옥은 사다께의 정수리를 겨누고 힘껏 자기병으로 내리깠다.

그 순간 처녀의 일거일동을 예리하게 노려보던 지또는 그 뚱뚱한 몸을 놀라우리만치 잽싸게 날리며 리옥의 손목을 틀어잡았다.

청자기는 방바닥에 떨어져 산산쪼각이 났다.

아무런 위험도 감촉하지 못한듯 침착하게 앉아있던 사다께는 야릇한 미소를 띄우며 뜨직뜨직 자리에서 일어섰다.

먹이를 노리는 독사마냥 파란 불꽃이 부서지는 눈으로 리옥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쏘아보던 사다께는 별안간 기다란 칼을 스르륵 뽑아들었다.

《요로시, 나는 올데갈데없이 된 네년을 우리 땅에 받아들이고 대부인 마님처럼 공대해주려 했는데 사례는 못할망정 이따위 망동을 부려?!…》

리옥은 이를 사려문채 사다께의 개기름이 번질거리는 상판을 쏘아보며 오연히 부르짖었다.

《나는 이미 죽고사는 리치를 달통한 녀자다. 고려의 개돼지로 살지언정 왜구의 부귀는 절대로 원하지 않으니 죽일테면 죽여라!》

사다께의 누런 이발이 드러나면서 쇠덩이같은 턱주가리가 한쪽으로 실그러지였다. 째는듯 한 악청이 방안의 살벌한 공기를 찢었다.

《오멘!―》

날카로운 칼날이 홱 공기를 베며 힘차게 내리박히였다.

리옥의 볼편을 스쳐내린 칼날은 서탁우의 연적을 두쪽으로 갈라내치였다.

웬간한 녀자 같으면 단박에 기절을 하여 나동그라졌으련만 리옥은 여전히 까딱없이 굳어진채 사다께를 쏘아보고있었다.

발치에서 번뜩이는 연적쪼박과 리옥의 얼굴을 번갈아 살펴보던 사다께는 갑자기 미친 놈처럼 어깨를 들썩거리며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으핫하하… 너는 과시 희한한 녀자다. 천생 무관의 배필로 태여난 담찬 녀자란 말이다, 핫하하…》

게걸스레 웃어대던 사다께는 불시에 웃음기를 싹 거두더니 고려식으로 만든 교자우에 들어앉으며 씨벌거리였다.

《너는 지금 죽고싶기도 하고 발광이 나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럴 까닭은 없다.

마음을 눙치고 진정을 해라. 가슴속에 아무리 크고 아픈 상처가 있다 해도 세월이 흐르면 아물기마련이요, 아물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성정이다.

우리는 방금 몽우리진 꽃망울과도 같은 처녀인 너를 절대로 죽이지 않을것이며 또 죽지도 못하게 하겠다.

에또― 그 리유는 첫째로…》

사다께는 리옥의 표정을 슬금슬금 훔쳐보며 손가락을 꼽아내리였다.

《…네가 죽었다는 소문이 혹여 고려땅에 날아가는 경우 박위를 제거하려는 우리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거나 많이 지연될수 있기때문이다.

둘째로, 에또― 그에 대해서는 네가 속을 진정한 뒤에 가서 명백히 알려줄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너는 무엇을 할것인가?!…》

방금전까지만 해도 살기가 번뜩이던 사다께의 넙적한 상판에는 회심의 미소가 그득히 발려있었다.

사실 사다께는 철들어 지금까지 적지 않은 계집들을 떡반죽 이기듯 제마음대로 주물러본 경험많은 호색한이였다.

사다께의 경험에 의하면 상판이 밴밴한 계집들은 대개 변덕이 심하고 코가 높아서 일을 치려들면 일쑤 정조가 어떻소, 수절이 어떻소 하고 속에도 없는 소리를 참새처럼 재재거리며 몸을 뒤트는것이 상례였다. 하지만 알고보면 미인이나 추녀나 정조관념이 희박하기는 매일반이였다.

미인으로 소문난 계집들 역시 희귀한 재물을 듬뿍 안겨주거나 시퍼런 칼날을 목에 가져다대면 즉시 초친 문어처럼 나긋나긋해지여 제쪽에서 먼저 나팔꽃넌출처럼 휘감겨들었다.

헌데 고려의 처녀 리옥은 어떠한가.

