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8 회)
제 2 장
13
놋양푼같은 보름달은 육중한 자기 몸을 이기기 어려운듯 둥깃둥깃 힘겹게 바다물우로 떠올랐다.
만월은 수면우에 떠오르자 그렇게도 무겁게 뚱깃거리던 좀전과는 달리 하늘중천을 향해 쑥쑥 날아올랐다.
그러자 검칙칙하던 밤바다는 금빛, 은빛으로 쪼각쪼각 부서져나가며 인간의 언어로써는 쉬이 형용할수 없는 신비스러운 자연의 선률을 도란도란 읊조리기 시작했다.
문득 도래굽이쪽에서 숱한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차츰 이쪽으로 가까와지자 바다는 그만 그렇게도 큰 입을 슬며시 다물어버리였다.
이제는 누구누구의 목소리라는것을 분명하게 집어낼수 있을만큼 사람들의 행렬은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게 내 애초에 뭐라던가, 계집의 인물이 반드르하면 애만 들지만 취금이처럼 덕성스러우면 복만 든다고 하지 않던가.
이 일이 주장 오천대정이 선을 잡은 일이기는 하지만 임자네 취금이가 뒤를 받쳐주지 않았다면 될번이나 했겠나.
하여튼 구서방은 사위감도 칠칠하지만 딸년도 여간만 잘 두지 않았단 말일세.… 핫하하!…》
옥보의 챙챙 울리는 말소리, 웃음소리였다.
언젠가는 구서방에게 딸년의 흠절을 덮어두면 큰일난다고 타박을 하던 옥보가 지금은 아닌보살을 하고 취금을 잔뜩 추켜올리는 판이였다.
《이 사람아, 일이 이렇게 잘되여가는게 어떻게 우리 딸년의 덕이겠나. 난 그게 다 오천대정이 남모르게 땀을 내고 피를 흘린 덕이라고 생각하네, 말은 바른대루…》
구서방은 바로 점잖게 오천을 추켜올리는투로 겸사를 표명했으나 그속에는 자기 딸에 대한 찬사도 적지 않게 배여있었다.
박위는 달그림자를 길게 끌며 자기앞을 지나가는 염초장사람들을 홀린듯이 바라보고있었다. 자기도 모르는새 한걸음, 두걸음 그들을 따라서기 시작하였다.
가슴은 자꾸만 울렁거렸다.
무엇인가 거대한 발견에 직면한듯 가슴은 자꾸만 부풀어올랐다.
이제는 오천의 지난 일이 거의나 뚜렷하게 짐작되였다.
어떻게 되여 자기가 그리도 엄청난 오해를 하게 되였는지도 명백히 리해가 갔다.
오천이와 취금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 열매를 안아왔는지도 저저이 느낄수 있었다.
박위는 걸음발을 재우치며 앞서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여겨보았다.
사람들의 맨앞에서 쩔뚝거리며 걸어가는 총각이 다름아닌 오천임을 알아보는 순간 박위는 공연히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오천은 너무도 기쁜탓인지 자기들을 따라서는 박위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채 손세를 써가며 열변을 토하였다.
《여러분네들, 오늘 명통사에 갔다오는 길이 멀기는 해도 다리 아픈줄은 조금도 모르겠수다.
이제 이놈의 감대기를 가져다가 백설같은 염초를 콸콸 뽑아내서 왜구의 소굴을 활활 태워버릴 생각을 하니 갈매기처럼 훨훨 날아갈것만 같수다.…》
오천의 말은 별로 우습지도 않은 소리건만 하나같이 기분이 흥뜬 사람들은 또다시 와하 소리높이 웃어제끼였다.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오천의 말과는 전혀 동닿지 않는 옥보의 해망스러운 목소리가 울리였다.
《그러게 내 뭐라던가. 옛적부터 사람이 많으면 하늘도 이긴다 했어. 우리도 이렇게 사람이 많으니 며칠새에 절간 여러개를 싹 쓸어내지 않았다.
한두사람이 나서서야 어디 될법이나 한 일인가?!》
옥보에게 뒤질세라 구서방이 제꺽 꼬리를 물었다.
《아무렴, 지푸래기도 모아서 엮으면 호랑이를 동인다네.
무지렁이 촌백성들이래도 모두들 단단히 마음을 합쳐가지구 떨쳐나서면야 큰산도 허물고 대병도 막아내다마다.
