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 회)

제 2 장

11

 

《왜구들이 나타났소이다.》

바다기슭에서 두어마장가량 들어와있는 솔숲에 뒤짐을 돌려잡고서서 바다쪽을 주시하던 윤통은 날카로운 시선을 박위에게 돌리며 나직이 말했다.

윤통이곁에 심상한 표정을 짓고 서서 바다쪽을 노려보던 박위는 알릴듯말듯하게 고개를 주억거리였다.

이른새벽이라 사위는 더없이 고요한데 배에서 내린 왜구들은 도적고양이떼처럼 소리없이 기슭으로 게바라오르고있었다.

모래불에 올라선 놈들도, 배우에 그냥 남아있는 놈들도 하나같이 눈이 화등잔같아가지고 사위를 두릿두릿 살펴보는 꼴이 여간만 불안하지 않는 모양이였다.

하긴 적국의 장수라고 해야 할 박위에게 어느날 어느시 어느 장소에 당도하겠노라고 희떱게 선통까지 하고온 놈들이였다.

박위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아는 놈들은 그가 어떤 희한한 례물을 안겨주기보다는 무서운 불화살을 퍼붓기가 십상일것이라는 짐작을 못할리 없었다.

하지만 포악한 사다께가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마구다지로 떠밀어보내니 범의 굴인줄 뻔히 알면서도 어쩔수없이 혹시를 바라고 예까지 왔을것이였다.

그래서 왜구들은 지금 여차하면 줄행랑을 놓을 잡도리로 연해 사위를 살피며 발을 저겨디디는것이요, 타고온 다락배들의 돛폭도 내리지 않는것이리라.…

《나가보자구.》

박위는 저력있는 음성으로 누구에게라없이 이르고나서 성큼 걸음을 떼놓았다.

윤통이 박위의 앞을 막아섰다.

《꼭 박장군이 나가야 할 까닭이 뭡니까? 저것들은 하관이 나가서 처리하겠습니다.》

《아니, 나를 찾아온 놈들인데 내가 나가서 대접을 하겠소.》

박위는 가볍게 윤통을 비켜세우고나서 당당하게 걸음을 놓았다.

윤통이와 여삼을 위시한 스무명남짓한 군사들도 더 어쩔수없이 박위의 뒤를 따라나섰다.

저들쪽으로 위풍당당히 걸어오는 고려군사들을 띄여본 왜구들은 극심한 공포감에 질리여 말뚝처럼 우뚝우뚝 굳어지였다.

박위는 놈들의 거동을 예리하게 살피면서도 풀리지 않는 의혹을 두고 다시금 생각을 거듭했다.

(사다께라는 놈은 무엇때문에 날자와 장소까지 찍어가지고 수하의 병졸들을 보냈을가?

정말로 놈들의 속심이 변하여 화평과 교역을 하자는건가!…

아니, 그것만은 절대로 있을수 없는 일이다.

설혹 왜구의 흉심이 이제 와서 조금 달라졌다 해도 우리는 반드시 피에 젖은 과거를 피로써 결산해야 한다.

민족이 흘린 피는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물로 계산될수 없다.

헌데 사다께는 내가 저들이 던진 음모의 올가미에 선선히 목을 들이밀리라고 타산했을가.

그럴리 없다.

승냥이처럼 흉악하고 여우처럼 교활한 그놈은 우리가 저들의 속임수에 들지 않으리라는것을 십분 짐작했을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때문에 사다께는 졸개들을 죽음의 함정이나 다름없는 이곳으로 보냈는가?…)

윤통이 힝힝 걸어나가며 다시 박위에게 말을 건네였다.

《박장군, 천행으로 맞다들린 기회인데 다시한번 생각해보는게 어떻습니까?