티없이 깨끗하고 수려한 얼굴모양과 청신하고 싱싱한 몸매도 탐스러웠지만 그 어떤 재물도 반기지 않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도도한 기상은 탄복할만큼 신기하고 매력적이였다.

하기에 방금전 리옥이가 청자기병을 휘둘렀을 때도 사다께는 놀라거나 악증이 나기 전에 여직껏 느껴보지 못한 신비한 매력을 느끼였다.

이처럼 아름답고 도담한 고려처녀를 거사에 계속 써먹으면서 차츰 온공하게 길을 들이여 제것으로 만든다면 한꺼번에 두가지 득을 얻는 셈이요, 그 쾌감은 비길데없이 감미로울것이였다.

얼추보매 리옥은 칼벼랑우에서 노니는 매처럼 길들이기가 매우 어려울것 같으나 따져보면 그 역시 언젠가는 남성과 어울려야 할 운명을 타고난 일개 녀자요 또 이미 박위에게 정을 주었던 계집인만큼 정신적인 공세를 들이대면서 박위이상의 인격을 보여준다면 능히 휘여낼것 같았다.

어쩌면 박위가 고려조정에 의해 처형되는 경우 박위를 제거하는 음모에 말려들었던 제 처지와 죄의식으로 하여 리옥은 제스스로 사다께 자기에게 엎어질수도 있을듯싶었다.

여하튼 모든 일이 다 때가 있고 철이 있는 법.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웠다면 열매가 맺히고 익을 때까지 직심스레 가꾸며 참을성있게 기다려야 할것이다.

사다께는 성공에 대한 확신이 굳어질수록 여직껏 체감하지 못했던 류다른 희열이 가슴속에는 물론 얼굴거죽에까지 근지럽게 퍼져오르는 듯싶었다.

사다께는 화독처럼 달아오르는 상판에 술렁술렁 손부채를 부치던끝에 무슨 큰 용단이라도 내리듯 호기있게 말하였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너에게 대부인마님의 지위를 선물할테니 너는 그에 맞는 자유와 부귀와 권세를 누리게 될것이다.

이것이 바로 앞으로의 너의 일이다!…》…

…리옥은 여전히 고려의 푸른 하늘가에 시선을 박고있었다.

자기의 목언저리에 도두룩하게 박혀있는 팥알만 한 기미를 습관적으로 매만지고있었다.

박위의 정겨운 시선이 때없이 와닿군 하던 자리, 사다께의 음탕한 시선이 번마다 털벌레처럼 지나치군 하던 자리.

리옥은 벌써 몇번이나 기미가 박혀있는 이 자리에 박위가 선물로 준 단검을 깊숙이 들이박고싶은 충동을 느꼈었다.

그렇게 하는것으로써 박위에게 용서를 빌고싶었고 치욕스러운 지금의 지옥살이를 끝장내고싶었다.

하지만 결심과 실행을 일치시킨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요, 언제나 가능한 일도 아니였다.

결코 죽기가 겁나서 칼을 박지 못하는것이 아니였고 밤낮으로 주위를 감도는 외통눈의 파수군때문에 기회를 얻지 못하는것도 아니였다.

박위의 체취가 슴배여있는 단검을 뽑아들기만 하면 리옥의 귀전에는 위불없이 아버지 목소리, 박위의 목소리가 준절하게 울리군 했다.

때로는 현중의 노란 목소리가 날아들기도 했다.

그들의 음성은 저마끔 달랐으나 스스로 생을 포기하는것은 타락한 인간의 최대의 타락이라고 하나같이 웨치였다.

또한 고려의 모든 사람들은 리옥이가 절망과 고통속에서 승리자로 솟아오르기를 믿고있노라고 부르짖었다.

리옥은 세상에서 가장 친근한 그들의 목소리에 마음의 귀를 기울이지 않을수 없었다. 하여 리옥은 매번 단검을 꺼내들었다가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다시 품속깊이 간수하군 했다.

그가 이렇게 번마다 자결을 포기하게 된데는 또한 박위나 군영의 군사들을 위해, 고려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하기 전에는 죽을수 없다는 생각이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이 생각, 저 생각 두서없이 번져가던 리옥은 문득 황홀하리만큼 아름다운 두눈을 유난스레 빛내이며 하늘가에서 바다쪽으로 시선을 돌리였다.

