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회)

제 2 장

9

 

검충충한 구름장들이 갈가리 터지고 찢어지며 이쪽으로 빠르게 밀려오는 꼴이 머지않아 또 한차례의 된소나기가 쏟아질것 같았다.

우수수― 벌써부터 물기를 머금은 습한 바람이 밀려들며 손바닥만큼이나 넓은 나무잎새들을 희끗희끗하게 뒤번져놓았다. 시꺼멓게 색이 죽은 하늘을 흘낏흘낏 살펴보며 쩔뚝쩔뚝 걸음을 옮기던 오천은 혼자소리로 중얼거리였다.

《봄소나기 삼형제라더니 가을소나기도 삼형제인가?… 줄금줄금 내리기는 젠장… 이제 또 한차례 소나기가 쏟아지면 산을 오르내리기가 여간 구접스럽지 않을텐데…

에라― 해가 쨍쨍한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며 걷기보다는 시원하게 비를 맞으며 걷는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

빌어먹을 놈의 소나기 퍼붓겠거든 실컷 퍼부어라.…》

만사를 락관적으로 감수하는데 습관된 오천은 으스산한 날씨조차 제좋게 해석하고는 공연히 더 기분이 좋아지여 벌씬벌씬 웃기까지 하며 걸음을 내짚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허리가 지끈지끈 결리고 장다리가 쿡쿡 쑤시여 절로 이를 사려물게 되였다.

아직도 매맞은 어혈이 깨끗이 풀리지 않은탓이였다.

하지만 오천의 기분은 지금 무척 좋았다.

뭐니뭐니해도 오늘중에 염초감대기를 큼직하게 얻어내게 된것이 제일로 기뻤다.

하여 오천은 벙그레 웃음을 띄운채 그냥 제 혼자 시시벌거리였다.

《사람이 마음먹고 나선 다음에야 못해낼 일이 무엇이랴.

염초감대기도 고양이뿔이나 자라털이 아닌 다음에야 못 구해낼 턱이 없느니… 이 오천이 염초일때문에 박장군에게 애매한 매를 좀 맞기는 했다만 그게 무슨 대수냐. 큰일을 하러 나선 사내대장부의 앞길에 어찌 노상 평탄태로만 있으리오, 헛허허…》

오천은 마음이 들썽들썽해나는중에도 은근히 박위에 대한 악의없는 반감이 떠올랐다.

물론 그것은 억울한 매를 맞았다고 하여 옹졸하게 도사려먹은 치졸한 악심이 아니였다.

오천은 무엇보다도 임금이나 조정의 량반들과 어울려야 모든 일이 성사될수 있다고 보는 박위의 삐뚤어진 관념(박위는 언제한번 내놓고 그런 말을 한적이 없었으나 오천은 추호의 의문도 없이 그렇게 믿고있었다.)이 진저리가 날만큼 싫었다.

원래 오천은 량반일반을 그다지 신통하게 여기지 않았다.

개경의 화통도감에서 일할 때부터 그의 눈에 비쳐진 량반들은 거개가 조상뼈다귀를 추켜들고 허세와 교기를 부리는 허풍선이들이였고 말시비질과 음풍영월로 허송세월하는 건달군들이였다.

그들중에는 외적이 출몰했다는 소문만 들어도 혼맹이가 건공중에 떠서 부들부들 떠는 겁쟁이가 있는가 하면 앞에서는 기가 나서 충의를 떠들다가도 뒤에 돌아앉아서는 저 하나의 권세와 영달만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위선자들도 적지 않았다.

개중에는 물론 최무선이처럼 진정으로 나라일을 걱정하고 자기의 힘과 지혜를 깡그리 나라와 백성을 위해 바치는 량반들도 없지 않았지만 그런 사람은 쌀에 섞인 뉘만큼이나 희소했다.

하기에 오천은 권세있는 량반들이 떠밀어주어야 이번 원정이 성사될것이라고 믿고있는 박위가 적지 않게 못마땅하였다.

박위 역시 량반일반이 다 그러하듯 자기를 포함한 무세한 상사람들을 무턱대고 우습게 여기는듯싶어 은근히 섭섭하기도 했다.