말은 바른대로…》
달빛을 휘감고 흘러가는 사람들의 행렬, 소수레, 마수레들의 행렬을 얼없이 바라보던 박위는 힘주어 고개를 끄먹거리였다.
(하기사 옛적부터 큰일을 해제끼고 수천수만의 외적들을 물리친것은 언제나 백성들이였지.…
그 백성들덕에 우리도 이제는 다시 염초를 뽑아낼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이윽하여 박위가 염초장앞에 이르니 사람들은 한창 짐을 부리고 들이느라고 정신없이 돌아가고있었다.
복새판이라 누구 하나 저들속에 박위가 들어선것을 알지 못했다.
기쁨과 감동에 젖은 시선으로 사람들을 둘러보던 박위는 갑자기 거친 숨을 훅 내불었다.
부지불식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그 어떤 노여움과 분기가 폭발적으로 뻗쳐올랐다.
박위는 누구에게라없이 와짝 청을 높여 웨치였다.
《모두들 잠시 일손을 거두어라. 그리구 오천이란 놈을 당장 내앞에 오라구 해라―》
흥이 나서 일손을 다그치던 사람들은 때아닌 벼락에 와뜰와뜰 놀라며 허리를 폈다.
저들속에 박위가 끼워있는것도 놀라왔지만 그의 불호령은 더욱 놀라운것이여서 모두들 겁에 질린 눈을 커다랗게 흡떴다. 저편 구석진 곳에서 큼직한 짐짝을 메고 오던 오천은 박위의 호령소리를 가려들은듯 소리없이 짐을 내려놓았다.
밤눈에도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것이 헨둥 알리는 얼굴을 이리저리 빗씻으며 박위앞에 다가왔다.
《오천이 불러 왔사옵니다.》
박위는 제잡담 천둥같은 소리를 터치였다.
《오천이 너 이놈! 요즘 너희 염초장것들이 린근의 절간들을 나들며 마루밑의 먼지를 말강스럽게 퍼낸다던데 사실이냐?》
오천은 먼지투성이머리를 더 깊이 조아려박았으나 그의 대답소리에는 한꼬치의 겁기도 없었다.
《네, 그것은 사실이옵니다.
하지만 애초에 이 일을 작정한것도 소인이옵고 일을 휘동한것도 소인이옵니다.》
《뭐라구?! 작정도 네놈이 하고 휘동도 네놈이 했어?! 그래, 네놈은 그렇게 한것이 장한 일같아서 번마다 제 이름을 찍어대느냐?》
《…》
《네놈은 명색 대정노릇까지 했다는것이 군기도 모르고 군률도 아랑곳없단 말이냐? 그런 궁냥이 나고 작정이 섰다면 우선 군영에 보고를 한 다음 군영의 지휘를 물어가지고 일을 펴야 할게 아니냐. 모두 네놈처럼 제갈래로 놀아난다면 부대의 군기는 뭐가 되고 또 싸움은 어떻게 한단 말이냐?》
둘러선 사람들중에서 여러명은 비로소 박위가 성내는 까닭을 제나름대로 짐작하고 고개를 끄떡거리였다.
아하, 장군께선 오천이가 제멋대로 일을 지휘하는것이 지금껏 노여운 모양이고나…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볼에 밤알을 물고 고개를 기웃거리였다.
아니, 군기문제로 말하면 이미 매를 쳐서 벌을 내린것이요, 요즘일을 말할것 같으면 오천이가 직접 취품을 하여 말미를 받고 하는것인데 무엇이 또 새삼스럽게 분격하단 말인가!…
사람들의 기색은 각이했으나 박위는 그냥 눈을 지릅뜨고 오천을 노려보았다.
오천은 겁이 나서가 아니라 진실을 터놓기가 딱하여 잠시 망설이던 끝에 헐쑥하게 살이 빠진 얼굴을 들었다.
《사실은 군기를 모르거나 망각해서가 아니오라…》
《무엇이 어째?! 네놈은 아직까지도 빙빙 에돌면서 사실을 바로 대지 않을셈이냐? 털끝만 한 거짓도 없이 바른대로 아뢰지 못할고!―》
오천은 마침내 모든 일이 결속단계에 들어선 이제 와서 더이상 일의 내막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제는 매 절간의 주지들은 물론 염초장사람들도 모두 오천이가 주동이 되여 절간침해를 했다는것을 너무나 잘 알고있지 않는가.