오늘 아침 사다께가 하던 말이 아무런 론리적련관도 없이 귀전을 징징 울리였다.

그때 사다께는 기분이 매우 족한탓인지 아니면 단지 리옥을 깜짝 놀래워주고싶었던지 느물느물 웃으며 여직껏 감추고있던 비밀한 속내를 꺼림없이 터놓았다.

《이봐 리옥, 일전에 박위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는데 글을 보니 아직도 그 사람의 기개가 제법 장하더군.

에또─〈너와 나는 백년숙적이요, 필생의 적이다. 적과는 오직 판가리싸움만이 있을뿐이다.

내 기어이 대마도에 찾아갈테니 이번에는 바로 너의 땅에서 검으로 결산을 하자!〉 이렇게 썼더군, 으핫하하…

역시 박위는 사내야, 용감하단 말이야.

다만 천동인지 지동인지 판별 못하는 그 우직성만은 참으로 유감스럽거던.

고려의 한 지방군을 가지고 우리 대마도를 치겠다?! 그게야 말똥구리가 수레바퀴를 굴리겠다는 수작이나 무엇이 다른가 말이야, 으핫하하.》

그때 리옥은 세면물을 뜨러 샘터로 나가던 길인데다 사다께의 웃입술이 훌렁 뒤번져진 징그러운 상판과 기고만장한 꼴이 보기에 역스러워 그의 말을 개짖는 소리쯤으로 흘려버렸었다.

그러나 지금에는 사다께가 뇌이던 말마디들이 전혀 새로운 의미를 띠고 자자구구 되새겨지였다.

(현중이 아버님이 고려군을 이끌고 이곳에 들어와 왜구들과 판가리 싸움을 하겠다고 했다지?!)

박위의 그 불같은 선언속에는 왜구의 소굴을 송두리채 요정내고야말 고려장수의 당당한 배짱과 철석같은 의지가 어려있었다.

자기를 비롯한 죽촌백성들을 반드시 구원하겠다는 애족의 일념이 빛발치고있었다.

또한 그 선언속에는 리옥이 자기에게 고려군이 진격해들어갈 때까지 절대로 맥을 놓지 말고 꿋꿋이 싸워달라는 박위의 절절한 당부도 들어있는듯싶었다.

리옥의 가슴은 숯불처럼 지글지글 달아올랐다.

그는 저도 모르는새 자그마한 주먹을 돌멩이처럼 단단히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람이 불행과 난관에 도전한다고 해서 반드시 구원되는것은 아닐것이다.

그러나 모든 파멸은 항상 완강한 저항력과 돌파의식을 상실하는데서부터 초래된다.

그런즉 지금이야말로 맥을 놓아서는 안된다. 아니, 백배로 마음을 도슬러먹고 힘을 내야 한다. 고려군대가 대마도진공을 준비하고있는 이때 나는 기어이 살아서 현재의 난국을 헤치고 아버지의 원쑤를 갚아야 하며 오늘의 수치와 원한, 현중 아버님께 지은 죄를 씻어야 한다.

가능한껏 아니, 최대의 힘과 지혜를 짜내여 사다께의 흉악한 모략의 내막과 김해땅에 박혀있는 세작년의 정체를 군영에 알리는것으로써 우리 군대의 대마도원정과 현중 아버님의 거사를 도와야 한다.)

누군가 저벅저벅 매우 느린 걸음으로 모래불을 밟으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였다.

보나마나 노상 리옥의 주위를 맴도는 외통눈파수군일것이였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보니 이쪽으로 오는 사람은 파수군이 아니라 죽촌에 살 때부터 풋낯이나 알고있던 벙어리 장서방이였다.

사람이 지나치리만큼 말이 없고 용해빠지여 드살센 동네아낙네들로부터 죽에 든 가시도 못 뽑을 위인이라고 뒤손가락질을 받던 사람.

그는 죽촌이 변을 당하던 그날에도 갓 돌이 지난 자기의 아들 백동이가 왜구의 칼에 찔려죽는것을 뻔히 보면서도 주먹 한번 둘러멜 생각을 못하고 꺼이꺼이 울기만 했다던가.

아무튼 과묵하고 용해빠진 덕분에 장서방은 요즘 왜구의 두목들에게 따로 처먹일 희귀한 해산물들을 잡아다바치는 중임을 맡고있었다.