물론 오천은 뜻이 높고 무술에 능하며 배짱과 기개도 헌헌할뿐아니라 자기를 각방으로 내세워주고 믿어주는 박위를 깊이 존경하고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지금껏 드팀없이 고수해온 인생신조와 생활관념을 굽히게 되지는 않았다.

아무리 큰일이라 할지라도 참깨, 들깨 다 섞어가지고는 일이 옳게 될것 같지 않았다.

더구나 자기들과는 처지도 다르고 궁냥도 다른 조정의 량반들과 김해부사같은 사람들을 믿고 일을 내민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제일 확실한것은 자기 몸에 붙어있는 머리와 팔다리요, 제일로 믿음직한것은 평범한 군사들과 백성들의 힘이였다.

오천의 인생관은 정녕 이러했다.

그의 인생관은 단순하고 소박할망정 절대로 허망한것이 아니여서 이번에도 역시 간난신고끝에 염초감대기를 쓰고도 남을만큼 얻게 된것이였다.…

부슬부슬 비방울이 떨어지였다.

허나 오천은 전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채 산중깊이로 자꾸자꾸 들어갔다.

…오천의 고향은 교주도(오늘의 강원도지역)에서도 제일 살기 좋은 고장으로 소문난 도지촌이라는 곳이였다.

바다에는 철따라 각색 물고기떼가 오르내리고 들에는 갖가지 곡식들이 기름지게 잘도 되는데 집오래와 산기슭에는 온갖 과일들이 가지가 휘도록 주렁지였다.

오천이 아버지는 서글서글한 성격에 남의 어려운 사정을 제일처럼 살펴주고 도와주는 인정많은 사람이였다.

게다가 무슨 일이든 남들의 곱으로 걸싸게 해제끼면서도 눈썰미가 빠르고 손재주가 좋아서 바다에 나가면 주장 목대잡이노릇을 하고 들에 나가면 꼭지대접을 받았다.

성격이나 취미가 꼭 아버지를 닮은 오천은 연골적부터 바지런히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바다일과 농사일에 몸을 적시고 농구나 어구를 손질하는 방법도 열심으로 익히였다.

부자가 억척같이 일하는데다 오천이 어머니까지 흑달과 해소병으로 장참 앓으면서도 고기밸을 따거나 미역과 조개를 말리우는따위의 잡일을 한시도 놓지 않았다. 그러나 관가에서 불러대는 온갖 명색의 가렴잡세를 빠짐없이 훑어바치고나면 군색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던 어느해 여름이였다.

마을 앞바다로는 초복의 더운 물줄기를 타고 여느때없이 큰 낙지떼가 연연 밀려들었다.

도지촌사람들은 너도나도 바다에 뛰여들었다. 오천이부자도 뒤질리 없었다.

그날도 너벅선을 타고 바다에 나가 장밤 낙지잡이를 한 오천이부자는 동녘이 희붐하게 밝아오자 기슭쪽으로 배머리를 돌리였다.

밤새껏 기름불을 켜들고 낙지잡이를 한탓에 눈정기도 어지간히 흐렸지만 사방에 젖빛안개가 자오록이 덮이여 한치 앞도 가려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배꼽에 굴껍데기가 더께로 앉았다고 할만큼 바다물계에 밝은 오천이 아버지는 조금도 당황해하지 않고 침착하게 노를 저어나갔다.

안개발에 몸을 잠그고 부지런히 노를 젓던 아버지가 갑자기 흠칫 몸을 떨더니 우뚝 굳어지였다.

앞쪽에서 돌연 코숭이가 뾰족하게 쳐들린 낯선 다락배 여러척이 안개덩이를 가르며 불쑥불쑥 나타난것이였다.

다락배들에서는 쌈싸우듯 하는 왜구들의 말소리가 왁자하게 들려왔다.

《아뿔싸! 왜구들의 배로다! 오천아! 어서 물에 뛰여들어라!》

아버지는 한손에 노대를 틀어쥔채 오천의 등을 마구다지로 떠밀었다.