무슨 물건흥정을 하는체 하다가 저놈들을 산채로 모짝 잡아가지고 대마도에 끌려간 우리 백성들과 바꾸어먹는게 아무래도 득책일것 같습니다.》

윤통은 어제 저녁에도 이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때 박위는 싸움에 나갈 군사들을 뽑고 그들에 대한 교련정형을 료해하느라고 (박위는 신입군사들을 위주로 선발했는데 그것은 실전을 통하여 군사들을 더욱 알차게 키우려는 의도에서였다.) 미처 윤통의 말에 관심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윤통의 견해는 물론 왜구에 대한 그 어떤 환상에서 나온것이 아니라 제나름의 전술적타산에서 시작된것이였다.

하지만 칼을 든 무관이 노상 그런 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면 장차 어떤 오유에 빠질지 알수 없었다.

박위는 여전히 왜구들쪽에 시선을 박은채 낮으나 단호한 어조로 언명했다.

《부원수, 우리는 장사군이 물건을 흥정하듯 해가지고 잡혀간 우리 백성들을 찾아오려 해서는 안되오.

또 그렇게 되지도 않을거요.

우리는 반드시 전투의 승리로 우리가 원하는 모든것을 당당하게 획득해야 하오. 병기를 잡은 장수가 적국의 흥정에 다소라도 마음이 끌리면 놈들의 음모에 말려들게 되고 음모의 나락에 빠지면 수치와 패배를 면할수 없소.

우리의 검은 오로지 승리를 위한 접전외에 다른것은 절대로 몰라야 하오.》

박위와 고려군사들이 병든 닭새끼들모양으로 오구구 몰켜선 왜구의 무리앞에 이르니 놈들은 그사이 어느 정도 마음을 도슬러먹었는지 제법 어깨를 으쓱거리였다.

박위는 왜구들의 막돼먹은 상통들을 휘뚜루 살펴보고나서 말문을 열었다.

《내가 경상군영의 원수인 박위다. 너희들중 누가 대장이냐?》

맨 앞장에 무슨 꾸레미같은것을 안아들고 서있던 옴두꺼비같이 생긴 작자가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내짚으며 꽤 정확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제가 대장이올시다.》

《오, 네가 대장이라니 한가지만 묻자.

너희들은 항복하러 왔느냐, 아니면 전쟁을 하러 왔느냐?》

전혀 뜻밖의 물음에 옴두꺼비는 한참이나 눈알을 디룩거리며 박위의 근엄한 낯을 살피더니 자신없는 소리로 떠드박거리였다.

《난 군사들을 이끌고가서 박장군에게 이 뢰물을 올리고 또… 박장군이 주는 고려뢰물을 받아가지고 오라고 해서 왔는데… 그 무슨 말씀인지?…》

박위는 버럭 청을 높이였다.

《이놈아! 내가 누구의 뢰물을 받고 또 누구에게 뢰물을 섬긴단 말이냐?! 천하에 너절하고 좀스러운것들…

나는 오직 두가지만을 원할뿐이다.

네놈들은 항복을 하겠느냐 아니면 전쟁을 하겠느냐?》

그제서야 사다께에게 속았다는것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은 옴두꺼비는 사납게 흡든 눈으로 박위를 노려보더니 들고있던 꾸레미를 내동댕이치고 칼을 뽑아들었다.

그러자 왜구들은 일제히 칼을 뽑아들고 와자자 산개대형으로 널리였다.

역시 하나같이 지독한 왜종자들이라 죽으면 죽었지 항복은 하지 않겠다는 태세였다.

박위는 서늘한 미소를 띄우며 칼을 뽑았다. 윤통과 군사들도 칼과 활을 들어올리였다. 박위는 아무런 겁기도 없이 칼을 쳐들고 서있는 옴두꺼비앞으로 척척 걸어나갔다.

옴두꺼비가 무슨 수인지 쓰려고 한발 뒤로 물러서는 순간 비호처럼 몸을 날린 박위는 자기의 발이 미처 땅에 닿기도 전에 왜구의 비게진 목대에 칼끝을 틀어박았다.

악― 옴두꺼비는 학춤이라도 추듯 두팔을 너풀거리며 뒤로 나자빠지였다.

《이것이 나의 뢰물이다!》

박위의 우렁찬 웨침소리가 잦기도 전에 고려군사들은 왜구들의 무리속으로 노도와 같이 뛰여들었다.