콜콜한 비린내를 풍기는 불룩한 멍구럭을 지고 꺼꺼부정해서 지나치는 장서방을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던 리옥은 그리 멀지 않은 모래불에 꺼꾸로 엎어놓은 퉁궁이가 피끗 가려지는 순간 불시에 심장이 곤두뜀을 하는듯 한 충격을 느끼였다.

황황히 타는 시선은 어느결에 퉁궁이쪽으로 돌아갔다.

높뛰는 심장은 벌써 몇번이나 똑같은 말마디를 소리없이 웨치고있었다.

(바로 저 배! 장서방의 고기배를 타고 나서면 얼마든지 이 섬을 빠져나갈수 있지 않겠는가.

아아, 내 왜 여직껏 장서방 생각을 하지 못했을가?)

높뛰는 가슴속에서 송진불같은것이 활활 타번지였다. 리옥의 입에서는 어느결에 나지막한 소리가 터져나갔다.

《장서방, 내 말 좀 듣소.》

장서방은 잔등에 비수가 날아와 박히기라도 한듯 흠칫 몸을 떨었다.

허연 소금기가 얼룩덜룩하게 피여있는 잔약해보이는 어깨를 느리게 돌리였다.

늙은이처럼 지거미가 꼬약꼬약 흘러나오는 정기없는 눈으로 장님 등불보듯 멀끄러미 리옥을 쳐다보았다.

리옥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위를 휘둘러보았다.

저 멀리 석양이 비낀 바다우에서는 이른바 해상공격전을 가상한 전투훈련을 하는 왜구들이 오리새끼들처럼 퍼덕거리고있었다.

외통눈파수군은 그리 멀지 않은 안침진 바위벽에 기대앉아 병든 닭새끼처럼 거불거불 졸고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장서방에게 다가선 리옥은 흥분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장서방은 대체 언제까지 그따위 퀘퀘한 멍구럭을 메고 다니겠소?

그따위를 메고다니면서도 속마음은 편안하고 남들보기는 부끄럽지 않소?》

리옥의 말은 시작부터 야멸차게 울리였다. 허나 장서방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석양이 비낀 저녁하늘만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리옥은 속이 바질바질 타는중에도 밸머리가 통으로 빠져버린듯싶은 장서방이 그지없이 원망스러웠다.

《…장서방은 그래 왜구들에게 장참 이렇게 고기나 잡아다 섬기면서 살아가겠소? 장서방의 지금의 모양을 고향에 있는 백동이 엄마가 본다면 얼마나 분해하겠소.

불쌍하게 죽은 백동이를 생각해서라도 이렇게 비루하게 살아갈수야 없지 않소?》

장서방의 불룩하게 튀여나온 어지게 생긴 황소눈에 눈물이 핑 고이였다.

리옥의 맑은 음성은 절절하게 번져갔다.

《…그런걸 생각해서라도 한시바삐 지긋지긋한 고역살이를 벗어던지고 고향으로 가야 하오.

오늘의 한을 풀고 어제의 원쑤를 갚기 위해 그리구 이곳의 죽촌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여기를 빠져나가야 한단 말이요. 모름지기 고향의 백동이 엄마도 그걸 바라고있을거요.》

장서방의 어깨는 세차게 오르내리였다.

그의 황소눈에서는 뿌연 눈물이 줄지어 흘러내리고있었다.

피투성이가 되여가지고도 고사리같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생을 부여잡으려던 아들애의 마지막모습이 다시금 삼삼히 떠올라 새삼스레 억장이 무너져내리는 모양이였다.

장서방은 한참만에야 눈물매닥질이 된 얼굴을 간신히 들어올리며 떠드박거리였다.

《그런데… 아씨… 무슨 수로 여기를… 빠져나간단 말이웨까. 도대체 아니될 소리웨다.》

리옥은 이런 바지저고리에게 매달리지 않으면 안되게 된 지금의 자기의 처지가 기막히였다.

하지만 장서방을 놓아준다면 탈출의 출구는 영영 막혀버릴것이였다.

필사적으로 달라붙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장서방, 겁낼것 없소.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 하겠소? 이렇게 구지레하게 천년을 살아서는 무엇하겠소.

죽기를 각오하고 달라붙으면 못할 일이 없소.