《아버지도 같이 뛰여내리자요. 저놈들에게 잡히면 죽어요.》

오천은 아버지의 솥뚜껑같은 손을 힘껏 끌어당기였다.

아버지의 부리부리한 눈에서 절망적인 초조감이 류황불처럼 파랗게 타올랐다.

《이녀석아, 좁쌀여우처럼 잔꾀가 말짱한 왜구들이 빈 배를 보고 그냥 갈상싶으냐. 저놈들이 참빗질하듯 바다를 훑으면 너도나도 다 잡혀죽는다. 내 저놈들을 끌고갈테니 너만이라도…》

아버지는 제잡담 오천을 버쩍 안아들더니 바다물에 내동댕이라도 치듯 던지였다.

하고는 일부러 노소리를 야단스럽게 내며 다락배들을 맞받아 배를 몰아갔다.

왜구의 배들은 먹이감을 발견한 구렝이떼마냥 아버지의 너벅선으로 우르르 밀려들었다.

물속에 곤두박혔던 오천이 수면우에 떠오르니 바다는 더없이 고요했다.

아버지는 필경 왜구들의 칼에 찔려 난탕이 되였을것이라는 끔찍한 예감이 오천의 뇌리를 번개처럼 때리였다.

쏟아져나오는 비명을 씹어삼키며 방향없이 바다를 헤가르던 오천은 중낮무렵에야 바다우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빈 배를 발견하였다.

황급히 배에 올라보니 그들먹이 쌓여있던 낙지무지는 간곳 없고 그자리에는 온통 피자박이 된 아버지가 고기밸따는 칼을 틀어쥔채 쓰러져있었다.

목터지게 찾고 불러도 아버지는 전혀 기척이 없었다.

가슴이 꺼져내리였다. 바다가 빙그르르 돌아갔다. 오천이 아버지를 업고 집에 들어서니 그러지 않아도 건강이 좋지 못한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어머니는 기혼을 하여 쓰러진 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오천은 왜구로 하여 하루아침새 량부모를 다 잃은 혈혈단신, 천애고아로 세상밖에 내던져지였다.

소년의 작은 심장은 복수의 피로 끓어번지였다.

그후 오천은 군사가 될 꿈을 안고 이 고장, 저 고장으로 나돌아다니던 끝에 화통도감에서 행수(관청수공업장에서 일하는 장공인들에게 주던 낮은 급의 벼슬.)노릇을 하는 먼 친척벌되는 사람의 권유로 개경에 올라가 화통도감에서 일하게 되였다.

당시 화통도감은 최무선의 지휘밑에 화약과 화약무기를 생산하는 조정소속의 병기창으로서 그곳에서 일하는 장공인들은 군사들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고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최무선은 화통도감의 일군들에게 화약과 화약무기를 만들게 하는 한편 각종 화약무기의 사용방법도 배워주고있었다.

오천은 부모들의 원쑤를 갚는 심정으로 도감의 일에 심신을 다 바쳐가면서 화약무기들의 사용방법을 열심히 배워나갔다. 하지만 오천의 소원은 병기를 만드는 군사가 아니라 병기를 잡고 싸우는 군사가 되는것이였다.

오천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최무선에게 지금 한창 왜구들과 싸움을 벌리는 전역으로 보내줄것을 열렬히 요청하였다.

용감하고 지혜로운 학자이며 사려깊은 인간인 최무선은 오천의 심정을 십분 리해하고 그의 갸륵한 소청을 높이 치하해줄뿐아니라 적절한 기회에 전방에 보내줄것을 굳게 약속하였다.

그러지 않아도 무선은 오래전부터 화통도감에서 생산하는 화약과 화약무기로는 전군의 수요를 충족시킬수 없는 조건에서 오천과 같은 재능있는 젊은이들을 현지에 파견하여 지방군자체로 화약과 화약무기를 만들어쓰게 하면 여러가지로 유익할것이라고 타산하고있었다.

일이 될 때라 지난해 여름 개경에 올라왔던 박위가 화통도감에 들리였다.