후날 탈이 생긴다면 모든 죄는 자연히 오천이 자기에게 쏟아질것이였다.
오천은 드디여 입을 열었다.
《황송하오나 미리 내막을 알리고 일을 벌리면 후날에 가서 절을 파헤친 루가 장군께 미칠것 같아 그렇게 하지 못했소이다.
소인은 옥살이를 해도 별일없고 귀양살이를 가도 탈이 없지만 장군께 루가 미친다면 그만큼 원정이 늦어지거나 아주 파탄될수도 있겠기에…》
박위의 가슴속에서 불덩이처럼 따가운것이 목젖을 치받으며 솟아올랐다.
자기의 예감이 한치의 드팀도 없이 면바로 들어가맞은것이였다. 박위는 석쉼하게 갈린 청으로 부르짖었다.
《네 이놈! 되지 못한 수작 그만두지 못할가!》
박위는 불가마속에라도 들어선듯 전신이 훅훅 달아올랐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절간먼지에 대해서는 자기도 이미 생각했댔으나 뒤에 생길 후과가 시끄러워 손대지 않은 일이였다. 헌데 오천은 뒤탈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니, 뒤에 생길 후과를 저 혼자 고스란히 들쓰기 위해 누구에게도 내막을 알리지 않고 오늘의 일을 떠밀어온것이였다.
온몸의 피가 다 몰린듯 화끈화끈해나는 얼굴을 들어 초점없이 허공을 응시하던 박위는 다시금 노성을 터치였다.
《그러니 네놈의 수작인즉 나는 뒤전에 나앉아 구경을 하다가 죄가 쏟아지거든 그 죄를 전수히 네게다 밀어붙이라는 뜻인데…
이놈아, 세상에 제 새끼를 잡아먹는 망둥이라는 고기는 있어도 제가 살겠다고 수하군사를 구렁속에 밀어넣는 장수가 어디 있다더냐?
에끼, 이 고이현놈―》
박위의 질책과 꾸중은 엄엄했으나 그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가를 시작부터 거의 확연하게 감득하고있던 오천은 마침내 박위의 웅심깊은 사랑앞에 통으로 가슴이 젖어들었다. 오천의 눈에서는 달빛에 젖은 파아란 눈물이 쉼없이 흘러내리고있었다.
속이 한줌만큼이나 졸아들어가지고 전전긍긍하던 사람들도 그제야 박위의 호령속에 깃들어있는 하졸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여실히 깨달은듯 눈굽을 찍어내고 코밑을 훔쳐냈다.
북받쳐오르는 오열을 흑흑 씹어삼키는 축들도 있었다. 박위는 오천이네들에게 감동되였으나 오천이네들은 박위에게 감격한것이였다.
그것이 박위의 가슴을 더욱 아프고 따갑게 휘저어주었다.
자기가 한 일은 조금도 크게 여기지 않으나 남의 사소한 인정에는 크게 감동하는 소박하고 진실한 이 사람들.
예전에는 마음먹은대로 휘고 부릴수 있는 하잘것 없는 존재로 여겼던 이 사람들이 지금은 쉬이 가량할수 없는 높은 뜻과 비범한 슬기를 지닌 거인들처럼 쳐다보이였다.
박위는 울컥울컥 괴여오르는 속을 주체하기가 어려워 슬며시 바다가쪽으로 돌아섰다.
이때를 놓칠세라 구석쪽에 박혀있던 여삼이가 대들듯이 오천에게 다가섰다.
그의 동글납작한 얼굴에도 눈물자욱이 번들거리고있었다.
팔소전투를 치르고 돌아온 뒤 신출내기군사들과 함께 코가 삐뚤어지도록 밀린 잠을 자고난 여삼은 깨나자바람 박위를 찾아보았으나 그는 군영안에 없었다.
여삼은 박위의 털등거리를 찾아들고 바다가에 달려나왔다.
그렇게 되여 염초장사람들속에 섞이게 된 여삼은 방금전의 광경을 죄다 목격하였고 오천의 일도 낱낱이 알게 되였다.
속이 깊지 못한탓으로 하여 누구보다 쉽게 오해를 품기는 하나 그대신 남달리 감동이 빠르고 리해가 빠른 여삼이였다. 한참이나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오천을 흘겨보던 여삼은 무슨 행풀이라도 하듯 큰소리를 뽑았다.