내가 아무때든 적당한 기회를 틈타서 연통을 하거든 장서방은 누구도 몰래 바다에 나와 배를 띄우오. 그뒤의 일은 내가 다 장담하겠소.》

고기비늘이 하얗게 달라붙은 설핀 턱수염을 바들바들 떨던 장서방은 갑자기 커다랗게 눈을 흡떴다.

노을빛을 받아 불그레한 바다물을 헤가르며 이쪽으로 헤염쳐오는 왜구들을 띄워본것이였다.

리옥은 장서방의 눈길을 따라 바다쪽으로 고개를 돌리였다.

바다우에서는 수십명의 왜구가 정신없이 헤염을 치고있는데 그들의 뒤로는 알락달락한 차일을 친 커다란 배 한척이 유유히 따르고있었다.

배의 갑판우에는 지또를 비롯한 섬안의 고위관리들과 수급장교들을 대동한 사다께가 관복자락을 펄펄 날리며 서있었다.

얼마전에 본토와 규수지방에서 새로 모아온 고께닌들의 해상훈련을 직접 현지에까지 나와 지휘하는 모양이였다.

헌데 물에 들어선 놈들은 거개가 륙지에서 제멋대로 바라다니던 알건달군들이라 헤염솜씨가 여간만 서툴지 않았다.

제법 물건너가는 개새끼처럼 대가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철썩철썩 물을 가르는 놈들도 있으나 태반이 무거운 몸을 내리드리우고 미욱한 곰새끼처럼 마구 허우적거리고있었다.

어떤 놈들은 떡돌처럼 자꾸만 가라앉는 몸을 이길수 없어 사다께가 탄 배에 매달리여 가긍한 소리들을 질러댔다.

《령주도노, 한번만 살려주십시오!》

《이제 물에 들어가면 소인은 꼼짝없이 죽습니다.》

불에 구워낸것처럼 누르끼레한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장사귀에 달라붙은 파리떼마냥 배전을 그러잡고 아우성을 치는 왜구들을 노려보던 사다께는 칼을 홱 뽑아들었다.

《이놈들! 범도 새끼를 낳으면 벼랑에 굴려보고 산 놈만 품에 안는다는것을 아는가?

시라소니들은 모두 죽어라!》

사다께의 칼등이 배전을 딱딱 때리며 줄달음쳐나갔다.

칼등에 손잔등을 얻어맞은 왜구들은 자지러진 비명을 지르며 철썩철썩 물속에 떨어져내리였다.

사다께는 그에 아랑곳없이 번쩍거리는 칼끝으로 기슭쪽을 가리켜보이며 더한층 거센 소리를 내질렀다.

《헤염을 칠수 있는자들! 우리와 함께 필생의 대망을 이룰 용기를 가진자들은 계속 앞으롯!》

공포에 질린 눈으로 사다께의 광기어린 작태를 바라보던 장서방은 금시 왜두목의 칼이 자기의 가슴에 날아오기라도 하는듯 두팔을 엇갈아끼며 황망히 머리를 흔들었다.

《안되웨다.… 그러다간 아씨도 소인도 다 죽쉐다.…》

장서방은 리옥이가 어쩔새도 없이 허둥지둥 모래언덕으로 치달아올랐다.

리옥은 그만 온몸의 기운이 쫙 풀리였다. 평생 입에 올려보지 못한 모진 소리가 서슴없이 터져나왔다.

《얼간이! 바보! 치욕을 들쓰고도 능히 살아갈수 있다면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이 무엇이란 말이요.―》

그러거나말거나 장서방은 조개껍질들이 옥쪼각처럼 반짝거리는 모래언덕을 구을듯이 넘어가버리였다.

리옥의 매섭게 치뜬 눈에도 피빛같은것이 얼른거리고 앙다문 입술언저리에도 피자욱이 번들거리였다.

차츰 날이 어두워지자 갖가지 희귀한 무늬를 펼쳐보이던 감빛구름장들은 꺼멓게 흐려지였다.

되돌이

Twitter로 보내기 Facebook으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네이버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Google+로 보내기 Evernote로 보내기 Reddit로 보내기
우리민족끼리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E-mail) : urimanager@silibank.com 홈페지내용에 관한 문의(E-mail) : uriminzok@silibank.com
Copyright © 2003 - 2013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gotop
기사종합
 
도서, 잡지
 
영화, 음악
 
독자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