무선은 박위를 조용히 따로 만나 자기의 속생각을 자상히 알려주고나서 오천을 수하의 군사로 받아줄것을 부탁하였다.

박위는 무선의 청을 쾌히 수락하였다.

그리하여 오천은 자기의 념원대로 통좁은 바지를 가뜬하게 차려입은 전역의 군사가 되였다.

이러한 오천이기에 대마도원정을 준비할데 대한 박위의 령이 떨어지자 그는 누구보다 기뻐하며 팔을 부르걷고 원정준비에 떨쳐나섰다.

부모의 원쑤를 열백배로 갚게 된것도 기뻤지만 불구대천의 원쑤인 왜구가 다시는 나라지경을 범접하지 못하게 도적떼의 소굴을 통채로 짓뭉개버린다는것은 생각만 해도 통쾌한 일이였다.

오천은 힘에 겨운 염초장일도 자진하여 맡아나섰다.

헌데 정작 염초장일을 껴안고보니 염초를 만드는 일은 애초의 짐작처럼 썩썩 풀려나가지 않았다.

역시 제일로 걸린것은 염초감대기였다.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여 염초감대기가 들나게 되자 오천이네들은 군영앞동네와 린근마을은 물론 수십리밖에까지 나돌며 촌촌호호를 훑었으나 번마다 모아지는 부엌재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는 도저히 염초생산을 확장할수 없었다. 염초감을 대량으로 확보하기 위해 밤낮으로 골을 썩이던 오천은 불현듯 최무선이가 처음으로 화약을 만들 때 오래된 절간마루밑의 먼지로 염초를 만들어 썼다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오천은 무릎을 탁 치며 환성을 올리였다.

(챠, 어째서 그 생각이 이제야 떠올랐을가?… 아무튼지 이제는 됐다.

여기 김해는 옛적부터 타고장에 비길수 없이 미신놀이가 성해온 고장이니 오래된 절간도 많을것이다.

우선 오래된 절간들을 전부 알아낸 다음 절마다에 마루밑먼지가 얼마나 되는지 일일이 확인하자.

그다음은 절의 주지들에게 군영의 형편을 잘 알려주고 협력을 요청하면 일은 그야말로 다 먹어놓은 떡이나 다름없지 않는가.)

당장 일을 시작하자니 한가지 불안하고 께름한 문제가 있었다.

만약 절간의 주지들이 자기의 요청이나 설복을 옳게 리해하지 못하고 울뚝불뚝 소동을 일으킨다면 일은 예상외로 복잡해질것이였다.

여삼의 말에 의하면 지금 조정의 일부 량반들은 박위를 모해하기 위해 별의별 험한 소리를 다 지어돌린다고 한다.

그런데 자기의 절간마루밑의 먼지를 파낸 일이 절간파괴죄로 오도되여 그 죄가 박위에게 재차 덮씌워진다면 박위는 더 큰 위험에 처하고 원정은 파탄의 랑끝에 오를수도 있었다.

이 점이야말로 신중한 고려를 돌려야 할 문제였다.

오천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였다.

마침내 그는 후날 절간사건이 복잡해지는 경우 자기 혼자 그 죄를 홈빡 뒤집어써야 하며 그러자면 절간마루먼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몰라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럴 때 뜻밖에도 죽촌에서 찾아온 저대로인은 저들도 전함건조와 염초생산을 한귀퉁이라도 맡아하겠노라고 자청해나섰다.

그것은 대단히 고마운 일인 동시에 또 하나의 혁신적인 방도를 튕겨주는 계기로 되였다.

(우리의 군사일을 돕고싶어 몸달아있으면서 방도를 몰라서 바재이는 백성들이 어찌 죽촌사람들뿐이겠는가.

절간위치를 알아보러 다니면서 동네방네 들리여 염초일이 얼마나 중하고 급한 일인가를 잘 알려주고 가능한껏 저들끼리 만들게 한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될것이다.)

그때로부터 오천의 일감은 두배, 세배로 불어났다.