《형님이 매정하고 모진줄은 오늘 다 알았소. 내가 아무리 입이 빠르고 말이 헤프다 한들 내게까지 일의 내막을 숨긴단 말이우.
너무하우, 세상에 그런 형이 어디 있고 그런 인정이 어디 있소?…》
여삼은 마치 오천이가 원망스러운듯 소리소리 질렀으나 사실상 그는 자기의 엷은 성격을 전에없이 아프게 꾸짖고있었다.
(오천형님은 지금껏 원정준비를 시각빨리 끝내기 위해 발에 불이 일도록 뛰여다니였다.
장군께 루가 미칠것이 두려워, 후날 자기 혼자 모든 죄를 뒤집어쓰려고 절간먼지소리 같은것은 애당초 입에 올리지도 않고… 그런데 나는 형님의 일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취금에게 반해다닌다고 고깝게 여기던끝에 꽁지대가리없는 헛소문을 그대로 장군께 일러바치였다.
그래서 오천형님에게 매가 떨어지게 하고 그의 일을 더디게 하였으니 세상에 나처럼 경망스러운 놈, 나처럼 고약한 놈이 어디 있는가?!)
여삼은 소리쳐울고싶도록 마음이 괴로왔다. 허나 오천은 그의 울음기섞인 말같은것은 별로 여겨듣지도 않고 여삼의 어깨를 툭툭치며 싱글거리였다.
《헛허허, 당장 애기아버지가 될 녀석이 속은 꽁해가지고…
젠장, 눈섭을 뽑으면 똥이 나오겠구나.》
여삼은 손을 홱 내리그으며 발칵 짜증을 내였다.
《형님, 난 지금 롱을 하는게 아니우.
아무튼 오늘 밤엔 짬을 내가지구 우리 집에 좀 나오우. 속이 쭉 풀리게 말을 해야지 장밤 잠을 못 잘것 같소.》
《아따, 삼년만에 만나는 가시애비냐.
새삼스럽게 말은 무슨 놈의 말… 하여간 내 틈을 봐서 나가도록 할테니 이제는 그쯤하고 우거지상을 풀어라.》
가까운 바다우에서 두점의 불꽃이 펑끗 살아올랐다.
박위는 더이상 오천과 여삼의 대화에 귀를 보낼수 없었다.
(저게 무슨 배일가. 우리 군영의 배라면 내가 모를리 없는게요, 왜구의 배라면 바다길순시를 나간 우리 군사들이 가만 내버려둘리 없을 텐데…)
박위는 가벼운 의혹을 안은채 바다쪽으로 걸어나갔다.
달밝은 밤이라 바다는 꼭 은빛비단필을 펴놓은듯 한데 그우에서 두척의 배가 뚜렷한 륜곽을 드러내며 이쪽으로 다가오고있었다.
오천이 급히 뛰여와 바다우의 배들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아까는 미처 아뢰옵지 못했사온데… 저 배들은 죽촌사람들이 무어가지고오는 전함들이옵니다.》
박위는 첫순간 오천의 말뜻을 가려듣지 못했으나 인차 사연의 앞뒤를 짐작할수 있었다.
언제인가 죽촌에 나갔을 때 목격한 알고모르는 사람들의 얼굴이 언뜰언뜰 안겨왔다. 오천은 하얀 이발을 번쩍거리며 신명이 나서 뒤말을 심어나갔다.
《달이 좋은 이밤을 타서 그새 뽑은 염초를 제창 새로 만든 전함에 싣고 군영앞바다로 들어오겠노라고 일전에 벌써 통기해왔댔소이다.》
《그래?!》
염초장사람들은 어느결에 벌써 죽촌의 전함들을 알아보고 와와 소리를 지르며 이쪽으로 밀려오고있었다.
박위와 오천은 그 소리에 떠밀리기라도 한듯 성큼성큼 바다쪽으로 걸어나갔다.
배는 벌써 기슭에 이르러 닻을 내리고있었다.
누구인가 잽싸게 배우로 사다리를 뻗쳐놓았다.
박위는 천천히 사다리우에 올라섰다.
박위가 움쭉 몸을 솟구며 배우에 올라서자 배전에 두손을 모두어잡고 서있던 저대로인은 정중히 허리를 꺾으며 흥뜬 어조로 아뢰였다.