혼전이 벌어지였다.

사방에서 칼날이 번뜩이고 화살날아가는 소리가 핑핑 울리였다.

선두에 서서 제법 대거리를 하던 왜구 몇놈이 거의 동시에 밸이 빠져나가는듯 한 괴성을 지르며 픽픽 쓰러졌다.

그러자 싸울 궁냥보다는 도망칠 생각에 골독했던 왜구들은 와― 소래기를 지르며 저들이 타고온 다락배쪽으로 정신없이 내뛰기 시작했다.

박위는 피빛으로 번들거리는 칼을 추켜들고 제먼저 뛰여나가며 소리높이 웨치였다.

《나가자!―》

박위의 뒤를 따라 수십명의 군사들이 사태처럼 바다쪽으로 쏟아져내리였다. 허겁지겁 물속에 뛰여드는 놈, 출렁출렁 물탕을 튕기며 배전에 다가붙는 놈들의 잔등과 목덜미에 칼날이 박히고 장창이 꽂히였다.

예서제서 얼음쪼각같이 하얀 물탕이 튕겨오르고 꽃이파리같이 새빨간 피방울이 퍼져나갔다.

《이놈! 어딜 내빼자구?》

《게 서지 못할가!》

《한칼 먹어라!》

고려군사들의 힘찬 웨침소리가 사처에서 울리였다.

《요로시―》, 《고노야로―》

쓰러지면서도 악에 치받치여 혹은 마지막기력을 다 짜내여 짖어대는 왜구들의 비명소리도 들리였다.

무릎을 치는 물속에 들어서서 또 한놈 왜구의 잔등에 우지직 갈비뼈 바사지는 소리가 나도록 깊숙이 칼을 들이박은 박위는 문득 자기 곁에서 춤추듯 날뛰며 돌아가는 고들을 띄여보자 무춤 굳어지였다. 창황중에도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여치다리처럼 껑충한 왜구의 어깨에 엇비듬히 칼날을 들이박은 고들은 예전의 그라고는 상상도 못할만큼 날래게 홱 몸을 돌리였다.

돌아서는 참 옆으로 달려드는 왜구를 힘찬 발길질로 차눕히더니 물속에 엎어지여 개구리처럼 팔다리를 놀리는 놈의 잔등에 기운껏 칼을 들이박았다.

파란 수면우에 시뻘건 피물이 떠올랐다. 고들은 어지게 생긴 퉁투무레한 얼굴에 거의 잔인해보이는 미소를 띄우며 제 혼자 웅얼거리였다.

《악귀같은 놈이 어째 죽촌 〈두부자루〉보다 쎄지 못하구나.》

고들의 민첩한 몸놀림과 칼재주는 정녕 볼만 하였다. 그의 담차고 당당한 말마디도 새겨들을만 하였다.

박위는 고들이가 노는 태를 좀 더 여겨보고싶었으나 그럴 경황이 없었다.

박위는 곧 군사들을 이끌고 다락배쪽에 몰키여 오뉴월 송사리떼처럼 오글복작거리는 왜구들속으로 뛰여들었다.

싸움은 그리 오래 갈것도 없었다.

기슭에 올라섰던 놈들은 깔축없이 피범벅이가 되여 나동그라지고 배우에 남아있던 놈들은 황망히 배머리를 돌리여 내빼는데 돛폭마다 삼단같은 불길이 활활 일어번지는 품이 그놈들의 운명도 뒤끝은 뻔드름 하였다.

도망치는 세척의 배중에서 제일 뒤에 선 배 하나만이 용케도 성해있었다.

《새앙쥐같은 놈이 어딜 내빼려구?!…》

여삼이가 활시위에 화전을 걸며 사람들앞으로 썩 나섰다.

성한 배의 돛폭을 겨냥한 여삼이 당겨잡은 시위에서 막 깍지손을 떼려는데 그곁에 서있던 박위가 나직이 말하였다.