오천은 죽촌은 물론 구렁촌과 가락마을에까지 나들며 사람들에게 배를 뭇는 방법과 염초일의 묘리를 직심스럽게 가르쳐주었다.

그러면서도 아직은 생소한 이 고장의 지형과 오래된 절간들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알아보았다.

누구도 모르게 산을 나들던 오천은 어느날 조용한 기회에 취금이를 찾아갔다.

때마침 구서방은 염초장으로 나간 뒤여서 집안팎은 쥐죽은듯 고요한데 취금은 토방우에 실팍한 무릎을 감싸고 앉아 수수쌀에 섞인 뉘를 고르고있었다.

오천은 셈평좋게 취금이곁에 털버덕 걸터앉았다.

《마침 집에 있었구먼. 내 오늘 먼길을 다녀와야겠는데 수고스러운대로 점심밥 한그릇 얼추 싸주어.》

이제는 상당히 친숙해지여 예전처럼 만나기만 하면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생청같은 소리가 터져나오군 하는 일은 거의나 없었다.

헌데 말부리를 털어놓고보니 오늘도 첫마디부터 썩 영글게 나간것같지 않아 은근히 속이 조여들었다.

사실 오천은 점심밥을 싸는것마저 남들의 눈에 이상하게 보일것 같아 군영에서는 일체 입을 봉하고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매번 점심을 굶으며 나돌아다닐수는 없었다.

하여 오늘은 취금에게 조용히 점심밥부탁을 하려고 그의 집에 나온것이였다. 헌데 군말없이 응할줄 알았던 취금은 시작부터 의외의 태도를 보이였다.

《내가 무엇때문에 그녁의 밥을 싸준단 말이야? 군영에 가서 군졸들 보고 싸달래여.》

오천은 등이 달았다.

《챠 이런, 보리밥이나 수수밥 한덩이에 절인 조개 몇쪽을 꾹꾹 박아주면 될텐데 뭘 그리 비쌔구 저쌔구 하는거여?

군영에 대고는 밥싸달라고 할 형편이 못돼서 그래.》

취금은 숙어들기는커녕 더욱 랭랭하게 나왔다.

《군영에서 못 싸주는 밥을 내가 왜 싸준단 말이야. 객적은 소리 그만하구 저리 비켜.

샘둥천에 나가서 저녁반찬으로 쓸 고사리를 씻어야겠어.》

무엇때문인지 잔뜩 앵돌아진 취금의 속을 풀어놓자면 앞뒤사연을 죄다 빠개놔야 할것 같은데 일의 시작부터 중대한 비밀을 털어놓을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들개처럼 노상 굶어가지고 산속을 나돌아다닐수는 없는노릇이였다.

잠시 고개를 비틀어꽂고 서서 바재이던 오천은 사랑에 취한 총각녀석들이 대개 그러하듯 이 처녀만은 절대적으로 믿을수 있다고 자신을 납득시켜버리였다.

오천은 자기가 취금의 깜찍한 수에 넘어간줄도 모르고 루루이 량해까지 구해가며 자초지종을 전부 토설해놓았다.

오천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취금은 수수쌀이 골숨하게 담긴 질자배기를 드르륵 밀어내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함께 갈테야.》

일이 이렇게 번져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오천은 퀭하게 눈을 흡뜨고 취금의 상기된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니, 어딜 함께 간단 말이야?》

《어디긴 어디야, 저 가는데지. 그녁은 여기 온지 한해도 되나마나 하니 이 고장 산길도 잘 모르고 오래된 절간들이 어디어디에 있는지도 똑똑히 모르지 않아.

하지만 난 봄내, 가으내 나물캐러 다니고 송피벗기러 다니고 또 아버지를 따라 화살감을 베러 다니기도 했으니 어느 산이나 다 손금보듯 환하단 말이야.》

잠시 어정쩡해있던 오천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취금이와 함께 나섰다가는 후일 그에게까지 무서운 불행이 떨어질수 있다는 섬찍한 예감이 들자 다소간 흔들리던 오천의 마음은 다시 단단하게 굳어졌다.