《우리 죽촌백성들이 군영에 기증할 전함과 염초를 만들어가지고 지금 막 당도하는 길이올시다.》
훨훨 나붓기는 저대로인의 다발좋은 채수염을 홀린듯이 바라보던 박위는 그의 나무뿌리같은 손을 덥석 잡아주고싶은 충동을 가까스레 누르며 말했다.
《누구들보다 고생스럽게 사는 죽촌백성들이 군영의 일을 위해 전함과 염초까지 만들어가지고 왔으니 무엇이라고 치하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소.
실로 갸륵하오.》
박위는 후둑후둑 골풀이치는 가슴을 안은채 뚜벅뚜벅 갑판을 거닐며 관습적으로 배안의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촘촘히 박혀있는 갑판우의 널판자들은 기름을 먹여 대우를 낸듯 청동거울처럼 알른거리는데 선미쪽에는 두세바리는 실히 될 흰눈같은 염초가 무져있었다.
무엇인가 크고 뜨거운것이 가슴버겁도록 밀려들었다.
(이 사람들은… 문벌좋고 권세 뜨르르한 량반들은 외눈으로도 보지 않는 이 사람들은 알쭌히 맨손으로 이 모든것을 만들어냈다.
아무런 평가도 대가도 바라지 않고 소리, 소문도 없이…
하고 보면 이 땅에서 누가 정녕 아름다운 인간, 힘있는 사람이며 진정한 애국자인가?
나는 진정 어느 토양에 인생의 뿌리를 박고 줄기를 뻗쳐야 하는가?!…)
한참이나 아무 말없이 생각을 이어나가던 박위는 마침내 오늘 밤짧은 순간에 열번도 더 되굴려본 사색을 간추려 군령으로 선포하였다.
《오천이, 듣거라. 오늘부터 너는 다시 대정벼슬을 맡아보되 이제부터는 단지 군영의 염초장일만 간검할것이 아니라 도안의 염초장들을 모두 총찰하도록 해라.
따라서 너에게는 염초도감이라는 벼슬을 덧붙여준다.
또한 염초장일의 급속한 진전을 위해 각 고을, 각 촌의 염초장마다 정식으로 행수벼슬제를 내오도록 하겠노라.
죽촌의 좌상로인은 제창 여기 나와있으니 관령을 기다리느라 할것없이 이 시각부터 행수벼슬을 행사하도록 하라.
이상의 사실은 곧 우에 품하고 아래에 알리여 정식 군령, 관령으로 통하게 할것이다.》
《황송하오이다.》
오천이와 저대로인을 위시한 모든 사람들이 감격에 젖은 청을 모아웨치였다.
잠시후 지금껏 괴괴한 정적에 묻혀있던 염초장에서는 기운찬 풀무질소리가 푸르르 딱딱, 푸르르 딱딱 울려나왔다.
은백색의 화광이 펑끗펑끗 솟구쳐오르는가 하면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 주고받는 먹임소리가 들썩하게 쏟아져나왔다.
박위는 기다란 달그림자를 끌며 염초장주위를 거닐고있었다.
격정은 갈수록 세차게 끓어올랐다.
그것이 억제할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박위는 뜨거운 숨을 내불며 얼굴을 추켜들었다. 온 세상이 다 듣도록 백성들의 덕에 염초가 풀렸다고, 원정은 필경 승리로 결속될것이라고 소리쳐웨치고싶었다.
하늘에서는 도래멍석같은 보름달이 화려한 얼굴을 구름장속에 숨겼다가는 서둘러 빠져나오군 하는데 그때마다 천지간은 잠시 어두워졌다가 다시 환하게 밝아지군 했다.
그렇다, 정의나 진실, 인생사의 참된 리치는 잠시잠간 구름장같은데 가리워지여 보이지 않을수는 있어도 영영 사라질수는 없다.
다만 인간이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영영 사라졌다고 때이르게 탄식하며 자기의 인생을 실패에로 몰아가는 경우가 왕왕 있을뿐이다.
하거니 그 어떤 광풍이나 어둠속에서도 한번 포착한 정의와 진실, 인생사의 참된 리치를 철석같이 믿고 그것에 의거하여 만사를 줄기차게 떠밀어나간다면 내세운 뜻이 아무리 크고 무겁다 한들 어찌 성사를 이룰수 없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