《화전을 쏘지 말아라. 그래도 한놈쯤은 살려보내야지.…》

여삼은 물론 모여선 군사들모두가 의혹에 찬 눈길로 박위를 쳐다보았다.

그러거나말거나 박위는 자기가 들고있던 화살 한대를 여삼에게 내주었다.

《여삼아, 이걸 저 성한 배의 돛대에 쏘아박아라.》

화살깃에 손바닥만 한 천쪼박이 매달려있는 이상야릇한 화살이였다.

박위가 준 화살을 얼추 살펴보고난 여삼은 군말없이 시위에 살을 메웠다.

별로 겨냥도 하지 않고 획― 살을 그었다. 별스레 실해보이는 화살은 뒤꼬리에 달린 천쪼박을 댕기처럼 날리며 빠르게 날아갔다.

윤통은 찢어진 팔소매자락을 여미다말고 물었다.

《장군, 저건 무슨 화살입니까?》

박위는 꺼먼 연기타래를 트레트레 말아올리며 끼우뚱끼우뚱 위태롭게 내빼는 왜구들의 배를 노려보며 심상하게 대답했다.

《편지요. 대마도령주가 내게 편지를 보냈으니 나도 그자에게 회신을 하는게 례절이 아니겠소.

나는 그자에게 이렇게 썼소.

〈너와 나는 필생의 적이다. 적과는 오직 판가리싸움만이 있을뿐이다.

내 기어이 대마도에 찾아갈터이니 이번에는 네놈들의 땅에서 말로써가 아니라 검으로 결산을 하자!〉…》

말을 마친 박위는 절벅절벅 물을 걷어차며 모래불로 나갔다.

모두들 무릎을 치는 물속에 말뚝처럼 굳어진채 찬탄과 공경이 어린 시선으로 박위의 뒤모습을 바라보았다.

윤통은 두툼한 입술을 사려문채 우두두 몸을 떨었다. 왜구의 칼에 찢어진 그의 팔소매가 누데기처럼 오리오리 날리였다.

박위의 오늘의 결단과 배짱이 얼마나 괴로운 마음속에서 솟아났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윤통은 존경과 감격이 우러나기 전에 자기반성이라는 가볍지 않은 고통에 휘감긴것이였다.

일시 소요스러웠던 바다가는 다시 고요해졌다.

어디론가 사라졌던 갈매기들은 하얀 날개를 퍼덕이며 떼를 지어 밀려왔다.

소복단장을 한 산뜻한 갈매기들은 전승을 축복하는 고취악대마냥 명쾌한 울음소리를 목청껏 휘뿌리며 박위네들의 머리우를 유유히 감돌았다.…

군사들은 가을의 다양한 해빛을 받아 찌르는듯 한 반사광을 내쏘는 고요한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군영으로 가고있었다.

그들은 저저마다 오늘의 첫 싸움에서 제 눈으로 직접 본 일, 제몸으로 직접 겪은 일들을 조금씩 과장을 섞어가며 주고받았다. 그러다가는 유쾌히 웃고 떠들기도 했다.

신출내기군사들은 은근히 공포감을 자아내던 왜구들을 제손으로 쏘아눕히고 찔러죽인것이 그리도 통쾌하고 자랑스러운것이였다.

대오는 연해 웃음발을 날리며 흘러가고있었으나 군사들의 앞장에서 말을 타고가는 박위는 아무런 감각도 없는 사람처럼 흐릿한 표정으로 멀리 앞쪽만 바라보고있었다.

대오의 맨뒤에서 박위와 거의 비슷한 표정을 하고 뚜걱뚜걱 말을 걸키던 윤통은 불현듯 그 어떤 내부적인 충동에 떠밀리워 번쩍 눈을 치뜨더니 세차게 말고삐를 나꾸어챘다.

윤통의 검정말은 빠른 달음으로 대오를 거슬러 박위곁에 다가섰다.

그런데도 박위는 여전히 앞쪽만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였다.

무슨 말인가 꺼내려던 윤통은 두툼한 입술귀를 꾹 짓물었다.