《딴은 그렇지만… 이번 길은 나 혼자 가야 해.》

취금의 덕성스럽게 생긴 하얀 얼굴은 그 어떤 원망의 빛을 띠고 이그러들었다.

《안되긴 왜 안된다는거야? 저한테만 가슴아픈 사연이 있고 저한테만 왜구에 대한 원한이 있다구 생각지 말아.

우리 엄만 내가 두살도 되기 전에 바다에 무잠이질을 나갔다가 왜구의 칼에 찔려 돌아갔어.

시신도 찾을수 없게 먼바다 어딘가로 피물을 흘리며 밀려갔단 말이야.

또 우리 아버지는 갓 스무살 한창나이에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바다복판에서 왜구들의 쇠장대에 얻어맞아 한쪽팔을 잃었어.

어깨뼈가 다 으스러졌단 말이야.…》

서럽게 흐느끼며 간신히 말을 이어가던 취금은 눈물이 번들거리는 얼굴을 오연히 쳐들었다.

《그러니 나도 왜구를 요정내는 일에 마음 한귀퉁이라도 바쳐야 조금이나마 속이 개운할거야. 그녁처럼 일등군사는 못된다쳐도 꼬리잡이군사노릇이라도 해야 하겠단 말이야.

거기서 그예 나를 따버리려 한다면 난 이길로 군영에 들어가 장군께 금방 들은 소리를 몽땅 일러바칠테야.》

오천은 취금의 눈물어린 진정과 결연한 의지에 가슴이 저리도록 감심이 되였다.

자기의 비밀한 일의 속내를 박위에게 일러바치겠다는 취금의 위협 또한 여간만 두렵지 않았다.

취금이를 데리고나서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고보니 이 고장 지형에 밝은 취금이와 함께 일을 펼치면 도움이 될 일도 적지 않을것 같았다.

그날부터 오천과 취금은 산과 산을 넘고 골과 골을 누비며 오래된 절들을 찾아다니였다.

가시덤불, 넝쿨나무에 할퀴우고 걸려 넘어지고…

츠렁바위에서 굴러내리고…

때로는 헛길을 잡아 밤새껏 수십리산길을 빙빙 에돌기도 했다.

언젠가는 봉은사의 응진전(석가모니의 제자라는 라한부처를 놓아두는 건물.) 마루밑을 들척거리다가 도적년놈으로 몰리여 하마트면 중놈들의 모두매에 들번 하였다.

또 어느날 밤엔가는 죽촌사람들의 일을 살펴주고나서 그곳 미륵불앞을 지나다가 굶주린 늑대무리를 만나 여차하면 맹수들의 밥이 될번 한적도 있었다.

심신은 말할수없이 고달팠으나 일이 진척되는것이 기쁘기만 한 오천은 노상 싱글벙글 웃으며 나다니였다.

《아이유! 오천대정이 요즘 별스레 얼굴이 환해진다?…

일이 아주 잘돼가나부지?》

입심센 동네아낙네들은 취금이와 오천을 볼적마다 공연한 호기심을 품고 이런 식으로 말을 걸었다.

그러면 자기의 일이 누구도 모르게 썩썩 풀려나가는것이 흐뭇하기만 한 오천은 매양 신중성없는 롱담으로 그들의 말을 아무렇게나 받아넘기였다.

《그러문요. 이 오천대정의 일이 잘 안될 까닭이 있나요.

이제 채단마련만 다되면 이 늙은 총각도 제꺽 두루마리상투를 뭉그려 꽂으렵니다, 헛허.》

이렇게 되여 오천의 비밀한 속내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의 언행은 적지 않은 사람들의 오해를 사게 되였고 결국은 억울한 매까지 맞게 되였다.

그래도 오천은 모든 일이 자기의 뜻대로 흘러가는것이 기쁘기만 했다.

여하튼 장근 두석달을 남모르게 애쓴 보람이 있어 이제는 오래된 절간들의 위치는 물론 들고나는 길도 환하게 알게 되였고 어느 절에 마루밑먼지가 얼마만큼 있다는것까지 알뜰하게 파악하게 되였다. 또한 절간의 주지들을 여러차례씩 만나 때로는 웃으면서 때로는 가슴을 치며 염초의 필요성과 절박성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이미 짐작했던대로 가장 큰 골치거리는 역시 매 절의 주지들이였다.

오천의 소청을 옳게 여겨듣고 그까짓 마루밑먼지같은것이야 왜 못내겠느냐 하고 선뜻 응해나서는 주지들도 있었으나 그런 사람은 겨우 두명뿐이였다.

어떤 주지는 오천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세상에 이런 괴변이 어디 있느냐고 왝왝 고아대는가 하면 어떤 주지는 골살을 잔뜩 찌프린채 검다희다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또 어떤 작자들은 매번 한본새로 저들의 절은 그 누구도 다칠수 없노라고 무턱대고 내우기였다.

보람없는 설복과 애원을 하고다니는 사이 날은 사정없이 흘러갔다.

더이상 주지들의 암매한 견해가 달라지기를 기다리고있을수 없었다.

오천은 마침내 오늘까지 설복을 해도 먹어들지 않는다면 강짜를 써서라도 마루밑의 먼지를 전부 퍼내리라 결심하였다.

모든 절의 주지들이 거의 일치하게 반대하는 조건에서 오천의 이러한 용단은 장차 어떤 화단을 가져올지 알수 없는 매우 위태로운것이였다.

하지만 모든 위험을 다 각오한 오천은 결심을 다지자 주저없이 행동을 개시하기로 하였다.

첫 과녁을 봉은사로 정한 오천은 아침일찍 염초장사람들에게 짐을 담을수 있는 물건들을 갖춰가지고 봉은사절문앞으로 오라고 이른 다음 제 먼저 길을 떠났다.

한걸음 앞서가서 봉은사주지를 다시한번 잘 주물러볼 작정이였다.

또한 중놈들과 어떤 드잡이가 벌어질지 알수 없는 오늘만은 취금이를 자기곁에서 떼버리기 위해서였다.

하여 오천은 군영에서 자고 나오자 잔입 그대로 황망히 산길로 접어들었다.…

…비발은 더욱 굵어지였다.

하지만 쩔뚝거리는 다리모양과는 판다르게 기운차게 활개짓을 치는 오천의 뇌리속에서는 취금의 사랑스러운 얼굴모양이 따갑게 맴돌고있었다.

예전에는 그저 천진하고 새침하고 또 명랑하기도 한 처녀의 이채로운 성격과 덕성스럽게 생긴 생김새에 마음이 끌렸었다.

허나 지금에는 왜구를 족치는 그 길에서 군사들과 한동아리가 되여 자기를 바치려는 처녀의 웅심깊고 강단있는 속심지에 걷잡을수없이 넋이 끌리였다.

그것이야말로 취금의 가장 큰 장점이요, 두사람이 한일생 시들지 않는 사랑의 꽃을 피워나갈수 있는 공통된 사랑의 바탕이 아니겠는가?!…

오천은 취금이가 마치 눈앞에 있기라도 한듯 벙시레 웃으며 중얼거리였다.

《지금쯤 취금이는 내가 혼자서 봉은사에 갔다는걸 알아차렸을게야.

눈이 쌍그레가지고 한창 야단을 치겠군. 하지만 혼자서야 따라올 생의를 못 내겠지. 저번날처럼 숲속에서 늑대들이 기여나올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돋을테지. 이제 일을 끝내고 돌아가면 나 혼자 갔다왔다고 성화가 이만저만 아닐게야.

헛허허… 그럴테면 그러라지. 취금이가 아무리 야단을 쳐도 밉기는 커녕 정나미가 폭폭 드는데야 그 성화인즉 얼마나 즐거운것이냐, 허허…》

후둑후둑… 솨― 솨―

어느새 소나기로 변한 비발은 제법 소란스러운 소리를 지르며 몰박으로 쏟아져내리였다.

그제서야 확연히 현실감을 의식한 오천은 사위를 휘둘러보았다.