전에없이 수척해보이는 박위의 모습이 아릿하게 가슴을 허빈것이였다.

예전에는 연한 분홍색이 돌 지경으로 희맑던 박위의 얼굴색은 검스레하게 죽어있었다.

친근감을 자아내고 귀인성스러운 맛을 불러내던 볼편은 훌쭉하게 꺼져있었다.

담벽처럼 든든해보이던 어깨마저 별스럽게 삐죽이 솟아오른듯싶었다.

윤통은 무엇에 할퀴우기라도 한듯 이마살을 찌프리였다.

(괴로운 번민에 시달리면서도 무자비한 결단력으로 왜구의 거짓 화평사절을 짓뭉개버린 이 사람!

오만무례한 대마도령주에게 바로 대마도에서 결판을 내자고 당당히 선언한 이 사람…

정녕 얼마나 높은 기개를 지닌 사내인가!…)

감탄과 찬사가 새삼스레 치밀어오르며 뜨겁게 속을 지지였다. 그에 정비례하여 그 어떤 죄의식과 수치감이 얼음덩이처럼 차겁게 가슴속 밑굽을 고패돌았다.

(…사실 나는 최칠석의 편지를 받은 뒤로 박위의 원정준비는 《무너져내리는 룡마수를 쳐다보면서도 절구질을 하는 무지스러운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솔하게도 최칠석의 견해에 즉흥적으로 공감하고 추종했다.

꼭 본의라고 할수는 없으나 여하튼 《최후통첩》이라는것을 착안해가지고 박위를 더욱 괴롭히였고 그것으로 하여 나자신은 스스로 유치하고 치졸한 인간으로 굴러내리였다.

내가 과연 이럴수 있는가?

길게 생각할것없이 오늘중으로 최칠석에게 편지를 쓰자.

나의 죄스러운 마음과 함께 달리는 될수 없는 나의 진심을 알리자.

이제와서 박위에게 원정준비의 중단이나 포기를 요구한다는것은 인간으로서도 무관으로서도 비렬하고 저속한 행위다.

아니, 정의에 대한 가장 혹독한 모독이다.

따라서 나는 어떤 풍파가 밀려온대도 사생동고의 억센 의지로 박위를 따를것이다.)

윤통은 아까보다 훨씬 밝아진 얼굴을 건뜻 들어올리였다.

눈앞에서는 온몸이 새빨간 고추잠자리들이 솟구치고 내리박히며 재주껏 깝치고있었다.

마음은 하냥 박위에게 쏠리였다.

박위가 어떤 마음으로 자기를 다시 받아주겠는지 알수 없었으나 여하튼 그에게 진정으로 되는 사죄를 해야 했다.

아프고 허우룩할 박위의 심경을 다소라도 위로해주어야 했다.

그렇게 해야 자기의 마음도 편하고 심혼도 깨끗해질것 같았다.

그래야 의리와 도리를 알고 정의와 진실을 아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정신적면모를 다시 찾을것 같았다.

윤통은 용기있게 말부리를 헐었다.

헌데 정작 말을 떼고보니 마음과는 전혀 다른 소리가 흘러나왔다.

《장군, 조반을 치르고 옷도 말리울겸 저기 고샅길어구의 소나무밑에서 잠시 쉬여가는게 어떻습니까?》

그제서야 고뇌의 심연에서 현실로 올라선 박위는 군사들모두가 꼭두새벽부터 싸움차비, 길차비를 하느라고 아침밥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상기할수 있었다.

강렬한 식욕이 동해오르자 머리속에서 끓던 복잡한 심리작용이 일시에 날아나버리였다.

《그게 좋겠군.》

박위는 헌헌히 응낙하였다.

잠시후 산기슭의 평평한 잔디밭우에 패패로 모여앉은 군사들은 저마끔 멍구럭속에서 비릿비릿한 젓갈내가 풍기는 밥보자기들을 꺼내놓았다.

박위와 윤통은 군사들과 조금 떨어진 소나무밑에 꿰진 돗자리를 깔고 마주앉았다.