몽몽한 안개, 쏟아져내리는 소나기, 뒤척거리는 숲…

아무리 급한 길이라 해도 초입부터 온몸을 화락하게 적시고싶지는 않았다.

오천은 다리도 쉬우고 소나기도 그을겸 오솔길가에 홀로 허리를 꼬부리고 서있는 늙은 소나무밑으로 들어갔다.

지끈지끈 들쑤시는 거북스러운 다리를 쭉 내뻗치고 퍼더앉았다.

심상한 기색으로 소나기에 잠긴 숲속을 휘휘 둘러보던 오천은 바로 발치앞에 드리워있는 넝쿨속에 밤알만 한 머루알들이 주렁주렁 열려있는것을 띠여보자 벌씬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요즘 여삼이 색시가 입쓰리인지 눈쓰리인지 한다던데 채 익지 않은 저 머루를 따다주면 좋아하겠구나.

근래 그 집에 자주 나가보지 못하니 여삼이나 여삼이 색시가 날 원망하겠지.)

머루넝쿨을 향해 몇걸음 다가가던 오천은 다시 우뚝 굳어지였다.

어제 저녁 저녁밥짓는 모닥불가로 우정 자기를 찾아왔던 여삼의 얄팍한 얼굴이 떠올랐다.

한동안은 제쪽에서 공연히 시뜩해다니던 여삼은 오천이가 매를 맞고난 뒤로는 왜서인지 마주칠 때마다 까닭없이 어색해하면서 무슨 말이든 정답게 나누고싶어하는 눈치였다.

헌데 어제 저녁 여삼의 말은 그의 평소의 표정과는 달리 제법 훈시조로 펼쳐지였다.

《형님, 내 일전에도 여러번 말하지 않았소. 지금 개경의 어떤 량반들은 우리 군영에서 반정을 준비하고있노라구 떠든다구… 아, 그런데 저번날 아침에는 우리 군영에 대마도령주라는 놈의 편지가 날아들었소.

그게 바로 우리가 어떤어떤 물건들을 저들에게 가져다바치지 않으면 잡아간 고려사람들을 다 죽이겠다고 떵떵 으르는 내용의 편지랍디다.

내 참, 이런 괴변이 또 어디 있겠소.

부원수나리는 우리 군영근처에 왜구의 세작이 박혀있는게 분명하다구 찍어서 말합디다.

판국은 이러한데 형님은 허구헌 날 나돌아다니기만 하니 이게 어디 일이 됐소?

누구보다 일축을 많이 내야 할 형님이 그러고 다니니 나부터 안타깝고 서운하우.》

여삼은 박위가 군심민심이 다 소란해질수 있으니 절대로 대마도령주의 편지사건에 대해서는 소문을 내지 말라고 했다는 소리까지 털어놓으며 알고있는 소식을 죄다 뱉아놓았다.

오천은 여삼의 말을 듣는 첫 순간에도 그러했지만 그의 말을 되새겨보는 지금에도 까닭모를 죄의식으로 가슴이 옥죄여들었다.

내외의 형세는 날로 험악해지는데 여삼의 말과 같이 남보다 몇배로 일축을 내야 할 자기는 한정없이 늦장을 부리는듯싶었다.

매일, 매 시각 곤두박질하듯 뛰고 달려서 시각빨리 원정준비를 끝내야 했다.

그와 함께 앞에서 날뛰는 왜구도 때려잡고 뒤에 숨어서 군영의 비밀을 뽑아내는 왜구의 세작도 튕겨잡아야 했다.

어느결에 머루열매같은것은 까맣게 잊어버린 오천은 자기의 눈앞에 금시 어떤 흉악한 적이 나서기라도 한듯 눈을 지릅뜨고 줄대처럼 쏟아져내리는 폭우속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갑자기 뒤쪽에서 와작와작 젖은 나무가지들과 잎새들을 헤치며 다가오는 인기척이 들리였다.

오천은 잽싸게 몸을 돌리였다.

한껏 긴장된 시선으로 뿌잇한 비발속을 노려보던 오천은 온통 물참봉이 되여가지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가려보자 너무도 기가 막히여 입을 딱 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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