가을의 따스한 해빛은 호듯호듯 퍼져내리는데 바다쪽에서는 갈매기우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고 풀숲에서는 유정한 풀벌레울음소리가 귀간지럽게 들려왔다.

윤통은 여삼에게 의미있는 턱짓을 해보이였다.

눈치빠른 여삼은 허리를 한번 갑삭해보이고나서 돗자리우에 술방구리와 말린 전복, 기름에 튀긴 게살과 유밀과가 담긴 모랭이들을 줄달아 꺼내놓았다.

《허, 이건 꼭 산놀이에 나온 사람들이 마음먹고 준비한 음식같구려.…》

박위는 음식그릇들을 두루 살펴보며 연한 웃음을 띄웠다.

윤통은 맑은 술이 찰찰 넘치는 커다란 술대접을 박위에게 들어올리였다.

제딴에는 일껏 사죄와 위로의 뜻을 표현하느라고 했으나 이번에도 역시 그의 말은 그다지 신통하게 들리지 않았다.

《장군, 후련하게 쭉 내시고 속을 푸십시오.》

박위는 그저 히뭇이 웃으며 술대접을 받아들었다. 몇모금 소리없이 술을 마시던 박위는 스르시 그릇전에서 입술을 떼였다.

문득 싸움판에서 보았던 고들의 날렵한 모습이 뇌리에 떠오른것이였다.

박위는 고들이가 그지간에 바친 남모르는 수고와 오늘 첫 싸움에서 거둔 뛰여난 전공을 축복해주고싶었다.

하나 지금 당장 손에 든것은 술밖에 없었다.

박위는 아직도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여삼을 가까이 오게 한 후 넌지시 물었다.

《술은 이 한방구리밖에 더 없느냐?》

《그렇소이다. 이 술도 사실은 부원수나리께서 특별히…》

박위의 속생각을 제꺽 알아차린 여삼은 윤통이까지 찍어대며 만류의 뜻을 펴놓았다. 그랬으나 박위는 여삼의 말자루를 초입에서 문질러버리였다.

《알겠다, 그럼 여기서는 이 대접의 술을 돌려가며 마실테니 방구리의 술은 저기 풀밭에 앉아있는 고들이에게 가져다주어라.

저눔이 오늘 첫 싸움에서 왜구 세놈을 찍어넘겼는데 그게 어디 간단한 공이냐?…》

반말들이는 실히 될것 같은 커다란 술방구리는 량반좌석에서 고들에게 통으로 넘어갔다. 그러지 않아도 산놀이에라도 나온듯이 흥성거리던 군사들은 와 환성을 터치였다.

언제인가 배무이장에서 박위에게 구변껏 말재주를 부리다가 된우박을 맞았던 《만사태평》이라는 뒤말을 달고다니는 군사가 말코를 벌름거리며 고들에게 다가갔다.

량반들의 귀에까지 들리도록 큰소리로 능글거리였다.

《이보시― 고들이, 나도 다음번 싸움때는 자네만큼 왜구를 때려잡아서 상을 탈테니 외상삼아 한대접 먼저 돌려주게나.》

만사태평은 실지 술이 욕심나서가 아니라 전공을 세우고 치하를 받은 고들이가 부러워 악의없는 노죽을 부려본것이였다.

군사들은 저마끔 입을 싸쥐고 킥킥 웃어댔다. 그 바람에 잔뜩 심기가 뒤틀려난 윤통은 험하게 눈살을 찡그리였다.

술로나마 박위에게 자기의 진정을 고하려 했던 은밀한 속궁냥이 여지없이 빗나간것이 서운하다못해 불쾌하기까지 했다.

이어 훈련에 성실하고 싸움에서 공을 세운 군사들을 제일로 사랑하고 쳐올리는 박위의 무관다운 성품이 새삼스레 마쳐와 가슴이 얼벌벌해났다.

박위는 진작 윤통의 유난스러운 언행에서 그의 속마음을 거지반 느낄수 있었다.

역시 본태를 저버리지 않은 윤통이가 고맙고 미더웠다.

이처럼 결바른 인간을 지나치게 몰아댄듯 하여 미안스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와서 서로가 면구해질 어색한 말마디로 그 어떤 화해를 하고싶지 않았다.

말은 간사하고 행동은 진실한것이다.

앞으로 피차가 마음속의 그 모든 말을 행동으로 표명하면 그만이 아니겠는가.

박위는 윤통에게 술대접을 내주며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부원수, 행동속에 사내대장부의 말이 있나니 우리 각자가 서뿌르게 말로써 행동을 약속하지 맙시다.

자, 부원수도 속이 활 풀리게 쭉 내우.》

윤통에게 술대접을 넘겨준 박위는 저가락끝으로 유밀과 한개를 꿰여들었다.

술을 마시면 다소라도 개운해질줄 알았던 마음은 더욱 어수선해났다.

한구석으로 밀려났던 울울한 번뇌는 다시금 뇌리를 헤집어파며 움쭉움쭉 고개를 들었다.

(오늘의 승리는 일시 통쾌한것이나 일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을것이다.

왜구들은 분명 그 무슨 《화평교섭》에서 패배를 당한 앙갚음으로 무고한 죽촌백성들과 리옥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할것이다.

이런 기막힌 일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는가.

나에게 온갖 성심을 다 기울이던끝에 처녀의 가장 귀중한 마음속 보배인 사랑까지 선물한 고맙고 귀중한 리옥.

헌데 나는 본의는 아닐지라도 그에게 처참한 죽음을 가져다주지 않았는가!…

아! 리옥! 그대의 때아닌 절명은 정녕코 박위가 무정하거나 모질어서가 아니요.

그것은 전수히 롱락과 음모를 꺼리지 않는 저 개창자에 사람가죽을 뒤집어쓴 왜구들의탓이요.

리옥이, 그대도 이러한 리치를 아주 모르지는 않으리다.

하지만 지금의 아픈 내 마음, 터져나가는 내 심장을 무엇으로 기워매고 무엇으로 씻어낼수 있으리오.

맹세컨대 내 기어이 대마도를 산산이 박살내는것으로써 우리 백성들과 리옥의 피맺힌 원한을 천백배로 갚아주리다.

이제는 이 나라 산야에 혼령으로만 떠돌고있을 잊지 못할 리별장!

당신도 나의 이런 마음을 부디 옳게 헤아려주고 또 믿어주시우.…)

박위는 어제 밤 자기의 문갑에 깊숙이 건사해두었던 리옥의 옛 편지를 꺼내여 대마도에서 온 편지와 까근히 대조해보았다.

얼추 보매 두장 편지의 필적은 신통히 비슷했다. 하지만 유심히 살펴보니 대마도에서 온 편지의 글씨는 세련된 맛은 있어도 단정하고 섬세한 느낌은 없었다.

속이 깊고 열정적인 리옥이의 체취 같은것은 더구나 풍기지 않았다.

틀림없이 대마도에서 온 편지는 리옥의 필적을 본딴 위조편지였다.

박위는 왜구들의 능활한 롱간질에 넘어가 순간이나마 리옥을 오해했던 자신이 괴롭고 부끄러웠다.…

갈피없이 번져지던 박위의 사색은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사다께는 무엇때문에 패배가 정해진 지점으로 졸개들을 보냈을고?

그것이 또 하나의 음흉한 음모의 발단이라면 사다께가 궁극적으로 노리는것은 무엇일고?…)

술대접을 쳐든채 한식경이나 우중충한 그늘이 드리운 박위의 얼굴을 쳐다보던 윤통은 갑자기 성이라도 난 사람처럼 벌컥벌컥 술을 들이키였다.

지금같은 때 박위에게 아니, 민족앞에 진정으로 사죄를 하자면 말이나 술로써가 아니라 량심과 의리가 비낀 행동으로 하는것이 가장 떳떳할것이다.

얼마후 제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윤통은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듯 시각빨리 군영으로 돌아가자고 소리소리 지르며 정신을 차릴수 없이 뒤설레를 떨었다.

되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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